Interlude

[SH/JW] 빈사의 의사선생 │ The Case of the Uncommon Cold - 3 본문

Sherlock_중편/시리즈

[SH/JW] 빈사의 의사선생 │ The Case of the Uncommon Cold - 3

topsecretum 기밀선녀 2013.11.24 01:05
#, , ,

←Part 2






Part 3





눈을 제대로 뜨기까지는 억겁의 세월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무의식의 세계에 누워 있는 게 낫지 비참한 투병의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 것 같았달까. 존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흐릿한 머리로 왜 잠에서 깼는지 떠올려봤다.


몇 년간 그의 꿈은 별로…유쾌하지 못했다. 하지만 존은, 그 악몽에도 곧 익숙해졌다. 그는 꿈속에서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 죽어가는 장병들의 절규를 듣는다. 폭탄이 터지고 피범벅이 된 시체들이 갈기갈기 갈라져 쏟아내리는 꿈은 이제 밤마다 씻고 양치질을 하는 것 같은 당연한 의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악몽갖고는 지난밤 내내 그를 괴롭혀댄 꿈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열에 들뜬 머리로 불러들이는 참혹한 전쟁의 광경은 원래보다 배는 끔찍해졌고, 거기다 뒤로 가면서 런던의 음산한 골목과 어릴 때 살던 집의 삐걱이는 다락방까지 나와 마구 뒤섞이면서 난장판이 됐다. 아직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악몽을 꾸다가 어느 순간, 따스하고 편안한 꿈으로 바뀌었다. 어떤 꿈이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익숙한 낮은 음성이 떠듬떠듬 들려왔던 게 기억난다.


깊숙한 물속에서 햇빛이 비치는 수면으로 올라오는 것처럼, 천천히, 몸에 자각이 돌아왔다. 여전히 사지에 힘이 들어오지 않고 식은땀도 배어있었지만 그래도 며칠간 몸을 괴롭히던 오한이 싹 물러가 있었다. 활활 타는 것 같던 목도 좋아졌고 무엇보다 코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열이 다 내린 거로군. 어쩐지 간만에 잔인한 악몽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했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감기가 떨어졌어.


마지막 잠기운까지 모두 떨치고 난 다음에야 존은 몸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온 몸이 땀에 젖어 한기가 서렸는데, 의아하게도 등과 다리쪽 일부분은 후끈후끈했던 것이다.


뭐지, 싶어 고개를 뒤로 돌렸고, 눈앞에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는 높은 광대뼈가 보였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셜록? 몸은 그대로 굳었는데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그럴 리가. 셜록은 절대…이것도 또 열에 들떠서 꿈을 꾸는 거겠지. 하지만 눈을 깜박여 봐도 눈앞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셜록이.


내 침대 안에.


게다가, 몸뚱이에 닿아 있는 따끈한 느낌을 보건데 ― 신이시여 ― 허리에 팔을 튼튼하게 감아놓은 채, 긴 다리를 존의 위로 턱 걸쳐놓은 녀석의 품에 자신이 폭 안겨 있더란 거다.


하느님 맙소사.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야? 존은 완전히 얼어서 플랫메이트가 자는 모습을 내려다만 보고 있었다. 폐가 활활 타며 위험신호를 보낼 때서야 존은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셜록.” 존은 몸을 틀어 팔꿈치로 뒤에 달라붙은 놈의 갈비뼈를 노렸고,


셜록은 잠결에 툴툴대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한 채로 팔을 밀어냈다.


“셜록, 뭐 하는 거야? 일어나봐.” 다시 팔꿈치로 찔러봤지만, 이번엔 요령좋게 피하더니 아예 팔을 잡아버렸다.


셜록이 한숨을 쉬자 뒷덜미에 따뜻한 바람이 사르르 내려앉았다. “생각이란 걸 좀 해, 존. 네가 그렇게 친히 내 횡격막을 쳐 주는데 어떻게 안 일어나고 배기겠어? 그리고 어차피, 몇 분 전에 네가 숨을 멈췄을 때부터 깨어 있었다고.”


“뭐라구?” 목소리가 확 뒤집혔지만 지금 그걸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자신을 단단히 휘감고 있는 셜록의 따뜻한 몸뚱이가 생경해도 너무 생경했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쿵덕거렸고, 흥분이 슬금슬금 얼굴로 피어오르면서 목으로, 가슴으로 퍼져갔다.


