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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H] 크리스마스의 행복 (Winter's Delights) - 1 본문

Sherlock_중편/시리즈

[JW/SH] 크리스마스의 행복 (Winter's Delights) - 1

topsecretum 기밀선녀 2013.01.0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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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 Winter's Delights
  • 저자 : kate_lear
  • 등급 : NC-17 (성인)
  • 비고 : 기밀선녀가 번역한 습작입니다. 창작물의 저작권은 모두 저자에게 있으므로 본문의 펌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Part 1






홈즈 가문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만찬이 어떻게 흘러갈것인가에 대해 존이 처음으로 암시를 받는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둘이 마을의 기차역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평소처럼 택시를 세우지 않고 셜록은 바깥에 서 있는 군중(그 중 반은 그들과 같이 역에서 나가는 길임에도) 사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누구 기다려?”


“응.” 셜록이 인상을 찌푸린다. “보통 파커가 늦는 사람이 아닌데, 아직도 안 나타났어.”


“파커?” 몸을 덥히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존이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겠지. 썬더버드에 나오는 그 파커처럼?”[각주:1]


“누구?” 불공평한 신장에다 쭉 뻗은 목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며 묻는 셜록이다.


존은 한숨을 쉬어버렸다. “됐다. 맙소사, 너네 가족이 운전사도 있는지 몰랐어.”


이번엔 셜록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다본다. “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크리스마스에 열리는 가족 모임에 같이 가겠느냐고 셜록이 간단하니 물었을 때, 존은 서슴없이 바로 승낙했다. 이미 해리가 클라라와 단둘이서만 같이 성탄절을 보내기로 했다고 변명조로 통보를 했기에 존은 할 일이 없었다. 연휴동안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할까도 생각해봤으나, 부랑자들 중에서 상당수가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아 길거리에 떠돌게 된 전직 군인들이다. 수염도 깎지 않고 거무죽죽한 얼굴로 런던을 배회하는 자들을 보고 있자면 그 예전 1월에 스탬포드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이 선연히 떠오르곤 했다. 자신의 또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었기에 존은 그들과 조우하는 게 두려웠던 거다. 그래서 존은 냉큼 셜록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너무 기쁜 티를 내지 않으며.


폭설로 도착이 지연되자 셜록이 짜증을 부렸다. 심심풀이를 한답시고 열차가 가는 내내 반대편의 존에게 계속 문자를 보냈다. 덕분에 주변 승객들이 불만을 토로했고, 존은 킥킥대며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웃음을 참는 존을 보고 셜록의 눈가가 살풋 호를 그렸다.


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식전 파티가 한창이었다. 뭐, 말하자면 ‘집’이라는 표현은 좀 어폐가 있다. 대저택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커다란 대지 위에 놓인 그 저택 안은 번쩍이는 불빛과 사람 소리로 웅성였다.


‘파커’가 홈즈 가의 운전사가 아니라는 말에 존은 한숨을 덜었다. 다만 그는 마을에서 택시를 모는 사람이었고, 오후 내내 역에서 저택까지 홈즈 가 사람들을 모시느라 연말 대목을 잡는 중이었다. 한편 저택을 관리하는 사람이 또 따로 있었다. 셜록은 가정부와 몇 마디 나누더니 육상트랙만큼 기다란 복도로 존을 끌고 가서 (“워링 부인 말씀으론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동관에 방을 배정받았다더군.” “동관? 건물이 따로 있어?”) 아라비안 룸이라는 명패가 달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곳엔 존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시절 보았을 법한 물건으로 그득했다.


“옥타비아 고모님의 아이디어지.” 침대 옆에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대충 던지며 셜록이 설명한다. “그분 집이거든. 각 방마다 테마가 달라.”


하지만 뭐라는지 존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마치 어렸을 때 해리가 그리도 좋아하던 동화책 중 하나로 들어간 것 같다. 벽에 금속제의 방사형 조명이 걸려 있고, 온 방이 화려하고 번쩍이는 색상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바닥에 겹겹이 쌓인 두툼한 페르시안 러그와, 방에서 가장 튀는 커다랗고 편안해 보이는 침대 위에는 붉은 오렌지색과 청록색, 그리고 자줏빛의 고급스런 색상으로 만들어진 베개며 쿠션으로 그득했다. 길고 넓은 침대라 셜록이 그 길게 잘 뻗은 사지를 이리저리 늘어뜨려도 끄떡없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침대가 하나뿐이다.


“어, 저기 셜록?”


안쪽에 딸려있는 욕실에서 셜록의 대답이 이상하게 메아리쳐 들려왔다. “음?”


네 기둥이 달린 커다란 침대에 다가가, 한쪽 귀퉁이에 가만히 앉으며 어두운 색으로 윤을 낸 기둥에 손을 얹는다. “저기 그러니까…음…침대가 하나밖에 없는데.”[각주:2]


대답이 없다. 그리고 존은 무심코 침대 옆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서랍을 열었다가, 성인용품점 진열대에 올려져 이름을 날렸을 법한 다양한, 수북한 양의 콘돔 그리고 윤활유 무더기와 조우하게 되었다.


“씨발!”


고맙게도 셜록 녀석이 걱정된 표정으로 번쩍 다시 나타났다. “왜 그래?”


“저기…저기에…” 존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내뱉었다. “저 서랍에 콘돔이 잔뜩 들어있다고! 거기다… 이거! 온갖 향 나는 것까지!”


“그래?” 빌어먹을 셜록 홈즈, 눈을 번쩍이며 궁금해한다. “무슨 향?”


“셜록!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문제는 이게 왜 여기 있냐는 거라고!” 당황한데다 흥분을 억누르느라 의도치 않게 무뚝뚝한 목소리가 나와버렸지만, 이거 너무하잖아. 안 그래도 온 런던의 식당 사장이면 사장들이 다들 존과 셜록 사이에 은근한 암시를 주면서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셜록의 고모까지?


셜록은 천연덕스런 으쓱 한 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옥타비아 고모님이 엄청나게 개방된 분이라 그래. 원조 히피 중 한 분이지. 옛날에 저메인 그리어[각주:3]와도 아는 사이셨고. 그 서랍 안쪽에 뒤져보면 아마 게이 카마수트라 필사본도 나올 걸.”


이게 셜록식 뜬금없는 유머인지는 모르겠으나, 서랍을 도로 쾅 닫게 되는 데는 충분했다. 얼굴에 불이 붙은 것만 같다. 머릿속에선 고맙게도 의지를 배반하고 셜록의 이미지를 마구 쏟아낸다. 향 나는 윤활유를 바른 셜록, 게이 카마수트라에 나온 자세를 한 셜록…


“셜록, 그분한테 필히 말씀드려, 오해… 그러니까 우리…사이 그런 거 아니라고.” 안타깝게도 이젠 셜록의 검은 머리에 대비되는 하얀 몸이 드라마틱한 색깔의 이불 위로 널브러진 이미지를 대량 생산중이다.


“알았어, 알았어.” 선정적인 생각 사이로 셜록의 목소리가 뚝 끊고 들어온다. “나중에 워링 부인에게 얘기해서 방 문제 해결해 줄게. 지금은 늦었어. 한 침대서 자기 싫으면 이만 내려가 보는 게 좋을 거야.”


문가에 선 셜록이 에둘러 말할 생각도 없이 성마르게 재촉해서, 존은 겉옷의 매무새를 살필 겨를도 없이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아래층의 연회장에 도착하자, 방에 그득 찬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웃으며 왁자하게 떠들고 있는 걸 발견한 존이 식겁하고 말았다.


