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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4 : 벌칸은 느끼지 않는다 (1/2)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4 : 벌칸은 느끼지 않는다 (1/2)

topsecretum 기밀선녀 2016.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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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3장, 재미있었어





제 14장

벌칸은 느끼지 않는다





따끈한 벌칸을 옆에 껴안고 맞는 아침은 정말 근사했다. 따끈해도 너무 따끈한 게 유일한 문제랄까, 짐은 몽롱하게 생각하다가 문득, 아직도, 스팍이 자신의 품에 누워 팔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완전히 깨어버렸다. 밤중에 깬 스팍이 자기가 아주 벌칸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등 돌려서 침대 끝까지 멀리멀리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팍은 여전하게 고른 숨을 짐의 어깨에 뿜고 있었다. 정말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다행이려나. 정말로 스팍이 거리를 벌리고 떨어져버린 걸 두 눈으로 보게 됐더라면 상처받았을 것이다.


이제 다 깨어버렸으니 꼼짝없이 그걸 봐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직접 스팍에게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을 보니 아무래도 생각보다 늦게 잠든 듯 했다. 오늘은 원래 그가 아침식사를 만들기로 한 날이었다. 맥코이 부녀는 이미 일어났을 것이다. 어쩌면 한참 전에 기다리는 걸 포기했을 지도 몰랐다.


소리죽인 한숨을 내쉰 짐은 아주 조심스럽게 스팍의 팔을 들어, 깨지 않도록 천천히 몸에서 거둬냈다. 그러다 스팍의 팔이 스스로 움직여 옆으로 치워졌고, 내려다보자 이제 깨어나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초콜릿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왠지 놀랍지가 않았다. 지난밤의 솔직했던 다정함은 사라지고, 스팍의 눈빛은 다시 멀끔하고 감정 없게 돌아와 있었다.


음, 적어도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눈치는 아니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짐은 조그맣게 말을 걸었다.


“미안.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더 자도 돼.”


“자고 있을 시간은 지났을 거야.” 대답하는 스팍은 내색은 안 해도 목소리가 조금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지.”


글쎄, 짐이 보기엔 있는 것 같았다.


“머리는 좀 괜찮아?”


그렇게 묻자 스팍이 텅 빈 얼굴로 멍하게 쳐다봤다. 어제 어리둥절해선 귀엽게 갸웃거리던 거, 벌써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짐은 설명을 붙였다.


“어지럽거나 하지 않아?”


스팍은 잠깐의 뜸 후에 답했다. “내 머리는 충분히 작동하고 있어.”


살짝 비껴간 대답을 하는 걸 보니 썩 괜찮지는 않다는 거겠다.


“뭐, 어찌 됐건 네가 좀 더 자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어. 간밤에 대단했으니까.”


그는 키득거리면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확실히 전례가 없는 신기한 경험이었어.”


따라서 일어나는 스팍의 대답엔 재밌다는 기색이 눈곱만큼도 담겨있지 않았다.


“전례가 없었으니 앞으로도 그런 독특한 경험은 없을 거야. 원인을 알았으니 실수를 반복할 일이 없게 해야지.”


아쉬워라. 진짜 귀여웠는데. 그렇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설탕을 향한 스팍의 반발심이 강해질 것 같았다. 짐은 시간이 많이 된 것 같아 단말기를 집어 시간을 확인했다가, 낮게 욕을 뱉었다.


“늦었다. 본즈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배가 많이 고프겠는걸.”


“내려가서 확인해보지 그래.”


짐은 몸을 쭉 펴고 나서 스팍을 슬쩍 돌아다봤다. 스팍은 침대 끄트머리에 옹송그리고 등을 돌린 채였다.


“그래, 그러려고.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상당히. 그렇지만, 내려가기 전에 샤워를 해야겠어.”


“알았어.”


미덥지 않은 짐이었지만, 돌봐줘야 할 정도로 스팍의 상태가 나빠보이지 않았다. 샤워를 하는 동안 정신을 깨우고 혼자 생각할 시간도 생길 것이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본즈와 조안나는 이미 아침식사를 마치는 중이었다. 주방에 들어서는 그에게 본즈는 별 얘기 없이 조리대에 몇 장 쌓아놓은 접시를 가리켰다. 그 옆에 조그만 와플이 오소록히 담긴 그릇이 보였다.


“일어났냐? 아직 따뜻해. 한 접시 들어.”


짐은 멋쩍게 웃었다. “미안, 본즈. 스팍이랑 얘기하다가 나까지 늦잠을 잤나 봐.”


