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lude

[JW/SH] 플랫메이트 죽이기 (To Sleep, Perchance to Smother Your Flatmate with a Pillow) 본문

Sherlock_중편/시리즈

[JW/SH] 플랫메이트 죽이기 (To Sleep, Perchance to Smother Your Flatmate with a Pillow)

topsecretum 기밀선녀 2012.10.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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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침, 혹은 - 플랫메이트 죽이기






“안돼. 너랑 안 자.”


“왜? 합리적이기 그지없잖아, 난 이 가설을 확인해보고 싶어. 거기다 이미 너 나랑 살고 있기도 하고.“


“너랑 , 잔, 다, 고.”


“조온.” 셜록이 칭얼거린다. 눈돌아가게 비싼 자주색 실크 가운을 입고선 갓난애마냥 존을 따라 테이블을 빙빙 도는 거다. 니킥이라도 날리고 싶다. 익숙해진 충동이다.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나누면 수면의 질이 향상된다는 학설이 이미 많이 나와 있어. 기간도 정해놓을 거라고. 솔직히 수면에 대한 연구를 위해 같이 자는 것뿐인데 왜 거부하는지 모르겠어. 이번 사건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중요한 지식이라니까.”


셜록이 말하는 그 사건이란, 별 웃기지도 않는 시시한 사건 중 하나였고 존과 셜록이 같이 자는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문제다. 브렌트포드에 사는 어떤 여자가 객실 침대에 죽어있는 남편을 발견했다. 남편이 지독하게 코를 고는 버릇이 있어 부부가 따로 잤는데, 부인 말에 따르면 떨어져서 자버릇 하느라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렇게 급사한 걸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왔다. 셜록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사건도 아니어서, 두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옆집 사람이 범인이라는 걸 추리해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보니 피해자가 옆집 문 앞에 얌체처럼 줄기차게 주차를 해대서 열이 받친 나머지 범인이 창문으로 침입해 베개로 질식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부인의 요상한 가설이 셜록의 호기심을 건드렸는지 수면 패턴에 대한 몇몇 기사와 책 두 권을 붙잡고 팠더랬다. 그리곤 이제 그걸 실증적 증거로 가설을 증명하고자 직접 경험하겠다는 소리를 하는 거다.


“그 가설에 대한 제대로 된 반론을 못 봤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거라면 당연히 거부지. 이미 연구 기사가 나와있는데 그냥 그대로 믿으면 안돼?”


그랬더니 존이 무슨 ‘제사를 치러야 하니 저 귀여운 아기 토끼들을 모두 도륙을 내게!’ 라고 한처럼 경악하는 표정인 거라. 웃기는게, 존도 과학의, 과학을 위한, 과학에 의한 남자 셜록 홈즈라도 결국 남의 연구 결과를 고만고만하게 받아들인다는 걸 알고 있다. 거기다 셜록이 진짜로 아기 토끼를 죽인다고 해봤자 그닥 놀라지 않을 거라는 의심이 자꾸만 들기까지 한다.


“잠깐 동안 같이 자는 건데 왜 그렇게 반대해? 사람들이 수군거릴까봐 그러는 거야? 내 방 벽은 유리가 아니라고, 존. 아무도 못 봐. 누가 알게 된다고 그래.”


“이미 수군거리고 있거든. 그건 문제도 아니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조리대 위를 행주로 박박 닦아내는 존이다. 이렇게 제대로 닦을 수 있을만큼 공간이 나는 일도 드무니까 기회가 났을 때 전력으로 치워야겠다.


“설마 정말로 현실화될까봐 그래? 재밌기도 하지.”


“내가 언제― 셜록. 아냐. 그냥 그것마저 허락해 버리면 너와의 생활에서 내 사생활이란 걸 모두 포기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개인 시간이라고 해봤자 고작 밤에 몇 시간일 뿐인데 부디 존중해 주겠어?”


셜록의 얼굴이 불만으로 가득 차오른다. 골이 나 홱 뒤돌아버리는 녀석의 가운이 화려하게 펼쳐져 바람을 일으킨다. 저 망할 옷을 입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저 효과 때문일 거라고 꽤나 확신하는 존이다. 놈의 분위기에 극적인 요소를 더해주는 아이템이니까.


“딱 일이주 만이라구.” 몇 시간 후 택시 안. 방금 막 레스트레이드의 전화를 받고 수사중인 사건 현장으로 떠나는 중이었다. 셜록이 말을 꺼낸다. “기껏해야 14일 간인데.”


존의 답변. “안돼.”


