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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2 : 현기증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2 : 현기증

topsecretum 기밀선녀 2016.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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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1장, 기억

↑ 표지





제 12장

현기증





스팍은 시간을 들여 신중히 일자리를 검토했다. 본즈가 조를 데리러 학교에 간 동안, 짐은 그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패드를 들고 이곳저곳 기록을 살펴보거나 근무 이전 신청서를 들여다보면서 몇 시간 있다 보니, 이렇게 빈둥빈둥 있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본즈가 나가기 전에 냉장고를 뒤져서 알아서 챙겨먹으라고 해뒀기 때문에, 짐은 간만에 건강에 안 좋은 걸로 근사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스팍에게 가서 뭘 먹을지 물어봐야 할까? 혼자 가서 저녁을 해먹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찰나, 마침내 스팍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떻게 돼가?”


“내가 예상한 대로, 면담 과정에서 평가 시험이 있었어.”


스팍은 대답과 함께 그가 있는 쪽으로 왔다.


“막히는 점이 없었으니 아마도 스타플릿 아카데미로의 진학에 지원했을 때와 비슷한 결과이리라 봐.”


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잘 된 것 같아?”


“어려움은 없었어.”


놀라울 일도 아니지. 짐은 씩 웃었다.


“다행이네.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문제점이 하나 있어. 내게는 그쪽과 연락을 계속 취할 만한 수단이 없어.”


“마침 잘 됐네, 그럼. 지금 아직 저녁 6시밖에 안 됐거든. 나가서 네가 쓸 만한 거 뭐 좀 더 사오자.”


스팍은 뭔가 말하려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는지 대신 눈을 슬며시 피했다.


“이미 앞서 관계가 덜한 일에도 도움을 받았으니 이걸로 도움을 거절하는 건 비논리적인 행동일 테지.”


“바로 그거지. 우리 지난번에 봤던 쇼핑센터 있지, 거기 한 번 가보자.”


아니나 다를까 쇼핑센터에 통신기를 판매하는 곳이 있었다. 신세지는 입장이라고 해서 제일 싼 단말기를 고를 거라 생각했는데 스팍은 마냥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기능과 입력 방식을 비교해 보면서도, 제대로 두고 쓸 만한 가격이 좀 더 나가는 것들은 제외했다. 그가 고른 모델은 겨우 고물을 면한 거였지만 그래도 그가 다시 자립해서 새것을 구하기 전까지는 필요한 역할을 다 해줄 것이다.


센터 내의 푸드 코트에 앉아 단말기를 구동시켜보는 동안에도 스팍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조력에 감사해. 추후에 반드시 갚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우선은 지원하는 직장에 합격을 해야겠지. 미안하게도, 약속은 못 할 것 같군.”


“괜찮아. 굳이 갚아주지 않아도. 정말 상관없어.”


짐은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 했다. 이번에도 역시 스팍은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렇지만 이내 스팍은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마음을 바꿔서 얘기를 하지 않을까 싶어 짐은 잠시 기다려봤다가, 분위기를 바꾸기로 했다.


“으음… 본즈는 조를 데리러 먼저 학교로 갔고. 네가 일을 마치고 나면 같이 뒤따라 나가겠다고 미리 말해뒀어. 끝나면 곧바로 거기로 갈까?”


스팍은 그렇게 하자고 한 뒤, 잠시 머뭇거렸다. “나 때문에 일정이 미뤄지는 것을 사과할게.”


“중요한 일을 하는 거잖아.”


“그래.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조안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렇겠지.”


설마 조안나가… 아니, 아니다. 학교에서 하는 행사라고 했으니 스팍을 끌어들여 뭔가 하려는 건 아닌 듯 했다.


새로 산 스팍의 단말기에 내려진 첫 임무는 조안나의 학교를 찾는 것이었다. 그래봐야 시험거리도 못 됐지만. 짐은 지도상의 학교 위치를 보고 거대한 부지 크기에 깜짝 놀랐다. 위에서 내려다본 거리뷰에서는 건물 옆 공터에 지어진 임시 돔 건물과 알록달록한 천막 사이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재미있겠다. 사람들 사이에서 본즈와 조를 찾는 거부터도 숨은그림찾기 같겠는걸.”


두 사람은 학교로 향하는 셔틀의 정류장으로 향했다. 스팍은 단말기를 꺼서 주머니에 넣으며 대꾸했다.


“지구인들은 자주 ‘재미’에 대해 매우 이상한 개념을 품는 듯 하군.”


“비꼬는 건 접어둬. 네가 축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말야, 곧 보면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야. 뭐 적어도 지구인들에게는 재밌으니까.”


목적지에 도착해 펼쳐진 광경은 생각보다도 더욱 거대했다. 지역 주민들이 함께하는 축제라 잘 꾸며져 보기에도 좋았다. 돔 건물 몇 군데에는 형형색색의 커다란 깃발도 걸려 있었는데, 잘 보니 그 중 한 군데에는 스타플릿 로고가 붙어 있었다. 그는 스팍을 향해 씩 웃었다.


“좋았어. 아수라장 속으로 들어가 볼까?”


“그래.”