“그냥 가족 모임이라고 하지 않았어?” 당황한 존의 중얼거림에,


도리어 놀란 듯 쳐다보는 셜록. “이게 우리 가족 모임이야.”


“합해서 백 명은 되겠다! 이 사람들이랑 모두 친척이란 건 아니겠지?”


“과장하지 마, 존. 많아봐야 오십에서 육십 명 정도야. 한 잔 할래?” 둘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존이 본 것 중 가장 커다란 음료 캐비넷으로 향했다. “진, 토닉? 아니면 위스키?”


“위스키로 줘. 고마워.” 술의 힘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아무래도 오후를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혼미하게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그 모두가 존과 전혀 다른 고상하신 상류층 인사들이었기에 제대로 5분이나 대화가 지속되긴 할까 회의가 드는 거다.


그래도 왁자하게 정신없는 게 베이커 가에서 홀로 외로이 보내는 크리스마스보다 낫지, 셜록이 건네준 라가불린[각주:4]을 크게 들이켜고 희미한 현악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존이다.


“저거 현악기 콰르텟이야?” 그가 초조하게 물었다.


“스테레오야, 존. 옥타비아 고모가 고른 음악이겠지. 에반더가 오기 전에 다른 데로 가야겠어.” 셜록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너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존의 중얼거림에,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던 셜록은 순간 어깨 너머로 눈을 들더니 표정을 환하게 밝혔다.


“할머니!” 그러더니 한 팔에 존을 달고는 마구 달려간다. 셜록의 멀쑥한 몸집으로 가리어지기 전에 노년의 여성이 잠깐 시야에 스쳤고, 셜록은 그녀에게 몸을 굽혀 볼에 키스한 후 양 팔로 껴안았다. 서로 포옹을 주고받은 후에서야 셜록이 상기되어 행복한 모습으로 물러나서야, 존은 이 집에서 가장 나이든 여주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머잖아 아흔 세에 접어들 것으로 보이는 이 노부인은, 완벽한 차림새와 (겉옷 단추에 깔끔하게 새겨진 C 로고를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하얀색의 우아한 단발머리로 흠 잡을 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분명 셜록의 광대뼈가 이 여인에게서 내려온 것일 테다. 그 노부인은 존을 보더니, 어색하게 마크 앤 스펜서 수트의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전직 군의관과 만나서 크리스마스 최고 선물을 받았다는 듯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할머니, 이쪽은 존이에요. 존, 여기 우리 할머니 에반젤린.”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정중하게 손을 내밀어 보는 존이지만 완전히 무시당하고, 대신 (레흐 뒤 땅[각주:5]의 향기와 함께) 볼에 다정한 키스를 받았다.


“어머나 세상에.” 에반젤린 여사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얘기 많이 들었다우.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셜록, 아가, 존과 얘기 나누는 동안 할미한테 마실 것 좀 가져다주련.”


베이커 가의 집에서라면 존이 차 한 잔 가져다 달라고 암시와 요청을 대체 몇 번이나 보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심지어는 애원까지 한 적도 있더랬는데, 지금의 셜록은 그저 순순히 “늘 드시는 거면 되죠?”하고 말하곤 음료를 내놓는 곳으로 가는 게 아닌가.


“자, 그럼.” 최면이라도 걸 것 같은 두 녹색 눈이 존을 샅샅이 훑는 게 느껴진다. “둘이 일 년 남짓 만나왔다던데, 맞지요?”


“어, 네.” 대답하면서도 존은 벌써 일 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란다. 그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바츠의 연구소에 발을 디뎠던 때가 오랜 옛날처럼 느껴진다.


“우리 셜록이 드디어 정착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우. 옆에 저 아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애도 세상 좋다는 걸 알겠지요. 착한 아이지만, 언제나 늘…” 말 뒤꽁무니가 흐려졌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 완전체 괴짜다? 마구 뒤를 이를 단어들이 떠오르지만 입조심 하느라 감히 꺼내지는 못한다.


“…잔망스런 데가 있어서.” 여사는 그렇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벨라 얘기로는 젊은이와 만난 후로 많이 안정되었다고 하더군요.”


지난 한 해를 되돌려봤다. 불과 저번달에 냉장고에서 피부 조직 샘플을 발견한 건을 애써 의식 저편으로 밀어버리면서, 지금보다 더 변덕스러웠을 셜록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곤 부르르 떨었다.


에반젤린 여사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요, 나도 우리 애들을 모두 아끼고 특별히 편애하지 않아요. 하지만 셜록을 보면 내 종조부가 떠오르곤 한다우. 훌륭한 분이셨지요. 딱 셜록처럼 빈틈없고, 매우 착하셨지. 친구분과 둘이서 서색스의 다운스에 사셨는데, 여름이 되면 그리 놀러가서 벌 키우는 것을 돕곤 했답니다. 거기서 나오는 꿀이 얼마나 곱던지요. 벨라가 둘째를 낳아서 중간 이름을 무얼로 하면 좋겠느냐고 내게 물었을 적에, 한 치도 망설임 없이 종조부님 성함이 떠오르지 않겠어요. 참 보면 셜록 그 아이가 그 분과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 모른다우.”


홈즈 가의 이야기를 잘 새겨들으며 한 모금씩 음료를 홀짝이다, 다음 순간 에반젤린 여사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인 말에 “그리고 두 사람 다 이반이기도 하고. 요즘 젊은 사람들 그렇게 부르지요? 아이구, 괜찮아요?” 사레가 콱 들려버렸다.


“예, 괜찮습니다.” 눈물이 핑 돌면서 위스키 때문에 코 안쪽이 시큼거렸다. 존은 헐떡이며 애써 대답했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증조부님이… 증조부님께서…”


“아, 그럼. 분명 확신해요. 나이가 들면서 그분과 함께 사시던 홀아비 친구분에 대해 퍽 궁금해하곤 했다오. 물론 두 분이 돌아가신 후에 일이지만.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그런 것들을 몰랐으니까. 알았더라도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때만 해도 함부로 입 밖에 낼만 한 것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많이 개방되었더군요.”


존은 늘 셜록의 성향에 대해 궁금했었다. 여성에 대한 전무한 관심과, 이따금씩 유별나게 잘 생긴 남자를 빤히 바라보곤 하던 셜록의 시선 (물론 자신도 그 남자를 너무 쳐다보느라 산만해지지 않았을 때 드물게 발견하는 일이지만) 등의 일련을 종합해보면 답을 알 법도 했으나, 자신의 희망사항을 다름 아닌 셜록의 할머님에게서 확신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더랬다.


“그렇군요.” 라고 겨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몇 해 전에, 바로 얼마 안 되었는데, 크리스마스에 웬 청년을 데려왔어요. 그런데 아이구, 얼마나 깨름칙한지 말도 못해. 가족들 모두 다 싫어했다오. 우리 손자에게 참 못되게 굴었지.” 회상에서 돌아온 녹색 눈이 다시 존을 살피며 반짝였다. “지금은 이 건실한 젊은이와 함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 고약한 버릇도 고쳐주고.”


셜록에겐 ‘고약하다’고 할 만한 버릇이 여러 가지 있었으므로 존은 부러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교묘히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왜, 코카인 말이우! 모른 척 하지 말어, 우리 애에게 참 극진한 것이 맘에 들지만은, 이 늙은이도 알고 있는걸. 셜록은 아이였을 때부터도 몹시 지루해하곤 했지요 ― 비오는 날이면 내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신 수수께끼와 놀이감을 모두 알려줘야 했으니 ― 하지만 그 나쁜 버릇은 하등 도움이 안 되잖아요.”


