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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H] 너와 나 사이 (The Sum of Us) - 하 (完) 본문

Sherlock_중편/시리즈

[JW/SH] 너와 나 사이 (The Sum of Us) - 하 (完)

topsecretum 기밀선녀 2012.12.23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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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때라면 택시나 지하철을 타고 갈 법도 하련만,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짜증나리만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독일 관광객들을 피해 성큼성큼 걷다 보니 벌써 집까지 반쯤 와 있었다. 그래서 이대로 계속 가기로 한다. 걷는 동안 런던의 공기는 점점 어두워지고 부쩍 빗방울이 굵어졌다. 221B의 현관문을 열었을 때쯤엔 깃 안쪽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다.


계단을 반쯤 올라서는데 웬 냄새가 얼굴로 훅 끼친다.


유기물과 화학물의 조합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그 기저에는 살갗이 타는 냄새가 강렬했다. 급히 뛰쳐올라가 주방으로 들어서자, 식탁 위에 도대체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반쯤 탄 채 올려진 것을 발견한다. 적어도 식탁 위에 비닐을 먼저 깔아둘 만큼은 셜록에게 주변머리가 있었다만, 온 집안에서는 마치 변압기와 코뿔소가 맞짱을 뜨다가 둘 다 같이 새까맣게 타선 식탁 위에 쪼그라든 듯한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거야??”


“실험.” 셜록이 존의 랩탑 위로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대답한다.


“뭐…뭐?! 이게 다 뭐야?!” 눈앞의 괴상한 물체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려다, 셜록의 날카로운 고함에 몸이 붙들린다.


“그냥 만지지 마! 장갑 껴야 돼.”


“뭐?! 어떻게 눈을 떼면 5분도 제대로 가만히 있질 않는 거야?!” 존의 새된 비명에,


올려다본 셜록이 멍하니 눈썹을 찌푸렸다. “5분? 그 정도 밖에 안됐었나?”


그랬겠지. 당연히 내가 몇 시간 나가 있었어도 알지도 못했을 거고, 더 일찍 돌아왔다 해도 당장 신경써서 알아차렸을 리가 있나. 그게 너인걸.


“대체 뭘 하는 거야? 웬 난장판이냐고??”


“동물 섬유 조직에 열과 화학물의 조합을 가했을 때 생기는 반응에 대한 실험이야, 존. 사건과 관련해서.”


“그럼 이제 치우지 그래?!”


“아직 안 끝났어.”


존의 인내심이 거기서 바닥나고 말았다.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집어들고 ― 낮에 자신이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책이었다 ― 거실로 내던졌다. 벽에 맞아 튀어나간 책이 카펫 위로 추욱 늘어진다. 셜록이 움찔 하며 깜짝 놀라 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봤다.


“언제나 넌 이런 식이야!” 존의 고함이 터져나온다. “모두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책임은 전혀 안 진다고! 사람 사는 데 온갖 영향은 다 싸질러놓으면서 하나도 몰라! 집에서 온통 동물원 쓰레기 냄새가 나잖아, 그걸 알기나 하는 거야? 내가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도대체 알기나 하냐고!!” 그래, 사실 지금껏 겹친 스트레스 무더기를 여기서 화풀이하고 있는 거다. 존도 괴로울 정도로 그걸 잘 안다. 하지만 살짝은 대상이 잘못된 분노가 그 생각을 온통 뒤덮었다.


“내가 다 치우면 되잖아?” 셜록이 그렇게 찔러보지만 그걸로 풀릴 화가 아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셜록! 뭔가 저지르기 전에 생각을 하란 말이야, 생각을! 가끔은 생각도 좀 해봐, 제발.”


그러자 어쩐지 셜록은 기분이 팍 상한 표정이다. 애써 침착을 끌어모은다. 이건 터무니없는 짓이야. 그러면서도 잠깐의 침묵동안 세상 모든 걸 다 저주하고 싶은 걸 어쩔 수 없다.


