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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6 : 눈길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6 : 눈길

topsecretum 기밀선녀 2016.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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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옛날 방에서 깨어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일어나니 침대에 혼자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나눠 쓰는 데 이리 익숙해졌을 줄이야. 짐은 눈을 뜨고 나서도 잠시 그렇게 누워 천장을 향한 채 현실감각을 짜 맞추었다. 파이크를 만나고 지구를 구하고 자신의 함선이 생겨 이곳저곳으로 탐험을 다닌 지난 수년간의 일이 전부 하룻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복도 맞은편이 스팍이 있는 샘의 방이었다. 지나가면서 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짐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엄마가 일어났는지 보러 갔다. 엄마는 아직 방에 있는 것 같아서, 그는 계획했던 대로 나가서 운동을 하기로 했다.


집을 나와 문을 잠그는 동안에도 세상은 고요했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고—새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어 이런 소리를 내는 게 무슨 종인지 몰랐다—바람을 따라 솨아 흔들리는 풀 소리도 있었지만 그 외에는 조용했다. 마지막으로 적막을 느껴본 지가 언제인지 짐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는 늘 쉴 새 없이 일이 일어났고 엔터프라이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년 임무를 떠나기 전 잠시 아이오와에 들렀을 때조차도 당시에 막 유명세를 탄 덕분에 혼자 있을 틈이 없었다. 지금도 자신이 리버사이드에 있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이런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지 짤막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 고요를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던 걸까. 그는 고개를 젓고 길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고 발소리에 맞춰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 외에는 계속되는 평화로운 적막이었다. 수년 전만 해도 흥미가 이는 거라면 뭐든 지나치는 법이 없었지만, 한참 우주에만 있느라 이런 환경에 떨어져 있었다 보니 — 또 어제 스팍이 평범한 집 주변 풍경을 보고 흥미롭다고 말하기도 했고 — 푸른 잔디, 푹신한 땅, 주변을 감싼 새소리 따위의 것들이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다. 딱히 길을 정해놓지 않고 달리면서 새소리를 따라갔다. 가까이 가자 새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박새 종류인 것 같았다. 평범하고 흔한 녀석들의 연속이었다.


나중에 스팍과 함께 와보자고 할까. 스팍은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짐은 흥미로워하는 스팍의 그런 성격이 흥미로웠다.


집에 돌아왔을 즈음에는 엄마와 스팍이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째서 벌칸이 원래 있던 콜로니들로 인구를 나누어 정착하지 않고 새 행성을 개척했는지에 대한 대화중이었던 듯 했다. 그가 들어서는 소리에 이야기가 중지되었다. 엄마가 커피를 권했지만 이미 몸에 열이 한가득이라 거절하고, 대신 시원한 물을 마신 후 샤워하러 들어갔다. 이것 참, 엄마가 벌칸과 대화하는 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참 다행이었다. 짐은 자신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그게 그리 복잡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스팍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는 이유는, 그와의 만남이 매번 극도로 어색하고 이상한 환경에서 시작해서일지도 몰랐다. 처음엔 그 자체가 사기나 다름없는 시험에서 사기를 쳤다며 불려나가서 대면했고, 다음 만남은 벌칸 행성이 파괴되고 종족 대부분이 몰살된 직후, 두 명의 벌칸과 면대면으로 만나게 되었다. 스팍 대사와 그 일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델타 베가에서 행성의 파괴를 바라보며 수십억명의 벌칸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니 엔터프라이즈에 타고 있던 스팍도 분명 그것을 느꼈으리라고. 그 당시 스팍 대사는 자신이 다름 아닌 짐이 알고 또 미워하는 바로 그 벌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실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스팍이 공항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마주치게 된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늘 스팍과의 사이에 긴장이, 그것도 최근까지도 죽 존재해 왔던 연유를 이해할 법 했다. 되짚어 보면 애틀랜타에 있는 동안 그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건 스팍이 거리를 둔 끈을 풀어주어서일까, 아니면 스팍과의 상호작용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에 변화가 온 탓일까. 분명한 건, 자신 쪽에서 뭔가 유별나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을 만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토브 앞에 선 스팍이 냄비 안의 무언가를 슬슬 젓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를 도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는가 보았다. 스팍만큼 기깔나게 눈썹을 들어올릴 줄 알았다면 짐은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테다.