“됐어, 너도 정신없었으니까. 오늘만 날이 아니야. 내일도 있어. 건 그렇고 그 녀석은 좀 어떠냐?”


“괜찮은 것 같아. 내려오기 전에 샤워한대. 아, 내일이라고 하니 생각나네. 조슬린은 언제 온다고 그래?”


짐이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은 일정에 대해 상의했다. 조슬린은 내일 저녁에 올 예정이라고 했다. 본즈는 사실상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이 소집되기 전까지 이 집에 머물러도 되는 입장이었지만, 본인은 썩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조를 생각하면 안 된 일이었다. 아이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니 예상했던 대로, 제 아빠가 어째서 일찍 떠나려는 건지 알아도 너무 잘 아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그게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은 없어야 할 텐데. 게다가 본즈가 당장에 멀리 가는 것도 아니었다. 도시 외곽에 스타플릿 기지가 있어서 미리 그곳에 몇 달 임시 거처를 예약해놨다고 했다.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보았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알려야 하는데, 일단 아침 먹은 후까지는 미루기로 했다. 스팍과 얘기도 해야 하고… 지금 알아보는 일자리가 마음에 든다면야, 한동안 이곳에 남아서 마무리를 지으려 할 거다. 부탁하지 않았어도 본즈는 먼저 나서서, 필요하면 기지의 숙소에 남는 공간을 줘야겠다고 해두었다. 어찌되었건 그 전에 스팍에게 먼저 물어봐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오늘 무엇을 할지 본즈와 상의했다. 여름방학 첫날이라 본즈는 조를 데리고 영화관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짐과 스팍더러 같이 와도 된다고 했다. 스팍은 여전히 위층에서 소식이 없었다. 잠깐 위로 올라가 보니 물소리가 멈춰 있었다. 그럼 곧 나오겠지 싶었다. 기다리는 동안 짐은 엄마에게 전화해서 도착은 내일쯤, 그리고 아마도 혼자 가게 될 것 같다고 전했다.


전화를 마치고 난 후에도 스팍이 나오질 않자 조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짐은 위층으로 올라가 욕실 문을 두드려 보았다.


“스팍?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목소리가 또렷해서 짐은 일단 안심했다. 스팍은 거의 마쳤다고 말했다. 안쪽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그냥 혹시나 해서.”


짐은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제 연락이 닿지 않았던 승무원들이 보내온 메시지를 읽으면서 한 귀로는 본즈가 틀어놓은 뉴스 보도를 듣고 있던 중, 스팍이 마침내 나타났다. 복도 쪽을 보고 앉아 있던 본즈가 제일 먼저 그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때 빼고 광을 냈네.”


돌아다본 짐도 놀라 눈이 커졌다. 스팍이 그렇게 욕실에서 오래 걸렸던 데에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샤워만 한 게 아니라, 수염을 밀고… 또, 머리카락도 확실히 잘라냈다. 벌칸인들 사이에서 대유행인 것 같은 그 바가지 머리보다는 조금 길고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숱을 쳐서 한결 정돈이 됐고 뾰족한 귀끝도 나와보였다. 그가 머리를 길렀던 좋지 못한 이유가 있었기에, 이런 변화에 짐은 어쩐지 감동마저 들었다. 이제 스팍은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 거다. 그거야말로 짐이 바라마지 않던 거였다.


스팍이 본즈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닥터가 주선한 자리에 집중에서 지원하려고 해. 곧 집을 나서게 되니 그 전에 좀 더 적합하게 세련된 차림으로 다듬는 게 좋겠다고 어제 생각했어. 머잖아 추가로 그 쪽과 면담을 주고받게 될 테니까.”


“확실히 세련돼 보여요.”


조가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했다. 지난번의 모습만큼, 이 모습도 마음에 드는 거겠지. 짐도 같은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수염이 까끌했던 얼굴이 되게 섹시했는데, 라며 아쉬웠다.


“이젠 좀 괜찮아?”


“내 상태는 지난밤보다 크게 개선됐어. 내게 알릴 사항이 없다면 돌아가서 지원서를 검토해 보도록 할게.”


“딱히, 특별한 얘긴 없고. 내일 낮에 아이오와로 가려고 했어. 네가 여기서 이력서를 넣는 거면 나 혼자 가는 거고.”


본즈가 옆에서 먼저 제안했다. “그러면 그 동안 방 하나 내줄테니까 잠시 내 숙소에서 지내. 일단 적당한 일자리를 구하고 나면 들어갈 곳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스팍은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게 가장 논리적인 선택이겠지.”