머릿속의 셜록이 든 상자가 전보다 더 격렬하게 요동쳤다. 자물쇠며 경고문을 그렇게 많이 달아 놓았건만, 존은 그 상자가 일 이 분 내로 싸구려 합판마냥 조각조각 터져나갈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이 녀석한테 찰싹 달라붙은 채로 버틸 수는 없었다. 이건 너무…


다시 고개를 틀어 어깨 너머로 녀석을 노려봤다. “내 침대에서 대체 뭐 하는 건데?”


“네가 자는 동안 몸부림을 치길래. 침대에서 떨어질 뻔 했어.” 셜록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존의 어깨에 묻혀서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는데도 어쩐지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럼 뭐야, 내가 떨어지지 않게 내 옆으로 기어들어와서 붙잡고 잤다 이거야?” 존은 이 미친놈의 팔을 치워내려고 꿈틀거렸다. 어째서인지 허리를 감고 있는 녀석의 팔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 잠에서 깼고 몸부림을 칠 일도 없으니까 구속하고 있을 이유도 없지 않나. 그런데 지가 무슨 안전벨트인 줄 아나, 아직도 꾸역꾸역 달라붙어 있는 이건 뭐냐고.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녀석은 보기보다 허당이 아니라서 이런 병치레한 몸으로 이겨낼 순 없었던 거다.


“놔.”


다시 팔을 밀어내자 그제야 셜록이 싫은 소리를 내며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


존은 풀려나자마자 최대한 멀리 피신해 셜록에게서 떨어져 나왔지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 금방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다. 침대 끝에서 떨어질락말락 하고 있는데도 둘 사이의 간격은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서로의 다리가 맞닿은 채였고 솜털처럼 얼굴을 간질이는 셜록의 숨결까지 느껴졌다. 당황스러우리만큼 입술이 가까웠다. 망할 트윈 베드 같으니.


“셜록, 왜 내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거야?” 그는 다시 물으면서, 속으로 끙 앓았다. 이건 정말 불공평하다. 어떻게 저 미치광이 천재놈이 이리 포근해 보일 수 있는거지. 헝클어진 머리에 이마로 굽슬굽슬한 머리칼을 흩트린 채로, 얼마나 얼굴을 부비고 잤는지 한쪽 볼에 존의 베갯자국을 달고 있는 모습이란. 나른하고 연약해 보이는 모습 이면에 있을 법한 높은 장벽이나 접근 금지 자물쇠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너 어깨를 다칠 수도 있었어. 몇 달간 그렇게 몸부림을 친 적이 없었거든.” 셜록은 이 침대에 멋대로 기어든 게 당연했다는 양 뻔뻔하기만 했다. 잠에 취해 헝클어지고 나긋해 보이는데도 녀석의 목소리만큼은 완벽하게 또렷했다.


존의 시선은 회의적이기만 하다. 무슨 권리로 남의 잠버릇을 지적하는 거지? 셜록은 불면증 환자라 며칠씩이고 잠도 없이 밤을 샌다. 결국 한계를 넘다 못해 혹사에 달한 제 몸이 협상을 포기하고 뇌를 때려눕혀 의식불명 상태로 만들고 나서야 불면은 끝이 난다. 그런 일이 일어날 적마다 존은 녀석이 전위적인 자세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일은 허다하고 거실 테이블 위에 고양이마냥 웅크리고 있다든가, 심지어는 잊어버리지도 못 하겠다, 위험스레 쌓아올린 파일 더미 사이에서 기절했는지 싱크대 아래 머리를 집어넣고 긴 다리를 냉장고 쪽으로 퍼질러 놓은 채 주방 바닥에 엎어져 있는 모습까지 발견하게 되고 마는 거다.


그럴 땐 셜록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기분이었다.


돌연 셜록의 말 중 하나가 레이더망에 걸리며 머리를 번쩍 치고 지나갔다. “잠깐, 잠깐만… 몇 달? 내가 몇 달간 그렇게 몸부림을 친 적이 없었다고? 셜록, 너 내가 자는 걸 보고 있었어?”


녀석이 어깨를 으쓱 하니 진동이 매트리스에 느껴졌다. “잠이 안 올 때만.”


“하지만… 너 불면증 있잖아. 그럼…늘 그랬다는 거 아냐, 그렇지?”


