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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JW]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남자 (The Man No One Liked) 3-2 본문

Sherlock_장편/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남자

[SH/JW]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남자 (The Man No One Liked) 3-2

topsecretum 기밀선녀 2012.10.15 00:41





3 : 그 남자의 사정Business and Other Transactions (2)





점심때가 되어 이번엔 숙녀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테이블에 좌석이 딱 열 네 자리 있었는데 임의로 정해진 탓인지, 또 존의 옆에 레스트레이드 경의 고모이자 반(反)여성운동가 아가사 여사가 앉게 됐다. 여사는 자신을 괴롭히려고 비가 내렸다는 것 마냥 쉼없이 불평을 해댔다. 반면 레스트레이드 부인은 오찬 후에 응접실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레스트레이드 부부는 말 그대로 선남선녀였다. 구릿빛 금발을 풍성하게 기른 부인은 여자치고 키가 멀쑥했고, 전통적 미인상에 비교하기엔 코가 약간 좀 길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걸출하게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저 사촌 ― 경의 사촌인지 부인의 사촌인지 아직도 헷갈렸지만 ― 의 이름이 아마 찰스였던 것 같다. 찰스 부인의 땅달만한 몸집은 후덕하게 불어가는 중이었음에도 미모를 아주 잃지는 않았다. 부인은 도통 입을 열지 않고 아주 가끔 말을 했는데 이 자리가 불편한 것 같다. 남편과 꼭 비슷한 여자다. 남편 역시 인상이 아주 희미한 남자로 여렸을 때 여성스럽던 얼굴이 나이가 들고 중년에 접어들면서 매력을 잃은 걸로 보인다. 존은 몇 번 부인과 이야기를 해 보려 했지만, 부인의 관심은 오직 아이들 얘기 하나뿐인데다 그마저도 몇 마디 꺼내지 않았다.


배우 던캐스터의 아내 역시 여배우라는데, 라킨이라는 이름의 제 무대에 서면 꼭 모두에게 현대식으로 제인이라 불리길 고집한단다. 외모가 예쁜 여자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을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지 아는 굉장히 명랑한 여자였다. 그녀는 점심 내내 자신이 아는 유명인 ― 나랏님을 포함해서 ― 의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옆에서 아가사 여사가, 던캐스터 부인더러 저속하지 않느냐고 존에게 소곤거렸다.


레스트레이드 부부의 딸 루이자 양은 어머니를 닮아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적갈색 머리를 한껏 부풀려 둥글게 머리 위로 틀어올린 모양은, 존이 어렸을 때 깁슨 걸 스타일[각주:1]이라고 부르던 방식이다. 제 약혼자 옆에 앉아 둘이서만 뭐라고 재밌게 웃어대느라, 레스트레이드 부인이 못마땅해 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리고 오찬의 마지막 구성원은 채도가 낮은 갈색 머리칼에 갸름한 얼굴을 한 젊은 여성이었다. 유쾌해 보이나 그다지 두드러지는 외모는 아니고, 지난밤 봤었던 것만 겨우 기억날 뿐이다. 이름이 뭐랬더라, 캐…캐서린…? 크리스티나?


“캐롤라인.”


레스트레이드 부인이 젊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날씨가 개이면, 오찬 후에 왓슨 박사님과 정원 산책이라도 하지 그러니? 계속 우중충해 있다면 저택 안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고 말이야.”


“물론이죠, 엘리스 이모. 재미있을 거에요.”


그녀는 존에게 살풋 눈웃음을 지었는데, 레스트레이드 부인이 다시 던캐스터와 얘기하려고 고개를 돌리니 몰래 입을 삐죽 내밀고 눈을 흘겼다. 그리곤 비밀이라도 나눈 것처럼 존에게 씩 웃는 것이다. 존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가 계속 내렸다. 다같이 응접실로 들어왔을 때 즈음에야 해가 살짝 나오고 바람도 덜해졌다. 레스트레이드 경과 그렌빌이 의논할 일이 있어 먼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덕분에 게임을 한다고 네 명씩 짝을 지어 모인 사람들 외에 두 명이 비게 되었는데, 게임 룰이 잘 기억나지 않아 난감함을 느끼던 차에 상황을 모면한 존이다. 그는 외따로 떨어져나와 캐롤라인 양과 소파에 앉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왓슨 박사님.”


그녀가 밝게 말을 걸었다.