어쨌든 ‘눈썹 들어올리기’ 없이도 의미는 전달된 모양이었다. 스팍이 묻지 않은 질문에 먼저 답했다.


“당신 어머니께서 벌칸 아침식사에 대한 경험이 적다고 하셔서. 지구에 동일한 재료는 충분하지 않지만, 실험 삼아 해 보려고 해.”


엄마가 옆에서 거들었다. “이따가 스팍과 함께 마트에 나가보려고. 일단 지금은 집에 있는 걸로 뭘 만들지 생각해 보고 있어.”


“그래요?”


짐이 대답했다. ‘탄수화물이 함유된 부드러운 것’이라고 했던가… 엄마가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넌 걱정 마. 스팍이 먹는 걸 굳이 같이 먹을 필요는 없어.”


그제야 안심이 들었지만 입으로는 대견한 소리를 했다.


“아뇨. 괜찮아요. 스팍은 제가 먹는 걸 그럭저럭 같이 먹어왔는걸요. 저도 그렇게 해야 공평하죠.”


입에 안 맞을 때를 대비해 베이컨 몇 장 구워먹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한에서는 말이다.


다 만들고 나서 먹어 보니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간을 좀 해야겠지만. 실험작의 맛을 조정하는 동안, 당근은 플로믹이 아니라고 스팍이 의견을 달았다. 엄청 미묘한 맛이었다. 이렇게 조미가 하나도 안 된 것만 먹고 자랐으니 스팍이 향신료 반대론자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비스킷과 같이 먹으니 그럭저럭 맛이 잘 어울렸다. 어찌됐건 짐이 아침식사로 생각할 만한 메뉴와는 차원부터 다른 음식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짐이 제안했다. “오늘은 저기 조선소에 한 번 가보자. 새 함선을 축조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있으니까 들어가서 가까이 볼 수 있을 거야. 함장 정도면 출입하는 데 자격이 충분한 것 같거든.”


역시나 스팍은 흥미로운 제안이라며 동의했다. “하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듯 해. 오늘 영상 면접이 예정되어 있어.”


“여기 오자마자?”


“인터뷰 일정을 짰을 때만 해도 이곳에 올 건지 애틀랜타에서 닥터와 있을 건지 알 수 없었어.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 어머니는 물론이고 당신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폐를 끼치지 않도록 일자리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엄마가 손을 내저었다. “폐를 끼치기는, 무슨. 너와 대화를 나누면서 얼마나 재미있었는데. 외계에서 온 사람과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눠본지가 정말 오래됐거든.”


엄마는 진심이었다. 스팍이 있으니 덕분에 짐은 엄마와 어색하게 있으면서 호들갑을 전부 감내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엄마는 굉장히…즐거워 보였다. 그걸로도 짐은 스팍에게 큰 빚을 진 거였다. 스팍도 맞장구를 쳤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벌칸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과는 이토록 편한 대화가 가능했군요. 그러나, 짐이 제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어서 많은 것을 즐겼습니다. 이제 다시 체계적인 삶으로 돌아갈 때가 된 듯 합니다.”


“뭐야, 그럼 난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거야?” 짐이 괜히 볼멘소리를 하자,


“그럴 리가 있니.” 엄마가 다 안다는 듯 대신 대꾸했다.


비꼬는 뉘앙스를 스팍이 알 리 없었다. “무례한 의도는 없었어. 당신과 마주치기 전까지만 해도 내 생활은 훨씬 무질서했지. 그것이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고.”


“그러게.”


짐은 대답했다. 애초에 고맙게도 스팍이 여기까지 따라와준 덕에 함께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선소는 내일 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스팍이 해준 제안도,[각주:1]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으니… 그렇지만 해가 쨍쨍할 때 그럴 용기는 안 났다. 게다가 엄마도 분위기가 쾌활해 있었다. 엄마는 스타플릿에 들어가기 이전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같은 건 일언반구도 없었다. 지난 저녁의 고민이 우스워질 정도였다.


아침식사 후 스팍은 첫 번째 회사의 면접 전에 최대한 멀끔하게 차려입을 필요가 있어서 방으로 올라갔고, 짐과 엄마만 남았다. 스팍은 가는 길에 짐에게, 지난 5년간 만나지 못했으니 어머니께서 임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실 거라며, 자신이 다른 일을 하는 동안 둘이 얘기를 나누라면서 등을 떠밀었다.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그는 엄마가 여기서 더 이상 자신을 걱정하게 만드는 건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너무 일을 잘 하고 있다 여기게 되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실제로 잘 하고 있다 해도.