“으음.” 애매한 대답이다.


존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저 탐정놈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단호하게 삼켰다. “뭐야, 밤마다 내 방에 몰래 침입해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고?”


“몰래 침입했다는 말은 맞다고 치기 어렵겠는걸. 넌 종종 문을 열어놓은 채로 자니까. 그냥 난 들어온 거지.”


입이 딱 벌어졌다. “문을 열어놓은 게 침입을 환영한다는 뜻인 건 아니라구. 그런 짓은…”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굴욕적이다? 무섭다? 겁난다? 분명 흥분은 아닌 거다. 그는 자신의 몸에 엄하게 일렀다. 안타깝게도 그 몸뚱이는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특히나 셜록이 이렇게 꼭 달라붙어 있었으니까 말이지. “소름끼쳐, 셜록. 그거 소름끼치는 거라구. 도대체가, 날 가지고 무슨 행동학 연구라도 한 거야?”


“너도 알지? 네가 이상할 만큼 자주 그런 식의 결론으로 넘겨짚는다는 거.” 셜록은 웃었다. 망할 자식, 허가 없는 연구를 했다고 의심받는 주제에 그 사실이 못내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녀석의 눈이 스륵 감겼다. 도로 자려는 의도가 충만했다, 그것도 이 침대에서. 또다시.


그러니까 멋대로 연구했다는 혐의를 딱히 부인하는 건 아니로군.


속에서 열불이 터졌지만 존은 애써 엄격한 목소리로 일렀다. “셜록. 넌 여기서 자면 안 돼.


“명백한 허위 진술이야.” 셜록은, 누군가가 녀석의 기준에서 범죄 수준으로 잘못된 추리를 했을 때 으레 그러듯 눈썹을 팍 찌푸렸다. “난 바로 4분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잘 자고 있었어. 내가 일어난 건 네가 갑자기 숨을 멈추더니 말도 안 되게 뾰족한 그 팔꿈치로 사악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잖아.”


“그게 무슨…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구.” 설명하려고 혼자 발버둥을 치는 꼴이었다. 셜록 이 자식은 꼭 구체적으로 해야 알아듣지. “네가 여기서 자면 안 되는 건 우리가 다 큰 어른이기 때문이야. 성인 남자들은 보통 침대에서 같이 안 잔단 말이야.”


“언제부터 우리 관계가 보통의 범주에 들어가 있었어?” 무심하게 되묻는 셜록이다.


존은 도끼눈을 하고 녀석을 노려봤다. 이 자식은 자기가 가까이 있음으로써 내게 무슨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전혀, 눈곱만큼도 모른다. 당연히 모르시겠지. 셜록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 사람을 분석하고 그들의 욕구를 이해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욕구는 도통 실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식사, 수면, 섹스… 위험할 정도가 되어서야 정기적으로 기본적인 필수 항목들만 채우곤 했다.


그래, 결국 셜록의 마음속에서 이런 밀접한 자세를 취한 건 그저 친구가 몸부림을 치다가 다치지 않게 하려는 순수한 의도밖에 되지 않을지도. 존의 침대에 같이 누워서, 맞닿은 무릎 너머로 후끈후끈한 열기를 내뿜으며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자신이 존에게 얼마나 커다란 고난을 주고 있는지 모르는 거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존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바로 눈앞에 있는 입술로 달려들지 않게 버티는 것 뿐이었다.


“넌 정말…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면서 어쩔 때 보면 완전히 멍청한 답답이라니까.”


셜록은 눈을 휙 굴렸고, “그럼 넌 내가 어디서 잔다는 것만으로 어떻게 내 지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지?”


그런 녀석 때문에 존은 머리채를 한 움큼 쥐었다. 아예 잡고있는 머리를 뿌리채 뽑아버릴 듯 했다가, 한숨을 쉬며 셜록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너 이러면 안 돼.” 그는 한 손으로 둘 사이를 가리키며 ‘너랑 내가, 같이 자면서, 플라토닉으로 있는다는 것’을 지칭하듯 손짓을 해보였다. 마침내 씹어뱉듯 내뱉은 말은 이런 거였다. “너랑 내가, 같이 자면서, 플라토닉으로 있는다는 건. 나로선 그럴 수 없는 거야.”