북적한 인파를 향해 눈길을 바로한 스팍은 흥미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입장료는 기부 형식이라서, 짐은 본인과 스팍의 몫으로 후하게 냈다. 학교 측에서 모금을 받아 여러 가지 시설을 제공하는 식인 듯 했는데 꽤나 알차 보였다. 심지어는 축제의 백미라고들 하는 고전적인 게임 부스와 그림이 전시된 구역을 지나자 한쪽에 무중력 체험관도 보였다. 짐은 옛날 생각이 나서 조금 흥이 들었다.


“저거 말이지, 나 어렸을 때 완전 좋아했어. 이젠 우주에서 실컷 즐기니 여기서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반면에 스팍은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나 역시 저런 시뮬레이터를 본 적이 있지만 유흥 목적의 이동형은 처음이군.”


처음에는 타러 갈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스팍이 공중에 붕 떠서 예의 그 완전히 심각한 얼굴로 있을 걸 생각하니 없던 의욕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한 번 들어가 볼까?”


결과는 딱 예상했던 대로였다. 입장하자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스팍이 공중에 붕 떠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게 정말 마음에 들었다.


“생각했던 대로야. 강한 자기장으로 생성된 대체중력이로군.”


스팍은 시험 삼아 수영을 하듯 팔을 저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중력의 밀도가 불균형해. 미립자 단계의 분자 구성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그래?” 짐은 바닥에서 도약해 스팍보다 조금 위쪽으로 떠올랐다.


“감지가 돼. 장기적으로 이어지면 이런 환경은 지구인에게 건전하지 못한 영향을 끼치겠지.”


“그래서 축제의 묘미란 거지.”


아이들 대여섯이 들어와 방방 뛰며 깔깔대느라 소란스러워졌다.


“겨우 하루 여기 잠깐 있다 철수될 거니까. 이 안에서 사람이 오래 있을 일도 없을 거고.”


“다행이로군. 혹시…” 스팍은 다시 팔을 휘저어 짐을 지나 천장으로 향했다. 돔의 천장에 붙은 장치를 보려고 하는 듯 했다.


공중에 떠서 손쉽게 장치를 검사하는 스팍의 모습을 보니 정말 원래의 스팍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이런 환경에 있어야 스팍은 본래의 모습일 수 있었다. 짐도 그랬고.


“너 이렇게 보니까 무중력 우주에서 난 사람 같은걸.” 짐은 천천히 따라 올라가면서 감상을 말했다.


스팍이 밑을 흘긋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스팍의 귓가에서 머리칼이 흔들리면서 뾰족한 귀끝이 드러났다. 짐은 눈을 떼지 못하고 그곳을 바라봤다.


“나는 벌칸 행성 지표면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서 태어났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짐은 큭큭 웃었다. 아래쪽에서 아이들이 자유자재로 몸을 뒤집고 뛰놀았다. 무중력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도, 하고자 하는 몸짓을 하려면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돔 벽면을 밟고 추진력을 얻어 홱 공중제비를 돌았다. 이런 건 정말로 우주에 나가 있을 때는 절대 하지 않을만한 행동이었다. 상상만 하다 진짜 해보니 재미있었다. 같이 하자고 끌어들여도 스팍은 절대 넘어오지 않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체험관에도 스타플릿 로고가 박혀 있었다. 스타플릿에서 제공해서 만들어진 우주선 체험의 일종인 듯 했다. 물론 고등학생 아이들이 관심을 가진다면 스타플릿에도 좋은 일이니까. 짐은 이런 건 그냥 지나갈 수 없다며 스팍을 꾀어서 들어가 봤다. 조종 장치가 약간 뭉뚱그려져 있는 걸 제외하고 시뮬레이션이 꽤나 사실적이어서 조금 놀라웠다. 스팍은 그 중 부품 하나를 알아보고 몇 전 전부터 연방 함선에서 개편을 하면서 교체되어 나온 구 모델이라고 했다. 모형이 아니라 실제로 쓰이던 기기지만 더 이상 군사기밀이 아니라서 이런 놀이터에 체험용으로 쓰일 수 있는 거였다. 두 사람 다 조작이 복잡해질수록 손이 따라가기 힘들어 분주해졌다. 특히나 짐은 지금 쓰고 있는 콘솔에 손이 익어놔서 자꾸만 틀린 부분을 눌러댔다. 어쨌든, 둘은 그럭저럭 시뮬레이션을 재미있게 완수했다.


구경하다 보니 짐은 몹시 허기가 져서 다른 건 일단 제쳐놓고 사람들이 들고 다니던 옥수수튀김을 어디서 파는지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러다 본즈를 발견했다. 그는 부스에서 음료를 홀짝거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본즈 저기 있다!”


그는 스팍의 어깨를 두드려 아는 척을 하고 본즈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참 찾았네. 하도 북적거려서 아예 못 만나는 줄 알았어.”


본즈가 지친 듯 대꾸했다. “사람 잃어버리기 딱 좋은 곳이지. 조가 한 시간 전에 친구들이랑 간식 가지러 간다고 했다가 그 뒤로 감감 무소식이야. 걱정은 드는데 이것들이 날 내버리고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어.”


“방학 전날이잖아. 친구들하고 원 없이 어울리고 싶겠지.”


“하긴, 친구들이 옆에 있는데 늙은이까지 매달고 다니긴 싫지 않겠어? 뭐 여튼,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은 해놨으니 그 전에 못 보면 거기로 가야겠지.”


