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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3 : 재미있었어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3 : 재미있었어

topsecretum 기밀선녀 2016.02.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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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2장, 현기증

↑ 표지





제 13장

재미있었어





스팍은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도움 없이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아마 스팍은 벌칸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취해볼 일이 없었을 거다. 그러니 컨디션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분이 안 좋다거나 괴로워 보이지도 않았고, 비틀거리면서도 잘 움직이고 조리 있게 말을 했다. 게임 중에 장난스럽게 짐에게 태클을 걸어 넘어뜨리고 웃기도 하지 않았던가… 짐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그 때를 곱씹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위에 올라탄 스팍의 웃는 얼굴을 생각하고 있을 만한 때가 아니었다. 어쨌든, 처음 술에 취하는 사람치고 스팍은 아직까진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였다.


식수대 근처에 음악가들이 연주를 하고 있는 무대가 보였다. 처음 듣는 노래들인 걸 보니 이 지역의 인디 밴드인 듯 했다. 짐은 그쪽으로 향하면서 한 팔에는 봉제 인형을, 다른 팔로는 스팍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지 않도록 살폈다. 걷는 동안 스팍의 몸이 서서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서, 쓰러지기 전에 어깨를 안아 지탱했다. 몸이 닿자 스팍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이내 잠자코 있었다. 이래도 괜찮다고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그렇게 식수대로 다가갔다. 지금까진 잘 하고 있더니 식수대 앞에서 스팍이 조준을 잘못해서 얼굴에 그대로 물을 맞는 걸 보고 조금 웃음이 나왔지만 너무 미안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취하니까, 스팍은 진짜로 귀여웠다.


몸을 펴고 소매 끝으로 얼굴을 닦는 스팍의 옆에서 짐이 물었다.


“어때, 버틸 만 해?”


스팍은 고개를 주억였다. 정신이 조금 다른 데로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응… 좋아. 나는 괜찮아.”


“그래.”


짐은 스팍의 허리를 양 팔로 감아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고—스팍이 이러는 모습을 보다니. 정말이지 희한한 일이었다—대신 웃어주었다. 스팍도 조금씩, 웃는 법을 배우는 사람처럼 조심스레 마주 웃었다. 윽, 이번엔 진짜 치명타였다. 짐은 꾹 참았다.


“스팍. 진짜로 아무것도 마시지 않은 거야? 조안나를 감싸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솔직히 얘기해도 괜찮아,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더래도 본즈는 애한테 심한 짓은 절대 안 할 테니까. 화가 난 것처럼 보여도 원래 심성이 착해서 기껏해야 어색하게 훈계나 하는 게 다일걸.”


“정말로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어. 조안나는 날 데리고 그… 관…람차?…를 구경시켜줬어. 조안나가 가지고 있던 팝콘을 조금 먹었고. 그 다음엔 내 몫의 팝콘을 구해서 돌아왔어.”


“이것 참…”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이러는 건지, 스팍에게 아는 게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스팍이 답을 할 만한 상태도 아니었고.


“…여튼, 가자.” 그는 스팍을 데리고 교문 밖의 셔틀 정류장으로 향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너 확실히 취한 것처럼 보여. 고등학교 행사에서 취해가지고 비틀대는 꼴을 보이면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할 거야. 게다가 혹시 상태가 심해질 지도 모르니까 집에 가자.”


“‘심하다’는 말은 나빠진다는 뜻이지. 나는 괜찮아.” 옆에서 비틀거리면서 스팍은 그랬다.


“그래…”


스팍이 이런 모습을 하고도 연신 괜찮다고 하는 걸 보니, 짐은 그동안 술을 마시러 가서 이 술집에서 취하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라고, 멀쩡하다고 말하던 예전의 자신은 무슨 꼴이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둘은 축제장을 빠져나왔다. 게임 부스와 행상인들, 구경꾼들, 무리지어 떠드는 학생들, 더러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까지… 지나오며 음악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짐은 스팍이 옆에서 잘 따라오고 있는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다.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예상치 못했던 일은 따로 있었다. 스팍의 손가락이 스친다 싶더니, 그의 손을 쥐고 깍지를 껴왔다.


놀라서 바라보자, 마주 시선을 보내오는 스팍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고, “좋다.” 그 한 마디 뿐이었다.


스팍은 인간으로 위장을 하고, 필요하면 악수도 했었다… 하지만 짐의 손을 잡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나, 벌칸인들은 보통 손은 커녕 남하고 닿는 것조차도 피하니 말이다. 모두 오해인 건 아닐까, 아무 의미 아닌 걸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그래, 나지막이 해가 지는 배경에 뒤에서 음악이 흐르고, 주변의 행인들 여럿이 손을 맞잡고 있으니 스팍은 그것이 평범한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합리화를 하면서도 짐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러네.”


