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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JW]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남자 (The Man No One Liked) 3-1 본문

Sherlock_장편/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남자

[SH/JW]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남자 (The Man No One Liked) 3-1

topsecretum 기밀선녀 2012.10.08 02:30





3 : 그 남자의 사정Business and Other Transactions (1)





 7시 반 경 존이 잠에서 깨어났다. 줄곧 꿈속에서 셜록의 따스함을 느끼다, 어느 순간 상대의 부재에 춥고 허무함이 온 몸에 파고들었다. 그는 자리에 누운 채로, 옷 입는 데 굳이 바쁜 셜록을 불러서 시킬 필요가 있을까 잠시 생각하다 결국 셜록을 다시 보고 싶다는 압도적인 일념 하나로 결론을 내리고 종을 울렸다.


 나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나봐.[각주:1] 그는 기다리는 동안 홀로 생각에 빠진다. 어찌해야 좋을지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경이롭고 근사한 느낌이었다.


 3분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셜록이 방으로 들어왔다.


 “당신 나오는 꿈을 꿨는데, 깨어보니 없어서 너무 끔찍했어요.”


 셜록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거친 비누의 향기를 맡으며 존이 웅얼거린다.


 “좀 잤어요?”


 “조금요. 하지만 당신과 있는 편이 더 좋아요.”


 셜록은 그렇게 대답하고, 잠결에 흐트러진 존의 머리칼에 얼굴을 문지르며 그 안에서 나는 새 이부자리와 냄새와, 셜록 자신 그리고 정사의 향기를 맡았다.


 “혹시 우리 시간이 좀… 시간 절약하게 내가 알아서 옷 입으면 안될까요?”


 “안 돼요, 존. 그러고 싶지만, 안 돼요. 짬을 내서 제 정찬 유니폼을 다려야 해서요. 제 옷에 모두 구김이 가 있으면 의심을 불러오기에 딱 좋을 겁니다…하지만 당신만 괜찮다면 기꺼이 무릎 꿇고 해주고 싶어요.”


 그의 목소리가 냉정을 저버리고 열성적으로 나와버리지만, 조금의 부끄러움 역시 담겼다. 존이 몸을 떼었다.


 “아니, 내게 봉사하는 건 원치 않아요. 상호적이길 원하지. 절정에 달할 때 당신 얼굴을 보는 게 너무 좋아. 정말… 천사같다는 거 알아요?”


 셜록은 살짝 상기되어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오늘 밤에도 올 테니 우리 하고 싶은 것 뭐든 할 수 있어요.”


 삐죽 내민 존의 입에 살짝 실망감이 걸렸다. 표정 변화가 다양한 얼굴이라서, 셜록은 웃어버리고는 그에게 몸을 숙여 달래듯 가볍게 입맞췄다.


 “자. 목욕 도와드릴게요.”


 그는 욕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고 수건을 내려놓았다. 존이 그 뒤로 따라왔다.


 “같이 하자고 해봐야 소용없겠지?”


 셜록이 나무라는 듯이 짐짓 엄한 시선을 던졌다.


 “목욕이나 하세요, 존. 그만 꼬드기시고요.”


 더운물 안으로 존이 들어가 자리잡고 난 후 셜록이 입을 열었다.


 “존, 그냥 알아두셨으면 하는 게 있는데… 어젯밤에 제 방으로 돌아가다 다른 사람과 마주쳤어요. 산책을 했다고 말해둔 데다 그가 뭘 눈치챌 만큼 똑똑하긴 한지 의심스럽지만, 당신에게 말씀드려야 할 성 싶어서요.”


 존이 올려다봤다.


 “고용인이에요?”


 “네, 앤더슨이라고 하인 중 하납니다. 안 그래도 얼간이인데, 남을 음해하는 질 나쁜 얼간이죠. 그래서 위험해요.”


 “부루퉁해서는 쥐 상을 한 사람 말이죠?”


 셜록은 앤더슨을 잘 모르면서도 저를 위해 그렇게 표현하는 존에게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사람이요. 될 수 있는 한 피하세요. 등 닦고 싶으세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알잖아요. 하지만 씻기고 싶으면 그렇게 해 줘요.”