“집어쳐, 다 필요 없어. 됐으니까 나 혼자 내버려 둬.” 넋두리처럼 말하곤 홱 돌아, 난장판이 된 주방을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잠잘 때 입는 티셔츠를 사납게 잡아당겨 억지로 입은 후 씩씩거리며 셜록의 침대에 파고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생각해보니 ‘씩씩대며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행위’의 목적지가 여기가 아니라 본인의 방이었으면 더 설득력 있었을 법 하다. 저 위에 있는 자신의 방 침대엔 근래 들어 늘 그랬듯 안 써서 먼지가 내려앉아 있을 거다. 이제 와서 거기로 올라가 잔다? 속이 더 뒤집힌다. 그래서 그냥 존은 여기 누운 채 반항적으로 뒤척였다.


한 30분쯤 뒤 셜록이 어둠 속에 조용히 다가와 침대로 들어왔다. 둘 사이의 적막이 고통스러울 정도라, 불안한 숨소리마저 다 들릴 것 같았다. 이불 밑에서 주먹을 꼭 쥔다.


“나 때문에 화났구나.” 여전히 어두운 가운데 입을 여는 셜록의 말은, 하나하나 신중하게 생각해낸 기색이다.


“대단하네. 그런 걸 다 알고.” 중얼중얼 존이 대답한다.


“다 치웠어. 이틀 정도 냄새는 남겠지만. 미안해.”


존은 등을 대고 돌아누워 천장을 쏘아봤다. “아니, 안 미안하잖아. 진심도 아니면서 사과하지 마.”


다시 침묵. 눈을 꾹 감고 잠이 오길 빌었지만, 이대로 잘 수 있을 리 없다. 마치 개가 제 꼬리를 좇아 돌고 도는 것처럼 분노와 깊이를 모르는 무력감이 연속적으로 존을 괴롭힌다. 아까 셜록에게 마구 화를 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쿡쿡 아렸지만 무시해버리기로 했다. 자연스레 사그라들 정도의 분노가 아니라 이리 한번에 온통 쏟아낼 감정적 그것이었는지 솔직히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얘기해줘.” 셜록이 입을 열었다. 명령조로 나왔을 말이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존의 심기를 더 건드리지 않기 위해 미묘하게 숨죽인 기색이 보인다.


“미치겠네.” 존이 대답했다. “우리 주방을 위험 폐기물 처리장으로 만들었잖아, 그게 이유 중 하나야. 봐, 이거, 너 때문에 이러는 것만은 아니야.” 존은 중얼중얼 한숨을 내뱉고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오늘 오래 알고 지낸 럭비 친구들 몇몇과 만났는데 우리 얘길 했어. 반응이… 괜찮지 않더라고.”


“아.” 셜록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걸 나한테 풀어낸 거군.”


“그래, 그랬지. 내가 바보라니까. 하지만 주방 건도 있으니 정당하다고 봐.”


“유감이야.”


“진심 아닌 거 안다니까. 맨날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단 한 번도 사과하는 법이 없으면서.”


“주방 말고. 네 친구들.”


“아. 그래. 나도.”


“너한테 욕했어?”


“이런, 아니, 아니 아니야. 갑자기 뭐… 호모포비아로 변했다던가 그런 게 아니고. 받아들이는 데 실감이 잘 안 나는 것 같아. 널 받아들이는 게. 내가 못 참고 소리를 질렀어.”


셜록이 가까이 몸을 맞붙이려다 말고, 뒤로 물러난다. 그 망설임이 파동처럼 선명히 느껴지는지라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짓고 있을 셜록의 강아지 눈을 보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한숨을 푹 쉬어버린다. “으이그, 이리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셜록이 호리호리한 팔로 허리를 꼭 감고 아이처럼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평소엔 나체로 잠을 자는지라 셜록이 파자마를 입고 누워있는 게 뭔가 느낌이 이상하긴 했다. 그러니까, 사람 관찰하는 걸 셜록만 하는 게 아니라니까.


“나 괜찮아. 괜찮겠지.” 셜록의 보드라운 면 셔츠에 이마를 폭 기대며 존은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도 이제나마 내 친구란 녀석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게 됐으니까.”


“아니, 괜찮은 거 아냐.” 그래, 그것도 사실이었다. 머리칼 사이로 셜록의 숨이 스며든다. 존은 정말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 따스한 존재의 한 조각만으로도 마음속에 뜨거운 감정을 지피는 데는 충분했다. 셜록의 옷깃을 손가락으로 말아쥐고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토닥이는 손길 안에 기대 잠시나마 평온을 얻어본다.