“아아.” 작게 감탄사를 내뱉은 셜록은, 무표정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하곤 시선을 저 너머 어딘가로 흘렸다.


그건 몇 천 번이고 보았던 익숙하고도 익숙한 표정이었고, 또 존은 그 표정을 사랑했다. 셜록의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놀라우리만큼 효율적인 기계들이 하나하나 맞물려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춤추는 추리들이 얼굴의 미묘한 움직임을 통해 존재감을 표현했고, 존은 언제까지고 그걸 질리지 않고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래턱에 힘을 준다든가, 눈썹의 각도가 변하거나. 아니면 눈가가 아주 살짝 움찔거린 것 까지도.


방금, 셜록이 그랬듯이.


“아니,” 얼른 말을 주워담고 싶었다. “아니, 아냐, 아니야.”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셜록은 명백할 정도로 분명한 애정의 징후들을 못 보고 지나칠 정도로 관계에 미숙한데, 방금 그건 아예 면전에 대놓고 설명해 준 꼴이잖아? 지금껏 그렇게 스스로를 억제하고 외면해 왔는데 이제 셜록이 다 알아버렸다고? 그럼 그 감정을 놓지도 못하고 있단 것까지 알아버리면?


셜록이 떠나버릴 거다.


그 생각에 속이 덜컹 내려앉았다. 숨이 턱 멎었고,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이리저리 뿜어지며 날뛰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리는데도, 손은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셜록의 눈꺼풀이 감았다 뜨이며, 다시 존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알아버렸어. 맙소사. 알아버렸다고. 역겨워 하겠지, 이제 떠나려고할 거야. 한 손이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앞으로 향했다. “아냐, 그게 아니라― 셜록, 잠깐만…”


셜록이 베개에서 슬몃 고개를 들더니, 한쪽 눈썹을 휙 치켜올려 보였다. “그럼 플라토닉이 아니라면 괜찮다는 거로군?”


이럴수가.


눈을 감고 셜록의 표정을 피했다.


이건 아냐.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지금껏 숨겨오려고 애썼던 엄청난 노력들이 모두…


아니. 이 세상이 이다지도 불공평할 리가 없다. 그냥 열감기 때문에 또 비참한 꿈을 하나 더 꾸는 거다. 잔인한 허깨비에 홀려 있는 것 뿐이니까, 잠에서 깨고 나면 셜록이 가구에다 시체 부위를 올려놔서 허드슨 부인의 고가구를 폐품으로 탈바꿈시키는 장면을 발견할 거고, 그럼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모두 다 괜찮아질 것이다.


“존? 존, 고개 들어봐.” 재촉하는 셜록의 목소리가 뭔가…조르는 것 같이 이상했다.


존은 눈을 떴다.


아주 조금 물러난 것 빼고는 셜록이 앞에 그대로 있었다. 히죽이는 얼굴을 하곤.


“맙소사.” 처음의 안도감이 곧장 쓰린 좌절감에 휩쓸려 내려가고, 존은 비참하게 중얼거렸다. “농담이었던 거지? 내가 농담하는 거라고 생각한 거로군.”


“아니야.” 셜록은 자기만족적인 미소를 한껏 띄운 채 대답했다. 존의 말을 심각성이라곤 전혀, 한 톨도 없이 흘린 거였다. “그냥 이 상황이 어쩐지 웃겨서.”


목소리만 들어도 웃기다는 걸 알겠군, 존은 짜증스레 생각했다. 아니, 그냥 웃긴 것 뿐만이 아니다. 녀석은 노벨상까지도 받을 수 있을 법한 대단한 발견을 해낸 과학자마냥, 아주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진짜로 이쪽의 반응을 행동학 연구니 뭐니 하는 거에 추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럴 땐 안도해야 하는 거다. 내심 기뻐해야 옳은 거였다. 셜록은 생각했던 것보다 보통 사람들의 감정에 훨씬 우둔했고, 자신이 숨기려고 애썼던 비밀은 그냥 농담거리로 오해받은 덕분에 아직 안전했다.


그래야 하는데, 짜증이 확 치밀었다.


이 구제불능의 병신같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존의 안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셜록의 셔츠를 한 움큼 붙잡고 앞으로 잡아당겼다. 둘 사이의 간격을 뛰어넘어 녀석의 히죽이는 낯짝에 키스하기까지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다.