존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손자가 A등급 마약을 하던 것을 안다는데 어르신과 더 이상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에반젤린 여사는 뻘쭘하게 앉은 존을 보고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요즘 사람들은 뭐든 자신만이 첫 발견자라고 생각하지. 괜히 ‘광란의 1920년대’라 부르는 게 아니지요.”


지뢰밭 같은 대화 속에서 안전지대로 피할 만한 화재를 찾다가, 문득 신경이 쓰였던 주제를 떠올렸다. “‘셜록’이 그 친구의 중간 이름이라고 하셨죠.”


“그렇다우. 몰랐나요?”


“예. 말해준 적이 전혀 없으니까요.”


“여기 받으세요, 할머니.” 시기적절하게 도로 나타난 셜록이 샐러리 한 도막이 장식된 토마토 주스를 들고 와서 건네주었다.


“고맙다, 아가. 듣자하니 존에게 네 이름을 모두 얘기해주지 않았다면서! 그 나이가 되선 부끄러워 그러지는 않았겠지?”


그러자 셜록이 짙은 눈썹을 추욱 늘어뜨리며 불만스레 인상을 쓰는데, 갑자기 존의 눈에 아주 어린 아이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이상하잖아요.”


“애가 실없기는. 예쁜 이름이잖니, 이상할 거 하나 없다. 저기 네 엄마 오는구나. 너 왔느냐고 옥타비아한테 묻던데, 도착했다고 말 안 했니?”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이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고분고분하게 다시금 자리를 떴다. 셜록의 할머님이 “그럼 이름이―”하고 막 운을 떼려는 존의 팔을 잡고 사람들 사이로 솜씨좋게 지나간다.


“저기 저 이가 내 남동생이라오. 젊은이와 만나길 학수고대하고 있지. 군대에 있었을 적 이야기를 무척 듣고 싶어 해요.”


존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바로 앞에 신장이 (어쩌면 어깨 둘레도) 180은 넘어 보이는 커다란 남자와 마주쳤다. 머리가 완전히 벗겨졌지만 우아한 은색 콧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죠브.[각주:6] 셜록의 친구 존이야. 존, 이쪽이 내 남동생 죠브.”


“안녕하십니까.” 존은 그런 식으로 경직된 말투를 낼 의도는 아니었으나 앞에 선 노인의 위상에 저절로 딱딱한 인사를 하고 말았다. 이름마저 한 몫 했다 ― 구름 위에 앉아서 천둥과 정의를 주관하는 일에 딱 어울려 보일 정도니까. 따스한 손과 악수를 나누고, 너무 빤히 쳐다보지 않으려고 (이 죠브라는 사내의 모든 외형은 평균에서 십분의 일이 더 커 보였으니) 정신을 분주히 움직이다가 에반젤린이 덧붙이는 말을 깜빡 흘려들을 뻔 했다.


“셜록의 할애비라오.”


“죄송합니다만 뭐라고…?” 잘못들은 게 분명하다.


“셜록의 할아버지요.” 에반젤린의 따스한 미소가 와닿았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헷갈렸나 봐요 ― 아까 셜록의 할머님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셨군요.”


“할미가 맞아요.”


“하지만 두 분이…”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면서 당황스러워 삽질용 굴로 파고들기 직전이다. 홈즈 가 사람들이 죄다 평범한 인물과 다르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건 너무… 대체 여기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야?


삽질용 삽을 막 들기 직전에 죠브의 차분한 목소리가 가르고 들어왔다. “물론 경어의 의미로서 부르는 호칭이야. 내 아내는 아이들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나서, 대신 누이가 나를 도와 아이들을 길러주었다네. 그러니, 할머니도 되는 게지.”


“아하. 알겠습니다.” 여사의 따뜻한 미소를 받으며 존은 속으로 홈즈 가에 대해 멋대로 폄하한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어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렇군요.”


사과를 하든, 모른척을 하든 뭔가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에반젤린 여사가 다른 홈즈 손자에게 이끌려 다른 곳으로 갔고 이번엔 죠브에게서 질문이 날아들었다. “군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잠시 파견됐었습니다.”


“흐음. 그럼 그곳에서 총상을 입은 거겠군.” 왼쪽 어깨를 살피는 커다란 손에, 존은 짧게 끄덕였다.


“예. 셜록이 얘기를…”


“나는 군대에서 복무를 한 적이 없다네.” 늠름한 어깨를 펴고 셜록의 할아버지가 말했다. “비록 전쟁 중에 공원에서 임무를 수행한 바가 있긴 하지만.”


“아하.” 공손한 표현을 찾으려고 마구 머리를 굴려본다. 이 분은 아마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인 대신 공무원으로 일한 거겠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음… 야생동물과 함께 말이죠?”


마치 존이 기똥찬 농담을 던진 마냥 죠브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돌아다봤다. 존을 향하는 즐거운 미소가 느껴진다 ― 셜록네 할아버지의 가극적인 풍부한 목소리가 친척들 사이에서 유명한 거겠지, 죠브가 대답한다. “그래, 그래. 그렇고말고. 왜 아니겠나.”


자애로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눈을 빛내고는, 존의 어깨 너머를 흘긋 보더니 근엄하게 덧붙인다. “황금알을 낳는 과묵한 거위들과 함께 일했다네.”


이러면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우리 손자 녀석이 왔군. 셜록, 잘 있었니?”


또다시 뒤에서 셜록이 지니 마냥 뾰롱 나타나 할아버지와 악수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잠깐 존을 데려가도 되겠어요?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어 하셔서요.”


“물론이지. 가보렴, 둘 다. 존, 만나서 반가웠네.”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인사하는 존의 한편에선 이미 셜록이 성마르게 한쪽 팔을 잡아당겨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갔다.


“재밌으신 분이네, 너희 할아버님. 전쟁 때 공원에서 일했다고 하시더라고. 거위랑 같이.”


“뭐랑 같이…?” 올려다보니, 셜록의 얼굴에서 무슨 소리냐는 찡그림이 떠올랐다 곧 사라졌다. 그러더니 그를 멈춰세우고 마주보게 돌린다. 입가가 위로 올라간 것이, 짜증이 나거나 비웃으려는 게 아니라 재밌다는 기색이다. 그리곤 지나가는 웨이터의 접시에서 솜씨좋게 샴페인 두 잔을 들고 존의 빈 잔을 대신 내려놓았다.


“그런 의미의 공원이 아니야.” 유쾌하게 반짝이는 눈과는 반대로 진지한 목소리다. “‘블레츨리 파크’라는 의미였겠지. 전쟁 중 블레츨리 파크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모르진 않겠지, 존?”[각주:7]


“맙소사!”


“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 국가 기밀을 취급하는 분이라구, 네 머리카락 개수마저 아실 걸.” 셜록은 여전히 군인처럼 짧은 존의 머리칼을 보며 한 마디 덧붙인다. “비유적 표현인 거야. 마이크로프트가 할아버지를 그대로 빼다 닮았지. 그러니 어서 가자구. 엄마 아빠를 찾지 못하면 마이크로프트한테 저녁 내내 정치 얘기를 듣느라 지치실 테니…”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고 존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할아버님이 거위와 일한다고―”


“‘황금알을 낳는 과묵한 거위들’[각주:8], 그래. 그건 처칠이 암호 해독 요원들을 부르던 명칭이야. 존, 역사 지식이 형편없군 그래. 태양계를 모른다고 비판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완전히 다른 거잖아! 지구가 해 주변을 돈다는 것도 몰랐으면서! 됐다, 그런데 말이야,” 존이 불편한 기분으로 말했다. “어쩐지 기분상, 너희 할머님께서 아무래도 오해를― 아. 안녕하십니까.”