“저는 캐롤라인 이스턴이에요. 엊저녁에 뵈었는데, 정찬 후에 눈길도 안 주시기에 제 인상이 그렇게 옅었나 싶었지요.”


“어, 미안합니다. 낯선 일들 투성이라… 이름이며 직위며…”


캐롤라인이 다시 한 번 씨익 웃었기 때문에, 존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창밖을 흘긋 보더니 은밀히 다가왔다.


“비가 그리 많이 오지 않으니, 약간 맞아도 괜찮으시다면 우리 여기서 나가봐요. 어떻게 하실래요?”


“그럽시다.”


기이한 매력이 있는 아가씨다. 존의 대답에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온 방에 들리도록 높아졌다.


“왓슨 박사님. 지금 우리 나가서 정원 한 바퀴 산책하고 와요.”


“캐롤라인.”


레스트레이드 부인이 한숨을 푹 쉬고 체념한 듯 말했다.


“미안해요, 박사. 잠시만. 캐롤라인, 풀이 젖어 있을테니 길 위로만 다녀라.”


“그럴게요, 엘리스 이모.”


그녀가 미소짓고 존을 문가로 이끌었다. 회랑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는 캐롤라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당연히 풀이 젖어 있겠지, 비가 왔으니. 어떤 천치라도 다 알겠네.”


캐롤라인이 언제 종을 울려놓은 모양이었다. 문 앞에서 셜록이 둘의 코트와 모자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셜록의 눈이 평소보다 몇 초 더 존에게 머물렀다가 캐롤라인에게 모자를 건네주러 거둬졌다.


존은 캐롤라인의 복장이 요즘 유행하는 폭좁은 스커트가 아니라 자신의 여동생이 그러하듯이 편안한 치마와 부츠인 것을 보고 안심했다. 짙은 푸른색 모자 역시 간단한 장식이 깔끔하게 다듬어져있을 뿐이다. 캐롤라인이 전신거울 앞에서 돌며 매무새를 정돈하는 동안, 셜록은 뒤에서 존이 외투를 입도록 거들었다. 목을 스치는 셜록의 손가락이 느껴져, 눈을 잠시 감아야 했다. 눈을 떴을 때 거울 너머로 캐롤라인의 호기심 많은 눈빛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셜록이 재빨리 숙녀에게 코트를 입히고 각각 우산을 건넸다.


“고마워요, 홈즈. 오래 안 걸릴 거예요. 돌아오면 핑크 룸에 따뜻하게 데운 술 한 잔씩 준비해 주겠어요?”


“물론입니다, 캐롤라인 아가씨.”


“갈까요, 왓슨 박사님?”


그녀가 먼저 우산을 펴들고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저택의 중심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존은 우산을 받아들면서 셜록의 손을 꼭 잡았다가 풀고 재빨리 캐롤라인을 뒤따라갔다.


“…하지만 정원과 동관이 1748년에서야 완공되었지요.”


존이 발걸음을 따라잡고 나서, 갑자기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주변을 살피더니 ― 이런 가랑비 속에 외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음에도 ― 외투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한 개피 꺼내물고 외치는 것이었다.


“휴, 살겠네. 라이터 있으시죠?”


존 역시 웃으면서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그래,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교묘하게 빠져나온 겁니까?”


“반쯤은요. 하지만 당신이랑 대화를 해보고 싶었어요. 새로운 손님이니까.”


고개를 젖힌 그녀의 입술에서 길게 연기가 올라와 우산 밑으로 모여들었다. 정원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갑자기 캐롤라인이 운을 뗐다.


“정말 잘 생겼죠?”


“미안합니다만,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하인이요. 박사님 청지기. 홈즈 말이에요.”


존은 눈을 깜박이고 입술을 핥으며 뜸을 들였다.


“일을 잘 하긴 하죠.”


그녀가 크게 웃었다.


“아, 집어 치워요. 그쪽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서.”


존은 당황한 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 무표정을 가장했다.


“오,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 제가 왜 그러겠어요? 게다가 그다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그녀가 몸을 숙여 존의 우산 밑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기 온 뒤로 한곳만 계속 지켜보느라 알았을 뿐이에요. 어젯밤에는 새 손님인 당신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한테서 눈을 못 떼는 게 보이더군요.”