“그럼 그 때까지 여기 서서 죽치고 있으려고?”


“아니. 방금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지금은 잠깐 쉬고 있는 중. 저기서 음악 틀어주더라. 이쪽으로 가면 먹을 걸 팔고…”


짐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갈 곳 정해졌네. 뱃가죽이 들러붙겠거든. 좀 이따 여기서 다시 볼까?”


“아냐. 같이 가자. 이걸 여기서 마시나 거기서 마시나 똑같이 레모네이드인데, 뭘. 너는, 스팍? 배 안 고파?”


“적당한 게 있다면야, 나 역시 식사할 때가 된 것 같으니.”


“그럼 가자구.” 짐은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하면서 먼저 앞장섰다.


놀라울 일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먹거리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있는 것도 대게가 향신료를 아끼지 않은 음식들이었다. 분명 스팍의 입맛은 아닐 텐데 스팍은 자꾸 괜찮다고, 나중에 여기서 챙겨 먹겠다며 고집이었다. 스팍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아왔던지라 짐은 내심 걱정이 들었지만, 뜻대로 하게 두었다. 짐은 가판대에 본즈와 나란히 서서 옥수수튀김을 게걸스레 해치우며 스팍의 면접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기를 때우고 난 후에는 게임을 하러 가기로 했다.


그 때 본즈가 조의 목소리를 들었다며 일행을 불러세웠다. 과연 뒤를 돌아보니 조안나가 또래 여자아이 몇 명과 함께 급히 뒤를 따라오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 아빠! 미안해요. 금방 돌아온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어요.”


“됐어, 그러려니 했지. 그래도 그 사이에 짐이랑 스팍을 찾았잖냐.”


“아, 맞다! 얘들아, 이 분은 짐 커크라고 해.” 조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 아빠가 일하는 함선의 함장님이야.”


“함장? 짱이다!” 아이들 중 하나가 외쳤다. “저희 아빠도 함선에서 일하세요. 그냥 대위지만요.”


“그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


“로버트 마스터즈요. 기술 부서에 계세요. 누군지 아세요?”


짐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다.”


“그리고 이 아저씨는 스팍이야. 벌칸에서 오셨어.”


짐은 스팍의 기색을 확인했다. 스팍은 그냥 그렇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출신을 숨길 생각은 별로 없던 듯 했다.


“와, 나 벌칸 처음 봐.”


“유감이에요, 아저씨네 행성이…”


조의 친구 중 하나가 말을 꺼내다 뒤를 흐렸다.


“지구는 마음에 드세요? 벌칸은 여기랑 엄청 다르다고 그러던데.”


“다르지. 벌칸은 이곳보다 기후가 훨씬 온난하고 물 자원이 매우 적어. 문화적 차이점 역시 무수히 많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야.”


“그럼 다행이네요.” 벌칸은 처음 본다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주억였다. “조가 그러는데 아저씨는 음악가라면서요?”


“가끔씩은.”


짐은 속으로 웃었다. 조는 친구들에게 스팍에 관해 어디까지 얘기를 한 걸까?


그러고 보니, 착각일 지도 모르지만 왠지 스팍의 시선이…


아. 착각이 아니었다. 스팍의 눈길이 조가 들고 있는 작은 종이봉투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안나, 하나 물어봐도 될까. 그건 팝콘의 일종인 건가?”


“네. 카라멜 팝콘이라는 거예요. 드셔 보실래요?” 조가 팝콘을 하나 꺼내 건넸다.


스팍은 조금 주저하다가, 손을 뻗어서 몇 알 더 집어와 하나씩 신중하게 우물거렸다.


“이건… 보통 팝콘보다 상당히 달아.”


아이들이 눈짓으로 서로 웃었다. “원래 그렇게 단 거예요. 어떠세요?”


“괜찮아. 나는 일반적인 형태의 팝콘이 더 나은 듯 하지만.”


그러면서도 스팍은 손에 든 나머지 팝콘을 입에 더 넣었다. 짐이 보기에 그는 확실히 팝콘에 관심이 지대했다.


“이거 가져온 데서 그냥 팝콘도 팔아요. 안내해 드릴까요?”


“그렇다면 고마워.”


여자아이들이 또 히히덕대며 눈길을 주고받았다. 조가 환하게 웃었다.


“알았어요. 이쪽이에요. 아빠, 금방 갔다 올게요.”


그러더니 친구들과 함께 스팍을 데리고 가버렸다.


“나도 따라가 봐야 하는 거 아닐까?”


본즈는 한숨과 함께 짐에게 물었다. 짐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십대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인 스팍이라…


“벌칸인이잖아, 잊었어? 혼자 알아서 처신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이왕 축제에 왔으니 원하는 것도 먹게 해줘야지.”


아카데미로 그를 데리고 온 이후 줄곧 짐이 모든 비용을 대고 있었지만, 스팍은 공항에서 그에게 받은 돈을 크레딧 칩에 갖고 있으니 자기 먹을 것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테였다.


“나중에 알아서 별 문제 없이 여기로 찾아올 수 있을 거야.”


아닐 지도 모르고 말이다. 마침내 스팍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분 후의 일이었다.


“조안나가 대관람차라는 기구를 안내해줬어.”