“매일 밤 자는 시간을 정해놓는 거야. 평균 8시간이 좋다니 그쯤으로 할까. 그리고 상대의 존재가 있을 시 각자의 수면 습관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는거지.” 머리없는 사체 ― 유별난 외형으로 보아 나이든 서커스 광대로 보이는 ― 를 들여다보는 와중에 또 셜록이 말을 꺼낸다.


존의 답변. “안돼.”


“이건 분명 인간의 본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짐승으로부터의 위협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니 다른 사람과 밤을 보냄으로서 무의식중에 안전함을 느껴 더 깊이 잠을 잘 수 있지.” 버려진 서커스 공연장 안을 살금살금 조사하는 와중에 셜록이 말한다. 톱밥과 오래된 솜사탕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존의 답변. “안돼.”


“매일 밤 자정에서 8시까지 규칙적으로 자는 게 좋다고. 그리고 너 진료소 교대 바꾸는 시간에도 영향이 없을 거야.” 노란색 페인트로 경계색이 칠해진 분리수거 통 뒤에 둘이 숨어들었을 때 다시 셜록이 말한다. 저쪽에서 약이 바짝 오른 범인이 레스트레이드 쪽을 향해 총을 겨누던 중이었다.


존의 답변. “미치겠네.”


“이 가설이 진짜로 증명되면 너한테도 이득이잖아.” 종래에는 저녁에 존이 신문 위에 신발을 올려놓고 빨간 페인트 자국을 지워내는 와중에도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네가 좀 더 제대로 쉴 수 있으니 일에 집중하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지랄! 언제부터 네가 날 위해줬다고! 선량한 척 자선하는 시늉 하지도 마.” 이를 악물고 소리치는 존이다. 신발 밑창을 드라이버로 긁어내는데, 해진 고무바닥에서 자국 벗겨내는 것마냥 자신의 다짐도 함께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끈질기게 징징대는 변종에게 촉을 못 쓰고 지는 게 아닌가.


과학을 위해서잖아, 존.” 그 진리 하나면 모두가 수긍해야 할 것처럼 말도 잘 한다. 존은 신발을 내려놓았다. 드라이버도 내려놨다. 또 이놈의 수법에 홀랑 넘어가 버린 멍청이가 된 기분이다.[각주:1]


“좋아. 네 방이야, 내 방 안돼. 딱 14일이고 이상한 짓 용납 안해.”


“무슨 이상한 짓?”


이상한 짓 하지 마, 셜록.”


그 이상 셜록은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제 의자에 앉은 놈의 표정이 이겼다는 듯 믿기 힘들 정도로 기뻐 보인다. 실험이 다 끝나기 전까진, 저 놈을 베개로 눌러 질식시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든 참아야 한다.






첫 번째 밤


첫째 날 밤이 되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 격렬하게 거부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럼 뭘 기대했던 걸까? 솔직히 모르겠다. 오후에 서커스 광대를 살해한 범죄자를 좇느라 지친 탓에 푹 곯아떨어져서 잤다. 셜록도 그런 것 같다 ― 아침에 일어나 이불 옆을 봤을 때 딱 정중하게 거리를 둔 곳에서 셜록이 불안할 정도로 조용하게 자고 있었으니까. 면도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니 그제야 깨서 앉아 있었다. 앙상한 발로 이불을 둘둘 밀쳐놓고 몰스킨 노트에 뭔가 정신없이 휘갈기는데, 존은 첫날밤이 어땠냐느니 물으면 안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 밤


두 번째 날 밤 셜록이 잠꼬대를 한다는 걸 알았다. 셜록이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잘 들어보니 자면서 차가 어떻느니 살짝 앞뒤가 안 맞는 독백을 하는 것이었다. 재밌어서 계속 듣는 와중에도, 셜록 이 자식은 자는 중에도 닥치는 법이 없구나, 싶으니 살짝 짜증이 날 것도 같다.


그리고 셜록이 앞으로 푹 엎어져서 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잠잠해질만 하면 한 번씩 매트리스 위에서 긴 팔다리를 퍼득거린다는 것 역시. 침대를 다 차지한 놈을 자비심 없는 발놀림으로 다시 떠밀어봐도 전혀 깰 기미가 없다. 겨우 이틀째인데 미치도록 짜증나서 이러다가 진짜로 셜록을 베개로 눌러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 번째 밤


세 번째 날 밤 셜록이 잠꼬대를 할 뿐 아니라 혼자 묻고 그에 대한 답까지 한다는 걸 알았다. 살면서 이렇게 재밌는 밤은 또 처음일 거다. 키득이다 셜록의 손이 잠결에 날아온 바람에 얼굴을 찰싹 맞았는데도 너무 웃겨서 화가 안 났다.