존은 저 말에 부인해야 하나 싶었으나 괜히 입을 열었다가 더 오해를 살까 두려웠으므로 아무 말 않고 그저 걸었다. 돌연 그녀가 외쳤다.


“장담하는데 아마 그 사람 그 짓 환상적으로 잘 할 걸요.”


큽 하고 숨이 막히면서 존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바로 꽁초를 비벼 껐다.


“그렇게 충격받은 척 마세요. 저도 그런 건 다 알아요. 지금은 20세기라구요. 그 사람이랑 하고 싶으신 거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녀에게 뭔가 대꾸를 하려고 존이 더듬더듬 입을 뗐다.


“무슨 말씀인지 정말로 모르겠소만. 이건 우리가 나눌 만한 대화가 아닌 것… 제 말은 레스트레이드 부인…당신 이모님이…”


그녀가 킥킥댔다.


“당신 눈 좀 봐요! 접시만치 댕그래져서는, 그리고 당신…당신 얼굴 빨개졌어요! 그러니까 꽤나 귀엽네요. 왜 아직…”


존의 얼굴에 무슨 표정이 떠오른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절대 모를 것이다) 캐롤라인이 갑자기 말 뒤꽁무니를 흐리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세상에! 잤군요! 완전 잘 됐네요. 굉장했어요? 오늘도 또 할 거에요?”[각주:2]


근래 들은 것 중 최고의 희소식이라는 듯한 표정이다. 두려움과 함께 화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캐롤라인의 팔을 붙들었다.


“이봐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캐롤라인은, 다정하게 존의 팔을 떼어, 길 위로 잡아끌 뿐이다.


“정말 잘 된 일이잖아요. 저 때문에 걱정하진 않으셔도 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 있을 땐 완전히 노골노골한 표정 짓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물론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할 거고 당신이 그림만 들여다본다고 생각할 테지만요, 눈치가 비상한 사람도 있죠. 하인 중 고약한 인간들이 몇 있거든요.”


긴 한숨을 내뱉고 마는 존이다.


“당신 말이 맞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날카로운 눈을 갖고 계시다니 좀 희한하군요.”


캐롤라인이 미소지었다.


“저와 우리 자매들, 어렸을 때 그 사람에게 무지하게 빠져있었답니다. 당시 우리가 어린애였으니 그 사람도 겨우 열아홉 스물 정도밖에 안 되었겠지만요. 우스운 일이에요. 까마득하게 어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봐요. 자라서 그 사람의 나이가 되어 다시 만나니 상대방은 하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일 말예요. 뭐, 이미 소년은 아니지만. 제겐 이미 가망이 없었어요.”


잠시 그녀는 애석하게 먼 곳을 바라봤다가, 다시 존의 팔을 끌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건 그렇고, 우리 이스턴 자매들이 축복을 내릴 테니 오늘 밤에 그 사람이랑 자면서 좋은 일이 있길 바래요. 마가렛, 캐롤라인, 마리. 우리를 알고 있을 거에요. 기억력이 좋으니. 끈질기고 성가시게 굴었을 텐데 그래도 우리들에게 정말 다정하게 대해주었어요. 부엌에서 과자와 단것도 가져다주고. 우리들이 ― 음, 대부분 저였지만 ― 말썽을 부려서 방으로 쫓겨날 때면 배고프지 않게 꼭 샌드위치 같은 걸 갖고 왔었지요. 그래서 전 탑 속에 갇힌 죄인마냥 어리광 피우는 게 좋았어요. 그 사람이 절 사랑해서 음식을 몰래 밀반입하는 거라 생각하고 싶어서.
매그와 마리, 그리고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엔, 매그는 좀 나이가 있었지만 ― 그 사람이 동화 속 왕자님이라고 상상하곤 했어요. 너무 대단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탓에 저주에 걸린 거라구요. 아니면 일부러 낮은 신분으로 수행하고 있다거나요. 그래서 우리가 크면, 우리 중 한 사람―, 돌아가면서 순서를 정했답니다. 우리 중 하나를 사랑하게 될 거고, 만약 우릴 사랑할 수 없다면 왕좌도 포기하게 되는 거죠.
그 다음에 조금 더 크고 나서 우리 셋은 이렇게 상상했어요. 그는 어느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난 사람이고 그 귀족 역시 아름다운 연인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같은 신분의 여자와 결혼을 해야 했죠. 후에 어머니가 임종할 때 그에게 숨겨왔던 출생의 비밀을 밝히면서, 친부는 모질지 못한 사람이라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해요. 그런데 어느 날 귀족의 아내가 죽고 유산을 상속할 아이가 없어, 늘 마음속으로 사랑하던 아들을 찾아내지요. 그래서 커다란 저택에 살게 된 그가 우리 셋을 불러다 모두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에요. 확실히 누가 결혼하게 될 건지는 좀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지만요.”