그렇다는 건 이제 스팍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스팍은 구직을 신경 써야 해서 같이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무엇이 중요한지는 짐도 잘 알았지만, 그래도 풀이 죽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 그건 그렇게 정해졌고.” 본즈가 말했다. “올라가기 전에 아침 좀 들지 그래? 남은 거 데워줄게. 얼마 안 걸려.”


스팍은 사양했다. “허기보다, 목이 말라. 물 한 잔으로 당분간 충분할 것 같아.”


확실히 숙취로군. 겉으로는 안 보여도 말이다. 본즈가 웃음기어린 시선을 보내왔지만 장단을 맞추기에 짐은 갑자기 너무 시무룩해졌다.


…그걸로, 전부 결정 난 거였다. 스팍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데 열중했다. 그거야말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거고 또 잘 된 일이다. 처음에 짐이 본즈네에 가기로 했을 땐 원래 본즈의 딸도 보고, 본즈와 같이 지내려고 한 거기 때문에 중간에 스팍이 잠깐 끼었다 다시 빠졌다고 해서 초기의 계획이 틀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 날은 이야기를 나누고, 게임을 하고, 정오 넘어서는 영화도 보러 갔다. 영화는 꽤 재미있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적어도 한없이 우울해지려는 기분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 아닌가. 이리 우울해서는 안 되는 거였으니까. 우울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생각뿐이고 잘 숨기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실 걸 사러 들른 가게에서, 조가 화장실에 간 사이 본즈가 말을 걸었다.


“그래, 왜 그렇게 기운이 쭉 빠졌어?”


친구로서의 목소리에서 한 단계 더 얹어서, ‘나는 함선의 군의관이고 네게 도마뱀주를 처방하겠다’는 권위적인 의사 전용 목소리였다. 대게 이럴 땐 본즈도 그의 마음을 대략 이해하고 있지만, 짐이 직접 털어놓길 바라는 경우였다. 그러면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본즈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럴 리가. 난 스팍이 다시 자립하게 돼서 기쁜걸. 애초에 그 녀석을 데리고 온 것도 그런 곳에 아무렇게나 두고 올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였으니까. 정말이야, 거기다 네가 좀 더 스팍을 돌봐준다고 기꺼이 나서줘서 고맙다구.”


“그렇지만 같이 아이오와에 가려고 기대하고 있었잖냐.”


짐은 끄덕였다가, 생각을 다시 했다. “스팍은 그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긴 거잖아.”


“뭐, 물론 그건 그런데 말이야. 계획이 좀 바뀌었다고 니가 시들시들해서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에이. 됐어.” 짐은 조금 뜸을 들였다가 가볍게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녀석이랑 같이 지내는 데 익숙해졌나봐. 스팍은 이력서 넣는 데 집중하고 있으니 이미 남은 시간이 없어진 거지. 하루도 채 같이 못 지내고 작별하게 생겼어.”


“어젯밤 그 난리로는 부족했냐?” 본즈가 웃었다. “그 놈도 같은 생각일 거다.”


본즈의 말이 맞을 지도. 일이 좋게 풀렸으니 기분 좋게 작별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데 마음만은 이제야 막 깨달은 사실에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진짜로 스팍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무의미했다. 스팍은 취해서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을 뿐이고, 그러니까 자신이 좋아한 스팍은 원래의 스팍이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달라진 스팍도 스팍 아닐까. 스팍은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웠을 뿐이지 실은 속으로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어제 그런 식으로 말한 것 같았다. 짐은 스팍이 숨겨온 진심을 알고 정말, 정말로 감동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엔, 스팍이 스타플릿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거 아니야?” 본즈가 조금 진지해져서 넌지시 물어왔다.


짐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머잖아 아이오와로 갈 거고, 거기서 지내다 마침내는 엔터프라이즈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스팍을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고 결심이 드는 날이 오긴 할는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 걸지도.”