잠깐 동안은 정말로 황홀했다… 정말 따스하고, 부드럽고, 아, 드디어… 맞닿은 셜록의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존은 데인 듯이 얼른 물러났다.


젠장, 그제야 충동을 붙잡아 가둔 존은 속으로 조용히 꾸짖었다. 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물론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 생각 없었지 뭐. 그 기저에는 억눌려 있던 감정과 열망은 물론이고, 그토록 모질게 거부해 왔건만 그 어떤 자물쇠로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던 실낱같은 희망이 끈질기게 남아 존을 고집불통의 멍청이로 만들어 버린 거였다.


난 정말 바보야. 그렇게 스스로를 마구 비난할 수밖에.


셜록은 동상처럼 가만히 굳어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야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일단 잡고 있던 셜록의 셔츠를 놓긴 했는데, 손바닥에 옷감의 느낌이 남아 있었고, 닿아있던 순간의 온기 역시 손등에 희미하니 머물러 있었다.


내가 대체 왜 선을 넘은 거지? 존은 멍하니 생각했다. 셜록은 이런 짓 안 해. 분명 나도 알고 있는 거였잖아.


셜록은 항상 냉담한 태도로 자신의 주변에 높은 벽을 쌓고 그 둘레에 잘난체로 똘똘 뭉친 깊은 해자를 파서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리고 그걸로도 부족하면 날카로운 말로 사람을 상처입혀서 멀리 쫓아버린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왔기에, 존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움츠린 채 비난이 쏟아지길 기다렸다.


어째서 난 지금 이대로로 만족하지 못하는 거야? 왜 우정으로 놔두지 못하고…


“미안해.” 침묵을 견디지 못한 존은 불안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그건 아무 일도 없었던 셈 쳐줘.” 침을 꿀꺽 넘긴 후, 셜록의 얼굴에 떠올라 있을 비난을 마주할 수 없어서 눈을 감아버렸다. “네 하드 드라이브에서 지워버려, 어떻게든 좋으니까 잊어버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 공허한 느낌이었다. 그 안으로 바람이 불어 끔찍이도 시려웠고, 존은 눈을 감고 이대로 뒤돌아서 얼굴을 숨기려고 했다. 그러면 쓰리고 아픈 속까지 감출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빌어먹을 셜록 자식이 더 빨랐다.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마자 몸을 날려 기다란 다리를 존의 허리에 홱 걸치더니, 어깨까지 끌어안고 존을 제자리에 못박아버린 거다.


존은 뜻밖의 접촉에 깜짝 놀라 휘둥그레 눈을 떴다.


“존.” 낮은 그의 음성이 살갗을 통해 온 몸을 타고 울렸다. 존이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녀석은 몸에 힘을 실어 존을 더욱 튼튼히 붙잡았다. “내가 불필요한 정보만 지운다는 걸 알잖아. 아까 그건,” 셜록은 고개를 휙 들고, 반쯤 내리깐 눈으로 존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아주 중요한 정보였어.”


위를 향해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존은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댔다. 여전히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 조그만 희망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뭐?” 


하지만 ― 그 입맞춤에 셜록이 굳어버렸다는 건, 말할 여지없이 분명한 거부의 반응일 수밖에 없다.


존은 조그만 구석에 막 자리를 튼 희망의 씨앗을 뿌리채 뽑아버렸다. 바보같은 짓은 이만큼이면 그만 충분하다. 이젠 어디 한적한 데로 가서 마구 소리를 지르며 자기비하를 한 다음에 사색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게 옳았다. 정말 운이 좋다면 여기서 더 못 견디게 어색한 사이가 되기 전에 남아 있는 우정의 건덕지라도 건져올려 관계 회복을 도모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셜록이 달라붙어 있는 상황에 그런 일을 할 순 없는 거 아닌가.


존은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보려고 다시금 녀석을 밀어냈다. 군대에서 근접 전투시 상대방의 포박을 벗어나는 법을 수십 가지도 넘게 배운 존이건만, 병치레를 하느라 힘이 약해졌을 뿐더러 셜록을 다치게 할까봐 조심하느라 문제는 첩첩이 어려워져만 갔다. 게다가, 호리호리해서는 겉으로 보면 종잇장같은 주제에 셜록이 쓸데없이 무겁다는 것도 한 몫 거들었다. 존은 옆으로 빠져나오려고 몸을 뒤틀어댔다.