그녀는 벤치에 다가가, 물기가 조금 서린 것도 상관 않고 그냥 앉았다. 빗방울이 점점 가늘어졌다. 존은 둘의 우산을 집어 정원수 쪽으로 턴 후 옆에 같이 앉았다.

“그 이야기, 불법이란 거 알고 있지요? 그렇지 않소?”

캐롤라인이 매섭게 휙 눈을 흘기고는,

“그런…제가 그런…철이 없다고 해서 절 무지랭이로 보시면 안되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언니 매그, 그러니까 마가렛은 당신 둘처럼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아왔지요.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다들 둘이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언니가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의 사랑을 주지 못할 거라며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 했대요. 언니는 둘이서 잘 해낼 테니까 그런 것 중요하지 않다고 했죠. 결국 자녀계획 등 얘길 하다 입장이 틀어졌는지 언니가 놓아줬어요. 그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라구요. 그는 언니에게 이게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외국으로 떠났어요, 그게 끝이었죠. 하지만 둘에게 평생 꼬리표가 따라다닐 거에요.
지금은 매그에게 약혼자가 새로 생겼어요. 그를 사랑하지도 않고, 둘이 공통점도 없지만 언니가 말하길 서로 좋아하긴 하니까 그걸로 된 거라고,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그런 건 다 상관없어질 거라고 하더군요.
언니는 지금 스물 둘이니, 얼른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엄마나 이모가 중매해준 사람과 엮여야 할 테죠. 하긴, 약혼자 그 남자도 돈이 무더기로 많은 사람이네요. 엄마랑 아빠가 사랑해서 결혼하긴 했지만, 꼴이 말이 아니었어요. 땡전 한 푼 없고 구석에 다 허물어져가는 성 한 채뿐이었으니까. 우린 돈과 결혼해야 해요. 그러면서 지켜야 할 명예까지 붙어 있지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뜻밖의 슬픈 기운에 물들어 조용히 흘러나온다.

“유감이군요.”

존은 이러한 것들에 무지했다. 그래서 말로 유감이라 하면서 정말로 심히 애석해 본 적이 없었다. 레스트레이드 경이 말한 농장에 사는 농부들은 가난하게 근근이 먹고 살아가니까. 상류층 여성들이 모임에 참석하는 것 역시 의무의 일환이고, 가끔 고된 상황이 있어도 그네들은 예쁜 옷을 입고 파티에 다니니 본인의 선택인 거라고 인식하던 거다. 캐롤라인의 말에 존은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재고하게 됐다.

짙은 색의 반짝이는 눈이 존의 표정을 빤히 들여다본다.

“뭐, 매그가 돈 때문에 결혼하게 되는 거긴 하지만, 그것도 언니가 아름다워서 쉽게 가능한 거죠. 그리고 마리도 엄청 예쁘니까 내년에 사교계에 나오면 아마 잘 해낼거에요.”


캐롤라인은 존의 얼굴을 살피며 골똘히 뭔가 생각하더니 이마를 찌푸렸다.


“당신이 여기 왜 초대받았는지 아시나요, 왓슨 박사님?”


“서류에 서명하려고요.”


“어머, 그건 아닐걸요.”


“뭐가 아니오?”


홱 일어난 그녀는 길가를 따라 마치 줄타기를 하듯이 양 손을 펼치고, 아이처럼 걷기 시작했다.


“제가 사교계에 나간 건 정말이지 재앙이 따로 없었어요. 기차에 갇혀서 억지로 끌려갔는데, 폐하[각주:3]를 알현했을 때 하마터면 눈에 들어 첩으로 잡혀갈 뻔 했죠. 그 뒤론 남자애들과 놀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밖으로 놀러 다니는 것 말이에요. 전 춤추는 것도 승마도 재밌고 극장 가는 것도 좋아요. 친구들은 하나같이 저더러 정말 잘 논다고 하죠. 그냥 여자애들이 그럴 법한 정도 이상으로 같이 놀면 재밌다구요. 약혼을 해서 더 좋은 유흥거리를 즐길 수 있을 진 몰라도, 삐죽삐죽 콧수염 달고 저한테 키스하려는 멍청이들을 선택해야 한다니 정말 끔찍하다니까요.”