스팍은 어딘지 멍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못마땅하게 툴툴대는 본즈를 보고 짐은 웃었다.


“뭐, 어쨌든 먹을 걸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네.”


그는 고갯짓으로 스팍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그랬지. 양해를 구하고 먼저 나왔어. 조안나와 친구들이 대화에 열중한 듯 해서. 그러는 동안 먹기만 하고 있는 것은 무례할 테니까.”


“그렇다는 건 이것들이 또 어디로 가버렸다는 거로구만.”


툴툴대는 본즈에게 짐이 위로를 했다.


“에이, 이렇게 생각하자. 우리 세 남자만 남은 거야. 애들은 두고 우리들끼리 재미나 보자고. 일단 스팍이 저녁식사를 다 하고 나면.”


스팍은 이미 봉투를 열어 팝콘에 열중해 있었다. 정말로 허기가 졌던 모양이었다.


“그래. 가서 뭔가 좀 사먹어.” 본즈가 맞장구를 치다가 짐에게 물었다. “근데 그 재미란 건 뭘 어떻게 할 작정이야?”


“글쎄…”


가까운 곳에 고전 게임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운과 실력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게임들이었다. 본즈는 부스 하나를 잡아 도전장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작은 카운터 너머에서 지나가는 유령이며 괴물, 클링온 함선 등 홀로그램을 맞추는 동안 스팍은 뒤에서 구경하며 조용히 남은 팝콘을 마저 먹었다. 마침내 점수를 딴 본즈는 나중에 조에게 주겠다며 곰인형을 골랐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이 비슷한 사격 게임 부스였다. 참여는 안 하지만 짐은 이런 건 본즈보다 월등할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다 스팍이 부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알고 보니까 모종의 이유로 스팍은 게임이 아닌 상품 진열대 쪽에 관심이 있었다.


“저거… 동물원에서 봤던 거야. 수생 조류.”


돌아온 후로 줄곧 조용하던 스팍은 상품 진열대 맨 위쪽 줄을 가리키면서 침묵을 깼다.


“…펭귄…이었나?”


“맞아, 펭귄이야.”


스팍이 상품에 관심을 보이니, 그렇다면 짐에게도 게임 부스에 도전할 아주 좋은 명분이 생긴 셈이었다.


짐은 언제나와 같이 훌륭한 사격 솜씨를 발휘했고, 게임 부스를 운영하는 남자가 상품을 주자 받아서 곧장 스팍에게 건네주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스팍이 완전히 어리둥절해서는 물었다. 짐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귀여우니까 주는 거야.”


“아…응.” 스팍은 손에 든 펭귄 인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것 같아.”[각주:1]


얼마 안 가니 점점 최신식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보였다. 본즈가 질렸다는 듯 투덜댔다.


“야, 짐. 저런 건 우주 나가 있을 때 질리게 본 거 아니냐? 모처럼의 휴가에 저런 거는 더 안 봐도 돼.”


“좋아, 그럼 페이저 대결을 펼치러 가보실까. 미리 말하는데 재미는 없을 거야. 날 한 발도 못 맞출 테니까.”


“널 쏴버리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지.”


“내 말이!” 짐은 자신만만하게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가상 서바이벌 게임을 운영한다는 광고를 올려다보았다. “자, 본즈. 저 사람들도 종일 우리만큼 하는 구경거리는 못 봤을 걸. 길이 뇌리에 남길 만한 결투를 보여줘야지. 어떻게 생각해, 스팍? 전에도 우리 한 번 해본 적이 있어. 내 기억으로 너 꽤나 명사수였거든.”


“나라다 호에서의 총격은 그다지 재현하고 싶지 않은 과거인데.”


“알아, 이번엔 우리끼리만 하는 거지. 진짜로 다칠 위험도 없고, 상사에게 잔소리 듣거나 행성이 위험에 처할 걱정도 없고. 무엇보다 남자 셋이서 총 쏘면서 우정도 다지고 말이야. 어때? 우리 셋이 전설을 남기고 가야지.”


“너한테 몇 방 구멍 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본즈도 씨익 웃었다.


스팍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벌칸이 펭귄 인형을 들고 어리둥절해 있는 모습을 보니 매치가 전혀 안 되는 만큼이나, 미치도록 귀여웠음을 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총을 쏘는 행위를 어떻게…어떻게 사교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


“그냥 우리가 하는 다른 게임이랑 비슷해. 체스 같은 거지. 사적인 감정 없이 서로 실력을 겨루는 거라고 할까.”


짐의 말에 스팍은 천천히 수긍했다.


“유사점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여전히 표정이 모호했다. 짐은 너무 몰아붙이는 건가 잠시 걱정이 들었다. 벌칸 행성의 붕괴 이후 여파를 겪느라 이런 일에 거부감이 생긴 건 아닐까?


“내키지 않으면 굳이 같이 하지 않아도 돼.”


스팍은 고개를 저었다. 짐은 어딘지 초점이 나가있는 듯 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단지 스팍은 약간 당황스러웠을 뿐,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신경을 쓰는지 쓰지 않는지 확실히 알 수야 없지만. 벌칸들은 그런 걸 잘 숨기니 말이다. 여하튼 짐의 눈에 심하지 않아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도 함께 할게. 이 게임에 호기심이 들어.”