셜록의 심장 소리, 변함없이 뛰는 작은 쿵쿵 소리를 듣는 건 아직까지도 존에게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선사한다. 셜록은 정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다. 평범이라는 범주의 경계선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기에, 그냥 인간 이상이라고 보는 데에 별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혹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인간 이하라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누구든지 그러하듯이, 심장이 뛰고 이따금씩 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나 발톱이 자라면 잘라야 하는 등의 소소한 모습들이 매일매일 나타나 존을 놀랍게 해준다. 동시에, 셜록이 이토록 가까이 받아들인 사람이 나 홀로뿐이라는 지각도 따라온다. 평범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잠꼬대를 하는 자신의 옆에 자리를 내주고, 입술과 이로 하얀 피부에 복숭아처럼 붉은 자국을 낼 수 있게 손을 벌린, 셜록의 옆으로.


“우리 사귄 뒤 처음으로 싸운 거네, 이거.” 셜록이 만들어내는 가슴팍의 낮은 울림이, 존으로서는 이 세상 어디든 필요 없고 여기가 바로 내 자리라는 감상이 들게 한다.


“으음. 길게는 안 갈 모양이야.” 그 말에 셜록이 키득인다 ― 또다시 깊은 울림. 존은 이대로 품에 파고들어 다시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  셜록이 말한다.


“비위맞추는 거 알거든.”


“병신.”


“나도 사랑해.”


“알아.”


존은 미소지으며 한숨을 내쉰 뒤, 잇새로 셜록의 셔츠를 살짝 물었다. 기분이 나아졌다.






다음날 아침, 모두를 대표해 엘리엇이 문자를 보냈다.


어젯밤 일 미안해. 상처줄 의도는 없었어. ― 엘리엇


그래 알아. 기분 개같긴 하지만. ― J


케브 성격 알지, 욱 하는 거. 그 자식 뭐라고 하든 난 동의 안해. ― 엘리엇


나도 케브 성격이 그런 거 알아. 미안한데, 더 이상 그 얘기 안 하려고. 내 삶에서 신경 쓸 가치도 없으니. ― J


우리 우정 아직 변함없는 거지? 난 네가 여자와 자든 남자와 자든 상관 안하니까. ― 엘리엇


그래, 변함없어. ― J

고마워. ― J


두말하면 잔소리지. 조니. 네 남자친구에게 안부 전해줘. ― 엘리엇


그렇게 했다. 셜록이 살짝 당황했다.






새로 발견한 자신의 성 정체성, 즉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 스트레이트’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숨기지 않기로 결심한 지 3주 하고도 나흘이 지난 후, 존은 불가피한 일을 더 이상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집주인에게, 애인의 형에게, 친구들에게 알리는 것 역시 수월하진 않지만, 대상이 가족이라면 완전히 다른 경우다. 무서울 정도로 비판적으로 변해 물어뜯을 준비를 할 테니. 평생을 알아온 사람들이다. 반대, 실망, 모든 것에 멋대로 거부할거라는 생각이 어마어마하게 압도하고 존의 마음을 혹독하게 짓눌러서, 잠을 못 자고 한숨을 쉬며 산만하게 만들었다.


열아홉 살일 적 해리가 커밍아웃을 했으니 이번에도 수월했으면 좋으련만, 실로는 그렇지 못하다. 가족들이 해리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고 있으므로 부담감만 늘어갈 뿐이다. 엄마가 당시 겪은 상황으로 또다시 밀어넣을 순 없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떠올라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엄마에게 있어 누나와, 자신과, 어쩌면 셜록까지 배신자인 거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순 없다고 존의 내면이 외쳐댔다.


그래서, 해리, 그래, 해리에게 먼저 갔다. 해리네 집 앞에 참을성 있게 서서 거의 십 분간 노크를 하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놀라고, 어딘가 죄책감이 어린 표정이다. 존은 해리의 집 안이 어떤지, 해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 텅 빈 집안에 홀로 술을 마셨는지 반쯤 남은 술병과, 빈 와인잔이 싱크대 안에 숨겨져 있는 게 보였다. 살도 오르고 좋아 보였지만, 화장이 다 먹혀서 눈 밑 그늘을 겨우 가렸을 뿐이었다.


