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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4 : (2/2)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4 : (2/2)

topsecretum 기밀선녀 2016.04.10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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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벌칸은 느끼지 않는다 (1/2)






다음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짐은 본즈와의 내기를 잊지 않고 떠올렸다. 그 날은 나가서 뛰지 않고 다음 24시간의 일정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조깅은 리버사이드에 가서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침대 한켠에서 스팍이 잠들어 있는 사이 짐은 조용히 일어나 여행일정을 짰다. 예약을 위해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오후 비행편이 있었다. 아침 먹고 작별인사도 할 수 있고, 엄마가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길 기대하고 있는 듯 하니 그 전에 시간 맞춰 갈 수 있어 마침 좋았다.


짐으로서는, 어떻게 사람들이 요리하는 걸 좋아할 수 있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어렸을 땐 엄마가 요리를 했고, 그 후로도 요리를 할 일이 없어서 요리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 그럴 만 했다.


그래서 막상 주방에 들어선 다음 아침식사로 뭘 만들어야 좋을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난감해진 중이었다. 대단한 만찬을 바라고 한 내기는 아니니까, 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되새기며 거실 소파에서 자는 본즈를 깨우지 않게 조용히 주방의 식재료를 확인했다. ‘짐이 만든 요리’ 보다 ‘짐이 안 만든 요리’가 더 인기 있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적어도 본즈라면 먹어줄 것 같아서 짐은 재료 몇 가지를 꺼내기 시작했다.


준비를 채 마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역시 스팍이었다. 스팍은 스토브에서 달궈지는 팬과 조리대에 올라온 재료들을 보고 짐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요리야?”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시절에 합성기로 무지하게도 해먹었던 식단이었다. 달걀 프라이, 소시지, 토스트.


“만들 줄 아는 게 이 정도라서.”


끄덕끄덕, 고개만 주억이는 스팍에게 짐이 물었다.


“넌 소시지는 안 먹을 테고. 달걀이랑 토스트는 어때?”


“괜찮아.”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벌칸인들은 아침식사로 어떤 걸 먹어?”


스팍은 생각해 보고는 대답했다. “가벼운 음식. 대게 탄수화물이 포함된 것을 먹지. 예를 들면 묽은 수프 같은.”


듣기만 했는데도 맛이 없을 것 같았다.


“뭐, 토스트도 탄수화물이라면 지지 않을 거야.”


맛이 없어 뵈더라도 아이오와에 도착하면 스팍을 데리고 장을 보러 가야겠다고 기억해 두었다. 스팍이 좋아하는 아침식사를 만들면 좋을 테니까.


스팍은 또 끄덕끄덕 하더니 식탁에 앉아 두 손을 앞으로 포갠 채 가만히 있었다. 더 얘기가 없어서 짐은 뒤를 넘어다봤다.


“왜, 뭐 필요해? 그냥 구경하는 거야?”


“…일전에 내가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했던 기억이 나. 하지만 막상 당신이 하는 음식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


짐은 웃었다. “신경 쓰지 마, 스팍. 그날 밤에 한 얘기가지고 널 부릴 생각은 없으니까. 그치만 도와준다면 환영이지. 어려울 거 없어. 나도 복잡한 건 하나도 만들 줄 모르는걸. 도와주고 싶다면 할 줄 아는 데까지 보여 줄게.”


스팍은 대답 대신 조리대로 가까이 와서 재료를 내려다보았다. 소시지가 거의 다 데워져서 짐은 슬슬 달걀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스팍에게는 토스트를 만들게 하고…


“생각해 보았는데.”


스팍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바로 옆에 서 있는데도, 돌연 목소리가 비밀스러워졌다.


“어제는 우리 둘이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에 당신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오늘은 닥터 맥코이와 헤어질 예정인데도 딱히 슬퍼 보이지 않아. 내가 알기로 닥터 맥코이는 당신의 절친한 친구지.”


이제 보니 우울한 얼굴로 스팍마저 알 정도로 온 동네에 광고를 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심지어 어제 스팍과는 저녁식사 때 잠깐 같이 있었을 뿐인데.


“음. 그게. 본즈는 내 배의 의무실장이니까 ― 엔터프라이즈가 출항할 때면 다시 보게 되잖아. 사실,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도 없어.” 그는 후후 웃었다. “몇 년간 같이 부대끼게 될 테니 몇 달 못 보는 것쯤이야 큰일도 아니야. 하지만 너는 지구에 머무르면서 일을 하겠다고 했으니, 적어도 다음 5년간은 서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거지.”