엄마의 목소리에 생각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엄마는 스팍더러 단말기 대신 컴퓨터를 쓰라며 터미널이 있는 서재를 내어주었다.


짐은 방 내부 모습에 눈길을 줬다. 바른 지 얼마 안 된 페인트와 새 카펫이 눈에 띄었다. 집에서 새것 냄새가 났다.


“…좀 달라졌네요.”


“응. 얘기하려 했는데 어제는 기회가 없었어. 너 태어난 후로 이 집,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는 거 알고 있니?”


“생각은 하고 있었죠.” 짐이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집이 낡기 시작했었다.


“새단장을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말야. 작년부터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한에서 바꿔보고 있었어. 참. 자리 비워줘야지.”


엄마가 터미널 앞에 앉은 스팍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짐도 한 마디 했다.


“그래, 손가락 꼬고 들어가(break a leg).”


역시나 숙어 따위 모르는 스팍은 의아해 했다.


“그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건 내 구직 활동에 좋은 영향이 못 되리라 생각하는데.”


뻔한 반응이로군. 짐은 빙그레 웃었다.


“사실 그건 네 손을 꼬라는 뜻이었지만, 뭐. 신경 쓰지 마. 행운을 빌어.”


스팍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요새 바쁘셨나 봐요?” 서재를 나오면서 짐이 물었다. 엄마는 요 몇 년간 시내에서 행정쪽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짐이 임무중일 때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엄마가 은퇴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들 둘 쫓아다니면서 뒷바라지하느라 수십 년간 제대로 마음 놓고 앉아보지도 못한 것 같아.” 엄마는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으며 복도 안쪽으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유전일 수도 있죠. 대를 이은 거랄까요.” 짐이 대꾸했다. “그럼, 서재도 고치고…?”


“1층의 욕실 두 개는 완전히 보수를 마쳤어.”


엄마가 욕실 문을 열어 보여주었다. 어제 집에 도착하고 나서 이곳을 쓸 일이 없어서 처음 보는 거였다. 짐은 반짝한 새 타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덧바른 페인트도 깔끔했다.


“샘의 방에 있는 최악의 문제도 손을 봤고.”


“봤어요.”


“이번 주에 벽지를 새로 바르려고 했거든.” 엄마는 그러면서 안방 문 앞에서 멈췄다. “그런데 네가 친구를 데려온다길래, 나중으로 미뤘어. 스팍이라서 더 신경쓰였지. 우리한테도 풀 냄새가 진동할 텐데 심지어 벌칸이 맡으면 어떤 영향이 갈지 몰라서.”


“이해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최근에 저도 벌칸에 대해 많은 걸 배웠다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까.”


전부 폭로해 버렸다간 스팍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 대략적인 것만 살짝 말하기로 했다.


“벌칸들, 설탕을 먹는 데 문제가 있더라고요. 정말 아쉽지만, 스팍이 함께 있는 동안은 디저트를 건너뛰어야 할 것 같아요.”


“그건 몰랐네.” 엄마는 생각에 잠겨 시선을 흐렸다. “벌칸들이랑 같이 일하면서도 한 번도 그런 문제는 못 봤는데…”


“벌칸인들은 자기네 음식에 설탕을 안 쓰니까 그런 거겠죠.” 이번에도 전문가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짐은 조금 흡족해졌다. “자기네들 사는 지역에선 그런 일 절대 없을 걸요.”


“그럼, 우리 둘만 남을 때까지 파이는 아껴둬야겠는걸.”


엄마의 웃음에 짐은 낙심한 척 과장했다. “아무 말 하지 말 걸 그랬네.”


“정말이지, 짐.” 엄마는 안방 문을 활짝 열어 안을 보여줬다. “네가 벌칸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그 반대로 생각해도 그렇고. 그렇지만, 너희들은 친구니까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그는 이야기하다 말고, 드러난 안방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그대로였는데, 벽지가 새것이라 안 어울리게 튀었다. 가구도 하나만 빼고 전부 원래 있던 거였다.


“괜찮네요. 나중에 카펫 새로 깔 거죠?”


“당연하지. 잠시 미뤄두고 있는 것뿐이야. 새 카펫은 진작 사놨어. 단지 이걸 전부 치우고 바닥을 들어낼 일을 생각하니까 일이 많아져서…”


“설마 그걸 다 혼자 하시려고요?”