캐롤라인이 그 자리에서 휙 뒤돌아 존을 바라본다.


“아마 박사님은, 저 때문에 여기 초대되셨을 거에요.”


“예? 그러니까 구혼자로서 말이오? 하지만 난 그럴만한 재산이 없는데.”


“현 시점에서 저는 방해물이니까요. 얼른 어디로, 아무한테나 시집보내 버리고 마리에게 집중하려는 게 아니겠어요? 제가 늘 모험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아마 이렇게 생각하겠죠. ‘아하, 먼 친척이 하나 있는데 멀리 타국에 다녀온 남자니까 그 애도 마음에 들어 하겠지.’ 아님, ‘결혼해서 얘를 데리고—,” 인도였나요?”


“그래요, 맞소.”


“‘인도도 도로 데려가 버리면 우리도 드디어 해방되겠지.’”


존은 잠시 우뚝 멈췄다가 다시 뒤따라갔다.


“그렇게 심할 리는 없지 않소?”


“당신은 상상도 못 하실걸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표정에 미소가 걸려 있다.


“중매결혼을 이런 식으로 하다니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거요? 그럼 난 지난밤에 당신이 그 연보라색 ― 연보라색 맞지요? ― 드레스를 입을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해야 했던 겁니까?”


캐롤라인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뇨, 그건 제 비장의 무기가 아니랍니다. 저녁때 저는 푸른색 옷을 입을 건데요, 저랑 박사님이 나란히 앉게 될 거라고 장담해요. 아마 지금도 엘리스 이모가 창밖으로 우릴 지켜보고 계실 걸요.”


“흠, 그 드레스도 매우 아름다웠소.”


“이쯤에서 제가 꼭 일러드려야겠어요. 저녁에 그 사람만 너무 보시면 안 돼요, 아셨죠? 가끔 제 쪽도 눈길을 주셔야 한답니다.”


존이 웃었다.


“미안해요, 난 결혼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운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소. 여하튼, 당신도 빠지지 않는 외모인걸.”


그 말에 캐롤라인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뭘요, 전 그저 평범한걸요. 그리고 당신 이상형이 아닌 게 더 맘이 놓여요.”


“한 대 피우겠소?”


존이 담배를 권했고 곧 두 사람의 담배 끝에 불이 지펴졌다.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전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적어도 한동안은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탐험하고 싶어요. 아마 사진작가가 되어서 수많은 잘생긴 애인들을 찍겠죠. 그러고 나서, 모든 걸 다 본 후엔 아마도 전 쉰 살이 되었을 테죠. 언제나 제 가장 좋은 친구로 지내온 사람과 결혼할거에요, 그리고 아프리카나 호주로 가서 살려구요.”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바보같다고 생각하시겠죠.”


“아뇨. 그냥 철이 덜 들었을 뿐이죠.”


“그게 더 안 좋은 것 같은데요.”


“흠, 어떤 사람은 철이 들고 자라지만, 누구는 전혀 자라지 않고 평생 바보로 살지 않소.”


“맞아요.”


그녀가 미소짓는다.


“이제 따뜻하게 한 잔 마시러 가요. 혹 그 사람이 내오면, 뽀뽀하실 때 제가 딴 데 봐드릴게요. 두 번 하셔도 돼요.”


현관에 다다를 때쯤 다시 비가 거세게 퍼붓기 시작해서 둘은 재빨리 안으로 달려들어가야 했다. 이번엔 셜록이 아니라 집사 그렉슨이 둘의 코트와 우산을 넘겨받았다. 실망한 존의 마음이 겉으로 다 드러난 게 틀림없다. 캐롤라인이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니까.






핑크 룸은 빅토리아 왕조 중기에 만들어진 가구들로 빽빽이 들어찬 작은 방이었다. 불이 미리 따뜻하게 지펴져 있어서 캐롤라인이 발받침에 주저앉아 신발을 말릴 수 있었다. 하녀가 쟁반을 들고 조용히 들어왔다가, 존이 직접 받아들면서 고맙다고 하자 얼굴이 빨개져서는 휙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온한 분위기 속에 복도를 지나는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캐롤라인이 입술에 손가락을 세우고 쉿 해보이더니 살금살금 문가로 가서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봤다. 존도 그 뒤로 다가왔다.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아이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일을 내고도 남는다는 걸 알지 않나, 그레고리.”