초로의 부부 앞에 셜록이 갑자기 멈춰섰다. “엄마, 아빠, 여기 존이에요. 존, 우리 부모님 아라벨라 그리고 기드온이셔.”


“만나뵈서 반갑습니다, 홈즈 부인.”


존이 악수를 나눈 여성은 활기찬 얼굴에 살집이 있어 곡선미가 넘치는 모습이었고, 환히 웃으며 존을 반겼다. “반가와요, 편하게 벨라라고 불러요. 아라벨라도 괜찮고. 아직 ‘어머니’라고 부르기엔 좀 이른 감이 있을 테니.”


“어…” 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는 사이 옆에서 셜록이 눈에 띄게 움칠 하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근엄한 얼굴에 키가 큰 남성이 존에게 악수를 청해온다. 존은 보자마자 이 남성이 셜록과 마이크로프트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보게 돼서 반갑네, 존.”


악수를 나누면서, 셜록에게 서른 살을 더 보탠다면 눈앞의 신사와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똑같이 기묘한 청회색 눈동자, 똑같이 생긴 얼굴형, 똑같이 호리호리하고 마른 체구 ―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게 분명한 검은 곱슬과, 관자놀이가 희게 세어가는 직모로 구분되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두 부부는 애정어린 따스한 미소로 존을 반겼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누구에게서도 받아본 적 없던 온정이었다. 셜록의 어머님이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존? 셜록이 그러길 진료소 일을 한다던데, 연휴에 시간이 나던가요? 다같이 모일 수 있어서 잘됐지 뭐야.”


“어, 예, 그렇습니다. 잠시 맡은 임시직인 터라 하루 이틀 정도 외에는 시간이 남거든요, 대략 그런 식이라, 아시지요.”


유감스러운 대답. “그래요, 경제 불황이 오고 한동안 구직 시장이 많이 침체되었지요.”


“예, 그렇지요.” 하고 되풀이하는 존은, 이 매력적인 중년의 부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당신의 까다롭고 관리 요주의인 아드님께서 사건만 맡으면 무조건 저를 불러다가 데리고 다니려는 통에 안정된 직장에 마음놓고 있을 수가 없다고, 그런데도 자신은 거절을 못 한다고. 범죄자 ― 혹은 약이 바짝 오를대로 오른 스코틀랜드 야드 경찰 ― 에게 셜록의 저 아름답고 잘난 머리통을 얻어맞도록 위험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으니까.[각주:9]


“다행스럽게도, 남편과 나는 아주 최악은 면할 수 있었어요. 우리 둘 다 자영업이라 할 수 있으니 ― 남편은 작곡가랍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음악을 쓰는 사람이지요. 셜록의 음악적인 소양은 모두 이이에게서 받았어요. 안타깝게도 마이크로프트에게 있어선 다소 건너뛴 면이지만.”


셜록이 제 아버지와 활발히 나누던 대화를 갑작스레 중단하고 이쪽으로 끼어들었다. “‘다소’? 설마 형이 피콜로를 배운다고 했던 그 끔찍한 여름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권력의 중점인 그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악기 다루는 데 젬병이라. 잘 해봐야 끽 소리고 나머지는 완전히 듣기 고역인 연주를 하는 마이크로프트를 상상하니 존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셜록이 그런 그를 향해 씨익 미소짓는다.


“으음, 뭐, 그렇기는 하지.” 벨라는 살짝 계면쩍은 표정을 하곤 존에게 몸을 기울여 비밀을 털어놓았다. “큰애가 어렸을 때 일이죠. 말은 안 하지만 동생이 남편과 함께 합주하는 걸 질투하곤 했지요. 딱 한 주가 걸렸어요, 그 애가…”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재치있게 문장을 마무리할 길을 찾다가 이렇게 이어갔다. “포기하기까지. 온 가족이 합의했답니다. 하지만 셜록, 그렇다고 네 형이 널 보러 올 때마다 바이올린으로 듣기 싫은 소릴 내면 안 되는 거야. 철없는 짓이잖니. 모든 면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으니 말이다.”


히죽, 웃으며 셜록이 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존은 클라리넷 연주할 줄 알아요.”


그 목소리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얼핏 엿보인다는 사실에 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드온의 얼굴에 반짝 호기심이 일었다. “정말인가? 대단하군.”


“예전에 그랬죠.” 급히 덧붙인다. 셜록 아버님의 표정이 겁날 정도로 열렬한 터라 ― 마치 가족끼리 단출하게 모여서 그리그의 전 작품을 하나씩 합주해가자는 계획을 세운 듯 ― 차마 모질게 안된다고 핑계를 대기가 어려웠다. “옛날에 학창시절 때 클라리넷을 배웠습니다만 지금은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나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존의 당황한 기색을 느낀 게 분명했다, 기드온은 벨라의 허리춤을 안고 품위있게 주제를 넘겼다. “혹여 말일세, 존. 셜록의 음악적 소양을 모두 내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내 안사람이 그러거든 귀담아 듣지 말게. 깜찍한 거짓말이지. 작년엔 로열 아카데미에서 연주회도 연 사람이니.”


“이이도 참.” 얼굴을 붉힌 사랑스러운 눈빛에 남편의 진지한 표정도 조금은 녹아내렸다. “별로 내세울 것도 아닌걸. 내 혼전 성인 체베릴을 걸지 않고 그저 소박하게 치렀을 뿐이에요.”


“벨라 체베릴이라구요? 정말이십니까?” 존은 깜짝 놀랐다. “제 누나가 당신 음악을 얼마나 좋아한다구요! 집에 사진까지 붙여놨을 정돕니다.”


“어머, 존. 어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벨라가 따스한 갈색 눈을 빛내며 존의 팔을 잡았고, 존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셜록, 왜 나한테 얘기 안 해… 어라.”


셜록이 또 사라졌다. 벨라가 웃었다. “다른 데로 갔어요. 들뜨면 온통 한 곳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아이지요, 우리 남편처럼.” 아내에게 따스한 눈빛을 보낸 기드온은, 금세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벨라는 허리에 한 팔을 감싼 그의 품에 기대어 말한다. “둘은 아주 많이 닮았답니다. 심지어는 본인도 모르는 버릇까지.”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기드온을 보고 있으니, 상대방을 향해 눈을 고정한 채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 기이할 정도로 움직임 없는 모습으로 진지하게 경청하는데, 어김없이 재미있는 사건을 물어온 의뢰인의 사연을 듣는 셜록의 모습이다.


“둘이 함께라니 우리 모두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벨라가 속삭였다. “그간 우리 애가 너무 걱정이 됐답니다. 한참 동안이나 오래도록 혼자였으니 말에요. 새 사람을 만났다고 하기에 궁금하긴 했지만 지난번 세바스찬과 지저분하게 끝난 후라, 셜록이 좋은 이를 만나 잘 지낸다고 마이크로프트가 전해주기 전까지 마음이 안 놓였지요.”