“가지 마.” 셜록이 말했다. 그건 보통 녀석이 무언가를 시킬 때 으레 그러듯 고압적인 투가 아니었고, 전에 들어본 적 없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건 명령이 아닌 요청이었다. 천천히, 존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셜록이 자세를 바꿔 둘 사이에 원한다면 물러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비웠다. 존은 재빨리 벗어나 멀리 떨어지려다, 순간 접촉이 사라진 살갗이 휑하게 느껴져 머뭇거렸다.


“존,” 거의 속삭임과 같은 낮은 음성으로, 셜록이 되풀이했다. “가지 마.”


존은 자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쟁통에서 싸웠고, 연쇄살인범을 죽였고 런던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의 대가들과 마주하며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손으로 버텨왔다. 그럼에도, 피하지 않고 셜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데에는 매 순간 매 초마다 조금씩의 용기가 필요했다.


고개를 든 존은 숨이 턱 막혔다. 그늘을 드리운 셜록의 검은 속눈썹과 확장된 동공, 숨김없이 노골적으로 번쩍이는 갈망이 눈에 선히 들어왔다.


지금 눈으로 입력된 정보를 믿을 수 있는 걸까, 아무거나 믿어넘기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을 많이 무릅쓴 상태였기 때문에 존은 셜록, 하고 조심스레 불러 봤다. 그 순간에도 눈길은 떼지 않은 채였다. 시선을 옮긴 사이 저 표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다면, 존이 지금껏 감히 꿈꿔오지도 못했던 경이로운 순간이 물거품처럼 없던 일로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가지마.” 이번에는 익숙한 명령조의 뉘앙스가 살짝 느껴졌고, 머리를 붙잡아 고정한 채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셜록 때문에 등골을 타고 전율이 일었다.


한계다. 녀석은 이글거리는 파란 눈동자를 존에게 고정한 채로, 그의 위로 완전히 몸을 덮고 맙소사, 슬금슬금 존의 허벅지 사이로 무릎을 들이밀었다.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생각과 함께 존은 몸을 들어 셜록을 와락 껴안았다.


입술이 다시 한 번 닿는 순간, 존의 마음속에 있던 장벽이 ― 근 일 년 전에 셜록을 집어넣어둔 후로 불안하기만 했던 그 상자가 ― 마지막 신음성을 흘린 후, 천 갈래 만 갈래로 조각나 바스러졌다. 꼭꼭 숨기고 억눌러왔던 커다란 애정과 열망과 바람과, 닿고 싶다는 충동까지, 둑이 터져 물이 넘쳐흐르듯 그를 휩쓸었다.


존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셜록이 정말 이걸 원하는 건지, 정말 자신을 원하는 게 맞는지 거듭 확실히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셜록의 키스 세례를 받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 현실이 어딘지 믿기지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돌연 셜록의 각진 골반이 내려와 지그시 누르는 감각에 존은 허리를 휘며 떨었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거부해왔던 감정이 한 번에 터져나오는 바람에 심장을 거진 아플 정도로 압박했다. 존은 입을 맞추며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방금 그릉, 한 게 셜록의 목에서 난 소리인가? 뭔지는 몰라도 존은 발가락 끝까지 저릿저릿한 기분이었다. 셜록의 단단한 무게감이 좋아서,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셜록의 셔츠자락을 양 손으로 잡고 끌어내렸다. 그러자 긴 손가락이 존의 뒷덜미를 감싸더니 셜록도 존을 더 원하는 것처럼 가까이, 더 가까이 끌어올렸다.


함께 지내오는 동안, 존은 저 남자가 섹스에 관심이 없는 녀석이라고 멋대로 확신해 왔었다. 불쾌하고 귀찮아서 쓸모없는 일이라며 멀리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어딘가 뒤틀린 저만의 현실에서 사는 녀석이라, 생리적 욕구가 늘상 무척이나 복잡하고 잘나신 두뇌의 활동에 억압되어 있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셜록의 두 손으로 몸을 어루만져지고 그의 입술을 맛보고 있노라니 존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그 동안 줄곧 셜록이 무성애자인 거라고 믿어야 했던 거다. 셜록이 섹스를 원했다면, 설마 그 대상이 나일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 신이시여. 그런 게 지금 무슨 대수인가. 현실엔 망설임 한 점 없이 다가오는 열기와, 옷이 말려올라가며 서로의 살과 살이 맞닿는 감각만 있었다. 녀석이 목을 집요하게 핥고 물면서 뜨겁게 부비는 입술과 따끔거리며 얕게 파고드는 이의 느낌이 생생했고, 셜록은 존의 윗도리의 목을 잡고 늘이더니 흉터가 남은 쪽의 어깨가 드러나도록 당겼다.