클라라가 떠난 후로 언제나 그랬듯 집이 휑했다. 간소한 소지품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는 그녀의 부재가 너무도 적나라하다. 매번 뭔가를 그을리던 향초와, 늘 소파 위에 놓여있던 커다란 코바늘 뜨개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존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와인 한 병을 새로 가져오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 말 않고 그냥 조용히 제 몫의 잔을 받아들었다.


둘은 한동안 별 영양가 없는 근황 얘기를 나눴다 ― 해리는 직장 얘기를, 존은 진료소 얘기를 하며 예전과 똑같은 레퍼토리로 어색하게 끊기곤 하는 침묵 사이를 메꾼다. 밋밋하고 지루하고, 셜록이 사절하는 딱 그러한 대화다. 20분간 존은 녀석에게 이런 사교적 의무가 적다는 데 마구 부러움을 느꼈다.


새 와인을 딴 후 두 잔을 비운 후에서야 마침내 해리가 왜 왔느냐고 물었다.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누나 집에 난데없이 왕래하는 일이 가뭄에 콩 나듯 적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할 말이 있어.” 목 안에서 꽉 메이는 말을 천천히 내뱉는다. 와인 맛이 무거워서 혀가 텁텁하다. 반대편에서 해리가 두 눈썹을 위로 올린다. “셜록에 대해서.” 덧붙이지만, 여전히 너무 모호했나 보다. 한쪽 눈썹이 내려갔는데 다른 쪽은 치켜올려진 채다. “셜록이랑 나.” 말을 마치고 해리를 바라보며 깨닫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술에 진탕 취하지 않은 해리의 머리에 불이 딱 켜졌다. “오. 어머나, 세상에. 조니. 장난치는 거 아니지?”


끄덕, 빈 잔을 가슴에 갖다댄다. “신께 맹세하고 절대 아니야.”


“어머. 어머, 세상에.”


벽에 달린 시계 ― 정교한 글자에다 요란하게 꾸며진 물건이다. 해리는 헤이스팅스의 골동품 가게에서 쓸데없이 비싼 장식물을 사던 사람을 사랑한 거다 ― 에서 분침이 한 칸 옮겨가고, 존은 반대편에서 해리가 자신이 아는 남동생의 모습에 새 정보를 추가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어쩌다 그렇게 된거야?” 마침내 묻는다.


비뚜름하니 미소를 짓고는, 존은 처음으로 셜록과 자신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모두 차례대로 되짚어 보았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녀석이 실험을 한답시고 졸라대서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됐어. 그게 기구한 팔자의 시작이었지. 그냥 잠만 자는 거고, 딴 건 없었어. 뭐, 처음에는. 그게, 나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엔가, 자는 내내 옆에 그 녀석을 데리고 있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은 거야. 녀석이 잠꼬대를 하는데, 그게… 이상하게 위안이 되더라고. 그 다음 아는 거라곤 우리가 굳이 사귀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미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거야. 그래서 자아성찰이랄까, 생각을 무지하게 많이 했어. 결국 보니까, 내가 어느 샌가 셜록에게 진심으로 바보처럼 빠져버리곤 그걸 깨닫지 못했던 거더라고. 녀석한테 그렇다고 말했어. 셜록도 같은 마음이라고 해줬고. 그게 바로 몇 달 전 얘기네. 음. 이게 다야. 간단하지. 뭐 아주 간단하지만은 않지만. 전엔 이만큼 여기가 내 자리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 말이 이상한가.”[각주:1]


“아니, 말 되네.” 해리는 조용히, 전에 없던 경외감에 휩싸인 시선을 보낸다. 둘의 평생 처음으로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때가 온 거라고, 존은 깨달았다. “엄마한테 말할 거야?”


존이 몸을 움츠린다. “모르겠어. 글쎄. 안 하는 게 좋을지도. 원래 말도 잘 안 나누니까. 나도 겁쟁이처럼 구는 거 아는데, 하지만…”


“그래, 겁쟁이지. 하지만 이해해.” 한숨을 쉬며 해리가 말을 잘라냈다. “우리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를 재현할 필요는 없으니까, 응.”


“언젠간 얘기해야지.” 느릿하게 대꾸하는 존이지만, 둘 다 그게 거짓말임을 안다.