그 말에는 깜짝 놀랄만한 거리가 여럿이라, 무엇부터 반응해야 할지 존은 확신이 안 선다. 세바스찬이 셜록의 옛 남자친구란 소식은 그닥 놀랄만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 예전 은행에서 만났을 때 세바스찬이 셜록에게 보이던 이상한 친숙함이 떠오른다 ― 그러나 마이크로프트가 그저 형제 사이의 필요 불가결한 완충지대로서 자신을 용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사람―으로 활발히 본가에 정보를 물어다주고 있다는 사실에는 존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여느 때처럼 자문 탐정과 나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이제 와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거다. 여기 서로 깊이 사랑하는 매력적인 부부가 그들의 비범한 두 아들을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자랑스러워하는데, 거기다 대고 틀렸다고 하기엔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존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더듬거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숫기가 없는 때문으로 보이길 바라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저… 흠, 저도 셜록을 만나서 정말로 행복해요.”


맞다, 적어도 그건 사실이었다. 존은 셜록 홈즈를 만나서 정말로 기쁘다. 만나지 못했더라면, 안 그래도 무미건조한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마이크로프트!”


“저 왔어요, 엄마.”


벨라와 그 장남이 포옹했다. 일가 가족이 모두 모이고 나니, 셜록은 아버지를 닮았고 마이크로프트는 어머니 쪽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이 명확하게 보인다 ― 똑 닮은 눈과, 살짝 살집있는 몸매에서 (셜록이 제 형더러 지치지도 않고 놀리는 부분이기도 하지) 모자가 흡사한 경향성을 드러냈다.


“멜이 존을 보고 싶다네요. 데려가도…?”


“그럼, 물론이지! 유명인사니까, 존,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해요. 크리스마스에 남편이 나를 여기로 처음 데려왔을 때가 떠오르네요, 친척들이 정말 많아서 주눅이 들었더랬지. 하지만―” 다시 웃어보이는 벨라의 볼에 보조개가 들어갔다. “모두들 정말 따뜻한 사람들이에요.”


‘주눅이 든다’고, 그 정도로는 기별도 안 가겠지. 마이크로프트의 안내를 따라가는 존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한 이름과, 자신을 보고 필요 이상으로 밝아진 표정의 행렬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마이크로프트가 “견딜만 합니까?” 하고 가볍게 물었을 때도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뿐이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틀림없이 존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있는 거다.


“이 다음부턴 인사를 오래 끌지 못할 것 같군요, 곧 만찬 시간이 될 겁니다. 그 전에 당신을 소개시켜 달라고 에반더가 성가시게 굴고 있어요.”


그 때 연회장의 한 켠에서 들리는 외침에 두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곳에선 세 젊은이가 소파에 늘어져서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잠시만’, 이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들어올려 보이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저쪽도 사촌입니까?”


“그래요, 베더비어, 갤러해드, 그리고 랜슬럿 세쌍둥이입니다.[각주:10] 셋이서 모여 컴퓨터 소프트웨서 회사를 차렸지요. 장황한 얘기를 생략하자면, 저 애들이 스물두 살 때 처음 벌어들인 금액이 10억이랍니다.”


“설마, 허풍이겠죠.” 힘이 빠져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다. “허풍이어야 해. 그럴 거야.”


아주 잠깐동안, 무표정한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에서 진심으로 놀랍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어느 부분이?”


“죄다. 모두 다요.” 존은 심호흡을 하며 허약하게 고집을 부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매끄러운 목소리로 마이크로프트가 대응한다. “랜슬럿은 운이 좋았어요 ― 여자였다면 이름이 모르가나[각주:11]가 됐을 겁니다.”


그러나 존이 무어라고 대꾸하기 전에 다시 마이크로프트가 어딘가를 향해 말했다. “멜, 이쪽이 존이다. 존, 사촌 동생 멜리플루아입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군가 튀어나와 존을 꼭 껴안았다. 몸을 뗀 존의 눈에는 여기 이 장소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뵈는 웬 여자가 비쳤다. 레게머리에다 눈썹 피어싱을 하고 도통 출처를 알 수 없는 난해한 패션감각을 지닌 그녀는, 한편 아니나 다를까 앞서 만난 여느 사람들처럼 존을 보곤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존! 멜이라고 불러요. 마이크로프트도 참 못됐어, 내 풀네임을 부르고 말야. 내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으쓱, 눈썹을 치켜올려 보이고 마이크로프트는 세 명의 소프트웨어 디자이너가 있는 쪽으로 갔다. 멜은 존을 끌고 (먼지 쌓이고 퀴퀴한 냄새나는 데를 찾아)가서 빈백 의자에 앉혔다.


“존.” 멜이 환하게 웃었다. “이제서야 드디어 만났네요, 얘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어, 음, 그래요? 그것… 잘됐네요…”


“당신 줄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만들었다구요.”


“아.” 당황스런 기분으로 존이 대답했다. “정말 친절하군요, 그런데 난 줄 것이―”


손을 휘휘 내저어보이는 멜이다. “걱정 마요, 선물 되받으려고 주는 거 아니니까. 스웨터를 많이 입는다길래 스웨터로 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대신… 열어봐요, 보세요.”


얼굴로 흘러내린 레게머리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기며 멜은 흐물거리는 선물을 건네곤, 존이 포장지를 열어보는 동안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하얀색 지구온난화 반대 팔찌를[각주:12] 만지작거렸다. 화려한 색깔의 보송보송한 선물을 무릎 위로 꺼낸 존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건 목도리였다. 눈이 현란할 정도로 복잡한 색실로 떠놓은 목도리의 양 끝은 또 밝은 무지개 빛깔로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마치 Wham!의 멤버 중 하나가 Last Christmas 뮤직비디오에서 입고 나왔을 법한[각주:13] 거라, 존이 속으로 다짐하길 이 목도리는 자신의 장례식이 되어서야 제 용도를 다할 것이다.


그러나 겉으론 입술을 깨물며 미소를 짓고,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고마워요. 만드느라 고생했을 텐데.”


“뭘요, 저도 재밌었어요. 당신이랑 셜록이 사귄다니 얼마나 기쁘다구요. 사실 딱 하나 좀 걸리는 게 있다면,” 엄지손가락에 낀 은색 반지를 돌리는 멜의 표정이 유감스럽게 변했다. “군인이었다는 말 듣고 실망 많이 했어요. 물론 대단한 사람인 건 알지만요, 존, 그래도… 뭐랄까… 무용가라거나… 조각가, 아님 뭐든, 다른 일 하는 거였다면 더 좋았을 거예요.”


“음, 사실 난 지금―”


“그리고 요즘 법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군인들이 동성애를 보는 시각이 여전히 너무 구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새로 생긴 사촌오빠네 게이 남자친구―를 향해 똑바로 고정된 멜의 푸른 눈동자 속에 자신의 모습이 선연히 담겨있는지라, 아무리 애를 써도 대답할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쪽으로 후퇴를 결정한다.


“그것이, 군대에 있긴 했는데 정확히 말해 군의관이었어요. 지금은 런던 진료소에서 근무하고 있구요. 그런데 난―”


“와, 존!” 다시금 멜의 얼굴이, 존을 껴안을 것처럼 빛났다. “짱이다 ― 사람을 치유하는 거군요! 저기 우리 언니 미네르바도 그래요.”


아주 잠시간, 존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이 그런 미사여구로 꾸며질 수 없다는 냉소적인 생각으로 번뇌해야 했다. 전시상황에서의 응급 수술과, 아무리 몸부림 쳐봐도 결국엔 무력하게 두 손 아래 전우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란, 아마 멜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닥 고결한 직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생각을 갈무리하고, 멜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사람들 사이, 옆의 세 사람의 열띤 토론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자그마한 검은머리 여자를 바라봤다.