“다는 아니구. 배관은 업자 불러야지.”


왜 놀랍지가 않을까? 그는 미소를 띄웠다.


“뭐, 전 배관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지만 뭐 뜯어 해치우는 거 하나는 잘 하잖아요. 카펫 뜯고 새로 까는 거 도와드려요?”


“휴가 보내러 왔는데 여기 와서까지 일을 하면 되겠니.”


“설마 제가 엔터프라이즈에서 카펫 까는 일 하면서 지냈을까봐요? 원래 일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고… 안 그래도 저, 가만히 앉아있는 거 이제 질린다구요.”


“그렇긴 해.”


거기까지 말한 엄마는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더니, 조금 머뭇거렸다.


“짐, 솔직하게 얘기할게… 머지않아 집을 부동산에 내놓을 생각이야.”


이건, 좀 놀랐다. 엄마가 내색을 한 적이 없었으니, 이곳이 아닌 다른 데에 살 거라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알아, 너랑 샘이 자란 곳이기도 하지만… 엄마한테도 추억이 담긴 집이야. 너희 아빠랑 여길 사서 이곳저곳 손 안 닿은 데가 없어. 비록 다 고치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나 혼자 사는데 방이 세개씩이나는 필요하지 않거든. 너희들이 다시 들어와 살 것도 아니고, 그치? 샘은 결혼해서 데네바에서 잘 살고 있고, 너도 함선이 있으니까…”


짐의 결정에 관계없이 엄마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그럼 엄만 어디로 이사하게요?”


“아직 못 정했어. 시내 쪽으로 나가야지, 이쪽은 다니기가 조금 불편하니까. 날씨가 더 따뜻한 곳이면 좋을 테고…”


엄마는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너한테 먼저 물어보고 싶었어. 네가 지구에서 지낼 곳이 없다는 게 마음이 안 좋아. 엄마한테 집값을 주지 않아도 돼, 연방에서 받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짐, 이 집을 가지고 싶니?”


이 집과 리버사이드에는 복잡하게 뒤얽힌 감정이 듬뿍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확신이 안 섰다. 본능 수준의 의식에서 곧장 ‘이런 데서 살까보냐?’라는 반발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렇게 내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어느 쪽이든 그가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엄마, 여긴 엄마 집이잖아요. 엄마랑 아빠의 집이라구요. 그건 엄마가 정할 일이죠. 어차피 전 지구에서 오래 있는 것도 아닌걸요.”


“알아.” 엄마는 계면쩍은 듯 시선을 돌렸다. “네가 여유가 날 때 집에 오고 싶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플릿에서 대여해 주는 그런 데 말고, 여긴 네가 익숙한 진짜 집이잖아.”


그랬다. 이 집은 그의 숙명과도 같은 거였달까. 싫든 좋든 무슨 일이 있건 이 집으로 돌아오게 됐고, 지금도 그랬다. 여기서 살기 싫다면서 뭘 고민하고 있는 걸까. 엄마의 제안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머리는 대낮에, 그것도 술을 들고 있지 않은 채로 할 생각이라기엔 너무 벅찬 일이라며 회피하려 했다. 본즈도 있어서 옆에서 부추겨줬으면 더할 나위 없겠고.


“그게… 글쎄요, 잘… 생각해 봐야겠어요.” 결국엔 이렇게 얼버무렸다. “어쨌든, 가구 옮기고 카펫 들어내는 건 도와드릴게요…”


바쁜 게 도움이 되었다. 들어내고 옮기고, 힘을 쓰면서 분주하게 일을 하는 동안 머릿속에 생각이 들어차지 않게 막아주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엄마에게 우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심각한 이야기는 물론 저만치 빼 두었다. 예를 들면 그의 승무원이 죽은 일이라든가… 그래서 본즈가 찾아와 손에 잔을 쥐어줄 만한 일, 잠을 잘 수 있거나 술에 취해 기절하거나 둘 중 하나로 괴로움을 잊어보려 했던 일 따위 말이다. 5년 동안 그런 일들이 그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멋진 전략이라든가, 미친 짓이지만 운을 걸고 누군가를 구해낸 일도 끼어 있었다. 엄마는 그가 조금은 자랑을 떠벌려주길 바라고 있을 테니, 사양 않고 거리낌 없이 떠들어 주기로 했다. 역시나 곧 엄마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슬픈 기색이 섞여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아진 거다고 여기기로 했다.