 셜록은 욕조 옆에 무릎을 꿇고 스펀지에 거품을 내어 존의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흉터 쪽에서 공을 들여 닦아내며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어떻게 난 거에요? 마조우크 때와 같은 시기에 생겼습니까?”


 “아뇨, 나중에요. 그래봤자 한 달이 채 안 지났을 때였지만.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 무모해져서 내가 어떻게 되든 말든 전장으로 자주 뛰어들었죠. 그렇게 부주의했으니 감염으로 악화될 수밖에요. 곧 열이 심하게 나면서 떨고, 나중에 가서는 원인도 알 수 없는데 다리까지 절게 되더군요. 넘어질 때 등을 다친 게 분명해요. 어쨌든, 수전증 있는 군의관은 군대에 별 쓸모가 없으니 나도 곧 집으로 돌려보내졌죠.”


 “지금은 안 떨리네요.”


 존은 놀라움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몇 번 뒤집어서 살폈다.


 “정말 그렇군요. 흥미롭군.”


 그는 셜록이 비누거품 묻은 어깨 위로 스펀지의 물기를 짜내는 손길에 뒤로 등을 기대었다.


 “손이 참 예뻐요. 이렇게 고된 일을 많이 해야 하다니 정말 안타깝군요. 당신은 피아노 연주를 해야 해. 장담컨대 한 뼘에 12인치는 될 걸요.”


 “바이올린 연주할 줄 알아요.”


 존의 두 눈에 충격받은 기색이 비쳤다.


 “바이올린 연주할 줄 안다고요? 당신 여러 모로 놀라운 남자네요.”


 “전에 말씀드렸죠, 제 어머니가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고 계셨다고. 바이올린을 배우는 게…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셨어요. 물론 바이올린을 살 여유가 없어서 지금은 연습 못 해요. 배울 적에는 주인님께 하나 빌려서 썼어요. 그리고 저 라틴어와 프랑스어 할 줄 압니다.”[각주:2]


 “라틴어랑 프랑스어요? 난 둘 다 겨우 하는 정돈데― 학창시절 때 의사가 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배운 정도에요. 당신 대단하네요. 정말 대단해.”


 존의 감탄에 셜록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하인으로서의 노련함이 아닌 진짜 셜록의 재능으로 칭찬 받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저는 배우는 게 좋아요. 눈을 감고 어떻게 정보와 정보가 연결되는지, 라틴어 문법이나 현이 줄 위에서 어떤 느낌이 나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지 살펴보곤 하지요.”


 존은 물에 젖은 셜록의 손을 잡아, 그 손바닥에 입맞췄다.


 “놀라워요, 비범하고, 대단해요. 당신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는 단어들이 부족하군요.”


 “그 말도 안 되는 소릴 너무 크게 말씀하신 거 아세요?”


 존이 느긋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그만 할까요?”


 “아뇨, 그럴 거 없어요.”


 셜록은 또다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는 자신이 존과 있을 때 자주 이런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저 씻으세요. 옷과 신발 꺼내놓을게요. 면도 해드릴까요?”


 “아니, 직접 하는 게 좋아요.”


 존은 자신의 가슴 위에 셜록의 손을 올렸다가, 마지못해 놓아주었다. 


 수증기로 가득 찬 방에서 셜록이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저 사람을 사랑해선 안 돼. 난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각주:3] 절망적으로 되뇌었으나 이미 너무 늦었음을 안다. 좋지 않다. 전혀 좋지 않아.


 그는 약간 시무룩하게 존의 신발에 광을 내고 있다가 존이 수건을 두르고 나오자 깜짝 놀라, 움찔하며 벌떡 일어서 외친다.


 “존. 절 부르시지 그랬어요. 물기를 닦아드릴텐데.”


 존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안 부른 겁니다. 당신 손이 내 알몸을 문지른다고 생각하면… 으흠, 내 반응에 책임을 못 질걸요.”


 존은 셜록이 여전히 하인의 임무가 몸에 배어 자동적으로 튀어오르는 것을 알아보았다.


 셜록이 옷을 입도록 도와주고 있을 때 ― 기다란 손가락이 살갗을 쓸고, 입술이 서로 살짝 물거나 키스하며 부드럽게 스쳤다 ― 존이 물었다.