혹은 평생 못 보거나. 그 생각을 하니 다시금 우울해져서 짐은 애써 웃었다.


“널 체스로 깔아뭉개지 못하고 어떻게 그 세월을 버티려나.”


스팍은 웃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진심으로, 날 다시 플릿에 복귀시키기 위해 회유할 요량은 아니었던 거로군?”


“그래, 아냐.”


짐은 한숨을 지으며, 가장자리가 노릇해지고 있는 달걀 프라이를 뒤지개로 지분거렸다.


“나도 하기 싫은 걸 남들이 시키면 무척 짜증나거든. 역지사지라구. 그러니까 남에게도 싫다는 건 억지로 강요하지 않아.”


“그렇다면 내가 닥터 맥코이와 있기보다 아이오와에 당신과 함께 갔으면 하는 바람에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만이 있는 거로군.”


“뭐, 예컨대 그런 거지.”


스팍은 그런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스팍이라면, 친구라는 것에 대해 곱씹어볼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벌칸은 친구 같은 거 만들지 않는다고 하려나.”


짐은 괜히 그렇게 말해보았다. 적어도, 어떤 나이 많은 벌칸 한 명의 경우라면 잘 알지만.


“정말 그래?”


그렇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모르겠어.”


짐이 바라다본 스팍은, 그저 조리대 위의 찬장을 향해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여느 문명화된 사회가 모두 그러하듯, 벌칸 세계에서도 활발하게 교제하고 모임을 결성해. 직업적 이유에서, 지적 혹은 창작 활동을 배양하고 추구하기 위해서. 그런 교제를 통해 이점을 서로 전달할 수 있으니 지극히 논리적인 일이지. 존재하지도 않는 감정적인 요구의 충족을 위하여 교제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나 역시 다르게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생각에 빠진 스팍의 음성은 혼잣말처럼 조용했다. 짐은 끼어들지 않고 기다렸고, 곧 스팍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 종족이 몰살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내 종족에 대해 알고 있다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됐지. 적합한 벌칸이란 것도 결국 어느 정도는 겉보기에 달렸던 거야. 내가 외양만은, 지극히 벌칸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는 행간에 잠시 주저했다.


“내 아버지 역시, 어렸을 때 들어온 바와 같이 적합한 벌칸이 아니었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더라도 정도를 벗어난 건 아니었겠지.”


스팍은 짐이 고민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주지에 있는 동안 다른 벌칸인들을, 참사를 겪고 관계되어 있던 사람을 잃은 그들의 반응을 보았어. 이렇게 비유할 수 있겠군. 벌칸어 중 근래에는 쓰이지 않는 말들이 있는데, 쓰임이 없다 해도 여전히 존재는 하고 있는 것과 같아. 내가 어렸을 때 맹목적으로 믿었던 것들 중 일부는, 진실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짐은, 괜찮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주었으면 한다고 말할까 싶었다. 하지만 이미 전에 물어보았다가 거절당한 것을 기억했다. 스팍의 말은 지금까지 해주었던 이야기들 중 어느 무엇보다 가장 사적인 내용이어서, 어느 정도는 바로 이게 이전의 물음에 대한 답일 지도 몰랐다. 여기서 말이라도 잘못 했다간, 이제 갓 스팍이 자신에게 보내주기 시작한 신뢰가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말 것 같았다. 프라이팬 위의 달걀처럼 말이다. 짐은 달걀이 타서 난리가 나기 전에 얼른 뒤집었다.


“…굉장히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 같네.”


“그랬지.”


그 이상 가타부타 얘기가 없어서, 짐은 다른 말을 더 해야 하는 걸까 고민해 보았다. 최대한 주제넘지 않도록 들리는 말을 고르는 사이, 본즈가 기지개를 펴면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들어왔다. 스팍이 거기서 말을 끊은 건 아마 그것 때문인가 보았다. 청력이 좋으니 이럴 땐 참 편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모두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더 했다. 본즈에 뒤이어 곧 내려온 조안나는 약간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어제 자신이 그랬던 것과 같은 이유겠지 싶었다. 하지만 머잖아 좀 더 자기 나이에 맞는 사람을 만나서 극복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본즈가 가방을 제대로 쌌는지 확인해보는 게 좋겠다고 웅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서야 짐은 오늘이 조안나에게 있어 친구 두 명만이 아니라 아빠마저 다시 떠나는 날이라는 걸 기억했다. 어린 날의 짐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고 그나마 유사한 기억이라면 프랭크 삼촌이 전부였지만(지금 생각해도 이젠 그 작자와 접점이 없어 참 다행이었다) 조의 복잡한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짐과 스팍 둘 다 가볍게 하고 여행을 떠났던 지라 챙길 것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스팍은 원래 정리를 잘 해서 소지품은 전부 가방에 들어가 있었다. 다만, 딱 하나…


“그거 들어갈 자리는 있냐?”