그렌빌 경의 목소리다.


“어디 한 번 그래 보시오.”


레스드레이드 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하지만 채권자가 여럿 있는 형편에, 당신 한마디로 런던을 쥐고 흔든다는 말은 믿기 힘드오만.”


“어쨌든 말이야.”


말을 얼버무리는 그렌빌의 어조는 의심할 여지없이 오만했음에도, 높은 목소리 때문에 비굴하게 들렸다.


“자네가 왜 이리 완강하게 구는지 모르겠어. 결국 자네에게 아주 이득이 될 텐데.”


“그래요? 도널드 찰스에게 얘기해보지 그러시오. 나는 고려해 봐야 할 아이들과 아내가 있소. 이 저택과 저택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자네 부인이라. 자네 부인에게 얘기해봐. 분명 다른 말을 할 테니까.”


복도 너머로 목소리가 잦아든 후, 캐롤라인이 문을 살짝 닫고 난롯가로 돌아왔다.


“으웩, 지독한 인간.”


“레스트레이드 경 말이오?”


존이 놀라 물었다.


“아뇨, 아니에요. 그레고리 이모부는 존경스런 분이세요. 그분이 아니라 그렌빌 경 말예요. 아주…여러가지로 불쾌한 사람이에요. 엘리스 이모도 몹시 혐오하시죠. 비록 이모와 엄마가 그렌빌 경에게서 후원을 받던 적도 있었지만요. 당시 외할아버지가… 어쨌든 이모는 경이 이모부와 사업 문제가 있다고 해서 여기 들인 것 뿐이에요. 이모에게 별다른 수입이 없는 이상은 사업 역시 결혼의 연장이랍니다.”


여성을 상품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상류층의 결혼관습에 또다시 존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우린 더 이상 가까이 관계될 필요 없으니까요. 매그랑 저랑은 꼭…”


존은 캐롤라인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도 같아서 욕지기가 나오려 한다. 나이든 남자와 원치 않는 관계를 한 젊은 여성들을 진료소에서 여럿 봤었더랬다.


“꼭 무얼 말이오, 캐롤라인?”


그가 이름만으로 부르고 있다는 걸 캐롤라인은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불 앞으로 발을 모으고 웅크린 모습은, 정원해서 볼 수 없었던 극명한 불안함이었다.


“그 남자는…그는…그 남자에게 포옹을 받거나 마차에서 내릴 때 손을 잡아줄 때면 정말 소름이 돋아요. 매그와 제가 자라고 나서, 꼭 마리에게는 그 손 닿지 못하게 하리라고 다짐했어요.”


“물론 당신 이모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렸겠지요?”


“당연하죠. 두 분도 아세요. 하지만 도리가 있나요? 두 분이 가진 모든 게 그 남자 덕분에 나온 건데.”


캐롤라인이 진저리를 쳤다.


“그 집 하녀가 되고 싶지 않다구요.”


“맙소사.”


존도 그 생각에 신음했다.


“그 자가 한 짓은 또 없소?”


“다행이도요. 그 사람에게서 거리를 두는 게 좋아요, 왓슨 박사님. 가까이 가지 마세요. 부자는 아니지만, 친구가 많답니다.”


끄덕이는 존이다. 그런 행동만으로 고발하기엔 힘들다는 걸 존도 안다. 좌절감으로 무의식중에 주먹을 꽉 쥐었다 편다.






역자의 말


"존에게 여자가 접근한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경계하며 폭풍 질투했던 제 자신을 반성해 봅니다....

그건 그렇고 셜록 왜이렇게 조금 나오나요! 손 잡는 걸로 난 만족하지 못해






  1. Gibson Girl style. <a href="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f/fb/Gibson_Girls_seaside_-cropped-_by_Charles_Dana_Gibson.jpg/800px-Gibson_Girls_seaside_-cropped-_by_Charles_Dana_Gibson.jpg" target="_blank" class="tx-link"><u>이렇게</u></a> 생긴 머리 모양. [본문으로]
  2. 이 때는 정신이 대략 멍해진다. [본문으로]
  3. 1913년 당시 조지 5세가 통치중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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