찾아간 서바이벌 게임장은 짐이 예상했던 대로 간단한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플레이어는 몸에 센서를 부착해서 바깥에서 참여자들의 움직임과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눈을 가리는 바이저 화면에 가상의 장애물들이 표시되어 나타났다. 고전적인 디자인을 보니 옛날 버전이었다. 모든 사물의 테두리가 밝은 색으로 강조되어 빛났고, 플레이어 역시 각각의 색으로 실루엣이 빛나다가 피격될 시 사라졌다. 좋아라하는 짐, 눈을 굴리는 본즈, 스팍은 살짝 멍한 모습 그대로였다. 돔을 운영하는 남자가 설명을 했다.


“피격이 되면 모습이 사라지면서 무적 상태가 됩니다. 10초간 초기화가 되기 전까지 위치를 옮겨 적을 기습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전략을 세울 수 있어요.”


“괜찮은 시스템이네.”


짐은 건네받은 돌격소총을 어깨에 기댔다. 고전적인 분위기에 맞춰 총도 쓸데없이 커다랬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준비 됐어?”


입장한 후 세 사람은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너희 둘 다 날 털끝만큼도 못 건드린다는 데 내기 건다.”


짐은 본즈와 스팍에게 선언했다. 짐의 왼편으로 간 본즈 쪽에서 대답이 들렸다.


“내기라고 했냐?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내가 널 맞추면, 네가 내일 아침 식사를 차리는 거다.”


“딜. 어차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보상을 걸지 않아도 최선을 다 해보겠어.” 뒤쪽 어딘가에서 스팍이 말했다.


“좋아, 기대해 보겠어.”


바이저에 보이는 디스플레이의 끄트머리에서 타이머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0이 되는 순간 사방이 깜깜해지고 장애물이 무작위로 솟아올라 만들어진 미로만 빛을 발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모든 것이 직선으로 깎아지른 듯이 만들어져 있었다. 짐은 손을 내어 가까운 곳의 가상 벽을 짚어보았다. 가슴에 붙인 센서가 진동하면서 녹색 테두리를 그리는 손이 벽에 닿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스타플릿의 기술만큼 정교한 것은 아니었지만(스타플릿은 실제와 거의 비슷할 정도의 가상현실을 구현했다) 어차피 그만큼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 그럼. 의사선생과 벌칸을 사냥하러 갈 시간이로군. 그는 자신만만하게 길을 따라 내달렸다.


벽이 신장을 가려줄 만큼 높지 않아서 움직이는 동안 몸을 웅크려 시야를 피해야 했다. 그는 장애물 끄트머리에 은신한 채로 간간히 고개를 들어 본즈와 스팍의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했다. 그러는 동안 한두 번 푸른 테두리의 인영이 살짝씩 모습을 드러냈다. 본즈와 스팍 중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이렇게 된 판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동태를 살피던 중 감시하던 쪽에서 총격과 함께, 본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 내가 보고 싶었지? 짐!”


“나 아니었거든!”


짐은 우습다는 듯 대꾸했다. 소리를 질러준 덕분에 이제 본즈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감이 잡혔다. 그렇지만 짐도 위치를 알려준 셈이 되었으므로 얼른 자리를 움직여야 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주변에서 움직이는 소리를 포착하고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푸른 외곽선이 바로 왼쪽 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짐은 그냥 일어서서 제 발로 들어온 표적을 쏘기만 하면 됐다.


이게 바로 나다.”


비활성화가 된 본즈가 낮게 욕을 읊조리며 사라졌다.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관찰에 따르면 현재 위치한 직선 경로는 자신이 왔던 곳과 이어지지 않는 듯 했다. 그는 귀를 열고 계속 이동했다. 더 이상 본즈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혹시나 해서, 총구를 슬며시 벽 너머로 드러내 봤다. 예상대로 곧장 발사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빔이 스쳐지나갔다. 즉각 몇 발자국 옆으로 도약한 그는 공격이 날아온 곳을 향해 사격했다. 파란 외곽선이 다시 훅 꺼졌다.


“제기랄, 짐!”


이번엔 본즈와 엇갈린 길로 이동했는지 정말로 아무런 자취조차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미끼를 써 유인해봐야 소용없었다. 이제는 본즈를 찾아 고전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때였다. 스팍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첫 번째 피격을 당한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깐 걱정이 들었지만, 스팍이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느라 엄폐를 잘 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가파른 벽을 양 옆에 두고 이동하니 조금 넓게 트인 공간이 나왔다. 몸 하나 숨길만한 작은 직육면체와 벽이 점점이 흩어져 있어서 매복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쪽으로의 유인에 성공했을 때의 얘기다. 짐은 그걸 염두에 두고, 맞은편에 본즈가 처음에 소리를 질렀던 방향으로 경로를 설정했다. 스팍은 아마 그쯤에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스팍과 마주친 순간, 심장이 멈출 뻔 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노란 테두리의 인영이 바로 코앞의 사거리 너머에 웅크리고 있었다. 짐은 날아오는 빔을 피해 얼른 뒤로 물러났다가, 총격이 사라지자마자 고개를 빼 조준했다. 스팍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숨어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좌우로 트인 어느 쪽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몸을 펴 시야를 확보하자, 노랗게 빛나는 윤곽이 스쳤다. 동시에 먼 곳의 벽 뒤에서 푸른 빛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그는 가까스로 본즈의 공격을 피했다. 진짜로 맞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그는 몸을 숙이고 스팍을 따라 달렸다. 스팍은 만만치 않은 상대이므로, 교차점에 다다를 때마다 스팍이 엄폐하고 있을 경우를 대비해 속도를 줄이고 사방을 경계했다. 예상대로, 얼마 안 가 그는 모퉁이를 넘어가다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은폐했다. 스팍이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좀 재밌어지는군. 짐은 히죽 웃고는, 공격이 잦아들 때를 노려 스팍이 있는 곳을 향해 몇 발을 날렸다. 전부 빗나간 것 같았다. 그는 스팍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때맞춰 얼른 숨었다.