일곱 번째 밤


벌써 망할 일주일이나 셜록과 한 침대를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인정하긴 싫지만 며칠간 잘 잤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셜록이 드디어 잠자리를 나누는 데 적응했는지, 불가사리마냥 퍼덕퍼덕 뒤척이고 계속 움칠거리던 걸 멈췄다. 존은 매일 밤 셜록이 여전히 웃기는 잠꼬대를 늘어놓는 와중에도 아무 문제없이 잘 수 있게 됐다. 아침이 되어 셜록이 편히 쉬었냐고 물었다. 맞다, 정말 잘 잤다. 그렇다는 답변에 과학을 위한 몰스킨 노트에 뭔가 또 맹렬히 휘갈긴다. 아마 셜록도 잘 쉰 것 같다 ― 재밌는 일이다, 이 녀석이 하루에 여덟 시간 숙면 취하는 모습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이레 연속은 고사하고 단 한 번도. 이렇게 제대로 쉬다 보니 우리 셜록이 달라졌어요, 하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딴 건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더 이상 저 잘난 주둥이로 여덟 시간이나 자면 뇌가 늘어진다느니 하는 소리는 못 할 거다. 이제 일반적인 인간에게 권장되는 정도로 셜록의 식습관을 바꾸기만 하면 이 실험에서 기막힌 성과를 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아홉 번째 밤


그날 밤 아주 기묘한 꿈을 꿨다. 꿈 안의 셜록은 이국적으로 잘 빠진 런던 미남으로 변장해 몰래 지구에 숨어든 외계 생명체다. 그래서 기생충 같은 걸로 존을 감염시켜서는 속에서부터 천천히 천천히 잡아먹는 거다. 대자로 누워있던 존은 퍼드득 놀라 깨서는 몇 시간동안 피해망상에 못 자고 있다가, 셜록이 잠결에, 정원사가 단호박 한 박스를 훔쳤다며 하녀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웅얼웅얼대는 허튼 소리를 듣고서야 잠이 들었다.






열한 번째 밤


존이 침대 안으로 들어와 목까지 이불을 잡아당기고 꼼지락꼼지락 편히 자리를 잡았을 때, 셜록은 헤드보드에 등을 대고 앉아 다리를 꼰 채로 랩탑을 두드리고 있었다. 곧 자정이다. 12시에 거의 가까워지면 셜록은 랩탑을 치우고 잠자리에 들 거다. 분명 새벽까지 일을 하고 싶을텐데 그런 본능적 충동을 거부하고 실험에 헌신한다는 게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자네. 보통 사람들만큼 쉬니까 몸이 가뿐하긴 하지?” 베개에 푹 머리를 묻은 채 존이 묻는다.


“글쎄.” 멀거니 말하는 셜록의 눈동자에 화면의 글자가 비춰졌다.


“인정하시지. 매일 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자면서.”


“그러겠지. 실험이니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러하시다. 야,”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짚고 셜록 쪽으로 상체를 일으킨다. “너 지금 실험에 맞춰서 네 몸이 잠을 자도록 신체적 변수가 변경되게 만든다는 말이야? 진짜로 피곤한 것과 상관없이?”


“그래―애.” 네 살짜리 저능아한테 대답하는 것처럼 길게 늘어지는 답변이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


터치패드 위로 휙휙 빠르게 몇 번 더 움직이더니 랩탑을 끄고, 화면이 까맣게 변하자 존을 쳐다본다. “난 내 몸을 통제할 수 있어. 할 수 있는 한 정밀한 결과를 얻고 싶으니 내 자신을 제시된 만큼 매일 여덟 시간씩 자게 하는 거라고.”


존은 가만히 녀석을 노려봤다. 어째서인지 티셔츠를 거꾸로 뒤집어 입은 커다랗고 마른 음영을. “너 싫어.” 그렇게 불쑥 내뱉고는 홱 돌아누워 눈을 감는다.[각주:2]


그 후로 잠이 오기까지는 약 한 시간 더 걸린 반면, 셜록은 십 분도 안 되어 곯아떨어졌다. 이 자식을 확 베개로 눌러 질식시켜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트라팔가 광장의 소가 어쩌고저쩌고, 신기할 정도로 일관성있는 셜록의 잠꼬대를 들으면서 깜빡 잠이 들었다.






열두 번째 밤


“우리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해?”


“최소 14일. 도출된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좀 더 늘이고.”


“이제 확실히 나오지 않았어?”


“이틀 뒤에 다시 얘기해.”