본즈가, 펭귄 인형을 들고 빤히 내려다보는 스팍에게 흥 웃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꼭 안고 있기 좋은 물건인 것 같은걸.” 짐이 옆에서 히죽였다. “물론 스팍은 셔틀에 타도 멀쩡할 거야. 누구와는 다르게. 쟨 뭘 붙들고 벌벌 떨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시끄러워, 자식아.” 본즈는 성격도 좋게 받아쳤다. “이젠 나아졌잖아.”


“지구의 수생 조류를 본딴…정교함이 의심되는 품질의 봉제인형은, 이렇다 할 목적이 없는 물건이지.” 스팍은 인형을 잡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그렇긴 하지.”


짐은 인정했다. 스팍에게 그걸 준 것도 어차피 장난이었고 해서 조에게 작별 선물로 주고 가자 말하려던 참에, 스팍이 다시 배낭을 열었다.


“하지만 신축성 있는 소재이므로 들어갈 자리가 있을 거야.”


짐과 본즈 둘 다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믿기지가 않는다는 본즈의 표정에 짐은 조금 웃었다.


손님방에서 소지품을 모아 챙기고 2층 화장실도 확인하고 있을 때쯤에, 스팍이 문가로 고개를 틀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즈의 얼굴이 살풋이 일그러졌다.


“젠장할, 빨리도 왔군.”


“전 부인이 온 건가?”


스팍의 물음에 본즈가 그렇다고 툴툴대면서 아래층으로 향했다. 욕실에 남긴 소지품이 없다고 확인을 한 참이니 짐과 스팍도 뒤를 따라 내려갔다.


“어서 와. 좋은 아침이야.”


아래층에 막 다다르자, 문가에서 씩씩하게도 본즈가 애써 친근한 목소리로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방을 아직 안 치웠어. 오늘 오후에나 오는 줄 알았거든.”


“베를린은 벌써 오후거든.”


그녀는 별로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조슬린은 확실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연륜이 연륜인지라(본즈와 비슷한 또래일 것이다) 사무적인 태도와 질끈 묶어 넘긴 머리칼이 짐의 눈에는, 항해 초기 그를 그렇게도 갈구고 힘들게 했던 어느 준장이나 제독과 닮아 보였다. 물론 그 중에서 조슬린처럼 남부 억양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본즈와 비슷한 점이 느껴져서 짐은 경계를 늦췄다.


“괜찮아, 신경쓰지 마. 렌. 오히려 예상보다 훨씬 상태가 낫네. 주방은 예외지만. 뭐 주방은 금방 치우니까.”


조슬린의 시선이 짐과 스팍을 향했다. 짐은 그녀를 대하는 것이 상사를 대할 때와 비슷할 거라고 판단하고, 한 발 나서 예의바르게 말을 꺼냈다.


“그건 제 쪽의 잘못입니다. 오늘 아침 식사를 제가 맡게 되어, 합성기가 아닌 손수 만든 요리를 준비하느라 본의 아니게 댁의 주방을 어지럽혔습니다. 저는 짐 커크입니다. 연방 기함 엔터프라이즈 호의 함장이죠. 레너드가 제 의무실장으로서 재능을 발휘해주고 있습니다. 아주 귀중한 인재죠. 부인께서는 조슬린 맥코이 씨 되시겠군요.”


“맞아요, 반가워요, 함장님.”


그는 소개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그녀는 군인이 아닌 사람 치고 꽤나 아귀가 셌다.


“며칠 함장님이 신세를 지고 가신다고 레너드에게서 들었어요. 주방은 그대로 두세요. 귀한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수야 없죠.”


조슬린이 본즈에게로 흘긋 시선을 던졌다. 본즈는 나름대로 씁쓸한 표정을 비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손님이 식사 준비를 맡았다니 조금 의아하군요.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괜찮은 거지, 렌?”