그렇게 움직이면서 얼마 후, 짐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스팍이 자신을 찾아 쫓아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보았다. 하지만 기대에서 그쳤다. 스팍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했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기다리고만 있다가, 순간 예고도 없이 빛이 번쩍 하면서 총성이 스쳤다.


“잡았다, 스팍!”


본즈가 외치는 소리에 짐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이 움직일 기회였다. 스팍이 본즈를 피해 달아날 거고, 지금까지 본즈를 두 번 잡았으니 이번엔 꼭 스팍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본즈가 같이 있는 한 안전하지 못했다. 해서 모퉁이 너머로 몸을 틀어, 본즈를 끌어내기 위해 총을 몇 발 날리고 재빨리 반대편으로 향했다. 스팍이 초기화되기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짐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 자리에 숨어 기다렸다. 역시 스팍은 바로 그의 동선을 따라 모습을 드러냈고, 적중시켰다. 그는 왁자하게 함성을 지르며 이동했다. 스팍은 잡혔고 본즈가 나타날 차례였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또 몇 번 총성이 오가고, 본즈가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짐은 가만히 기다렸다. 스팍이 곧 따라올 것이다. 발소리가 들리자 그는 엄폐에서 벗어나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일단 총부터 쐈다. 스팍이었다. 그런데 본즈도 멀리 있지 않았다. 스팍이 피격되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마자 얼굴에 번쩍 빛이 날아들었다. 가슴팍의 센서가 피격 신호를 울림과 동시에 시야가 즉각 붉은 색으로 물들면서 “치명타”라는 글자가 눈앞에 점멸했다.


“아침 만들 준비나 해라, 짐!” 본즈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짐은 초기화되기 전에 가까스로 모퉁이 너머를 돌아 몸을 숨겼다. 돌아다보니 방금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스팍이 초기화되어 나타났다. 그렇지만 곧바로 본즈가 그쪽으로 발사를 했고, 짐은 이번에도 차려진 밥상에 본즈를 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복수다!” 외치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때부터는 전쟁이었다. 쫓고 쫓기고 엄폐 공격을 하고 ― 한 발자국 먼저 나가려 해도 틈이 없을 정도였다. 스팍의 공격을 피하고 운이 좋으면 복수로 적중시키기도 했다. 짐은 기회를 노려 빠져나왔다. 본즈가 저쪽에서 야유를 보내다가도 욕을 하고 반복하는 걸 보니 스팍과 서로 바쁜 듯 했다. 그런데 스팍이 자신을 여태 단 한 번도 잡지 못했다는 게 이상했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이 실력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타이머가 디스플레이 가장자리에서 반짝이며 게임 종료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짐은 남은 몇 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스팍의 흔적은 놓쳐버렸고, 본즈의 소리도 일이 분 가량 듣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이제 화려한 막을 내릴 때가 왔다는 거였다. 그는 생각해둔 바가 있어, 방금 지나왔던 너른 공간을 향해 이동했다.


장소에 다다르자, 노란 윤곽선이 번개처럼 장애물 너머로 사라졌다. 스팍이 먼저 와 있던 모양이었다. 짐은 얼른 몸을 숙이고 낮은 담 뒤에 숨은 뒤 스팍이 있는 방향으로 한 발을 날렸다. 기척이 들린 후, 흘긋 확인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명중한 건지 아니면 스팍이 몸을 숨긴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뭐 얼마 안 가 스팍이 마지막으로 보였던 장소에 다시 초기화되어 나타났으니 궁금증은 풀렸다. 재차 공격하자 외곽선이 반짝이며 꺼졌다. 이걸로 두 번 연속 명중이었다. 짐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스팍의 기척을 찾아 귀를 열어놓은 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숨었다.


스팍이 또 그 자리에서 반짝 나타났을 땐 점점 우스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짐은 옮긴 자리에서 공격을 날렸고, 세 번을 연달아 그러고 나선 웃음이 터졌다.


“뭐 하는 거야, 스팍?”


계속 같은 자리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걸 보니, 스팍은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뭐, 차려놓은 밥상을 마다할 순 없지. 또 발사했다. 이번엔 노란 선이 살아나면서 일어나려고 하는지 스팍의 윤곽이 엉거주춤했다. 뭘 하려는 건지 짐도 궁금해졌다. 물론, 일단 한 방 더 먹이고.


그런데 스팍이 외곽선이 꺼지고 나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조준한 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곧장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 그리고―


별안간 무거운 몸뚱이가 달려들어 그를 넘어뜨렸다.