열세 번째 밤


셜록이 꿈을 꾼다. 존이 그것을 안 이유는 스스로 진짜 악몽을 접해보았기 때문일 테다. 천만뜻밖에도, 셜록은 꿈속에서 엄마를 찾는다. 그 다음엔 마이크로프트를 애타게 부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갔으리라는 추측만 든다. 이전에는 웃기고 어쩐지 귀엽기까지 했던 셜록의 잠꼬대가 마음을 아프게 짓누른다. 웅얼거리면서 조그맣게 흐느끼고, 작게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절박해진다. 그걸 듣는데 셜록을 깨워야 하나 싶다. 어떻게 해야 할지, 셜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결국 욕실로 도망쳐와, 셜록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가보다 싶을 때까지 욕조에 기대앉아 기다렸다.


아침에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셜록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괜찮아 보였으니까. 런던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저 녀석이라면 간밤에 무슨 꿈을 꾸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꿈에서 어둠 속에 홀로 서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아이처럼 외치던 셜록은, 얼마나 자주 그래왔던 걸까.






열네 번째 밤


열네 번째 밤이 지난 후 아침, 침대에 앉은 셜록은 옆에 랩탑을 놓고 수십 장의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종이 안은 수많은 그래프와 한 쪽 전체에 복잡하게 돌고 도는 알고리즘 순서도에 더불어 여기저기 휘갈겨 쓴 메모로 빽빽이 도배됐다. 그 중 한 장을 집어든 존은 빨간색과 검정색 펜으로 괴발개발 그린 그래프를 해석해보려고 집중해서 쳐다봤지만, 수면 실험의 데이터를 구체적 숫자로 바꿔놓는 셜록의 능력을 넘볼 수 있을 리 없었으므로 당연히 실패했다.


“결과 맘에 들어?”


“흠. 존, 수면의 질이 향상된 것 같아?”


“글쎄. 원래 환경에 상관없이 잘 자는 편이야. 난 군인이었잖아. 필요하면 서서도 잘 수 있으니까.”


자료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곤 손가락으로 펜을 빙빙 돌리던 셜록이 점을 쿡 찍는다. 존은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결과가 확답이 안 나와. 기간을 한 달로 변경해야겠어. 데이터가 더 있어야 돼.”


존의 대답. “알았어.”






열여섯 번째 밤


그날따라 유난히 진료소에서 끔찍하게 힘들었던 터라 푹 곯아떨어져 자다가, 잠결에 실수로 셜록을 걷어찼나 보다. 존을 거칠게 흔들어 깨워서는 잔소리를 하더니 다시 곧바로 자버린다. 존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히느라 이후로 세 시간동안 잠들지 못했다. 남 깨워놓고 저 혼자 쿨쿨 자는 이놈을 베개로 콱 눌러 숨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열일곱 번째 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난 존은 셜록이 자신을 촬영하고 있다는 걸 지각했다. 처음 든 생각은, ‘우리 집에 캠코더가 있었나?‘ 그 다음 제정신이 퍼뜩 들어 벌떡 일어나서는, 농락당한 불쌍한 처녀처럼 이불로 꾸역꾸역 몸을 가렸다.[각주:3]


“씨발 뭐하는거야?”


“영상 수집. 연구의 일환으로.”


“나 자는 걸 찍는다고? 소름끼쳐 이 자식아!”


“실험에 동의했잖아.”


“같이 자는 걸 동의했지. 충분히 희생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걸로 모자란 거냐.”


그 말을 들어도 셜록은 무슨 생각인지 도통 말을 않고 계속 찍어댈 뿐이다.


“그만 찍어 셜록, 나 일어났다고. 맙소사, 너 전부터 내가 자는 걸 찍어온거야?”


“응.” 카메라를 끄면서 간단하게 대답하는 셜록이다. 셜록에게 맞춰 설계된 것처럼 손에 딱 맞는 세련되고 조그만 디지털 카메라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존이 베개에 침을 흘리며 자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기록한 놈일테고.


“부탁이니까 그거… 다시는 하지 마. 소름끼친다는 말 진심이야. 글로는 조사한 거 맘대로 써도 되는데 나 모르게 촬영하진 말아줘.” 카메라를 노려보며 조용하게 말한다.


“이미 찍은 건 그냥 둬도 돼?”


“그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면 니 면상을 뭉개버릴거다.”


“알았어.”






스무 번째 밤


스무 번째 되는 날 셜록의 실험에 지장이 생겼다. 셜록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커다란 가을 폭풍우가 런던을 가로지르는 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창문을 두드리고 지붕으로 계속 먹먹한 천둥이 내리치는 와중 베개에 푹 머리를 누인 셜록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 번개가 순간적으로 방을 번쩍 밝힌다. 딱 셋까지 세자 바로 천둥이 치며 베이커 가가 웅웅 진동했다. 어딘가에서 시끄럽게 개 짖는 소리가 빗소리에 떠듬떠듬 묻혀 들려온다.