“아빤 신경 안 쓸거야.” 차라리 그런 말 덧붙이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존은 동의의 의미로 끄덕였다.


해리는 두 번째 잔을 따랐고, 존은 사양했다. “근데 이거 안 물을 수가 없네. 너 이제 게이야?”


“다들 왜 ‘이제 게이’냐고 묻는지 모르겠군.”


“무슨 뜻으로 묻는지 알잖아.”


“알아. 아냐. 진심으로 아냐. 분명 확신하는데 그 녀석한테만 그래. 내 시야가 아주 넓어지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아주 조금. 누나도 알잖아. 셜록도 나여서가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있는걸. 내가 누구고 어떤 세계에 있는지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뒤집히는 게 한 순간이더라고.”


해리는 와인을 입 안 가득 한 모금 삼키고 히죽 웃었다. “어디서 읽었는데, 쌍둥이 중 한 쪽이 동성애자면 다른 한 쪽도 게이가 될 확률이 무려 7할이래.”


“그건 일란성 쌍둥이만 해당하는 거라고 확신하는걸.”


“자잘한 건 신경쓰지 말라구. 우리를 봐, 신기하잖아. 그리고 엄마도 결국은 당신께서 그렇게 바랐던 사위가 생겼다고 받아들이게 될 걸.”


“몰라도 한참 모르네. 셜록은 이상적인 사위나 며느리가 되기엔 한참 동떨어진 인물일텐데.”


빙그레, 해리가 웃으며 와인잔을 흔들어보인다. “다 제쳐두고서라도 네 애인 꼭 만나봐야겠다. 전에도 그러고 싶었지만 이젠 필수야. 너도 정식으로 소개시켜 줘야 하는 거 알지. 우린 일단 가족이니까.”


“그래, 그래. 곧 보게 될 거야. 그렇고 말구. 실망할 준비 하고 있으라고, 사람 무안 주는 데 한가닥 하는 녀석이니.”


“너도 내 반응 보고 실망할 준비 해둬. 걔는 그저 분명한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거잖아.”


해리가 그걸 이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존은 놀라운 마음으로 해리를 바라보며, 테이블에 빈 잔을 올려놓는다.


“그럼 생각해 두는 거라도 있어?” 해리 역시 더 이상 마시지 않고 빈 잔을 옆에 놓았다.


“뭘?”


“뭐 결혼이라든가 그런 거.”


“무슨, 아니, 아냐, 아냐.” 평생 둘이 함께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아서 이러는 이유가 아니다 ― 어쩌면 언젠가 셜록이 자신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서도 ― 그게, 결혼이라는 걸로 매인다는 게 지금으로선 어딘지 바보같으니까. 어차피 그런 얘길 불쑥 꺼내봤자 셜록이 웃다 뒤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평생 둘의 관계는 비공식으로 남을 것이다.


“진짜? 쥑이는 하얀 드레스 입혀놓으면 이쁠 텐데.”[각주:2]


대답으로 머리에다 쿠션을 던져버렸다.






존은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의 삶을 거치고 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상한 표현이다. 사람 반 쪽(3분의 2나 그 외 여러 가지 유리수를 포함해)분의 몫을 다 한 적 있는지 알 수도 없건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으므로 그냥 즐기기로 했다.


존은 사랑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을 거다. 그는 런던 누구보다 제일가는 별난 집에 산다. (혹 이 도시에서 사람 흉선을 반찬통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하는 남자친구와 사는 누군가가 있다면 꼭 만나보고 싶다. 장담하는데 그 사람도 분명 유명해질걸) 아직 생각보다 많이 두렵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모두에게 그걸 알리고 싶다. 그야말로 존은 마음의 평화를 알았고 간단하게 말해,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세어보니 공평하게 균형이 맞는다. 그 정도면 살면서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손수 만든 토마토 수프에 국수를 넣어 셜록 앞에 대령했다. 전에 장 보면서 사은품으로 딸려나온 스머프 프린팅 그릇에 담아서. 셜록의 시선이 스머프에 가서 콕 박힌다. 어라, 이 녀석 스머프를 아는 건가?