 “아침식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꾀병부리고 종일 당신이랑 있지는 못할 것 같은데.”


 “물론 당연히 안 되죠.”


 셜록이 존의 뺨에 다시 입을 맞추며 말했다.


 “대부분 남성분들은 작은 식당에서 조식을 드십니다. 숙녀분들은 일반적으로 각자 방으로 식사가 가고요.”


 “아하. 거기 있을거에요?”


 “드나들 겁니다. 서빙되는 게 아니라 뷔페 형식이라서요. 원래 매일 아침에 살펴야 할 일과 병행하느라 이중으로 바쁩니다.”


 셜록은 존이 트위드 재질의 노퍽 재킷을 입도록 도왔다.


 “이제 가봐야 해요, 존. 준비되시면 아무 때나 내려오세요. 제가…”


 “왜요?”


 존이 물기가 남은 머리를 빗질하다 뒤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마터면 속내를 말해버릴 뻔 했다.


 “제가 하려던 말은, 무어라도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금방 올게요, 시중 들러요. 제게 일을 시키시는 게 남들 시선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겁니다.”


 “알았어요.”


 존은 셜록을 하인으로서 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키스 한 번?”


 “물론이죠.”






 셜록의 존재가 없는 덕분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된 존은 아침식사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며 지난밤의 단편적인 기억들을 정리했다.


 식탁에는 레스트레이드 경과 멜번에 더불어 무슨 삼촌 격이라는 네빌 그렌빌 경, 그리고 유명한 배우이자 부부의 친구 토마스 던캐스터가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레스트레이드 귀부인의 친척도 함께. 어제 저녁 만찬에는 지역 교구 목사와 그 아내까지 왔었더랬다.


 아침식사는 조용한 아침식사 가운데 남자들은 각자 신문을 읽거나, 이따금씩 날씨나 경마 얘기와 주식에 대해 의례적인 대화를 나눴다. 지루한 이야기일 뿐이다. 덕분에 존이 굳이 신경써서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됐다.


 식사 자리에는 꽤 여러 가지가 제공되었다. 달걀, 베이컨, 연어, 양고기 볶음, 토스트 등 영국식 아침식사에 걸맞는 다양한 음식이 줄지어 있고 커피와 찻주전자, 그리고 런던의 각종 신문들이 배열되었다. 심지어 최근 경기에서 누가 우승했는지 등의 기사가 나온 이 지역 가십거리 신문도 있었다. 벽에 풍경화가 한 점 걸려 있었는데, 전문적인 식견은 없지만 존이 보기에 아마 터너[각주:4]의 작품인 듯 했다. 가까이서 감상해 봤으면 싶었으나, 화랑에라도 온 사람처럼 남의 집 장식품을 빤히 들여다보는 건 실례인 듯 했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는 얼마 못 가 흩어졌다. 그렌빌 경이 신문을 큰 소리나게 펼쳐들며 외쳤다.


 “망할 남아프리카 검둥이 같으니. 이놈이 지금 인도인들을 선동한다고 난리라는군. 보아하니 자기네 나라도 아닌데.”


 접시에 코를 박고 있던 멜번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 어디요?”


 “이 남아프리카의 망할 간디 놈 말이오. 기회를 잡아서 그 놈을 감옥에 처박아야 하는데.”


 그 때 존이 분연해 말했다. “검둥이라는 말은 매우 모욕적인 표현입니다.”


 그렌빌이 눈을 번득였다. 그는 일흔 가량의 키가 큰 남자로 금욕적인 얼굴에 매부리코가 특징이었다. 가운데로 심하게 몰린 눈이나 입가가 우울하게 쳐져 우거지상으로 새겨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잘 생긴 축에 들 수도 있었을 테다. 지난 저녁 만찬을 들 때 놀라울 정도로 젊은 저 목소리가 들렸던 것을 기억한다. 비록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숙녀분들께 제 언사가 불쾌하게 들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렌빌이 비아냥거렸다. 자신감이 없어 좀 추레해 보이는 멜번이란 남자는, 안 그래도 커다란 초록색 눈을 둥그렇게 뜨며 그렌빌에게 물었다.


 “자기 나라도 아닌데 왜 거기 있단 말입니까?”