“이건 말도 안돼.” 셜록이 이불 위로 팔짱을 끼며 불평한다.


“날씨가 이런 걸 어쩌겠어.” 존이 말한다. “네 몸을 통제한다는 대단한 능력은 폭풍우 조금 내릴 때 자는 것과 관련이 없나봐?”


“시끄러.” 셜록은 우물우물 이불을 차더니 코를 긁었다. “너도 못 자는 건 매한가지잖아.”


“난 원래 장대비가 내려도 잘 자. 이것들이 지금 지붕으로 작정하고 달려드니까 문제지.” 천장을 올려다보며 대답한다. 잠이 와서 몽롱한 까닭에 원래 미색으로만 도배된 천장에 무늬가 보이는 것도 같다.


천둥이 두 번 더 치는 동안, 셜록은 조용히 꾸물꾸물 코를 문지른다. 잠이 들락말락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었지만, 눈을 감을 때마다 번쩍 하고 비치는 빛 때문에 다시 깨곤 했다.


“오늘 밤은 편안히 잘 쉬었다고 볼 수 없으니 실험한 날로 세기 힘들겠어.” 옆에서 셜록이 말한다. 그 말 뒤에 셜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셜록은 홀로 집중해서 생각할 때면 평소만큼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역시 내가 실험중인 가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군. 폭풍우 치는 밤에 깨어있어도 옆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존은 고개를 돌려 셜록을 바라봤다. 이런 때에도 그는 침대에 똑바로 누워 턱 끝에 손을 모은 자세다. 어슴푸레한 방에 순간 파란 빛이 번쩍일 적마다 날카롭게 대조되는 셜록의 실루엣이 팔꿈치까지 이어진다. 존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곧 천둥이 내려쳐 말을 가로막는다.


“폭풍 올 때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자본 적 없어?” 천둥이 잠잠해지고 나서 존이 묻는다. 이미 유리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답이 명확하더라도.


“어.” 예상대로다.


그 다음에 존이 꺼낸 말은, 지금껏 묻고 싶어서 좀이 쑤셨던 화재였다. 셜록을 알게 된 후로부터 미안할 정도로 너무 궁금했던 터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침대에 다른 사람 들인 적 없지?”


“어.” 마치 혹시 당근 싫어해? 라는 질문을 들은 것처럼 바로 대답하는 셜록이다.


옆으로 몸을 돌려 살짝 몸을 일으키고, 잠시 비 내리는 소리를 듣다가 말을 계속 잇는다. “남의 침대에 들어가 본 적은?”


셜록이 돌아본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두 눈이 빛났다. “내 성 경험을 묻는데 너무 우회적인 질문이잖아, 존.”


그 말에 존이 키득이고는, 셜록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올려주었다. 바람이 221B의 창문에 불어와 몇 번 흔들린다. 오래된 벽돌이 막지 못한 찬바람이 새어들어온다. “알았어. 들통났네. 너 동정이야?”[각주:4]


셜록의 입가가 슬쩍 올라간다. 직설적인 존의 질문에 이상하게 만족한 것처럼. “엄밀히 말하면, 맞아. 그게 놀랍나?”


“그런 건 아닌데.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 그러니까, 너잖아. 상상이… 상상이 잘 안 간다고나 할까… 뭐 그래. 글쎄, 대체적으로 약간 이상한 얘기니까, 네 나이 대 사람들에겐. 해보고 싶었던 적은 없어?”


셜록도 이쪽으로 몸을 돌려, 머리 밑에 팔을 베고 올려다본다. 존은 아닌밤중에 진실게임을[각주:5] 하는 열두 살 여자애가 된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든다. “궁금하긴 했어. 하지만 실행으로 옮길 정도는 아냐. 성가신 일들이 따라붙으니까. 그래도 그 부분에 있어서 내 이론적 지식은 꽤 해박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럴 것 같았어. 그냥, 수면에 대해 남들이 알아낸 정보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섹스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지식을 수용하는 걸로 만족하는 게 이상해서.”


존은 그 말이 입에서 흘러나올 때까지도 모르고 있다가, 퍼뜩 깨닫고는 입을 합 다문다. 불안한 기운 가운데 간간히 개 짖는 소리만 울린다.[각주:6] 게다가 셜록은 입을 딱 벌리고 묘한 시선을 던진다. 지금 저 말이 모욕이 된 걸까? 아님 이 녀석의 경계선 따위 없는 개념에 아주, 아주 나쁜 아이디어를 제공하게 된 걸까?[각주:7]


“방금 한 말은 신경쓰지 마.” 그래서 애써 말을 주워담는다. “넌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원하면 다 하는 사람이니까. 아니면 안 하든지. 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말야. 그래도 말해줘서 고마워. 빈말이 아니라, 궁금했었거든.”