그는, 스팍의 손을 살짝 쥐며 동의했다. 이게 어떻게 되어가는 상황인지 냉정하게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싶으면서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거니와, 스팍이 문자 그대로 손을 내밀 용의가 있다면, 또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라면 짐 역시 그 손길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손을 놓아야 했다. 바깥으로 나와 셔틀을 기다리는 동안 풀밭에 앉았는데, 짐이 단말기를 꺼내는 동안 스팍은 짐의 손이 없어지자 손이 아쉬워졌는지 대신 풀을 쥐어뜯었다.[각주:1] 현재 뉴 벌칸이 전화하기에 적절한 시간이 아닐 지도 모르지만, 이런 상황에라면 스팍도 괘념치 않을 거라 짐은 생각했다. 적어도 스팍 대사라면 말이다. 반면 여기 그의 옆에 주저앉아 있는 스팍은… 이러다 스팍이 노발대발하진 않을까 걱정됐다. 아님 앞으로 스팍과 손을 못 잡게 된다든가. 깍지를 꼈던 것, 스팍의 말마따나 정말 좋았으니까. 정 그렇다면 스팍이 듣지 못하게 멀리 떨어져서 전화를 해도 되는 거지만, 동시에 스팍을 이런 상태로 혼자 내버려 둔 채 다른 데로 갈 수도 없었다. 제길, 될 대로 되라지.


“화내지 말고 들어봐.” 짐은 미리 경고를 하기로 했다. “네가 이러고 있어서 걱정이 되거든? 그러니까 지금 스팍 대사에게 연락해서 네가 무엇에 영향을 받았는지 물어볼 거야. 혹시 내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게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게 다야. 괜찮겠지?”


느긋하게 풀려 있던 스팍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괜찮아.”


“그냥 확실히 하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네 개인사를 뜯어낼 생각같은 거 없어.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왜 상태가 이렇게 됐는지 물어보려는 것 뿐이니까, 알았지?”


스팍은 고개를 숙이고 부루퉁해져서는, 왠지 열중해서 풀을 뜯는 데 집중했다. 귀엽기는. 짐은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전화를 연결했다.


전화를 받은 스팍 대사는 보통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다 일어난 것이 분명한 기색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금방이라도 웃음을 지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맞아주던 그가 이번엔 얼굴이 보이고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짐, 예상치 못한…연락이로군.”


“네, 애매한 시각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근데 좀 곤란한 일이 일어나서요. 어떻게 된 건지 딱히 물어볼 사람도 없고 당신밖에 없더라고요.”


“내 젊은 쪽의 일인가?”


짐은 그렇다고 했다. 원래 같으면 바로 알았을 스팍 대사가 그렇게 묻는 걸 보니 확실히 그는 잠에서 깨는 중이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걱정되는 일이 조금 있어요. 더 심해지기 전에 상의를 하고 싶었어요.”


스팍 대사는 잠을 깨려는 듯이 눈을 깜박이다가 얼굴에 살며시 염려를 담고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사과하지 않아도 되네, 짐. 무슨 일인가?”


“그게 말이죠…”


짐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일단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간단히 말해서, 스팍이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본즈가 스캔을 해봤는데, 취했다고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자기는 아무것도 안 마셨대요. 저도 옆에서 계속 같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확신하거든요. 딱 한 번 시야에 없었던 적이 있는데 몇 시간 전에 조안나와 친구들이랑 잠깐 같이 있었어요. 열다섯 살짜리 애들이니까 그럴 만도 하잖아요. 스팍이 계속 그 애들이 술을 먹인 게 아니라고 하니 믿기는 하는데, 그럼 어떻게 된 건가 싶어요.”


“흠…”


스팍 대사가 생각을 하는 동안, 이쪽의 스팍이 옆에서 혼자 불편하게 몸을 틀었다.


“최근에 그가 무엇을 먹었지? 특별히 낯선 것이 있었나?”


“글쎄요. 저녁을 팝콘으로 때우긴 했는데 ― 사연이 길어요. 여튼 방금까지 먹을 만한 채식 요리가 없던 곳에 있었던지라… 방금은 물을 좀 마셨고… 그 전에, 조가 준 카라멜 팝콘을 좀 먹었어요. 그건 아마 스팍한테 생소했을 거예요.”


“카라멜 팝콘? 그게 정확히 무언가?”


“그냥 팝콘이에요. 위에 카라멜을 입힌. 카라멜은, 그러니까…”


짐의 입장에서도 달고 끈적하다는 거 외에 솔직히 카라멜의 정체가 뭔지 몰라서 설명하기가 난감했다.


“설탕으로 녹여 만든 시럽의 일종이에요.”