 “왓슨 씨가 말씀해 주시면 되겠군. 검둥이들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저는 왓슨 박사입니다. 그리고 왜 간디 씨가 남아프리카에 저도 모르겠군요. 그곳 사정은 썩 잘 알지 못합니다만 인도인들이 들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존은 자신이 아는 대로 인도가 영국의 통치하에 있고 인도인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비폭력 시위를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어차피 그래 봤자 그렌빌의 편협한 시선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결국 식탁 반대편 끝에서 친척과 대화에 열중해 있던 레스트레이드 경이 나서서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자, 신사분들. 정치 얘기로 아침식사를 흐리지 맙시다. 당신의 견해는 잘 알겠소, 그렌빌 경. 그러고 보니 왓슨 박사, 최근에 인도에서 돌아왔다지. 자네 무용담이라도 해 주면 정말 즐겁겠구만. 식사 끝나고 서재에서 그 얘기를 해봄세.”


 그는 그렌빌에게 가만히 시선을 주고는 다시 원래 하던 대화로 돌아갔다. 그렌빌은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존을 쏘아보았으나,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신문을 펴들며 성이 나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다.


 “…망할 촌구석 나라에 다녀온 주제에, 빌어먹을 평민놈이…”


 뒤에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확실히 존은 그렇게 들었다. 존이 냅킨을 내려놓자 레스트레이드 경이 말을 걸었다.


 “왓슨 박사? 내 서재로 같이 와주게. 긴히 할 얘기가 있네.”


 경을 따라 복도를 건너가며 존은 서관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책으로 가득한 방 안은 자그마한 벽난로가 있는 아늑한 장소였다. 존은 서류와 책으로 난장판인 레스트레이드 경의 책상을 보고 홀로 웃었다. 군대에서 언제나 질서정연함을 요했기 때문에 습관이 들었다곤 해도, 존 역시 집에서는 진료일지며 온갖 서류들을 제대로 정리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레스트레이드가 책상 건너편에 앉아 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한 대 피우겠나?”

 그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상감 무늬가 새겨진 티크나무 상자를 내밀었지만, 존이 고개를 저어 정중히 거절했다.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 쓴 성냥을 난롯불로 던졌다.

 “왜 이 먼 데로 끌고 왔는지 궁금해 할 것 같은데, 맞나?”

 “중요한 가문 문제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희처럼 먼 분가에 무슨 일로 관련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레스트레이드의 손이 책상 위 어지러이 흩어진 종잇장들을 훑었다.

 “자네, 마크햄 남작을 기억하는가?”

 “제 아버지의 후원자이자 친구분이신 걸로만 알고 있습니다.”

 “맞네. 6개월 전에 돌아가셨어. 내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사촌으로 같이 자라셨지. 그분의 자녀들이 모두 죽어서 대신 내가 유언 집행을 맡았다네.”

 “저런, 유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만나뵈었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마 어머니께서 연락을 하지 않은 걸로 압니다.”

 레스트레이드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소식이 끊겼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분은 자네 가족에게 아주 애정이 깊어서 자네에게 따로 유산을 남기셨어.”

 존이 몇 번이고 눈을 끔벅였다. “세상에, 정말입니까?”

 “아, 그다지 많지는 않아.” 존의 놀란 반응을 오해한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연간 이백 파운드씩, 반은 자네 어머니에게, 반은 자네에게 새해부터 지급될 걸세. 어머니가 작고하시면 그 유산 반이 누이와, 가족이 있으면 그들에게도 돌아가네. 자네 진료소를 번성시키는 데 보탬을 하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말이야, 실제로 그런 조건이 붙은 건 아니니 자네 원하는 데 쓰면 돼.”

 “이백 파운드라고요? 이건…말이 제대로 안 나옵니다. 정말 너그러운 분이시군요. 그 분을 마지막으로 뵌 게 막 대학으로 떠나기 전 열일곱일 적이었을 겁니다.”