“그냥 언제고 와서 물어봐도 되는 얘기였어, 존. 내가 부끄러워하는 주제가 아니야.”


“그래. 그렇지. 맞아.” 어색하게 도로 누워 턱까지 이불을 한껏 치켜올린다. 빗소리가 천천히 물러가고, 존은 눈을 감고 부디 잠이 오기만을 바랐다. 계속 이쪽을 보고 있는 셜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스물두 번째 밤


존이 악몽을 꾼다. 익숙한 꿈이다 ― 스쳐지나가는 사막의 풍경, 모랫길, 그의 손 아래 고통으로 울부짖는 장병들의 피 그리고 죽어가는 아이들의 처절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 잠에서 깨는 순간 역시 전과 다르지 않다. 마치 이불이 자신을 붙잡아 가두는 족쇄라도 된 양 몸부림을 치며 숨을 헉헉 몰아쉬고, 식은땀이 등허리에 맺힌 채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셜록이 상체를 일으켜 이쪽을 보고 있다. 그 모습을 마주보는 존은, 어쩐 이유에선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침대에서 홱 일어나 욕실로 피한다. 세면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새까맣게 타오르는 사람 살갗 냄새가 맡아지지 않을 때까지 십 분 가까이 울고 나서야 셜록과 자신의 집 안 하얗고 아늑한 욕실에 있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터덜터덜 침대로 돌아와 파고든다. 셜록이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제발 아무 말 하지 않기를.


“괜찮아?”


젠장. “그래. 괜찮아.” 옆으로 돌아누워 한 손으로 베개를 꽉 쥐고, 눈을 굳게 감는다.


“존. 혹시 내가… 내가 뭔가 해줄 건 없어?”


그게 지금껏 존이 셜록에게서 들은 질문 중 가장 솔직한 말일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픈 곳을 정통으로 짓누르기도 했다. 있으면 어쩔 건데, 하고 짜증을 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셜록으로선 이게 최선이니까, 그러니 괜히 상처줄 필요 없다.


“나 괜찮아, 셜록. 다시 자.” 무뚝뚝하게 말한다. 다시 셜록이 자리에 누우면서 뒤쪽에서 매트리스가 살짝 출렁였다.


그리고 다시 잠에 들 때쯤, 어깨 위로 유령처럼 손이 올라와 머뭇머뭇 다독인 것 같기도 했지만, 진짜같은 느낌은 안 들어 아침이 되었을 땐 잊어버리고 말았다.






스물네 번째 밤


4시 30분에 깨어 화장실에 갔다 돌아오니, 셜록이 꾸물꾸물 뒤척이면서 침대 위 대장정을 했는지 존의 자리로 와 웅크려 있었다. 이불로 꽁꽁 몸을 감은 채 부스스한 머리칼만 쏙 나온 모습이 마치 쓸데없이 커다란 영국 부리또 같다. 존은 잠시 침대 옆에 당황스럽게 서 있다가, 조그맣게 짜증난 한숨을 내뱉고는 원래 셜록이 자던 자리로 들어갔다. 몇 번 이불을 잡아당겨 제 몫을 겨우 가져오고 나서, 편히 누워 스르르 잠이 든다. 셜록이 누워있던 자리가 정말이지 무척 따스하다는 것과 셜록의 베개에서 엄청 비쌀 것 같은 샴푸 향이 난다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아침이 되어 셜록의 모습이 평소보다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녀석은 아무 말 않고 랩탑 자판을 마구 두들길 뿐이었다.






스물일곱 번째 밤


잠자리에 누워 막 잠들기 전에 생각해보니 셜록의 연구가 이제 사흘 남았다. 그 사실에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는 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옆에서는 셜록이 켄트(Kent)에 거위가 사네 어쩌네 자면서 웅얼대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당황스럽다.






스물아홉 번째 밤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밤은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날이 끝나갈 즈음에 사건이 터졌다. 범인은 몇 달 전 자살 기도에 실패한 17세 여학생을 살해한 깡마른 남자아이였다. 둘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도망치는 범인을 좇았다. 그래서 범인을 잡아다가 기소하도록 경찰에 넘기고 돌아와 새벽 5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고, 존은 옷도 못 갈아입은 채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셜록은 8시에 어김없이 존을 깨웠다. 저는 아주 잘 쉬었는지, 존은 이제 겨우 세 시간 남짓밖에 충전하지 못했는데 억지로 깨워다가 신나게 말을 거는 거다. 낮에 입던 옷을 그대로 착용한 채 자니까 네가 코를 고는 것 같더라, 새벽에 집에 돌아왔을 때 아드레날린이 막 날리고 있는데도 둘 다 그렇게 빨리 잠이 들다니 신기하지 않느냐, 어쩌고저쩌고.