알았다는 듯이 스팍이 곧장 머리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그것이 요인이겠군. 가공된 당류는 벌칸인에게 취한 증상을 비롯한 특이한 효과를 일으킨다네. 적은 양이라도 두드러지게 영향을 미치지.”


짐은 화면을 빤히 쳐다보다가, 옆의 스팍과 눈이 마주쳤다. 완전히 말문이 막힌 표정을 보니 스팍도 모르고 있던 내용 같았다.


“…진짜로요?”


“진실이네, 짐. 그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건 놀라울 일이 아니야. 나 역시, 지구산 사탕을 섭취하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벌칸 신체의 특성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네. 인정하건데, 당시의 내 주변인들에게도 퍽 놀라운 경험이었지.”


무미건조한 말투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정말 여기의 스팍과 똑같아도 너무 똑같아 보였다. 짐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호라… 그러니까 요컨대, 벌칸인들은 설탕에 취한다는 말인 거죠.”


“요약하면 그렇지.”


벌칸이 설탕에 취한다니 너무 재미있었다. 딱 집어 재미있는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일단 지금은 웃음을 꾹 참기로 했다. 아직 신경 쓰이는 점이 모두 해결된 게 아니었다.


“미스터리 하나는 푼 것 같네요. 지켜보고 있어야 할까요? 혹시 특별한 지시사항이라도…?”


“나는 이 분야에 아는 게 많이 없다네. 그러한 상태를 유발하는 여타 다른 중독 물질과 비슷하게, 소화가 되고 나면 가라앉는 것으로 보여. 자네 종족이 알코올을 과다 섭취했을 시 보이는 증상과 엇비슷할 거야.”


“알았어요. 그런 거라면 제가 좀 익숙하죠.” 짐은 여전히 황당한 기색을 벗어나지 못한 스팍에게 웃어주었다. “나만 믿어. 내가 잘 돌봐줄 테니까.”


“지금 자네와 함께 있나?” 대사가 물어왔다.


“그럼요. 자초지종도 모르는데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죠. 여튼 정보 고마워요. 그만 다시 쉬세요. 전 본즈에게 소식을 전해야겠어요. 딸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줘야죠…”


“내가 잠깐 대화를 해도 좋을 정도로 정신이 깨어 있는 건가?”


무슨 대화를 하려고 하는 걸까? 짐은 궁금해졌다. “네, 얘기는 멀쩡히 해요. 스팍이 괜찮다고 하면…”


짐이 내민 손에, 스팍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기기를 받아들고 대사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스팍.”


스팍 대사가 어색하게 운을 떼었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쉬고 나머지 말을 털어놓았다.


“우리가 서로 오해를 하고 있던 것 같네. 나와 같은 길을 가도록 의도한 것은 절대 아니야.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나는 너를 조종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조언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어.”


그는 말을 멈추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이쪽의 스팍은 표정 없는 얼굴로 화면을 쳐다보기만 했다. 마침내 스팍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제 알아서 다행이로군.”


“내 실언에 의해 네가 이주지에서 떠나가게 된 것이라면,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내가 떠난 건, 그 곳에서 살 수 없어서야.”


스팍 대사가 슬픈 얼굴로 끄덕였다. “…네가 어떤 길을 선택하건, 너는 우리의 아버지가 축복을 내린 소중한 아들이야. 그 분은 아내를 잃었어. 아들까지 잃고 싶지는 않을 거야.”


스팍은 오랫동안 가만히 화면을 내려다보고만 있다가, 대답을 하지 않고 단말기를 짐에게 넘겨주었다. “못 견디겠어.” 그는 여전하게도 텅 빈 얼굴로 낮게 웅얼거렸다.


“괜찮아, 자…”


스팍이 일어나서 도망가 버리고 싶은 듯 몸을 틀었기에 짐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안심시켜 주었다. 스팍도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지금은 별로 좋은 때가 아닌 것 같네요.”


스팍 대사는 수긍했다. “이해하네. 기회가 있을 때 얘기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생각했을 뿐이네. 후에 더 얘기하세, 짐.”


“그래요. 고마워요. 이만 끊을게요.”


대사는 자신뿐만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스팍과도 더 얘기를 하고 싶을 것이다. 통신을 종료하고 스팍을 돌아다보자, 그는 멀리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아니, 허공이 아니라,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였다. 한참 후 스팍은 거의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조그맣게 속삭였고, 짐의 걱정은 깊어만 갔다.


“…집에 가고 싶어.”


그는 너무도… 쓸쓸하고 공허해 보였다. 짐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아까 스팍이 그에게 먼저 손을 잡았으니까, 짐도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는 스팍의 어깨에 한 팔을 둘렀다.


“거긴 집이 아니야. 어쨌든 이제 본즈네로 돌아가자. 가서 쉬어야지. 집은 아니어도 집만큼 가치는 있지?”