처음은 아니지만 새삼 엄마가 현직에 머물러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스팍과 대화할 때 열심이었던 것도 그렇고 그의 이야기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랬다. 엄마는 열렬했다. 대화중, 켈빈 호 사건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예전에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개인적인 얘기를 이따금씩 풀어놓던 걸 떼어놓고 보더라도. 이것 참. 죄책감을 느낄 만한 일이 하나 더 늘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을 바꿀 능력은 없으니, 다만 현재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해서 그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시에 잠재된 좌절감을 낡은 카펫에 풀어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문가에 나타난 스팍이 무얼 하느냐고 물어왔다. 온 방의 카펫을 갈가리 뜯어내고 있으니 분명 스팍의 눈에는 희한하게 보였을 거다.


“엄마가 이 방에 새 카펫을 깔려고 하거든.”


짐은 손에 묻은 먼지와 부스러기를 털고 몸을 펴며 대답했다. 이참에 잠깐 쉬어야지 싶었다.


“그러려면 예전 거를 먼저 벗겨야 해서. 면접은 어떻게 됐어?"


“대략 예상대로야. 간단하고 형식적인 질문이 대게라 수월했고, 무엇보다 벌칸인으로서의 내 특성에 경계하지 않는 듯 했어. 오히려 그것을 장점으로 여기더군.”


“잘 됐네. 그래서 거기서 오래?”


“아직은. 다른 면접도 남아있고, 일단은 간부들끼리 내 고용을 두고 상의를 해보겠다고 했으니까. 내 재능과 경험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예전의 그 연구 기관이 그걸 몰라봐서 참 안 된 일이야. 분명 넌 뽑힐 거야.”


“그건 저쪽에서 채용을 제안했을 때 내가 수락하는지 여부에도 달려 있어.” 스팍이 대답했다. “오후에 두 군데에서 더 면접을 볼 계획이야.”


스팍은 그 사이 두 사람을 돕겠다고 했다. 스팍은 손님이라 일을 시킬 수야 없었다만, 휴가 중인 짐도 일을 하고 있다는 점과 맞물려서 피할 수 없는 핑계가 되었다. 어쩔 수 없다면야 짐으로서는 스팍의 도움이 반가웠다. 둘이 힘을 합쳐 엄마에게 없는 근력이 더해지니 가구를 치우는 데 속도가 붙었다. 스팍의 도움으로 침대까지 문 밖으로 빼내고 필요한 공간을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었다. 스팍은 면접 때 입었던 재킷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인 차림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원래 깔려 있던 카펫을 훌렁 들어냈다. 그런 다음엔 둘이 낡은 카펫을 밖으로 옮겨 임시로 카펫더미를 지어놓는 동안 엄마가 간단하게 새참을 만들어 와서 먹었다.


점심 후 스팍이 다음 면접까지 조금 시간이 있다면서, 엄마가 사다놓은 카펫을 방에 옮겨놓는 데까지 돕겠다고 했다. 현관의 벽장에 넣어놨다고 해서 짐과 스팍은 나란히 그곳으로 향했다.


과연, 벽장문을 여니 돌돌 말린 거대한 카펫 덩이가 안에 들어가 있었다. 짐은 혀를 내둘렀다.


“엄마가 왜 샘의 차를 아직 갖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네.”


“당신 어머니께서 혼자 카펫을 이 벽장에 옮기신 거라면, 보기보다 힘이 세신 모양이군.”


“아니면 완전 고집이 센 거라고 볼 수도 있고.”


카펫을 꺼내는 게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쪽으로 무너지지 않는 한 둘이서 무게를 잘 나누면 될 테니까. 카펫 앞을 상자가 가로막고 있어서 옆으로 옮기면서 보니, 스타플릿 로고가 박힌 상자였다. 자신의 소지품이 담긴 상자인 듯 했다. 다만, 다른 건 다 방에 있는데 왜 이것만 여기 있을까 싶었다. 의아한 생각에 그는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아.”


이건 자신의 상자가 아니었다. 소지품이 집에 잘 도착했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그럴 만 했다. 스타플릿에서는 수십 년 넘게 똑같이 생긴 상자를 쓰고 있었던 거였다.