“그래요?” 존은 동료 의료인과 좀 더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전망에 심히 안도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위험한 대화(예를 들어 섬뜩한 열대 기생충 감염 증상에 대한 심층적인 토론 같은)보다야 차라리 자신과 셜록의 존재하지도 않는 로맨스에 대해 칭찬을 받는 쪽이 무한히 더 나으니 말이다. “어느 쪽 전문의랍니까?”


“완전 짱이에요. 언니는 최근에 드물지만, 암세포에 치명적인 형태의 아주 중요한 유전 형질을 알아내서 분리해낸 참이에요. 우리 언니는 아주 똑똑하죠.” 멜이 자랑스럽게 말을 끝마쳤다.


“에, 음, 그런 것 같네요.” 웅얼웅얼, 대답하는 존이다. 군의관으로 의사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라도 이 가문의 의사와 비교하면 지루하고 특별할 일 없는 인생이 될 것 같다.


멜이 존의 빈 손을 들어다가 양 손으로 꼭 잡고, 진지하게 눈을 반짝였다. 


“우리 분명 좋은 친구가 될 거에요. 특히 그 못된 세바스찬 자식보다 당신이 훨씬훨씬 나으니까.”


“에, 그게 말이에요.” 존이 재빨리 화재를 붙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셜록이… 한 번도 그런 얘기 꺼낸 적 없어서요.”


“으, 그 개자식. 셜록한테 꼭 물어봐요. 개인적으로, 셜록이 왜 그런 놈과 사귀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하지만―”


“존.” 다시 나타난 마이크로프트가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유감이지만 충격적인 옷맵시를 제안하는 멜과는 이만 이야기를 정리해야겠습니다.”


모욕에도 불구하고 멜은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다. 존은 이 홈메이드 목도리에 기겁한 사람이 자신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너무 안도한 기색을 겉으로 내비치치 않으려고 의식해야 했다. 그는 일어나서,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이는 목소리를 대략 갈무리해 품에 들었다.


“식사 전에 당신을 에반더에게 소개하지 못하면, 뒷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할 겁니다.”


멜은 난데없이 기침을 한바탕 하더니, 즐거움이 가득한 눈으로 존에게 인사했다. “에반더에게 물어봐요. 신나서 말해줄걸요. 저보다 말솜씨도 더 좋고. 잘 가요!”


작게 손을 흔드는 멜을 뒤로 하고, 마이크로프트가 늘 그렇듯 날카롭고 공손한 태도로 존에게 몸을 돌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니콜라이 숙부와 루크레티아 숙모님에게 나눌 얘기가 있어서.” 그가 연회장 한 켠에 서 있는 거만한 자세의 훤칠한 남자와, 완벽한 히치콕 블론드의[각주:14] 여자를 은밀히 가리킨다. 셜록이 그 커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 보인다. “러시아 쪽 친척이지요. 자주는 못 뵙니다. 나는 늘 저 분들이 KGB[각주:15]에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어요. 정직하게 말하자면,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니.”


그 말이 마이크로프트 홈즈에게서 나오다니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온 런던의 빈 주차장을 누비고 다니며 은밀한 티 파티를 주선하는 공작의 제왕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와버렸다.


“뭐라구요?” ‘당신’이 저 사람들더러 이상하다고요?! ― 까지 말이 나오기 전에 존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트는 뒷생각까지 모두 들었는지 점잖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간단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날 믿어요, 존. 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되돌아 길을 나서서야, 참았던 미소가 존의 얼굴에 슬며시 퍼졌다. 저 반듯한 외양 너머에도, 눈 깜짝할 사이에 왔다 가긴 하지만 유머 감각이란 게 있는 것이다.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정말로 자신을 좋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우뚝 멈춰섰다.


“에반더, 나돌아다닐 필요 없이 내가 존을 데리고 왔다. 존, 사촌 에반더입니다.”


마이크로프트가 옆으로 비켜서자 에반더의 모습이 보였다. 존은 지금이라도 셔츠 깃을 빳빳이 세워 멀쑥하게 보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에반더의 키는 존과 비슷했으나, (존마저도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이너 라벨의) 목탄 빛깔의 수트에서 보이는 세심한 품격으로 둘러싸여 극히 자연스러운 우아함이 흘러넘쳤다. 그가 손을 굳게 맞잡고 미소를 지었고, 존은 속으로 이를 악문 채 최대한 공손하게 악수했다.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신장과 몸집 그리고 저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이, 모리어티와 너무도 흡사하다며 외치고 있었기에.


바보같이 왜 이래, 존은 뒷덜미에 곤두선 머리칼을 느끼며 속으로 꾸짖었다. 디자이너 수트 입은 키 작은 남자를 만날 때마다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없는 거라고.


그러나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친절한 에반더의 미소가 그 생각을 지워내는 데 도움이 됐다. 오히려 에반더는, 평생 다른 존재에게 (GQ[각주:16]의 지난 8월호 표지 모델이라든지…를 제외한다면) 해를 끼칠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해본 적이 없어 보였다.


“이럴수가.” 짐짓 고통스러운 목소리의 허스키 보이스가 흘러나온다. “머스터드 옐로우? 이 컬러에? 세상에, 너무 소름끼친다. 누가 입혀줬대, 당장 잘라버려, 마이크로프트.” 그의 졸려보이는 눈매가 언뜻 날카롭게 존에게로 고정되는 바람에 존은 하마터면 움찔할 뻔 했다. “이번엔 당신, 좀처럼 시선이 가는 컬러가 없네요. 뭘 포인트로 잡았는지는 알겠는데, 푸른색이나 녹색에 더 잘 어울리겠어. 지금 입은 무미건조한 베이지색 셔츠는 꽝이구요, 꽝.”


“참 고맙네요.” 별로 불쾌하지 않은 목소리를 내는 존이다. 고맙게도 셜록과 근 일 년간 같이 지낸 덕분에 이런 건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에요.” 에반더는 달래듯 한 손을 존의 어깨에 올리고, “내 말은… 당신을 봐요. 자기 자신을 충분히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잖아요. 뒤돌아볼래요?” 성마르게 손가락을 휙휙 돌리는 바람에 존은 자신이 지금 대체 뭘 하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순순히 돌고 있었다. 그리고 (홈즈 가문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명령을 복종하게 만드는 유전자라도 있는 걸까 의심하며) 몸을 반쯤 돌렸을 때, 에반더의 손이 재빨리 존의 재킷 뒷자락을 홱 들추고는 “오, 예스.”하며 감탄사를 내는 것이다.


“이봐요!” 질겁해 홱 뒤도는 존이다.


“오, 존.” 이 남자, 염치도 없는 작자인 게 분명하다. 매너손을 모르는 것 또한 ― 바짝 다가와 깃을 정리해 주며 말을 잇는 에반더의 코롱 향까지 느껴졌으니. “쇼핑갈 때 꼭 날 대동해서 갈 필요가 있겠어요, 지금 입고 있는 걸로 엉덩이를 가려버리다니 이건 범죄잖아.”[각주:17]


“저기요.” 존은 탈의실 안에서 추행을 당한다든지, 소름끼치게 노출이 많은 옷을 강제로 착의하게 된다든지 하는 장면들로 온통 머릿속이 심란해졌으므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제안은 정말 고맙지만, 난 그다지―”


“날 믿어요.” 그는 웃으며, 시야를 분명히 하려는 건지 금갈색 머리칼을 이마에서 거둬낸다. 그의 머리는 ‘막 잠에서 깬 듯’ 예술적으로 흐트러졌는데, 안 봐도 거울 앞에서 최소 15분은 매만졌을 거라고 존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과도한 걸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매력을 닦아서 끄집어내는 거지. 무심한 듯한 우아함… 제임스 본드처럼.”