또다시 존은 이놈을 베개로 눌러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서른 번째 밤


마지막 날 밤은 엄청나게 평범하고 그저 그랬다. TV를 보며 소리소리 질러대는 셜록을 데려다가 침대로 가, 서로 잘 자라고 말하곤 그대로 잠들었다. 존은 밤 내내 셜록이 무슨 잠꼬대를 하던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잤다. (30일간 셜록의 잠꼬대를 듣지 못한 게 이번이 유일하다) 둘 모두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에 깼고, 존이 양치질을 하고 나왔을 때서야 일어나라며 울리기 시작한 알람시계를 셜록이 주먹으로 내려쳐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날 저녁 진료소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존은 식탁 위에 있는 리포트를 발견했다. “이게 네 연구 결과야?” 거실에 있는 셜록에게 묻자, ‘그렇다’는 말로 여겨지는 흠 소리가 대답으로 돌아온다.


“읽어봐도 돼?”


“맘대로 해.” 셜록이 목도리를 휘 두르고 문으로 나간다.


“어디가?”


“바츠. 자기 집 창고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남자 시신이 들어왔는데 내가 관심있을 거라고 몰리가 그러더군.”


존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차 한잔 타와서 의자에 앉은 다음 무릎 위에 리포트를 올려놓는다. 타이핑된 것이다. 그래프며 파이 차트, 끝도 없이 달린 주석 등등. 아마 반도 이해하지 못할 거다. 의학도로서 다년간 수련해 봤자 셜록 홈즈의 뇌 돌아가는 방식이 감당 안 되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아마.


수면 실험, 2010년 10월 6일에서 11월 5일 진행, S. 홈즈 & J. H. 왓슨 박사


셜록이 이렇게 자신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걸 보니 간질간질하다. 목적과 의도가 뭐든 어차피 셜록과 자신 외엔 아무도 안 볼 텐데 말이다. 존은 휘황찬란한 그래프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그저 대단하게만 보이는 숫자 도표의 일련들을 대충 넘기고 보고서를 쭉 훑었다. 그런데 뒤쪽에서 셜록이 매일 밤의 기록을 짧게 남긴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 잠든 시각과 그날 신체기능의 향상 여부만 달랑 썼을 뿐이지만, 몇몇은 셜록의 관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사적인 이야기도 있어 깜짝 놀랐다.




1일


약 0시 15분경 취면했다. 나와 J 모두 수면 방해 없이 잤다. 낮동안의 격렬한 활동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J는 꽤 조용하게 자는 편이다. 내 옆에서 죽은 줄 알고 밤새 네 번 호흡을 체크했다.[각주:8]


6일


약 23시 55분경 취면했다. J가 선호하는 자세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왼쪽으로 (내 쪽으로 등을 돌리고) 누운 형태다. 얕은 수면일 경우 등을 대고 누워 한 팔을 베개에 올린다. 나는 일반적으로 엎드려서 오른다리를 들어올린 자세로 잔다. 내가 선잠을 잘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는 모르겠다. J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 J가 태아 자세를 취하는 횟수가 고무적이다. 즉 동침자가 있어 더 깊고 효율좋은 잠을 자게 된다는 것을 제시한다.


10일


약 0시 6분경 취면했다. J의 수면 활동을 촬영하고자 낮에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했다. J가 깊이 잠들어 렘수면 주기가 오면 명확한 변화가 생겨 온전히 고요해진 모습을 보인다. 매우 흥미롭다. 그의 렘수면 주기의 지속 시간을 측정하고자 했으나, 내 기호 방식과 상이해 측정 도중 잠들었다. 밤새 녹화해서 후에 데이터를 수집하는 게 좋겠다.


13일


약 23시 58분경 취면했다. 악몽을 꿨다. J는 모르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악몽을 꿀 때 역시 옆에서 취침하는 친구의 영향을 받아 진정 작용을 받는다.


14일


약 0시 35분경 취면했다. 실험자와 J 모두 잘 잤다. 결과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실험 기간을 14일에서 30일로 연장할 것을 제안했다. 놀랍게도 J가 동의했다. 편하고 이상하게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17일


약 0시 5분경 취면했다. 실험자와 J 모두 잘 잤다. J가 촬영을 거부했다. 수면 상태에서의 움직임과 표정 변화가 매우 유용했는데 유감이다. 그러나 이미 촬영한 자료에 있어서는 허락을 받았으므로 적어도 얻은 것이 있다.