이기적인 생각이다. 짐이 본인의 입으로 얘기했듯이, 스팍이 스타플릿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건 그의 자유다. 그것에 대해 해명할 이유조차 없었다. 짐이 그것을 파고들 권리는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잘 해왔으니, 어쩌면 더 나아가서 스팍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지,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을지 방도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결국에 진짜로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스팍에게 길을 제시해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본즈라는 사실에 약간 질투마저 들었다. 자신은 아이오와로 가서 엄마와 단둘이 있을 텐데 본즈는 스팍과 좀 더 지낼 수 있다는 데서 시샘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울해질만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짐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조용했다. 얼마나 표정이 어두웠으면 조가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래서 애써 억지로라도 웃는 낯을 했다. 역시 말할 기분은 나지 않았다. 스팍 대사와 얘기하고 나면 좀 기분이 나아질까. 아니, 오히려 눈앞에서 멀어질 소중한 관계를 되새기며 슬퍼만 질 거다. 어떻게 되든 그에게는 스팍 대사와의 우정이 있고 또 그에게서 애정을 받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스팍 대사는 스팍 대사이지 여기의 스팍과 같을 수 없었다. 스팍 대사와 그곳의 제임스 커크가 그러했듯 짐은 스팍과 그것을 쌓아올리고 싶었고 ― 그 진한 우정이 바로 손에 잡힐 듯, 번듯하게 자라서 두 눈 앞에 나타나 있었는데…


별로 할 말도 없고 할 기분도 아니었다. 그래서 저녁에 외식을 하러 간다는 말에 스팍이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도 그다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선택한 장소는 근사한 레스토랑이었다. 보통 짐이나 본즈가 끼니를 때우러 갈 만한 곳보다는 고급진 장소였는데, 본즈의 말마따나 여행 마지막 날이니 다같이 근사한 데로 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조안나는 아주 대단하게 차려입었고, 그 옆에 앉은 스팍도 조지아에 오기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골랐던 멋진 정장 차림을 했다. 반대편에 앉은 짐의 우울한 기분은 메뉴판을 들고 고심하는 스팍을 보면서 조금 위안을 받았다. 스팍은 결국 많고 많은 메뉴 중에 샐러드를 콕 집어 주문했다. 저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될 텐데. 뭘 잘못 먹어 어제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돌봐줄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하기야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스팍이 이제 설탕이란 설탕은 전부 거부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음식이 나오고, 스팍은 그간의 구직 활동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얘기해 주었다. 그를 눈여겨보아 면접 약속을 잡길 바라는 곳이 몇 군데 있다고 했다. 본즈가 그쪽 회사들에 아는 게 많아서 스팍에게 몇 가지 세부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짐은 이번에도 할 말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었다. 본즈가 스팍더러 자신의 숙소에 오래 머물 일은 없겠다는 얘기를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스팍이 본즈에게 말했다.


“닥터, 친절에는 감사하지만 닥터의 숙소를 빌릴 일은 없을 듯 하군.” 그러고는 짐에게 말했다. “영상 통신을 통해 면접을 하기로 회사 측에 요청해 두었어.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당신과 함께 아이오와에 가려고 해.”


“…뭐?”


“이미 정해진 약속을 임의로 물리는 건 경솔한 일이지. 더욱이, 당신의 어머니께서 나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계시기도 하고.”


“그…렇긴 하지.”


여전히, 짐이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스팍이 같이 가겠다는데 싫다고 할 수야 있을까? 그렇지만… 스팍이 직접 본인의 입으로 조지아에서 본즈와 머물러 있는 게 논리적이라고 했었다. 스팍은 항상 논리적인 일을 하지 않았던가?


“그치만 네 구직 활동에 영향이 갈 지도 모르는데…”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봐. 회사 측에서는 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어. 통보된 시간에 제때 면접에 응하는 한, 당신과 같이 가지 못할 이유가 없어.”


“그래, 문제같은 거 없지.”


짐은 문제고 뭐고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처음에 스팍의 가방을 빼앗다시피 해서 억지로 도움을 안겨주고, 체스에 내기를 걸어서 공항에 구걸하러 가지 못하도록 막았던 걸 생각해 보면. 그 때와 달리 지금의 스팍은 가장 논리적일 길 대신 자신의 선택으로 짐과 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종일 나오지도 않던 평소의 웃음이 반짝 돌아왔고, 짐은 스팍을 향해 방긋 웃었다. 방금 전보다 밥맛마저 훨씬 좋아졌다. 웃는 낯에 스팍이 같이 웃어주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스팍에게 최선인지 확실히 해두고 싶어, 집으로 돌아와 잘 준비를 하면서 물었다. “정말 여기 있지 않고 나랑 아이오와로 가겠다는 거지?”


“당신의 감정은 비논리적이지 않을 때가 없지만, 내가 함께 여행하겠다는 사실에 몹시 기쁜 듯 하군.” 스팍은 말을 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걸 당신이 기뻐하고… 또 당신이 내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적절한 일자리를 찾기까지의 과정에 도움을 주었으니, 나 역시 조금 더 당신의 동행자로 있어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어.”


“고마워.”