“어…”


“스카우트의 명예를 걸고, 손 간수를 하겠노라고 맹세하지요.” 손가락 셋을 펴서 쾌활하게 거수경례를 올려붙인 에반더가 덧붙였다. “더구나, 안 그랬다간 셜록이 내 두 팔을 부러트려버릴 테기도 하고. 물론 당신이 직접 그러지 않았을 때 얘기지만― 당신, 전직 군인이라면서요.”


에반더의 미소가 어딘지 스리슬쩍 음탕하게 바뀌는지라, 존은 다급히 다른 주제를 꺼내들었다. “셜록 얘기를 해보죠. 방금 멜에게 물어봤었는데―”


“아하. 어쩐지.” 존의 팔에 감겨있는 목도리를 보는 에반더의 시선이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냈지만,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예상했듯 그는 눈치가 비상한 사람인 듯 했다.


존은 씩, 웃었다. “그래요, 마이크로프트도 같은 생각이더라고요. 어쨌든, 세바스찬 얘기를 막 하던 참이었는데 도중에 급히 이리 와야 해서, 멜이… 음, 당신에게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에반더의 가는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셜록이 말 안해줬어요?”


“그런 주제로는 입도 벙끗 안 했어요. 혹시 괜찮다면…” 그리 말하다가, 목소리가 점차로 줄어들었다. 야비한 짓거리라는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사랑과 전쟁, 그리고 가족 모임에선 뭐든 정당화 될 수 있는 법이다.[각주:18] 게다가 이미 에반더가 눈을 데굴 굴리며 입을 달싹거리기도 했고.


“오, 물론 전혀 문제될 거 없어요. 셜록이 가시 돋우고 비밀스럽게 굴긴 해도, 이렇다 할 만한 비밀도 아닌데다 부끄러워할 것 하나 없다고 내가 늘 말하거든요. 털어놓고 말해서, 큰 낭패에 가깝죠. 여기―” 에반더가 음료 트레이를 들고 지나가던 검은 머리의 마른 웨이터에게 신호했다. 그리곤 어느 샌가 존의 손에서 빈 잔을 빼서, 잘게 부순 얼음과 라임 조각이 잔뜩 들어간 커다란 잔으로 바꿔놓았다. 존이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켜 설탕, 라임, 몸에 좋기 그지없는 알코올의 맛을 알아보는 동안 에반더의 시선이 그 웨이터를 위아래로 훑는다. 미묘하면서도 은근하게 노골적인 눈빛이다, 그리고 반대편의 사내가 답으로 여유롭게 도발적인 미소를 보내자 이쪽에서 확실히 기쁜 기색을 보인다. 홈즈 가문 사람들 중 만찬 후에 에반더를 발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려나, 하고 존은 내심 웃었다.


웨이터가 반대편으로 사라진 후, 에반더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다시 존을 돌아다보았다. 존에겐 어쩐지 익숙한 눈빛이다. 물론 유별나게 잘 생긴 남성을 유심히 지켜보다 되돌아왔을 때의 눈빛보다야 막 레스트레이드의 문자를 받은 때의 모습을 보는 게 더 익숙하긴 하지만 말이다. 


“카이피리냐[각주:19]에요.” 한 모금 음료를 삼킨 에반더가 존에게로 고갯짓을 해보인다. “새로 나온 모히토죠. 맛이 아주 좋아요.”


“그렇네요.” 존도 매너를 아는 지성인이니, 당연히 모히토를 많이 마셔본 사람답게 행동해야 했지만 이젠 이미 늦은 모양이다. “그래서, 세바스찬이…”


에반더가 가까이 몸을 기울였고 존도 따라서 귀를 기울였다. 누가 보면 공모라도 하는 거라 생각할 테지만, 뭐. “셜록이 대학 때 일이었어요. 내 생각엔 아마 입학 첫 해 말에 만났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집으로 데려온 건 2학년 크리스마스였죠. 맙소사, 정말 끔찍한 놈이었어요. 솔직히 다들 대체 셜록이 뭘 보고 그와 만나는 건지 몰랐다니까요.” 그리고는 살짝 민망한 듯이, “모든 사촌들이 다 셜록더러 보는 눈이 없다고 놀려댔을 걸요. 그저 장난으로요, 아시죠. 그도 그럴 게, 이전에는 셜록이 남자친구든 여자친구든 사귄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거의 누구에게도 관심을 안 보였죠. 그러니 저가 맘만 먹으면 사람을 사귈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일부러 데려왔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세바스찬은 심해도 너무 심한 놈이에요. 완전히 거만하죠. 셜록의 추리를 일러 늘 ‘같잖은 속임수’라고 깔보더라니까요. 세상에, 아주 선심을 베풀어서 셜록과 같이 다녀준다는 듯이 행동했어요. 거기다 셜록의 기행을 못 참고 매번 편협하게 굴었죠. 그러니까, 완전히 객스러운 행동이잖아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구석 없는 사람이 어디있대요?”


이 저택에서? 아무도 없지.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입을 다물고 대신 진절머리 난다는 듯 한 손을 저어보이는 에반더에게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로프트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셜록더러 더 나은 선택지도 많지 않느냐고 에둘러서 암시를 주려고 했지만, 뭐, 셜록에게 조언을 주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당신도 알겠죠. 고집불통으로 거부했어요. 특히 자기 형 얘기라면 더.”


“알죠, 그거.” 아련한 기분으로 중얼대는 존을 향해, 에반더는 동료애적인 미소를 보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여하튼, 그런 식으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죠. 마이크로프트가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하고 이만 처리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내가 맞춰볼까요.” 저도 모르게 끼어들게 되는 존이다. “마이크로프트가 세바스찬과 은밀히 만나, 셜록의 행적을 보고하는 대가로 금전을 제안했고, 세바스찬이 그걸 받아들인 거겠죠.”


“맞아요.” 에반더가 놀란 기색이다. “정확해요. 어떻게 알았지?”


존은 으쓱 했다. “대충 직감이죠. 계속 해봐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마이크로프트가 맨 처음 세바스찬과 만났을 때 나눈 이야기를 녹음했어요. 그 다음 보고할 때도요. 그렇게 세바스찬의 계좌로 첫 입금을 하기까지 기다렸다가, 녹음 복사본과 세바스찬의 은행 거래 내역서를 셜록에게 보냈죠.”


아이쿠. 존의 반응을 보고, 에반더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썩 친절한 방법이 아니었죠. 하지만 다른 걸로는 셜록이 들은 체도 안 했을 걸요. 어떻게 끝이 났는지 당신도 예상이 갈겁니다. 그 날로 셜록과 세바스찬은 깨졌어요 ― 나중에 듣기론 세바스찬이 저가 셜록을 찬 것처럼 행세하고 다녔답니다. 누가 믿을 사람도 없는데 말이죠 ― 그 후로 셜록은 오랫동안 마이크로프트와 한 마디도 안 나눴어요. 벨라 숙모도 몹시 화를 내셨죠. 셜록이 세바스찬 건을 용서하기까진 몇 년이 걸렸어요. 이젠 마이크로프트와 그럭저럭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라죠.”


“뭐, 그렇군요.” 마이크로프트가 들를 때마다 베이커 가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을 떠올리며, 존은 미심쩍게 추임새를 넣었다.