20일


뇌우 때문에 오늘의 수면 결과는 사용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폭풍을 견뎌내면 사람 사이에 이상한 연대감 같은 것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J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듯 했다. 실험자 역시 그에 대해 불편하지 않았다.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22일째 밤 밑으로는 뚝 끊겨서 아무것도 없었다. 22일이라는 표기는 있는데, 그 아래는 비었다. 데이터도, 관찰도 없이 덩그러니 두꺼운 리포트 가운데 빈 페이지만 있을 뿐이었다. 존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다가, 그 날이 자신이 악몽을 꾼 날이라는 걸 떠올리고 깜짝 놀라 굳어버린다. 하얀 백지를 보고 있으니, 셜록이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자신을 위해 공백으로 남겨둔 것임을 깨달았다. 그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냉정하게 데이터를 남기고 싶을 법도 한데, 존의 안 좋은 상태에 대해 기록하는 걸 원치 않았던 거다. 순간 고마움이 물밀듯이 흘러들어와 벅찰 정도로 존을 압도했다.


리포트를 도로 식탁에 놓고,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쳐든다.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셜록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들뜬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 셜록은 정원관리 도구가 몸에 여기저기 박힌 남자에 대해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몹시 정신없긴 했지만, 존은 미소짓고 열심히 경청했다.






다시 첫 번째 밤


잠이 더럽게 안 왔다. 밤새 아래층에서 셜록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났다.






세 번째 밤


잠이 더럽게 안 왔다. 새벽 3시 42분쯤에 셜록이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저 자식을 베개로 확 눌러 처리해버릴까도 싶었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자러 올라오는 게 귀찮다.






일곱 번째 밤


일주일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셜록도 거의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침에 아래층으로 내려와, 책상에 푹 엎어져 있는 셜록을 발견했으니 적어도 하루는 어찌저찌 잠을 잔 거겠다. 이마에 포스트잇을, 한 장도 아니고 두 장 달고 말이다. 존의 손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서야 깨서 홱 물러났다.


그리고 그 날, 자정이 되기 15분 전이었다. 존은 쇼 프로그램을 보다 말고 끈 다음 일어났다. “자러 가자.”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아주 조금 크게 나가버렸다.


책상에 앉아 랩탑을 두들기던 셜록은 빤히 이쪽을 향해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누가 셜록 아니랄까봐 금세 이해한다. 히죽 하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유쾌한 손놀림으로 랩탑을 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를 닦은 후에 침실로 쏙 들어오니, 이미 제 자리에서 웅크리고 누운 셜록의 검은 고수머리가 하얀 이불 밑으로 빼꼼 보였다. 존도 불을 끄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존은 셜록이 반은 불어로, 반은 영어로 벌에 대해 뭐라고 잠꼬대 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아기처럼 곤히.






역자의 말


저 엄청난 제목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싶다가 결국 대폭 할인을....(요즘 법이 참 무섭던데 이런 제목을 해도 되려나요0_0) 충동은 느끼는데 미수에만 그친 착한 조니보이는 오늘도 셜록이를 거둬줍니다.....

말 그대로 어도러블한 커플이죠, 이미 휘말려있는 존이나, 안그런 척 존 생각해주는 셜록이나. 이래서 둘이 좋지:)


새벽에 오렌지주스 1.5리터를 흡입하고 번역을 도와준 기밀도사님, 감사합니다 :D






  1. 자넨 이미 어쩔 수 없어.... [본문으로]
  2. 같이 살면 닮는다더니, 님도 만만치 않네요. [본문으로]
  3. 안돼, 그러지 마. <strike>진짜로 괴롭히고 싶어지잖아</strike> [본문으로]
  4. 숫총각이라고 표현했다가, 동정으로 바꾼다. 동정이라는 어감을 별로 안좋아하지만(왠지 셜록이 마법을 써야 할 것 같아....) 이쪽이 사용도가 높으므로. [본문으로]
  5. 원문에는 파자마 파티로 표현되는데, 여자애들끼리 잠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털어놓는 느낌으로 미루어 각색해봤다. [본문으로]
  6. a mocking badum-tish of thunder. 재미있는 것이 badum-tish에는 드럼 울리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인 동시에, 싸구려 농담이나 놀리는 말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원문에서는 천둥소리지만 맥락상 ‘개드립’으로.... [본문으로]
  7. 후자에 한 표 :p [본문으로]
  8. 이 녀석 의외로.... 소심하구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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