“사실 그건 제가 내기에 져서 맡게 된 거였습니다.”


짐은 부러 쾌활한 웃음으로 대했다. 진심으로 웃음이 나올 기분은 아니었다. 조도 시무룩해져서 거실로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불쌍한 녀석.


“하지만 제가 본즈만큼 요리에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덕분에 아침에 다들 요리 같지도 않은 걸 먹게 됐어요. 그건 그렇고, 제 친구를 소개시켜주지 않았군요. 실례했습니다. 이쪽은 스팍입니다. 예전에 엔터프라이즈가 첫 출항을 했을 때 일등항해사로 근무한 적이 있죠. 갑자기 이 친구를 일정에 끼워 넣느라 레너드가 무리했을 겁니다.”


“무리까지는 아니었어.”


본즈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스팍과 조슬린이 서로 말없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설거지는 신경 쓰지 마. 안 그래도 곧 공항에 가봐야 하잖아. 조슬린 말대로 넌 손님이니…”


“아니야, 내가 해야지.” 짐은 이 이상 본즈에게 책임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본즈가 지금 신사처럼 구는 것도, 다 딸 하나만 보고 참고 있는 거기도 했다. “이륙 시간까지 아직 여유 있어. 얼마 안 걸리니까 괜찮아.”


본즈는 툴툴대면서도 그러라고 했다. “같이 하면 더 빨리 끝나니 도와줄게.”


짐은 이쯤 해서 스팍도 청소에 끼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스팍은 아무래도 다른 생각이 있던 모양이었다.


“맥코이 씨. 저는 일종의 음악가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 며칠 조안나에게 연주를 들려주니 좋아하더군요. 떠나기 전에 작별 인사 겸 마지막으로 연주를 해 주려 했습니다. 잠시 거실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괜찮으시다면 맥코이 씨도 관객으로 환영입니다.”


스팍이 무슨 속셈인지 알 것 같아서 짐은 입꼬리를 들었다. 조슬린이 그에게 매력적으로 웃어보였다.


“어머, 음악가시라고요? 연주해 주신다면 저야 좋죠.”


짐은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그 동안 저희는 실례하죠, 맥코이 씨. 주방은 레너드와 제가 잘 치우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조슬린이라고 하셔도 돼요.”


“그래요, 조슬린.”


짐은 본즈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남부의 정과 교묘한 예의가 맞물려서 당장은 폭탄을 피한 것 같았다.


이제 둘만 있게 되면 설거지 소리에 숨어 숨죽여 이것저것 불평을 늘어놓겠다 싶었던 예상과 달리, 본즈는 요령 좋게 일을 처리하며 멀쩡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쩐지 이런 식의 본즈는 오히려 무섭다 싶어질 대쯤 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네 전부인은 너무 과거에 매달려 있어. 네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잘 못 받아들이는 것 같아.”


본즈는 스타플릿에 뛰어들어 딸에 대한 것만 제외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기에 예전엔 어땠는지 사실 짐도 알 길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래. 내가 무슨 탓을 할 수 있겠냐, 짐. 조슬린은 그저 자기 길 외에는 모르는 여자야.”


그는 그다지 화나지도, 우울하지도 않아 보였다. 짐은 그의 속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본즈는 알아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짐은 이렇게 제안했다.


“본즈. 나랑 스팍이랑 공항으로 갈 때 같이 가지 그래. 맥주 한 잔씩 들고 얘기나 더 하자고. 어때?”


역시나 본즈는 고맙다며 웃었다. “좋지. 고맙다.”


두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스팍의 리라 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일을 계속했다. 연주의 대부분은 짐이 잘 모르는 클래식 음악이었다. 어디에서 작곡된 건지 전혀 모르는 것들뿐이었는데, 중간에 한 번 제목은 모르지만 지구에서 유명한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마침내 청소가 끝나자 본즈는 행주를 조리대에 던져놓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긴 하다만, 천하의 레너드 맥코이가 함선 타고 위험천만하기 짝이없는 우주로 나가길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짐은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 말 들으니까 기쁜걸.”


기쁘고말고. 정박한 후의 첫 연락에서 본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했다. 성실해진 자신의 모습에 조슬린이 좋아하는 눈치더라, 딸이 얼마나 많이 자랐고 또 커서 간호사가 될 거라는 조안나의 말에 어찌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등등… 짐은 본즈가 다음 임무에서 빠지겠다고 하면 어쩌나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본즈의 가정사가 본인의 바람대로 개선되지 않았다고 기뻐할 순 없지만, 스팍을 떠나는 게 어려운 만큼 본즈를 남겨두고 가는 것 역시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자신과 본즈는 수년을 좋은 친구로 지냈으니 헤어지는 게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고 짐은 생각했다. 하지만 본즈가 지구에 남는다고 해도 그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을 거다. 그게 다른 점이려나.