 존은 마크햄 남작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되돌려보니 혈육간에 닮은 점이 보인다. 레스트레이드 경과 같이 남작도 크고 떡 벌어진 어깨에 은회색으로 세어가기 시작하는 검은 머리와 부드러운 검은 눈을 한 남자였다. 남작은 존의 아버지보다도 몇 인치는 더 큰 사나이였지만 존의 기억 속엔 다정한 눈빛과 유쾌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그는 언제나 시간을 내 존과 해리엇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레스트레이드 경은 그와 비슷한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속 책상 위를 뒤적였다. “서류 몇 장에 사인만 하면 돼…망할, 바로 이 위에 있었는데… 아, 여기 있구만. 그런 다음에 내 거래 은행사와 얘기해서 권리를 넘겨주겠네.”

 서류를 받아든 존이 쭉 표준 문안을 훑는다. 모두 문제 없어 보인다. 레스트레이드가 물었다.

 “자네 변호인을 통해 확인할 텐가? 그래도 괜찮네. 그렇다면 나중에 런던에서 해결 보면 되겠지. 크리스마스 즈음 해서 쇼핑도 할 겸 우리 장녀 집에 올라갈 거거든.”

 존은 그래야 하나 생각을 해봤지만, 이 이상 레스트레이드 경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서명하겠습니다.”

 그는 속으로 조소했다. 명성이니 작위니 하는 게 다 쓰레기같은 허식이라고 생각하면서 경에게 괜히 피해를 줄까봐 서두르는 꼴이라니, 다음엔 무릎꿇고 절이라도 해야 할 차례인가.

 “아, 좋아. 그러게.”

 레스트레이드 경이 책상 위를 대충 치워 공간을 낸 후 존에게 만년필을 건네주었다. 그는 존에게서 다시 문서를 돌려받은 다음, 돋보기를 끼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복사본에 서명했다.

 “그리고 여기 자네 사본일세. 자, 이제 됐구만.”

 경은 두 개피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렌빌 경의 무례를 용서하게. 좀…고집이 있는 양반이거든. 그건 그렇고, 이 저택에서 지낼 만 한가?”

 이렇게 간단한 서류 처리일 뿐이라면, 런던에 올라와서 자신을 부르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존은 왜 이곳까지 초대를 받아 일주일을 머물러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신경써주신 덕분에 아주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 이 멋진 저택에 깊은 역사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래. 그런데 그런 것은 우리 아내가 더 잘 알지. 아내에게 한 번 물어보게. 신나서 여기저기 볼만한 거리들을 소개해 줄거야. 회랑에 꽤 괜찮은 그림들이 몇 점 있거든. 자, 부족한 것은 없고?”

 존은 꿀꺽 침을 삼키고 입술을 핥았다.

 “예, 그 청년이…제 수발을 드는 사람이 아주 완벽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슬쩍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좋아, 그래… 홈즈였나?”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경은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을 달싹였으나, 그만 두고 다른 것을 물었다.

 “자네 인도에 있었다지?”

 “예. 약 일 년 전에 귀국했습니다. 그 전에는 아프가니스탄에 있었습니다.”

 “흠…그것 참 이상하군. 내가 들은 것과는 좀 다른데.”

 “예, 그러실 수 있겠지요.”

 둘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놈도 인도에 갔는데, 아예 거기 눌러앉더니 무역 일을 해서 지금 꽤나 잘 살고 있어. 나라면 못해먹었겠지. 더럽게 더우니까.”

 존이 웃었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저도 북방에 있어서 최악의 날씨는 피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제 진료소며, 여러가지로 그리운 곳이지요.”

 레스트레이드 경도 웃다가, 잠시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지난 저녁 만찬에서 발칸 반도 이야기를 했었지. 자네는 우리가 개입해야 할 일이라고 보는가?”

 존은 잠시 생각해보고 대답했다. “솔직한 말씀으로 저도 걱정을 했습니다. 영국이 그 영토를 점령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허술한 조약이 결국 또다른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법입니다. 그 일로 전 세계인의 분노를 살 듯 합니다. 기술, 산업적으로도 말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깨달을 자유를 주는 것이지요. 러시아 역시 1905년에 그런 격변을 겪었고…”

 존의 말이 중간에 흐지부지 끊겼다. 개인적으로 존은 개혁을 찬성하지만, 한편 변화라는 것은 레스트레이드나 그렌빌 같은 자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렌빌의 인종차별주의를 경멸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순 있다. 저런 사람들에게는 개혁으로 인해 평생 알고 있던 삶을 부정당하게 되는 일이니까.