스팍은 고개를 살래살래 젓더니 짐을 올려다보고 조용히 속삭였다.


“응,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짐. 당신이… 더 힘써주지 않아도 돼.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그동안 몇 년이나 부족하게 지냈지만, 지금은 괜찮아.”


짐의 입가가 올라갔다. 방금, 드디어 ‘짐’이라고 한 거지?


“…그래.”


본즈에게 보낼 문자를 적느라 잠깐 떨어져야 했지만, 셔틀이 정류장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다시 스팍의 등에 팔을 감고 있었다. 스팍이 취해 있을 때를 노려 채우는 욕심이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팍은 싫은 기색도 없고, 그저… 흠, 지쳤다고 해야 하나, 평소의 스팍답지 않았다. 거기다 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까지 했다. 이런 그를 떨어뜨려놓고 싶지 않았다. 스팍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 속을 알 수는 없어도, 그나마 그가 지금은 편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날씨도 좋았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여기 앉아만 있을 순 없었다.


그동안 짐이 집에 돌아가게 도왔던 만취한 사람들과는 다르게도, 돌아가는 길에 스팍은 얌전하게 있었다. 조용한 걸 보니 생각을 하느라 머릿속이 바쁜 것 같았다. 심각한 생각들인지, 이게 스팍의 원래 모습인지 짐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걸 다른 사람들도 있는 셔틀 안에서 불쑥 묻지는 않을 것이다. 아예 묻지 말아야 하는 걸지도 모르지. 셔틀에서 내려 맥코이 가로 스팍을 데리고 오는 동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연방 법에 따르면 의식이 분명치 않은 사람에게 정보를 캐내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항목이 확실히 명시되어 있었다. 아니, 연방 법이 아니더라도 짐은 그런 개념에 동의했다. 스팍이 답을 해주는 상황이라면 그 이유는 그가 자발적으로 원해서여야지 취한 사이 멋모르고 당하기 때문이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것 때문에 한 편으론 죽을 것 같았다. 자신이 아예 나쁜 놈이었으면 이런 때에 스팍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공항에서 재회한 후로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이 기회에 얻을 수 있겠구나, 좋아할 법 한데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 스팍에 대한 걱정이 앞섰고, 또 그가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도록 믿음을 주고 싶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차라리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취한 스팍에게서 욕심을 채우지 말자고 마음먹은 다짐 때문에, 스팍을 부축해 위층의 방으로 올라가는 짐의 갈 곳 없는 불만은 커져갔다. 계단을 올라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또 손을 대야만 했다. 방으로 들어서자 스팍은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풀썩 엎어져서는, 몸을 스륵 굴려 위를 보고 대자로 누웠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좋다는 듯 태평했다. 눈을 감은 스팍은 한 손을 이마에 대고 슬슬 머리를 쓸어넘겼다. 긴 머리가 침대 위로 흩어졌다.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누워서 만족스런 신음을 자그맣게 흘리는 걸 보고 있자니,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파이크를 만나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기 전만 해도 짐은 이런 남자들과 지냈다. 주말마다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그랬고, 더러는, 토요일 밤이 깊으면 밤을 같이 보내기 위해 물색하던 그런 남자와도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스팍에게 느끼던 이상한 보호심이 자리를 틀더니 형태를 바꾸었다. 갑자기, 그의 몸에 올라타 삐딱한 웃음을 지으며 바지 지퍼를 열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여기까지. 더 이상 안 돼. 진정할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 있어, 알았지?” 어차피 스팍이 이 상태로 어디 갈 일이야 없겠지만. “목마를 테니까 물 떠올게.”


“내가 갈게.”


“아니야, 그냥 쉬어.”


바르작거리는 스팍의 가슴에 손을 짚어 도로 눕혔다. …얼씨구. 이젠 셔츠까지 말려올라갔다. 이거야말로 전혀 도움이 안 됐다.


“금방 돌아올게.”


주방으로 내려온 그는 시간을 들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술은 마셔봐야 못된 생각만 들게 할 테니 물만 조금 들이키면서 진정을 했다. 축제장에서 그 팝콘 가지고는 요기도 안 되었을 테니 스팍에게 먹일만한 게 있는지 둘러봤다. 단말기를 확인해 보니, 바쁜 사이 본즈에게서 문자가 몇 개 와 있었다. 역시나 본즈는 조안나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데 무척 안도했다. 조를 찾아내기 전에 그걸 알아서 다행이라고. 그 다음 문자로 본즈는 조와 함께 곧 돌아가겠다고 보냈다. 그만 조안나에게 실수로 스팍이 상태가 안 좋다고 말해버린 모양이었다. 짐은 빙그레 웃었다. 취한 스팍을 괜히 놀리고 건드리고픈 욕심과는 반대로, 조가 이런 꼴의 스팍을 보려 든다면 자신은 스팍을 보호하느라 바쁠 거다.