“예상치 못한 거라도?” 스팍이 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


여기서 발견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짐은 상자 뚜껑을 옆에 내려놓고, 맨 위에 있는 액자를 꺼내 스팍이 보이도록 들었다.


“우리 아버지야.”


“그렇군.” 스팍이 느리게 끄덕였다. “외모의 유전이 강하군.”


“그렇지? 확실히.”


짐은 사진을 다시 잘 들여다보았다. 만나본 적조차 없는 아버지인지라, 조지 커크는 역사 시간에 사진에서나 만나는 여느 장교일 따름이었다. 연방 깃발 앞에 제복 차림으로 서 있는 남자는 눈이 자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조금 위로 올라간 입꼬리가 개구져 보였다.


“지금 보니까 스타플릿에 막 들어갔을 때보다 요즘이 더 닮아진 것 같아.”


그는 상자 뚜껑에 사진을 넣어둔 후 안에는 무엇이 더 있나 살폈다. 생각한 대로였다. 상자 안에는 증명서와,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김새의 졸업기념 반지, 메달, 배지 등이 담긴 케이스가 나왔고, 추도식에 아버지의 관을 덮은 깃발도 있었다. 그 아래에, 휴대형 리더기도 있었다. 화면을 펴서 전원을 켜면 뉴스 기사를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 아래의 천은 분명 아버지의 제복일 테고, 그 밑 어딘가에는 부츠가 있을 것이다. 짐은 발견한 것들을 도로 차곡차곡 정리해 넣기 시작했다.


“유품인 건가?”


스팍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돌려놓으면서 설명을 해주려던 찰나, 복도에서 기척이 들렸다. 엄마가 거기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다 어디 갔나 했는데 여기 있었네요.”


“벽지 바르느라 치워야 했어.”


그 다음 질문은, 하기 싫어도 자동적으로 나왔다. “다시 진열하는 거 도와드려요?”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사 갈 거니까 어차피 상자에 꾸려놔야 돼.” 그러곤 행간에 스팍을 흘깃 보더니 뜸을 들였다. “괜한 수고는 줄이는 게 낫지.”


짐은 끄덕였다. 이해할 만 했다. 스팍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겉으로는 아닌 척 하겠지만. 벌칸들은 감상적인 일과 거리를 두고 사니까 말이다.


“여하간, 카펫 가져가야지.” 그는 상자에 뚜껑을 도로 씌우고 일어섰다. “스팍, 이걸 반으로 접어서 문 밖으로 빼낼 거야. 나오면 잡아줄 수 있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


방에 새 카펫을 옮겨놓은 후, 스팍은 양해를 구하고 다음 면접을 준비하러 자리를 떴다. 방을 나서는 스팍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살갑게 감사를 표한 후로, 일을 하는 동안 엄마는 왠지 말이 없었다. 짐이 엔터프라이즈에서 있었던 바보 같은 무용담들을 쏟아냈지만 엄마는 이야기에 끼어들지도, 그다지 크게 웃지도 않았다. 물론 얘길 하는 짐 본인부터가 썩 즐거운 기분이 못 되기도 했다. 짐의 이야기가 효과가 있었을지 회의적이었다.


새 카펫을 까는 일은 이전 것을 들어내는 작업보다 훨씬 빠르게 끝마쳤다. 일이 끝나갈 때쯤 스팍도 나머지 면접을 마쳤다. 역시 이번에도 전망이 좋은 결과였다고 하는 걸 보니, 그냥 가고 싶은 데를 고르기만 하면 될 거 같았다. 스팍은 끝나고서도 쉬지 않고 짐을 도와 방에 빈 가구를 도로 넣었다.


엄마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둘이서 침대를 안으로 들이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난밤에 그랬던 것처럼 걱정거리가 있는 듯 하군.”


침대를 미느라 허리를 숙인 스팍이 숨죽여 속삭였다. 말이 없던 스팍이 분위기를 지켜보고 있던 줄은 몰랐다. 침대를 제자리로 맞추어 놓고 나서 대답했다.


“글쎄. 그다지.” 스팍이 무슨 생각으로 말을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원래 아버지의 유품을 보고 감상에 젖는다거나 하지 않아. 어차피 만난 적도 없으니, 그리울 것도 없는걸.”


“어제도 말했지만.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나는 언제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마음에 걸린 건 엄마 쪽이었다. 그는 엄마가 이런 무드를 금세 떨쳐낼 수 있단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엄마의 기분전환이 될 만한 것들을 알고 있으니, 그쪽으로 눈길을 돌려야겠다 싶었다.