 “아마 앞으로 몇 년간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많은 것이 변하게 될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한 중립적인 태도로 말을 마쳤다. 레스트레이드 경이 존의 생각을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 생각도 그렇네.”

 괘종시계가 정각을 알렸다. 레스트레이드는 마지못해 편안한 분위기를 깨고 불쑥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거듭 논의해도 모자라지 않지. 자네에게 조그만 농장을 보여주려고 했었는데 말이야. 몇 군데 막 수리를 마친 터라 위생과 주거 환경같은 것에 대해 자네에게 자문을 구하려고 했거든. 오후나 내일쯤 돼서 날이 개면 기회가 있겠지.”

 “저도 기대되는군요.”

 “좋아, 그래. 음, 이제 읽어봐야 할 서신이 있으니 자네도 이만 볼 일 보게. 오찬은 한 시에 있을 거라네. 부담갖지 말고 둘러봐. 서관에 자네가 관심 있을만한 죽이는 책들이 있어. 집처럼 편안히 지내게.”

 존은 이 저택이 서리에 있는 어머니의 집이나 런던 자택과는 하나도 닮은 곳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미소를 지었다.

 “서관에 책을 구경하러 가야겠군요.”

 “부디 그러게.”

 “감사합니다.”

 그는 일어나서 나가다가, 깜빡할 뻔 했던 서류를 챙겨 방을 나섰다.





 셜록은 검은색 팔토시와 흰 장갑을 끼고 기다란 하인용 테이블에 앉아 은식기를 닦고 있었다. 그다지 즐거운 아침시간은 아니다. 주체하지 못하고 내내 존을 — 그 몸의 열기와 살갗의 맛을 — 떠올리느라 산만해져서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심은 위험한 일이다. 식사 시중을 드는 하녀 몰리가 놀림조로 말을 걸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내가 홈즈 씨를 잘 몰랐으면 아마 연애라도 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걸요. 계속 허공만 멍하니 보고 있는걸! 이 집 하녀 중 하나는 아니겠죠, 그죠?”

 그렇게 희망하는 게 몰리의 모습에서 다 드러난다. 셜록 역시 몰리가 자신에게 좀 반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 사실을 이용한 적도 있었다.

 정신이 팔려 있던 탓에 셜록은 원래 닦아야 할 것이 아닌 엉뚱한 접시들을 꺼내왔고, 그것을 본 그렉슨이 바로 나무랐다.

 “홈즈 군! 오늘따라 자네답지 않아. 자네를 질책할 일이 없게 해 주게. 별도로 시중드는 일이 고된 건가?”

 “아닙니다. 제가…지시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심지어는 터너 부인까지 혀를 차며, 혹 어디가 안좋다거나 열이 나지 않는지 물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앤더슨이 나타났다.

 유감스럽게도 몰리가 하던 말을 들어버린 앤더슨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 심술맞은 머릿속에서 새벽에 밖에서 마주친 일과 현재 흐트러진 셜록의 행동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끼워맞추려고 뇌를 굴리고 있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연애 사업이라도 벌이셨나?”

 그는 오후에 내갈 음료를 가지러 저장고로 향하다 말고 히죽이면서 어슬렁어슬렁 부엌을 맴돌았다.

 “새벽 댓바람부터 정원에 나돌아다닌 이유가 바로 그래서였군. 어떤 여자야? 어디, 시내에서 술집 작부를 하나 꼬셨나?”

 “내 생각에 술 취하고 지저분한 여자는 네 전문 분야인 것 같은데, 앤더슨. 특히 그중에서도 돈을 지불받으려는 여자는 말이야.”

 앤더슨을 도발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리고 잠시나마 존을 잊을 수 있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성이 난 앤더슨이 무어라 외치려다가, 금세 물러났다.

 “얼마 안 가서 곧 찾아내게 돼 있어, 그럼 너도 좋은 꼴은 못 볼 걸. 나도 다 수가 있다고.”

 으스스한 목소리로 아는 체를 하지만 결국 유치하게 들릴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서 눈을 번쩍인다.