마음에 안정이 되었을 즈음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갈 준비가 되었다. 스팍은 침대에 누워있던 그대로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다행히 편해 보였다.


“자, 여기 물 마셔.”


짐은 스팍이 눕는 쪽의 머리맡에 (물론 지금은 스팍이 침대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컵을 올려두었다.


“뭐라도 좀 먹을래? 밑에서 뭔가 가져올까 했는데 네가 식욕이 있을지 몰라서.”


스팍이 고개를 느릿느릿 저었다. “나는 괜찮아.”


“정말 괜찮아?” 짐은 자신이 쓰는 쪽의 침대가로 와서 앉았다. “날 고생시키기 싫어서 또 말만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고?”


“정말로 괜찮아. 편해졌어.” 스팍이 눈을 가린 손을 치우고 살며시 눈을 떠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얼굴에 나른한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지금 느끼는 감가…감각, 매우… 신기해. 걱정되고…불쾌해야 맞는데. 그런데 아무래도…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이거… 즐거워.”


그렇다니 다행이긴 한데, 스팍이 저렇게 몽롱하게 헤헤거리고 있으니까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 진짜로 취했구나.”


스팍이 또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나는 취하지 않았다니까. 그 표혀…표현은…”


“좋아, 그럼. 맛이 갔다고 하자.”[각주:2]


놀리고 싶어지는 녀석이었다. 스팍은 골똘히 생각해 보는 듯 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자기도 웃기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보고 있으니 또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귀여워도 너무 귀여웠다.


“재미있었어.” 스팍이 불쑥 말했다.


뜬금없는 소리에 짐은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응?”


“오늘. 재미있었어. 저녁에.”


“다행이네. …나도 그래.”


“그렇게 재미있었던 적은 처음이야. 지금까진 한 번도…” 그러다가 말을 흐린 스팍의 미소가 점차 흩어졌다.


반쯤 내리감긴 눈으로 저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스팍이 키스를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물론 일어나서 그렇게 할 만한 체력이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그가 원하는 건, 짐의 쪽에서 먼저 몸을 숙여서… 짐은 거기서 생각을 끊어냈다. 이 사람은 스팍이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으로서는 그런 게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 스팍이 진짜 미치게 귀여웠으니까. 당장에라도 덮치고 싶게 만드는 거기도 했고, 완전히 다 풀어져서 접근하기도 쉬웠다. 그런 생각 역시 그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거였다. 하지만 스팍이라면? 그럴 리가. 게다가 그렇게 한다 해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스팍이 그를 미워하고 탓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혐오한다든가. 그 쪽이 더 나빴다.


그래도, 그를 올려다보는 스팍의 눈빛이 대담하게도, 도전적인 기세로 빛나고 있었고, 짐은 도전을 마다하는 데 용한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을까. 돌고 도는 번뇌 속에 손을 들려는 찰나,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음. 본즈와 조가 돌아왔나 보다.”


짐은 죄진 느낌으로 몸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스팍에게 가까이 허리를 수그리고 있었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몸을 뗐는데도 스팍은 그 눈빛 그대로였다.


“…나 있다고 얼굴은 비쳐야지.” 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있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랐다. “금방 돌아올게.” 스팍이 알았다는 듯한 희미한 소리를 흘렸다.


본즈와 조가 주방에 들어와 있었다. 본즈가 밤참으로 먹을 과일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스팍은 어때?”


“괜찮아. 지금 눕혀 놨어.” 눕혀놓는다니, 스팍에게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난데 어떻게 보면 이루긴 했다. “아직 깨어있어. 이거 조금 갖고 올라가도 돼? 과일을 먹이면 좀 나아질 것 같아.”


“어떻게 된 거예요?”


식탁에 앉아 있던 조가 끼어들었다. 짐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하면서 얼른 머리를 굴렸다.


“걱정할 거 없어. 벌칸한테 어쩌다 가끔씩 생기는 일이래.” 뭐,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심각한 건 아니니까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그래?” 본즈가 대신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길 바라야지.” 숙취에 시달리겠지만 어쨌든 스팍 대사가 한 말이 맞을 거다 싶었다.


“혹시…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니죠?” 조가 불쑥 물었다.


짐과 본즈는 시선을 교환했다. 본즈가 조에게 무슨 일인 건지 제대로 말해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짐도 다행이다 싶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대관람차를 타고 나서 갑자기 안 좋아진 거 아니에요? 벌칸들도 멀미를 해요?”


조는 완전 심각해져서 물었다. 짐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한은 아니야. 스팍은 소형 우주선을 몰고 대피한 적도 있거든. 걱정하지 마, 네가 잘못한 거 없으니까.” 안심시키는 그에게, 조안나의 너머에서 본즈의 미소가 전해졌다.