“개인적으론, 셜록이 세바스찬을 정말로 좋아하긴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일부러 실험 삼아 마이크로프트를 상심시키는 것 이상으로 화나게 만들려고 그랬다 해도 놀랍지 않을― 에구,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어이, 셜록. 안녕. 오랜만이다. 존과 한창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옆으로 셜록이 나타났다. 사촌을 향해 짧게 미소를 짓지만, 입가와 어깨에 드러난 긴장을 존은 알 수 있다. 셜록이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레스트레이드가 런던으로 귀환을 요청한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셜록과 반대로) 매력 넘치고 사교적 기품이 흐르는 홈즈 가 사람들과 전혀 뜻밖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안녕, 에브.” 셜록이 부러 밝게 말했다. “중요한 얘기를 하는 중이 아니었으면 하는군. 미안한데 존과 따로 얘기를 하고 싶거든.”


“물론 아니지.” 씨익, 웃는 에반더. “네 비열한 전 애인 세바스찬에 대해 존에게 들려주고 있었는걸.”


대번에 셜록은 미소를 싹 지우고 정색했다. “하지 마.”


대부분의 셜록-유경험자 경관들이라면 그 목소리에 서리 맞은 낙엽 마냥 움츠러들었겠지만, 에반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꼿꼿이 서 있었기에 그에 대한 존의 평가가 몇 단계 상승하게 됐다. 어쩌면 20여년간 셜록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녀석의 성질머리에 감각이 무뎌진 걸 수도 있겠다.[각주:20]


“셜록, 저 사람한테 아직도 말을 안 해줬다니 믿을수가―”


“그만 해, 에브.”


“하지만 네가 수치스러워 할 이유 하나 없잖아.” 에반더는 미간을 찌푸리고 진심어린 목소리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나도 여러 사람 만나봤지만, 솔직히 지금 보면 그놈처럼 지독한―”


“닥쳐. 존, 가서 얘기 좀 하지.”


그리곤 다짜고짜 존의 손목을 붙들고 반대편으로 잡아챈다. 존은 뒤로 고개를 돌려 미안한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당신 사촌이 저지른 무례를 용서하세요.”[각주:21] 셜록이 뭐라든 전혀 동요하지 않았는지, 에반더는 윙크를 날리고 이전에 검은머리 웨이터가 간 방향으로 사라졌다.


연회장 다른 편으로 갈 때까지도 그를 잡은 셜록의 손이 풀어지지 않는다. 존은 할 수 있는 한 조심스레 말을 꺼내본다. “있잖아, 아무래도 너희 가족들이 뭔가 오해를―”


“아니.” 하고 셜록이 쏘아붙였다가, 다시 누그러뜨린다. “말하지 마, 부탁이야. 여기서는.”


“알았어.” 셜록은 원래 ‘부탁’이란 말을 하지 않기에, 지금은 존이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가기에 충분했다. 손목을 감은 셜록의 손가락이 차디찼고 움직임에도 그답지 않은 동요가 섞여 있었다. “에반더가 나더러 쇼핑할 때 부르라고 하더라.”


옆에서 셜록의 볼이 미소를 지어 당겨지는 것을 보고 존은 안도하며 아주 약간 긴장을 풀었다. “대동하고 가는 게 좋을걸. 런웨이에서 디렉터로 일하는 녀석이니. 라거펠트[각주:22]도 에반더 없인 쇼를 열지 않을 정도야.”


“있지, 너희 집이 이렇게 대가족이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어. 그것도 친절하고 착한 사람들일 줄은.”


셜록이 기쁘면서도, 살짝은 놀란 얼굴로 흘긋 돌아다보지만 대답은 평소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다. “자, 그럼. 인사 시간은 이제 끝난 것 같군. 다들 날 붙들고 네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해댔으니. 물론 친절하고 착한 사람들이지, 나도 아주 예의를 모르지는 않아.[각주:23] 아님 경미한 실수에도 나와 마이크로프트를 지하 창고에 가둬버리는 중세시대 부모라도 예상했던 거야?”


“네가 얘기해준 적이 전혀 없었으니까. 단 한 명도.”


으쓱, 하는 셜록. “만나보지 않고선 말로 표현이 어려운 사람들이지.”


“그래도 뭔가 말해줄 수도 있었잖아. 예를 들면 다들 엄청나게 부자에다 성공한 사람들이고, 어쩌면 서부 유럽을 쥐고 있을 만큼 부와 권력을 쌓았다든가. 아니면… 헉, 진짜로 그러고 있는데 아무도 모르는 걸수도…”


멘붕하는 존과는 반대로, 셜록은 웃음을 꾹 누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모습이다. “지금 엄청 크게 말하고 있다는 거 알고나 있어?” 그는 그리 물으며, 존을 끌고 와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밖으로 나가 어딘지 모를 방으로 들어갔다.







역자의 말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크리스마스 소재의 글입니다. 까칠한 셜록과는 달리 정다운 가족들이 나오는 등 재미있는 설정이 많으니 드라마 속 셜록은 잠시 잊고 심심풀이 땅콩으로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엄청난 양의 각주는 애교로 넘겨주세요^^;;





  1. TV시리즈 Thunderbirds에 나오는 Parker는 크라이튼-워드 가의 집사이자 운전사로 일한다. [본문으로]
  2. 103에서 편지를 열어보는 셜록의 말을 따라 “Obviously.”라고 대답하는 바로 그 표정!이 떠오른다:D [본문으로]
  3. Germaine Greer. 20세기 중반의 오스트레일리아 여성운동가. [본문으로]
  4. Lagavulin. 스카치 위스키 [본문으로]
  5. L’Air du Temps. 니나 리찌 향수. 모 핸드크림 향이 난다고. [본문으로]
  6. Jove. 제우스의 독수리 이름. [본문으로]
  7. 세계 2차 대전 당시 Bletchley Park가 영국군의 암호 해독 기지로 활용됐다. [본문으로]
  8. The geese that laid the golden eggs but never cackled. 처칠 수상이 일명 블레츨리 파크라 불리운 암호 해독 기지의 비밀 연구원을 두고 칭송하던 표현. [본문으로]
  9. 이게 바로 물가에 애를 보낸 엄마의 심정이랄까.... [본문으로]
  10. 켈트 전설,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 12인 중 Bedivere, Galahad, Lancelot. 각주 11에 이어서. [본문으로]
  11. Morgana. 아서왕의 이복누이. [본문으로]
  12. <a href="http://www.stopclimatechange.net" target="_blank" class="tx-link">www.stopclimatechange.net</a>의 환경보호 슬로건이 새겨진 팔찌. [본문으로]
  13. <a href="http://youtu.be/E8gmARGvPlI" target="_blank" class="tx-link">링크 : 라스트 크리스마스 뮤직비디오:)</a> [본문으로]
  14.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이상한 옷차림새와 차가운 느낌의 금발이 유명하다. [본문으로]
  15. 러시아 국가 안보 위원회. [본문으로]
  16. 남성 잡지 Gentlemen’s Quarterly. [본문으로]
  17. 그건 맞아....범죄야(??) [본문으로]
  18. all is fair in love, war, ‘사랑과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는 격언에서 family get-togethers를 하나 더 덧붙인 것. 존의 사고방식은 셜록만큼이나 톡톡 튄다:) [본문으로]
  19. Caipirinha. 럼, 라임, 설탕 등을 혼합한 칵테일(모히토). [본문으로]
  20. 셜록이 무슨 위험물질인가요;; [본문으로]
  21. 뭔가 사과하는 사람이 반대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_-;; [본문으로]
  22.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본문으로]
  23. 아, 그러세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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