“배 안 고파, 존.” 짤막하게 대답한 셜록은 도로 눈을 돌린다. 무언가 흉선에 관련된 갖가지 수치와 함께 괴발개발 날려쓴 글씨가 쓰인 연구지다. 존은 굳이 묻지 않았다. 둘의 관계에서 ‘묻지 않는다’는 걸로 얼마나 많이 차지하는지. 재미있는 일이다.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지?”


“아침 먹었어.”


“거짓말 하시네.”


“아니거든.” 아닌 거 좋아하고 있네. 출근할 때에도 계속 자는 것 밖에 못 봤지만, 이 애새끼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데 내기를 걸 용의도 있다.


“혀 내밀어봐, 확인하게.”


은근히 찔리는 표정으로, 셜록이 고분고분 혀를 내밀며 존을 올려다본다.


“이것 봐, 종일 굶었으면서.”


혀가 도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놀라움의 표정. “어떻게 그게 보여?!”


씨익. “안 보여. 네가 방금 스스로 확인사살 했는걸. 그러니까 이제 닥치고 먹어.”


셜록은 도끼눈을 해선 노려보고는, 6살 넘어선 다들 웬만하면 내지 않는 불만스런 소리를 작게 냈으나 곧 몇 번이고 입으로 수프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어찌 됐건 맛있게 만들었으니까. 냄비에 물 붓고 재료 넣어서 국물내는 요리라면 또 내가 일가견이 있지.


셜록의 반대편에 앉아서, 랩탑을 켜고 부팅되는 것을 차분히 기다렸다. 블로그에 뭐라도 업데이트해야겠지 싶다 ― 거의 일 주일간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건이 없고, 얘기할 것도 … 뭐, 아예 없지는 않은데. 다만 조금 망설여질 뿐이다. 셜록은 신경쓰지 않을 테고, 모두에게 이 소식을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알려줄 가장 빠른 방법이 될 테다.


랩탑 화면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내가 해도 돼?” 셜록이 보라는 듯이 빈 그릇을 쭉 내밀며 물어왔다.


“뭘?”


“네 블로그 업데이트.”


블로그에 글 올리고 싶어?”


“블로그에 우리 얘기를 올리고 싶은데 마땅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 거잖아. 그러니 내가 해도 되겠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우리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 이거지.” 랩탑 너머로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래, 존. 바로 그거야.” 셜록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바삐 놀려 노트에 (존이 보기에 상당히 전문적 내용인 듯한) 글을 휘갈기며 사람 흉선 모양을 놀라우리만치 정밀하게 스케치하고 있었다.


“네 블로그에 쓰지 않고 왜?”


“아무도 내 블로그 안 보잖아, 존.”


아. 그래. 그건 그렇지. “알았어.”


홱 올려다보는 셜록의 눈초리에 의구심이 가득하다. “정말?”


“그래, 진짜로. 그래도 올리기 전에 내가 확인해 볼거야, 알았지? 이상한 얘기 하면 검열이다.”


셜록은 슬며시 웃으며 어깨를 으쓱 하고, 곧바로 보던 것을 옆으로 치웠다. 그 뜻인즉슨 꽤나 진지하다는 거겠다. 그가 조용히 글을 쓰는 동안 존은 그릇을 씻기로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조리대와 스토브를 닦은 다음 주전자에 차를 우려낼 때쯤 셜록이 부른다. “존, 다 썼어. 와서 읽어볼래?” 그는 랩탑을 돌려주었고 존은 반대편에 앉아 셜록의 글을 읽고는, 말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안녕, 존 블로그에 오시는 독자 여러분. 오늘은 언제나 재밌는 얘깃거리를 들고 오는 존경스러운 왓슨 박사가 아니라 대신 바로 저, 셜록 홈즈입니다. 존에게만 유일하게, 그의 퍽 유명한 블로그에 업데이트할 거리를 제공하는 바로 그 셜록 홈즈 말입니다.


사족으로, 더욱 전문적이고 교육적인 컨텐츠를 원하시면 제 블로그인 <추리의 과학>홈페이지로 오시면 됩니다.[각주:3]


존이 제게 게시를 허락한 것은, 여러분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말이 있으나 적절한 표현을 찾는 데 곤란을 겪는 이유에서입니다. 해서 제가 조원을 자청했습니다 ― 제게도 역시 개인적인 영향이 있는 일이니까요.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 루머를 아시겠지요? 존과 제가 처음 만난 거의 그 시점부터 언제나 떠돌았던 말입니다. 오늘 저희는 그게 사실임을 밝힙니다. 정확하게 진실입니다. 줄곧 사실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사실이 맞습니다. 존과 저는 사귀는 관계는 물론 성적인 관계 역시 포함된 사이가 맞습니다.