짐은 대답하며, 스팍를 데리고 가기를 원하는 건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다그치는 이성을 무시했다. 그는 어차피 벌칸도 아니었다.


“그치만 나한테 진 의무같은 건 없어. 처음에 했던 내기 기억해? 여기 같이 온 걸로 그건 끝이 난 거야. 더 이상 내기에 매여 있을 필요 없어.”


“당신도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내게 원조를 베풀었듯이, 나도 단순히 같이 가겠다고 제안하는 것일 뿐이야. 나는 당신과 달리, 기껍지 않다는 것을 강요할 사람은 아니지만.”


“괜찮아. 너랑 다르게 난 나쁜 일이 없다면야, 호의를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거든.” 짐은 그에게 웃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얻어낸 시간은 겨우 며칠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냥, 고맙다고 하고 싶어.”


“그렇다면, 난… 감사를 받아들일게.” 스팍은 그렇게 말한 다음에, 묘한 분위기로 행간을 미적였다. “우리 사이에 이제 빚은 없군. 마무리가 지어졌어.”


그렇다는 건 스팍도 지난밤의 일을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짐의 미소는 다정해졌다. 어제에 대한 얘기는 서로 꺼내지 않았지만 필시 불편했는지, 스팍은 여기 온 첫 날 그랬던 것처럼 최대한 침대 끄트머리에 바짝 붙어있으려 했다.


“…그렇게 멀리 갈 건 없잖아.” 짐은 누워서 스팍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지. 그러니 오늘도 나랑 폭 껴안고 잘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아. 뭐 그러고 싶다면 또 모르지만.”


히죽 웃는 짐을 향해, 스팍은 등을 대고 조금은 편히 누우면서 흘긋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 않아.”


“그러려니 했지.” 아쉬워라. “그래도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야. 어제 정도를 넘어간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그걸 네 잘못이라고 할 순 없잖아. 날 믿어.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돼.”


“부끄러움은 감정이야.” 스팍은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꾸했다. “벌칸은 그러한 것을 초월했지.”


하하. 웃기고 있네. 지난밤에 자기 입으로 그런 말도 해놓고는. 하지만 더 얘기는 않기로 했다. “알았어. 그냥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조명을 끈 후 두 사람은 고요한 어둠에 포근히 싸여 잠들 준비를 했다. 짐의 생각은 이리저리 뻗쳐나갔다. 며칠 더 같이 있게 되었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는 걸까 싶은 회의가 들었다. 스팍은 더 이상 지난밤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을 열어 보여주지 않을 거다. 어차피 추가로 주어진 시간 동안에도 얻지 못할 것을 아쉬워하고 곱씹으면서 허비하게 될 것이다.


짐의 돌고 도는 생각은 매트리스가 출렁이는 감각에 중단되었다. 스팍이 이불을 들추더니 뭔가 찾는 듯 손을 넣어 더듬거렸다. 이윽고 들려나온 것을 위로 들었다. 창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바깥 빛에 비추어진 그것은, 흰색 폰이었다. 지난밤 체스를 둘 때 스팍이 어지저찌 잡아낸 녀석이었다.


머리맡 서랍에 폰을 올려놓는 스팍의 너머에서, 짐은 조용하게 웃었다. “내일 같이 떠나게 되어 다행이야. 날 체스로 한 번도 못 이기고 가면 평생 아쉬워서 어쩔 뻔 했어.”


스팍도 도로 자리에 누우며 인정했다. “재경기라면 환영이야. 어젯밤의 경기는 무효로 해야 해.”


“당연한 소릴.”


그 순간, 스팍도 그가 그리워질 거라고 말해줄 것처럼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스팍은 어제처럼 웃어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짐을 바라보는 눈빛에 편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짐은 그 눈길에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14-2에서 계속...



역자의 말


이야기가 반을 달려온 지금, 드디어 스팍이 1화에서 거지줍 당할(?) 때의 부스스한 모습을 청산했습니다.

손도 잡고, 한 침대에서 자고, 축제 가서 데이트 하고, 여행도 다니고, 베스트 프렌드와 만나고. 엄마한테 소개시켜주려 가기까지. 할 건 다 했다. 이제 결혼만 남았군요



이 일 이후 결국 랩탑을 하나 더 샀습니다...헣헣핳 저는 이제 랩탑이 세 개에요~ 눈물

덕분에 다시 <중력을 거스르다>를 편집하고 있습니다.

어째 점점 한 화 분량이 길어져서, 적정 분량으로 잘랐습니다. 더 자르면 장면까지 중간에서 잘려서 좀 그렇지만, 비교적 자주 연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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