그 중 하나가 요리였다. 엄마는 장 볼 때 스팍을 데려가겠다던 말을 잊지 않고 지켰다. 스팍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 만한 재료를 골라야 한다나. 어차피 할 일이 없던 짐은 따라가기로 했다. 리버사이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위노나 커크가 누구인지 알아볼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오와를 떠난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와 나란히 서 있는 자신이라면 꽤 알아보기 쉬운 표적이었다. 자신을 ‘너무’ 잘 아는 사람과는 마주치지 않아서 게중 다행이라고 할까. ‘말썽쟁이가 아주 잘 자랐구나’ 부터 시작해서 ‘스타플릿에서 잘 대접해 주디?’ 따위의 말 정도까지만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이었다. 다만 한 번 성가셨던 일은, 아이들을 데리고 쇼핑을 나온 자기 또래의 여자가 있었는데 스팍과 엄마가 온갖 채소들의 맛과 질감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여자가 옆에서 줄기차게 그에게 곁눈질을 해댔다. 짐은 반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 여자랑 잘 일은 없을 테니까. 아이들이 아주 어린 게 다행이었다.


짐은 오늘 저녁도 벌칸처럼 먹어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내일은, 휴, 짐 커크식 아침식사가 필요했다. 그도 인간이라 먹고 살아야 했다.


식사 후. 짐은 옛날에 썼던 보드게임을 꺼냈다. 역시나 예상대로, 엄마는 샘과 가족들이 분가해서 나간 후로 보드게임을 할 일이 없었던 터라 그의 제안에 크게 기뻐했다. 이번에 고른 게임은 둘 이상 하면 좋고, 특히 머릿속에 사전이 든 사람과 한다면 더 재밌는 게임이었다. 단지 황당했던 건, 스팍이 벌칸어를 내세우는 반칙을 쓸 줄은 몰랐다는 거다. 더군다나 엄마가 스팍의 편을 들어 진짜 있는 단어라고 확인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고. 게임의 규칙에 따르면 외국어는 사용하면 안 된다고 짐이 괜히 투정을 부리자, 스팍은 친절하게도 보드에 나온 영어단어 중에는 이미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외래어가 있다고 지적해 주었다. 스팍과 엄마는 합세하더니, 벌칸어는 알파벳 체계와 완전히 달라서 원래 알파벳으로 제대로 된 단어를 만들 수 없단 걸 짐이 알아챈 후에도 개의치 않고 뻔뻔하게 계속했고, 짐은 복수로 발음 나는 대로 적은 스펠링을 써서 반격했다. 경쟁심이 붙는 만큼 분위기는 즐거워졌다. 스팍은 여느 벌칸들 못지않게 무자비했고(그야 물론 스팍이 이겼으니까), 짐은 바보 행세를 해서 여전히 엄마를 웃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리고 밤이 깊었을 즈음에는 짐 역시 좋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여름날 밤에 끼익거리며 식어가는 익숙한 집의 소리를 들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그대로, 그는 한동안 고민으로 밤을 보냈다.






17 : 막다른 길 (1/3) →



역자의 말


끊어서 자주 올리겠다구 해놓고 또 통짜를....(笑 

어디서 끊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담부턴 정말로 조금씩 자주 올려볼게요.


전번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 연재물의 제목은 제가 임의로 지은 겁니다. 각 화마다 제가 집중했던 포인트를 제목으로 올린 건데 요번 16화에서는 서로 이어질 듯 엇갈리는 눈길이 제 관심을 끌었어요. 각자가 서로를 지켜보고 있을 때면 상대방의 눈길은 잠시 비껴가 있고. 알 듯 말 듯 미묘한데 이럴 땐 누군가가 먼저 용기를 내야겠죠.

먼젓번화부터 스팍이 짐에게, 감정적인 고민을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이미 거기서 스팍의 마음은 확고하게 굳어진 거라고 봅니다 전.

그러니까.... 빨리 결혼해


이번 화는 별다른 일이 별로 없고 소소한 내용이었는데, 다만 짐의 엄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살짝 있었어요. 그건 다음 화에 하기로.


다음 화부터는 단기간에 많은 일이 몰아칩니다.

날씨가 많이 더워요. 굿밤 보내시길.




  1.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문제가 있다면 기꺼이 듣겠다던 제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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