나중에 이 녀석 혼쭐을 내줘야지 싶다. 순면이라 아끼는 잠옷인데, 늘어지고 망가지는 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셜록이 쇄골을 핥고 있는 와중에 화낼 건덕지가 도대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내는 건 썩 어려운 일이었다. 셜록은 쇄골 중간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서 다 아문 총알 흉터까지 뭉근하니 길게 핥았고, 존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흉터 주위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빨아들였다.


넌 내 거야.” 셜록이 으르렁, 으름장을 놓는 소리에 존은 이미 누워있는 상태인 게 정말 감사해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모두 풀려버려서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셜록의 어깨를, 등을, 허리를, 모두 한꺼번에 어루만지고 싶어 온통 더듬거렸다. 손바닥 아래 보드라운 살갗을 덮고 있는 얄팍한 옷감 한 꺼풀마저 불만스러웠다. 셜록은 응당 그러리라 생각해왔던 것보다 가까운 곳에서 부드럽고 따스한 몸뚱이를 맞대오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제정신이라곤 다 날아가고 완전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애초에 그게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인가? 어차피 제정신인가 미친 건가 하는 건 상대평가인데다가, 이쯤 되니 존은 셜록만의 특별한 ‘미친 천재’ 캐릭터에 더 호감이 가는 중이다. 물론 엄청 짜증나고 별난 성격이긴 하지만.


일말의 경고도 없이 셜록이 일어나더니 존의 허리 위로 휙 걸터앉았다. 그리고 존이 갑작스런 자극에 헉 이를 악무는 동안, 녀석은 크리스마스를 맞은 꼬맹이들이 지을 법한 표정을 하곤 존의 윗도리를 마구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건 좀 신경쓰이는데.” 셜록이 마구잡이로 벗겨내는 옷감에 묻히기 전에 존은 얼른 말했다. 이런 데 서투른 모양인지 소매가 벗겨지다 말고 어색하게 뒤엉켜 있는 윗도리에 갇혀 존은 잠시 어색하게 누워 있었다. 셜록은 무언가 수학 공식같은 말을 중얼거리더니 이윽고 잡아당기던 걸 놓아줬다.

“신경쓰여?”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은 녀석은 셔츠 자락을 잡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한 번에 머리 위로 옷을 벗어 던졌다.

존은 대답하려고 벌린 입을 그대로 연 채, 눈앞의 광경에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얼어붙었다.

셜록이 며칠씩 입에 음식을 가져다대지 않을 때면 존은 걱정이 들곤 했다. 윗 단추 한두 개 툭툭 풀어놓은 셔츠와 코트와 목도리로 늘상 꽁꽁 감춰놓은 몸뚱이를 들춰보면 피골이 상접해 있을 정도일까봐. 그런데 이제 보아하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셜록은 정말 멋졌다. 마른 근육으로 잘 빠진 몸매가 부드럽고 말간 빛깔의 피부로 뒤덮여 있었고, 존은 이 세계의 미스터리와 같은 남자의 몸을 더듬어 기억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할 정도였다.

“무슨 뜻이냐구.” 셜록이 검댕같은 눈썹을 찌푸린 채로 독촉했다.

존은 눈을 깜박이면서 머리를 헤집어, 생각의 선로에서 벗어난 기차를 도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 표정.” 그는 침을 꿀꺽 넘기고 나서야 마침내 한층 거칠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섯 살 짜리 애가 선물 열어보는 것 같은 표정 말이야. 레스트레이드가 살인사건 때문에 전화했을 때 꼭 그 표정을 짓더라. 딱 그 때만. 너한테 살인사건과 동급 취급을 받는다는 데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똑같지 않아.” 셜록은 힘주어 말하고, “더 좋지. 넌, 살인사건보다 훨씬 더 나아.” 도로 몸을 숙여 입술을 집어삼켰다.




Part 4→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