아직 그러한 관계가 아니었을 때, 저희는 오랫동안 커플이라는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 존은 혹 자신의 애매모호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오해를 샀을지도 모름을 걱정했지만, 아닙니다. 저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랬고, 존 본인을 제외한 모두가 그걸 알았던 겁니다.


존은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매력적이고, 비범하기까지 한 인물입니다. 존에 대해서라면 무엇도 제대로 예측할 수 없지요, 정말 근사해요. 저를 끊임없이 놀랍게 해줍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겠습니다. 단조롭게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던 저의 세상에 갑자기 나타나 추측할 수 없는 내일로 만들어 준 존재가 바로 존입니다.


그를 잘 알고 또 우리 사이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을 때, 존은 제 예상을 뛰어넘어 사랑한다고 해주었습니다. 존 왓슨에게서 느끼는 이러한 감정을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본 적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동시에 굉장히 즐겁기도 합니다.


존은 저에 대해, 저와 함께하는 생활에 대해 블로그에 글을 쓰고 또 여러분은 댓글로, 제가 있어서 그의 하루하루가 즐겁고 흥미로운 모험으로 가득 찼노라고 행운아라 말하지요. 하지만 모두 틀렸습니다. 즐겁고 근사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접니다. 존 덕분입니다. 그러니 제가 행운아라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진실입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누구도, 그 무엇도 제 블로거, 저의 존 해미쉬 왓슨만큼 사랑한 존재가 없습니다. 저를 선택해 사랑으로 화답해준 그 사람으로 인해 제가 얼마나 행복한 지 여러분에게 표현할 길이 없을 따름입니다.


진심을 담아,

셜록 홈즈.





존은 제대로 앉아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셜록을 쳐다봤다. 둘의 관계로 엄청난 대서사시를 써놓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하던 일에 눈을 돌리는 녀석을. 또다시 한 번 더 읽는다.


그리고 ‘게시’를 눌렀다. 몇 초 뒤 글이 게재됐고, 그 기분을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잘 썼네, 놀랐어.” 애정을 담은 말에 셜록은 으쓱 하고 미적지근한 반응만 보인다. “네가 시적 감각마저 뛰어난 지 누가 알았겠어.”


그 말에 셜록이 팩 쏘아보지만 ― 어떻게 감히 과학적이지 않은 수식어를 갖다 붙이냐는 거겠지 ― 입가에 걸린 분위기가 살며시 호를 그리는지라, 그럭저럭 칭찬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존은 랩탑을 닫고 일어났다 ― 바로 내일 아침만 돼도 댓글이 눈덩이같이 불어 있으리라고 예상되지만, 지금은 내버려 두련다 ― 그리곤 셜록에게로 가서 어깨를 꼭 감싸고, 뒷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


“네가 만든 수프 맛있어. 더 있어?”


“방금 설거지했다구. 이제와서 배고프다고 하지 마.”


“흐음.”


존은 한숨을 쉬고, 셜록의 머리칼을 흩뜨린 다음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셜록을 위해 냉장고에 남겨둔 수프를 꺼내 불 위에 올린다.







역자의 말


오잉...끝인가요? 네 이걸로 완결입니다.

존의 마음에 한 번, 셜록의 속내에 두 번 격침하고, 이 아저씨들 나를 아주 죽이시오ㅠㅠ

매 편이 간질간질하고, 사랑스러워서 저도 마냥 부둥부둥 껴안아주고 싶은 기분으로 한 문장 한 문장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장편은 아니지만 나눠서 올리다 보니 참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또 금세 끝이네요.

이번 해를 Two Coffees 시리즈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Thank you, Lin :)

그리고 잊지 않고 찾아오시는 여러분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





  1. 미친 소리 같겠지만 모두 사실이에요. [본문으로]
  2. 누....누님! [본문으로]
  3. 끼워팔기(?)의 좋은 예 :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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