조는 다행이라며 눈에 띄게 안도했다. “제가 과일 갖다드려도 돼요?”


“짐이 잘 돌봐줄테니 쉬게 해주는 게 어떻겠니?” 본즈가 대신 대답하면서 접시를 하나 꺼내 과일을 올렸다. “벌칸에 대해서라면 짐이 더 잘 알거든.”


조가 아빠에게 싫은 얼굴을 했다. “그치만 아빠가 가까이 못 가게 하는데 어떻게 벌칸 생리에 대해 알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건 의대에서 배우는 거야, 우리 딸. 친구를 데리고 실험을 하는 게 아니라. 짐. 그러고 보니까, 미안한데 올라가기 전에 잠깐만.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어?”


“아, 그거.” 짐은 잠깐 생각했다가 장단을 맞췄다. “거실에 놔뒀어.”


“그래. 고마워.” 본즈는 조안나에게 하나, 짐에게 하나 접시를 나눠주고 손짓을 했다. “잠깐 와봐.”


짐은 시키는 대로 거실로 갔다. 머지않아 본즈가 따라와서 귀 닿지 않는 곳까지 나오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난 진짜 아빠 자격도 없는 놈이다. 착한 애라는 걸 알면서 내가 왜 그런 의심을 했는지―”


“상황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잖아.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조안나가 그 녀석한테 취할만한 걸 준 건 맞지. 너무 자책하지 마.”


“그렇긴 해도, 애한테 여지는 줬어야 했어. 의심해야 마땅한 것도 아니었는데.” 본즈가 엄한 얼굴로 한 마디 붙였다. “애한테 무슨 일인지 얘기하지 마. 자기 잘못이라고 마음 상할 거야.”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짐은 히죽 웃었다.


“좋은 애야.” 본즈는 또 그러면서 소파 뒤에 놓아둔 테디 베어를 집어올렸다. “그래, 스팍은 정말로 괜찮아?”


“내 생각엔 그런 것 같아. 그렇게 맛이 가지도 않았어. 좀 어질어질 하기만 한가봐. 거기다 자꾸 웃으면서 재밌었다는 얘기도 하고 ― 어느 정도는, 좋은 영향인 것 같아.”


“있잖냐, 놀랍지가 않아. 여태껏 본 벌칸은 죄다 목이 뻣뻣해서 억눌려 있었다고 해야 하나, 술이라도 거나하게 먹이면 좀 나아질까 싶었었거든.”


“나도야.”


아마 스팍 대사라면 다르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편한 모습을 보여줄는지, 자신이 그 제임스 커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디까지 허용해 줄는지 짐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의 젊은 스팍과 한동안 지내오면서, 짐은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 것도 같았다. 그는 소파에 놓인 봉제인형을 내려다보고 씩 웃었다.


“어쨌든, 그 녀석 지금 무드가 좋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야겠어. 안 좋아지면 이거 주고 껴안고 있으라고 해야지.” 그는 다른 손으로 펭귄 인형을 집어들었다.


본즈는 흥 웃었다. “사진이라도 찍어 놔라. 잘 자, 짐.”


“너도.” 짐은 위층으로 올랐다.


스팍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침대에 퍼질러져 있었다. 놀리고 싶어 어쩔 수가 없었다. “두뇌 풀가동!”[각주:3] 외치면서 스팍을 향해 펭귄을 홱 던지고는, 벌칸 녀석이 깜짝 놀라 얼른 잡으려고 두 손을 드는 모습을 흐뭇하게 감상했다. 펭귄 인형은 이미 그 전에 스팍의 가슴팍에 맞고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스팍은 떨어진 인형을 봤다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짐을 다시 쳐다봤다. 짐은 웃기만 했다.


“먹을 것 좀 가져왔어. 괜찮다고 했지만 혹시나 해서.”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와 앉으면서 가운데에 접시를 내려놓고 한 조각 집었다.


“싫으면 내가 다 먹어버려야지.”


“그렇다면, 이왕 가져왔으니까…”


일어나 앉으면서도 당황한 기색을 하던 스팍은 도로 펭귄 인형으로 눈길을 내렸다.


“그런데 내게 인형을 던진 거랑 사과를 먹는 게 무슨 관련이 있어?”


소리 내 웃는 짐. “전혀 없지.”


“알겠어.” 스팍은 천천히 그렇게 말했다가 다시 생각을 고쳤다. “사실은, 모르겠어.”[각주:4]


“신경 쓰지 마. 그냥 긴장 풀고 즐겨.”


짐은 그렇게 조언을 해주며 사과를 한 입 앙 물었다. 스팍이 이러는 걸 보고 있자니 자신도 술 몇 잔 마시고 함께 즐기고 싶었다. 본즈도 초대해서 같이 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술을 마시고 스팍과 어울릴 생각을 하다니, 안타깝게도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으니 안 될 말이었다.