 “아니지…맞아, 그럴 리가 없어. 그럼― 위층 마나님 중 하나인가?”

 셜록이 인상을 찌푸렸다.

 “입조심해, 앤더슨. 그렉슨 씨나 터너 부인이 네가 경의 가족과 손님들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었다간… 하긴, 나도 네가 잘리든 말든 관심 없으니, 마음대로 해.”

 셜록은 앤더슨이 진실을 알아낸다 해도 상관없었으나, 앤더슨 역시 아랑곳 않고 말했다.

 “보자, 현재 누가 위층에 있더라. 그 여배우? 런던에서 한참 뒷말이 많았다던데. 설마 찰스 부인? 우웩, 홈즈! 아무리 남편이 비리비리하다지만 그 여자 좀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잠깐, 그 되잖은 조카딸은 아니겠지?”

 셜록이 눈을 들어 앤더슨을 노려봤다.

 “오호라! 어쩐지 네가 그 여자와 자매들한테 좀 지나칠 정도로 잘 해준다 싶었다니까.”

 “앤더슨.”

 셜록의 낮은 목소리가 위협하듯 쏘아붙인다.

 “내가 닥치게 만들기 전에 당장 그만해.”

 그러나 앤더슨은 신이 나 더 지껄일 뿐이다.

 “그 전에 말이야. 이런 얘기 아나 모르겠군. 소문에 의하면 우리 안주인이란 여자가…뭐, 말하자면―”

 “안주인께서 무엇이 어쩌신지 들어나 볼까?”

 그렉슨의 목소리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 와인 하나 옮겨담는 것을 아직도 못 마쳤단 말인가? 저택이 손님으로 만원인 상태라네. 자네 둘이 대립하느라 일을 소홀히 하는 걸 그냥 봐줄 수는 없단 말이야.”

 “시정하겠습니다, 그렉슨 씨.”

 뚱하게 대답하는 앤더슨이지만 와인 창고로 가기 전에 재차 셜록을 한 번 쏘아봤다.

 셜록은 다시 접시를 닦으며, 앤더슨이 마지막에 비밀스럽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궁리해본다.





저자 주석 (역자가 번역하며 추가한 내용이 부분 있습니다.)


Rred_chapel님의 조언에 따라 작품 내 정치적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1912년,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포함한 유럽의 소규모 국가들 사이에 <제 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터키는 영향력있는 타국(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 중개자로서 평화를 요청하고, 그 결과 1913년 5월 런던에서 강화 조약을 맺게 됩니다. 한 달 후 <제 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고, 이번엔 러시아 제국이 불가리아와 함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남아프리카 내 소수 인도인들에 대한 인권 보호를 위해 인종차별 비폭력 시위를 벌여 체포된 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간디가 그 지역 무슬림들을 비하하면서 “검둥이”란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아프리카는 이후로 간디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하고 있습니다.


*


역자의 말 + 주석


벌써부터 신혼 분위기 내주시는 두 분들 외에도, 이야기가 조금씩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번 편에서 실제 1913년 유럽의 배경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중간에 레스트레이드와 존의 대화에 대해 더 원활한 이해를 원하시면 발칸 전쟁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읽어보셔요. 물론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까 그냥 가볍게 넘어가셔도 됩니다:D


레스트레이드, 그렌빌, 마크햄 등 등장인물의 호칭에 대해 잠시 짚어보자면,

레스트레이드는 "Lord"로 조상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세습받은 경우고

그렌빌은 "Sir", 기사 작위를 부여받아 갖추어지는 칭호며

마크햄은 남작이므로 "Baron"입니다. (영국에서는 남작을 Lord라고 하지만 아마 세습작인 레스트레이드와의 구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튼 시대물이다 보니 위키를 뒤져서 주석을 조금 달았는데요, 중요한 내용이 아니고 깨알같은 재미를 위한 디테일이니까 그저 편하게 감상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 그렇지!!! 앗....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본문으로]
  2. 묻지도 않았지만, 존에게 자랑하고 싶었어! :D [본문으로]
  3. 와이낫? [본문으로]
  4. <a href="http://en.wikipedia.org/wiki/J._M._W._Turner" target="_blank" class="tx-link">윌리엄 터너.</a>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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