청소 후에도 비행 시각까지 시간이 조금 더 있어서, 설거지를 마치고 난 후 두 사람은 스팍의 연주회가 열린 거실로 합류했다. 조는 다시 활기를 찾았고 조슬린 역시 전남편이 돌발행동을 하지 않으리란 걸 알자 마음을 놓았다. 짐이 보기엔 바로 그게 연주를 하겠다고 시선을 돌린 스팍의 목적인 것 같았다.


다같이 스팍의 연주를 몇 곡 더 듣고 난 다음 마침내 짐이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왔다고 고했다. 스팍과 짐이 조슬린에게 집에서 머물게 해준 데에 대해 예의바르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사이, 조는 본즈가 지금 아주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별인사로 꼭 아빠를 안았다. 그 다음으로는 짐도 안아주었다.


“다음번에는 저도 자격이 되도록 준비해놓을게요. 아저씨랑 아빠가 가실 때 저도 데려가셔야 할 거예요.”


짐은 웃으면서 마주 포옹해 주었다. “나야 영광이지.”


스팍 역시 조안나의 포옹을 받았다. 놀랄 것도 없었다. 아니,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스팍도 마주 안아주었기 때문이다.


“조지아에 오시면 저희 집에도 가끔 들러주실 거죠?”


스팍은 한쪽 눈썹을 조금 들고 조슬린을 쳐다봤다. “네 어머니께서 허락하신다면야. 하지만 아무래도 일 때문에 바쁠 것 같아.”


“아마 만날 기회를 잠시 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조슬린 역시 약간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허락했다. “이번에는 인사만 겨우 나누고 헤어지게 되었군요.”


마침내 가방을 챙겨나오고 문이 닫히자, 본즈는 커다랗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당장 술이 들어가야 살 것 같다.”


짐은 일단 본즈의 손에 술을 쥐어주기로 했다. 푸념을 늘어놓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전부인에 대한 불평, 자신은 개과천선했는데 변한 게 없는 전부인, 머잖아 다시 딸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들을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본즈는 엔터프라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다. 곧 다시 만나길 기대하는 승무원들, 출항 후 기회가 되면 해보고 싶은 것들, 흥미로운 의학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개척지들 등등. 본즈는 기운을 차린 것 같았고,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짐은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붙였다. 스팍은 말이 많지 않았지만 술 대신 물을 윤활유 삼아 대화에 녹아들었다. 이따금씩, 본즈가 기대하고 있는 몇몇 연구 얘기가 나올 때마다 흥미가 이는지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갈라져야 할 시간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본즈는 짐의 어깨를 꽉 쥐고 곧 보자며 웃었다. 스팍에게는 자신이 한동안 이 지역에 있을 거라며 구직에 대한 조언이나 머물 곳이 필요하면 언제든 돕겠다고 말했고, 스팍이 감사를 표했다. 이륙 시간이 왔다.


짐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다시 승무원들을 소집할 일정을 짜는 게 대부분이었고, 본즈가 말했던 것들을 짬을 내서 확인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차피 사령부에서 내려온 잡일을 하느라 수시로 항로가 바뀌기도 하니까…


이륙한 후로 그의 동행자는 말이 없었다. 뭐 원래 스팍은 조용하니 신경쓰고 있지 않았는데, 예상 밖에 스팍이 불쑥 입을 열더니 해괴한 질문을 했다.


“지구인들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 서로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건가?”


“…아니, 맞는데. 보통은 그렇지.”


왜 그런 걸 묻는지 알 것 같았다.


“왜, 본즈와 조슬린 때문에 그래?”


“내가 보기에는 그들 사이에 긍정적인 감정은 많지 않아 보여. 기껏해야 불신과 얄팍하게 억누르고 있는 반감뿐이야. 그것이 지구인들이 말하는 사랑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그래, 그렇지.”