“야, 스팍, 이게 무슨―”


바닥에 나동그라져 자신의 위에 올라탄 스팍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제 보니 이상하게도 호흡이 거칠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더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있으니까, 비슷한 자세로 함교의 계기판 위에 밀쳐진 채 스팍에게 목이 졸렸던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돌연 겁이 왈칵 들었다.


“스―스파―”


말을 채 건네기도 전에, 노란 선이 되살아나 자신을 덮친 형체를 보여줬다. 그 형체는 총을 들어 조준했다.


…그게 다였다. 불빛이 번쩍 하면서 시야를 가리는 화면이 붉게 빛났다. 스팍에게 맞은 것이다. 그리고 스팍은 그의 몸뚱이 위에 걸터앉은 채였다.


“이런 초기 단계의 증강 현실은 실제를 대체하기에는 아직 이르군.”


스팍이 숨이 가쁜 소리로 말했다. 약간 지치면서도 만족한 듯 했다.


믿기지가 않고 우습기도 하고, 짐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초기화되려고 했지만 어차피 시간이 다 되었으니 달아나지 않고 그냥 있었다. 스팍이 이렇게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는데 안 보고 가면 서운하지. 그는 헐떡이면서 스팍에게 웃었다.


“이걸… 이걸 갖다 반칙이라고 할 순 없는 거겠지?”


“그건 위선이겠지.”


짐의 웃음은 커지기만 했다. 스팍에게서 한숨으로 들리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을 때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번쩍 빛이 날아오면서 스팍의 윤곽선이 사라졌을 때서야 겨우 웃음이 잦아들었다.


“찾았다!”


어디선가 본즈가 불쑥 튀어나왔다. 연이어 짐 역시 또 치명타를 먹었다.


그렇게 게임이 종료되고 증강현실이 사라지면서, 문득 투명한 바이저 너머로 스팍의 얼굴이 보였다. 스팍이…스팍이 웃고 있었다. 그것도, 금방이라도 웃음소리를 터뜨릴 것처럼 함박만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껏 스팍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 스팍이라면 그랬다. 이 당황스럽고 이상한 기분은 뭘까.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닌 거라고 짐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스팍은 옆으로 비켜나서 바이저를 벗어내고 이마를 문질렀다. 짐도 바이저를 벗고 어리벙벙한 기분으로 일어나 앉았다. 그래도 괜히 주의를 끌어 스팍이 민망해지지 않도록 일어나서 먼저 본즈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 점수를 좀 따놔서 다행이지? 마지막 그건 점수로 안 쳐줘.”


“그러든지.” 본즈도 웃었다. “확실히, 짐, 진짜 간만에 재미 좀 봤네. 꼬맹이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아무렴. 클링온을 쏘는 것보다야 친구들끼리 총질하는 게 더 재밌지.”


짐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면서 스팍 쪽을 봤다. 스팍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로 눈만 비비고 있었다. 본즈가 제안했다.


“좋아, 이제 감 잡았어. 니들 한 판 더 땡길래?”


“나는… 앉는 게 좋겠어.”


스팍이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아도 겉으로 이미, 어지러운 게 한 눈에 보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지러운 것 같아.”


가상현실에 있다 현실로 돌아올 때 가끔 그런 현상이 있다고는 하지만, 스팍이 그런 것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는 게 왠지 이상했다.


“스팍, 괜찮아?”


“난…나는 괜찮아.”


스팍은 웅얼거리면서도 짐이 내민 손을 사양하고 조금 휘청이다가 일어났다. 얼굴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띤 채였다.


“그래…? 그럼 나가서 잠시 앉아 있자. 한 판 정도면 충분하지, 뭐.”


본즈를 보니 역시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지 황당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했다.


돔을 나서는 동안 짐의 걱정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스팍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갈지자로 자꾸만 짐과 어깨를 부딪혔다. 가상현실에서 현실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어지러움이 유발될 수 있다곤 해도, 멀미가 심하지 않은 이상에야 확실히 이 정도일 리는 없었다. 게다가 스팍은 숙달된 파일럿이라 (예전 일이긴 하지만) 무중력 우주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조종을 하기도 했다. 스팍은 몸을 바로세웠다. 그래도 짐은 그의 팔을 잡아 지지를 해주었다. 눈짓을 하자 본즈도 옆으로 와서 다른 쪽을 붙들었다.


“안되겠다, 스팍. 너 확실히 상태가 이상해.”


짐은 그를 지탱해 밖으로 이끌었다. 스팍은 계속 “괜찮다”고 했지만 말만 그런 것 같았다.


“그냥, 조금… 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본즈가 체험관 외곽의 사람들이 한산한 곳을 찾아 스팍을 앉혀놓고 지시했다. “짐, 여기 잠깐 있어. 가방 가지고 돌아올게.”


“나한테 허락 안 맡아도 된다고.”


짐은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본즈의 뒤로 중얼거린 뒤 스팍의 곁에 앉았다.


“자… 스팍.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스팍은 어지러운 듯이 머리에 손바닥을 대고 지탱했다.


“…나는 괜찮아. 그저… 조금, 약간의… 문제가…”


“무슨 문제?”