어쨌든 재미는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피곤하다는 말과 달리 아직 애매한 시간이라 잠이 오지 않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스팍은 체스를 하는 게 시간을 때우는 데 좋은 방법일 거라고 생각한 듯 했다. 취한 스팍을 이겨주는 것쯤이야, 재미로 하는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짐은 여행용 체스 세트를 꺼냈다. 자석으로 붙이는 거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스팍이 연신 자세를 트느라 침대가 출렁여서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뭐, 스팍 쪽에선 차라리 판이 엎어지는 편이 나았을 거다. 스팍의 집중력이 한껏 흐트러져 있으니 이기는 거야 식은 죽 먹기였다.


“어떻게 한 거야?” 짐의 외통수를 받은 스팍은 체스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렇게 못 했으면 그게 더 놀라울 걸.” 짐은 웃었다. “뭐 어차피 여기 걸린 것도 없으니까.”


스팍이 체스판을 더 열심히 살펴보자 짐은 말을 고쳤다.


“그러니까, 내기를 걸고 한 게 아니라구.”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까 본즈에게 져버렸으니 내일 아침 준비는 영락없이 내 몫이네.”


“그거 내가 할게.” 스팍이 불쑥 끼어들었다. “닥터 맥코이 덕분에, 그동안 대…대저… 받아서…”


“대접을 받았다고?” 짐은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말을 채워주었다.


“닥터 맥코이는 여기서 우리가 머물게 해줬어.”


“알아. 그치만 이번 건 본즈랑 나 둘의 내기였어. 내기에서 졌으니까 벌칙을 받는 거야. 네가 신경 써서 뭔가 할 필요 없어.”


게다가 내일 아침이 되면 스팍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를 일이다. 아예 아침식사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일자리를 찾는 것도 도와줬어. 과학 쪽에.” 스팍은 조금은 의아한 듯이 생각에 빠졌다. “이렇게까지 해주리라고는… 오래 전에 내 분야에 맞는 일을 찾길 그만 뒀어. 계속 실패만 되풀이하고…”


그럴 만도 했다. 스팍이 겪어온 일은 아무리 벌칸이라 해도, 사람의 의욕을 자존감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짐은 신중하게 고개만 끄덕여 응해 주었다.


“그럼, 준비가 됐을 때 본즈에게 고맙다고 해. 깨고 나서 생각을 바로 할 수 있게 되면, 같이 본즈에게 뭔가 해주자.”


“하지만 난 당신에게도 빚을 졌어.”


“글쎄, 딱히…”


“정말이야.” 스팍이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날 책임지고 먹이고 입혔지. 안식처를 주고 돌봐줬어. 당신에게 충분히 감사를 표한 적이 없었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짐은 멋쩍게 손을 내저었다. “네가 고마워한다는 거 알아.”


그걸 스팍이 말로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것도 알았다.


단, 취했을 땐 다른 모양이었다. “아니, 해야 돼.”


스팍은 돌연 무척이나 진지해져서, 불안정한 몸을 한 팔로 지탱하고 좀 더 다가왔다.


“짐, 나는 그동안 포기하고 살아왔어. 내, 내… 제대로 말이 안 나와.”


그러면서 스팍은 잠깐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눈을 들어 짐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난 여태껏 포기한 채 지냈어. 이제 당신을 만나서… 당신이 많은…많은 걸 보여줘서… 재미있었고, 행복했어. 그렇게 느끼는 내 감정이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었어. 지금은, 부끄럽지 않아.”


“설탕에 취해 있기 때문이지.”


스팍에게 이런 말을 들어서 기뻤지만 내심 한편으로 스팍이 원래 같았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내일이 되어 스팍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지금 한 말을 후회할지도 몰랐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정말로 괜찮아, 스팍.”


“해야 해. 당신은 인간이야. 나와는 감정적인 요구가 달라.”


“스팍, 난―”


고마워, 짐.” 스팍이 기세도 좋게 감사를 표했다. “나를 도와주어서. 음식과 쉴 곳을 마련해 줘서. 위안을 주고… 여기저기 같이 다니면서 재미있는 걸 알려줘서…”


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서 펭귄 인형을 집어올렸다.


“거기다 이런 것도 주고.”[각주:5]


짐은 웃음을 꾹 눌러 삼켜야 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진지해져 있는 스팍이 펭귄마저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너무 웃겼지만, 하지만 무척이나 심각한 스팍이었다.


“큰 일도 아닌걸.”


스팍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다리에 펭귄 인형을 내려놓더니 두 손으로 짐의 손을 잡았다.


“큰 일이야.” 그가 힘주어 말했다.