짐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도 자세하게 아는 바는 얼마 없었다. 알더라도 본즈의 가정사는 스팍한테 떠벌릴 사항이 아니었고 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게… 가끔 그렇게 엉망이 될 때가 있어. 아니, 가끔도 아니지. 빈번히 그래. 생각해 봐, 사람 하나만으로도 그 속이 얼마나 복잡한데 ― 그 복잡한 두 명이 영원히 같이 산다고 약속을 맺고 서로 부대낀다면 얼마나 더 골치가 아프겠어. 여튼 내가 알기로, 본즈는 수년 전만 해도 조슬린에게 미쳐가지고 푹 빠졌었거든. 결혼해서 같이 산 걸 보면 분명 조슬린도 그랬을 거고. 하지만 감정이란 건 언제라도 바뀔 수 있어. 맥코이 부부의 경우라면 확실히 그런 모양이고.”


“이상한 표현이군. 광기를 감정적인 끌림의 의미와 동일시하다니.”


“뭐.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완전히 미친 짓을 하는 경우가 참 많이도 있거든.” 짐은 그러면서 빙그레 웃었다. “왜, 너도 셰익스피어 정도는 알잖아?”


“극작가이지.”


“진짜 세상은 연극보다 훨씬 이상할 때가 많지.[각주:1] 뭐라 할까… 요는, 누군가를 많이 신경쓰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보다 그 사람을 상처주는 것이 더 힘들 거야. 고의든 아니든 간에. 물론 일부러 상처를 입히는 일은 별로 없으니 실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어. 너무 많이 사랑하면 그만큼 슬퍼지기도 하고, 외려 사랑하는 만큼 서로를 심하게 미워하게 될 수도 있어.”


“사랑이 다른 감정으로 변한다는 거로군?” 스팍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 했다. “당신의 행성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격언들에 의하면 사랑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던데.”


“…솔직히, 지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내가 전부 공감하는 건 아니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떻게 표현하면 그건 사실이야. 사랑은 다른 형태로 변하더라도, 절대로 아예 사라지지는 않아.”


“당신의 경험에 근거해 하는 말인 건가?”


옆을 보니 스팍이 심각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짐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야 많이 사귀어 봤지만. 딱히 난 애착을 갖는 남자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사람들이랑 자고 스치듯 보내고 그래도 괜찮은 걸지도. 다시 생각해 보면, 아까 그 말을 비슷하게 다른 식으로도 적용할 수 있어. 부정적 감정이 호감으로 바뀐다거나. 난 말이지,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널 친구로 여기거든. 돌이켜보면 우리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서로 뼛속 깊이 미워했잖아?”


“당신의 근골 체계가 나의 것과 차이가 있기는 하나 그것을 반대하지는 않아.”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센스에 짐은 흥 웃었다. 농담을 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주체가 스팍이 되니 자신할 수 없어졌다.


“여튼… 요는 알겠지? 인간들은 뭔가, 진짜로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누군가를 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그게 옳지 않은 방향의 감정일지라도. 벌칸들은 감정 대신 논리로 생각한다니까, 분명 이런 것보다야 나은 결정을 하면서 살겠지?”


“…잘 모르겠어.”


짐은 그것이 이전에, ‘벌칸도 친구 같은 것을 만드느냐’고 물었을 때와 비슷한 대답이었음이 떠올라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스팍은 무슨 생각인 걸까 궁금했다.


하지만 스팍은 고개를 돌려 앞을 본 채로, 입을 열지 않았다.






15 : 이해 (1/?) →



역자의 말


....수년만에 레포트를 쓰려니 정말 죽을 맛이군요. 하고 싶은 거 하는 대가로 과제지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번역을 더 잘 해 보겠다고 영어 관련 과목을 하나 수강하고 있는데, 어설프게 아는 영어가 마구 탄로나고 있어요.

이런 실력으로 용케 의역난무하는 번역을 하고 있었사와요.

이번 편은 특히나 의역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동안 번역하면서 영어의 압박에 푹 깔려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셜록때문에 많았는데 그나마 근 1, 2년은 편했습지요. 커크는 귀염떨면서 잉잉대고 스팍은 말만 어렵지 들춰보면 '님이 걱정됨'이라서 별로 어렵지가....

그런데 이번 편, 스팍의 독백 부분에서 딱 막혔습니다. 진심으로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이해한 부분으로 의역을 했습니다만 역시 원문을 읽어보시는 편이 좋을 듯 해요. 원문은 요기요기.




  1. 스팍의 말 “Works of fiction.”에 받아서 “Truth is stranger than fiction.” 앞서 극작가라고 번역했기에 맞춰서 연극이라고 표현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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