스팍이 고개를 들어 짐을 바라봤다. 스스로도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모르겠어.”


스팍의 얼굴에 옅게 녹빛이 돌았다. 덩달아 당황한 짐이었지만, 곧 벌칸이 얼굴을 상기시킨다는 게, 인간의 그것과 같은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는 걸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즈가 돌아와서 상품으로 획득한 동물 봉제인형을 짐에게 던져줬다. 그러더니 가지고 다니던 조그만 가방 안에서 예상치도 못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런 걸 늘 갖고 다닌단 말이야?”


“그래. 그것도 누구 때문에 몇 년 전부터.”


본즈는 퉁명스레 대꾸하며 의료용 트라이코더를 켜고 몸을 낮춰 스팍의 옆에 앉았다.


“작고 갖고 다니기도 편해. 생각지도 못할 때 이게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 지 모를 거다. 내가 의사인데 트라이코더를 못 갖고 다니는 게 이상하지. 여러 모로 기똥차게 정보를 알려주거든… 뭐, 것도 제대로 작동할 때 얘기지만…”


본즈는 그러면서, 인상을 쓰고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몇 번 흔들었다. 그는 찌푸린 얼굴로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게 왜 이러지…?”


뭔가 잘못되었는지, 얼굴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왜? 뭐라고 나왔는데?”


본즈가 트라이코더를 내리고 짐에게 황당한 얼굴을 했다.


“스팍이… 취했다고 나오는데.”


“뭐?”


짐도 트라이코더의 화면을 확인했다. 스팍을 쳐다보니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취했다고 한다면야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게 전부 이해가 가지만…


“…술에 취했을 리가 없잖아. 집에서 나선 이후로 줄곧 같이 있었는걸. 몇 시간동안 계속. 그러더니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하면서…”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 게임장으로 오기 전부터도 스팍이 좀 웃긴 짓을 하긴 했다. 스팍은 조용했는데, 뭐 원래 그랬으니 그렇다 치고 약간 오락가락하면서 멍해있었다고 해야 하나…


본즈가 눈이 커지더니 얼굴을 굳혔다.


“조! 조와 친구들이랑 잠깐 자리를 떴었잖아― 그 때 말고는 우리 시야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


본즈의 말이 맞았다. 그러고 보니 바로 그 뒤부터 스팍이 살짝 멍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치만 설마, 조안나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좋다. 짐은 그제야 자신이 조안나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열다섯 짜리 사고방식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짐은 잘 알았다. 발랑 까진 사춘기를 겪어본 자신이 아니던가. 짐 본인만 해도 어렸을 때 금요일 밤이 되면 불법에 가까운 행위를 즐기며 날고 기었으니까. 짐은 일단 본즈를 달랬다.


“야, 진정하고 생각해 봐. 조가 나쁜 짓을 할 작정이었으면 너랑 나중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겠어? 그럴 리가 없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원. 조를 찾아봐야겠다.”


본즈는 트라이코더를 다시 노려보다가 가방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자…잠시만.”


스팍이 떠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나…나는 취하지 않았어. 난…” 그는 잠시 멈춰 생각하다가, 스스로도 자신이 하는 말에 놀란 듯 이랬다. “…나른해진 거야.”


그런 것 같긴 했다. 본즈는 어이없어 했고, 짐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난리판에서 조를 찾으려면 한참은 걸리겠다. 본즈, 우린 가봐야겠어. 집으로 먼저 돌아갈 테니까 이따 알아서 와.”


“그래, 가봐.”


“그리고 말야, 본즈? 조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 너도 틈만 나면 늘 마시잖아.”


“바로 그게 내가 걱정하는 거다.”


“잠깐만.”


스팍이 신경질이 난 본즈를 잡아세웠다.


“닥터… 조안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조안나는… 우린… 아무, 아무것도 안 마셨어.”


이러고 있으니 별로 신용할 만한 상태가 못 되는 듯 했지만, 어찌됐건 스팍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지 않았던가. 짐은 본즈와 시선을 교환했다.


“확실해?”


스팍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것도 안 마셨어.”


“그럼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휘청거리고 정신을 못 차려?”


스팍 본인도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모르겠어.”


본즈는 더욱 의심쩍게 스팍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쨌든, 너희 둘은 돌아가. 난 조를 찾아봐야겠다. 술 때문이든 아니든,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맞는 것 같으니까, 설명을 들어봐야겠어.”


“그래, 알아서 해.” 짐은 조안나가 이해하고 있기를 내심 바랐다. 본즈가 화가 나 보이는 건 단순히 정말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다른 복잡한 감정도 뒤섞여 있다는 걸. “행운을 빌어.”


“그래. 조심히 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본즈의 뒷모습을 보던 짐은 도로 스팍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스팍은 앉은뱅이가 돼서 아까의 자세 그대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채였다.[각주:2]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로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정말로 술 안 마셨어?”


“안 마셨어.”


스팍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진지하게 덧붙였다.


“물도 마시지 않았어. 그런데… 생각하니까 목이 말라. 무척.”


짐은 한숨을 짓고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자, 물 좀 마시고 난 다음에 여기서 나가자.”






제 13장, 재미있었어 → 



  1. 벌칸 귀여워! [본문으로]
  2. 벌칸이 진심으로 심각하게 귀엽다. (진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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