스팍을 덮치는 건 안 돼. 절대 안 될 일이야, 라며 짐은 다시금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그걸 잘 알고 있었고 지킬 자신도 있었는데, 문제는 스팍 쪽에서 도움이 안 됐다는 거였다. 그를 보는 스팍의 눈빛은 무척 강렬했다.


“천만에.”


짐은 진심을 담아 대답하면서 그를 잡은 스팍의 손 위로 나머지 손을 얹었다.


“네 감사를 받아들일게.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아도 돼. 이제 알았으니까.”


끄덕끄덕, 스팍은 시선을 내려 두 사람 사이에 맞잡은 손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짐은 여기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솔직한 말로 내심,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버리는 게 두렵기도 했다. 그래, 이걸로도 괜찮아… 라고 생각한 자신이 조금 놀랍기도 했다. 스팍의 손은 엄청 뜨거웠고, 그의 마음의 장벽이 내려가 더욱 다가가기 쉽게 변해 주어서 더욱 끌렸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대로도 괜찮았다. 지켜주고 싶은 모습으로 보통이라면 하지 않을 말을 하고, 마음을 인정하고,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제야 짐은, 처음으로—정말 이것으로 처음이라는 걸 깨닫고 거듭 놀라움이 들었다—평행우주에서 자신과 스팍이 친구였다는 사실을 정말, 진심으로 믿을 수 있었다. 스팍 대사가 말한 대로 짐과 스팍은 친구였던 것이다. 스팍 대사와의 친교는 무척 즐거웠다. 하지만 그 후로, 짐의 소심한 바람과는 달리 델타 베가에서 스팍과 정신을 엮었을 했을 때 느꼈던 수준의 깊은 긴밀함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었다. 아니, 어느 누구와도 그랬다. 오늘까지만 해도. 어쩌면, 이 느낌이 아침이 되면 사라질 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기까지가 이게 최선일 지도. 짐은 스팍이 지원한다는 직장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이 없었지만 기회가 왔으니 스팍은 재주껏 자리를 잡을 거라고 믿었다. 짐이 우주로 돌아가 수행하는 동안 그는 여기 지구에 남아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정 아쉽다면 가끔 통화를 해서 얼굴을 보면 되지만… 그렇지만 스팍이 도움이 필요할 때 곁에 있을 수가 없고, 아침을 먹고 마주보고 앉아서 체스를 두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예정되어 있었고, 가질 수도 있었던 서로를 향한 진한 우정. 그것을 지금 이렇게 스치듯 느껴보는 것만이 결국 이 평행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그들의 최선인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 바로 지금만큼은 그 우정을 누리고 있으니 소중히 아껴야 했다. 짐은 스팍을 보고 다시 웃음을 지었다. 스팍은 마주 웃지 않았지만, 눈빛에 진심이 담겨 진지했더라도 기색만큼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 대신 약간은 편해져 있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짐은 마주 쥔 손으로 다시 눈길을 줬다. “시간 꽤 많이 됐어. 난 이제 자야겠다. 너는?”


“나 역시.”


그러면서 짐과 엮인 손을 풀어내리는 모습엔 망설임이 선연했다. 솔직히 짐도 그다지 놓고 싶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놓아야 할 거였다. 그는 나눠먹고 깨끗이 빈 접시를 치워놓은 다음 일어나면서 체스 세트도 옆에 올려놨다.


잘 준비를 한다고 부산 떨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옷만 편한 걸로 갈아입기로 했다. 위에는 입고 있는 티셔츠로 충분했고 바지만 느슨한 걸로 바꿔 입었다. 스팍은 약간의 도움이 필요했다. 짐은 사심 가득한 마음으로 속옷만 남기고 스팍의 옷을 전부 벗기고 싶었지만, 스팍을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만 현실로 옮겼다. 이걸로도 괜찮은 것 같았다.


괜찮은 것 또 하나. 간단하게 욕실에 다녀온 후,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스팍이 가까이 다가와 짐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깜짝 놀랐지만… 생각보다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보단 썩 기분이 좋았고, 스팍의 옆구리 위에 팔을 올려놓고 무슨 농담을 던질 지 장난스레 생각했다. 널 두고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야,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그러는 대신, 잘 자라고 속삭여 주었다.






제 14장, 벌칸은 느끼지 않는다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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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ine, you're wasted, then.” GTA에서 캐릭터가 사망하면 뜨는 바로 그 메시지. <d>너님은 갔습니다</d> [본문으로]
  3. “Think fast!” 자꾸 채모씨가 떠올라서 의역한 건 비밀. [본문으로]
  4. “I see,” Spock said slowly, then reconsidered. “Actually, I do not.” 귀여움 +2 상승. [본문으로]
  5. 작가의 의도를 알겠다. 작가는 독자를 심장마비로 죽일 셈인 거다. (진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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