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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9 : 표현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9 : 표현

topsecretum 기밀선녀 2015.05.0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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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8장,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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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표현





짐은 도대체 어쩌다 정신 멀쩡한 여자가 본즈 같은 남자와 이혼을 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좋다, 솔직히 그건 좀 과장이고, 피차 본즈 쪽에서도 뭔가 잘못이 있었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짐보다 생각이 뻣뻣하게 막힌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런 본즈의 단점에 거슬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짐이 보기에 친구의 실력과 결단력이며, 절대로 흔들릴 일 없는 의리에 견주어 생각했을 때 그런 건 아주 작은 단점일 뿐이었다. 그는 말하자면 ‘영원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거기서 헤어나와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 더욱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본즈도 이혼 후 수년이 흐르고 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혹시나 합칠 가망이 있을까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조안나의 곁에 있을 기회만 생기면 세계 최고로 헌신적인 아빠가 되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이번에 안 사실인데 본즈는 요리마저 꽤 잘 했다.


게다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스팍과 똑같이 고집스레 남에게 퍼주는 심성까지 확실해졌다.


“이 집은 지어진 후로 개조를 몇 번 했어.” 본즈는 가방을 들고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짐과 스팍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원래 여기가 바글바글하게 살려고 지어진 데가 아니라서 안방, 조의 방, 그리고 손님방만 있지. 그래가지고 일이 좀 난처하게 됐다. 어제까지만 해도 짐, 너만 오는 건 줄 알았거든. 같이 손님방에서 자면 되겠지 싶었지.”


짐은 옆에서 스팍이 고개를 갸웃 하는 것을 보았다. “음? 왜?”


스팍은 짐이 자신의 반응을 알아채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당신과 닥터 맥코이가 잠자리를 함께 하는 수준의 관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아니야.” 본즈는 당장에 표정을 찌푸리며 잘라 말했고,


짐은 그 못마땅한 얼굴에 히죽이는 걸로 마주해 주었다. “안됐지 뭐야.”


“몇 년 내내 개인실이 가까운 데 붙어 있다 보니 이젠 같이 지내는 데 익숙한 것뿐이야.” 본즈는 무시하고 설명했다. “셔틀에 며칠 동안 같이 처박혀 있거나 한 방에 함께 갇혀 있는, 뭐 그런 거라 해야 하나? 한 침대에 그것도 이런 킹사이즈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 따위는 큰 일도 아니지.” 그는 덧붙이며 짐에게 인상을 썼다. “그럼에도 말이야, 짐은 아주 끈질기게 달라붙는 놈이거든.”


“야, 개인실이 가까워서 그렇게 편했으면―”


“시끄러, 인마.” 복도의 한 방문 앞에 다다라 본즈가 스팍에게로 돌아섰다. “여튼, 이왕 손님으로 왔으니 니들이 알아서 손님방을 나눠 써. 난 아래층 소파에서 자면 돼.”


스팍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안방의 침대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건너뛰고 얘기했어.”


“뭐, 그렇지.” 본즈는 복도 끝의 닫힌 방문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거긴 전부인 방이거든. 자기 없는 동안 거기서 누굴 재웠다간 썩 좋아하지 않을 거다.”


“그럼 당신은?”


나야말로 제일 싫지.” 본즈가 낮게 투덜거렸다. “거긴 원래 내 방이었다고 ― 그 여자 침대가 아니라 같이 쓰던 침대라니까. 그 방은 지나가기만 해도 성질이 나.”


“아아, 뭘 또 그래.” 짐은 진지해지기는커녕 살살 놀려댔다. “전부인의 방에서 불타는 복수의 섹스를 하는 거야! 솔직히 너도 끌리지 않아?”


“그렇긴 해. 그냥 그 상대가 너인 게 사양이라고.”


퉁명스러운 본즈의 대꾸에 짐은 으, 싫은 소리를 했다. “스팍, 너는 어때?” 짐은 스팍을 향해 물었다가, 이쪽을 보고 눈썹을 추켜세우고 있는 모습에 우스워졌다.


“나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와 잠자리를 나누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회의가 들려고 해.” 스팍이 본즈에게 말했다.


“거 뭘 좀 아는 양반이로군…”


결국 짐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조심할게. 진심이야.” 상대방이 스팍이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욱 조심할 생각이었다. 바보 같은 장난을 했다가 스팍을 거슬려서 휙 가버리게 만들 수는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원래의 예정은 당신과 닥터 맥코이뿐이었고, 나는 예기치 않게 추가된 인원이야. 두 사람이 침대를 나눠 쓰고 내가 소파에서 자는 것이 논리적일 것 같아.”


스팍의 제안에 본즈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됐다니까, 마. 조는 아직 방학하려면 한 주 더 남아서 일찍 일어나야 돼. 나도 어차피 그 때 일어날 거니까. 너희들은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시간에 관계없이 수면을 보충하는 일에 익숙해.”


으으. 이곳에 도착한 후로 ― 아니, 사실은 아카데미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모든 게 느긋하게 풀어져 있던 터라 한동안 티격태격 하던 걸 잊고 있었다. 여기선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소파에 나가 자겠다고 설득할 구실이 없었다.


“스팍, 이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래.” 짐은 방 안으로 들어가서 침대 가에 섰다. “봐. 넓잖아? 달라붙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구.” 내가 의도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


“당신은 스스로의 사적인 공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내 공간을 현저히 중요시해.” 스팍이 그를 따라 방으로 한 발자국 들어왔다.


“그건 걱정 마. 나부터가 너의 사적인 공간을 더 중요하게 여길 테니까.” 짐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그에게 웃어보였다. “갑갑하게 굴지 말자구, 스팍. 이제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하잖아.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나는 네가 밤에 편하게 자는 걸 보고 싶은 거라고.”


“인간들이 ‘편하게 잔다’고 여기는 개념은―”


“스팍.” 짐은 진지한 시선으로 말을 잘랐다. “우리가 침대에서 같이 자면 안 되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얘기해도 좋아. 그럼 내가 바닥에서 자도록 할게.”


“당신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서 바닥에 잘 순 없어, 커크.”


짐은 삐딱한 웃음을 던졌다. “그렇담 같이 침대를 나눠 쓰는 데 딱히 논리적인 반론은 없는 거지?”


이럴 때의 스팍의 눈빛을 짐은 잘 알고 있었다. 더 항의할지, 수긍하고 받아들일지 가늠해보고 있는 거다. 이번에 그의 선택은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렇군.”


“좋아.” 짐은 매트리스 위로 주먹을 콩 박아봤다. “잠 잘 오겠는걸.”


“이제 해결이 됐구먼.” 문가에서 본즈가 말했다. “가방 정리하고 쉬고 있어. 저녁 먹고 나면 난 이따 딸내미 숙제를 봐줘야지. 이미 조는 전부 마쳐놨겠지만, 확인하는 셈 치고…”


“알았어. 가서 일 봐.” 짐은 스팍이, 침대 다른 편으로 가 배낭을 내려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막상 이렇게 되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섹스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과 나란히 자는 건 정말이지 어색하다(본즈를 제외하자면). 그것도 매력적인 인물과 단둘이라니 더 그랬다. 뭐… 이것도 익숙해지는 법을 배워가면 되는 일이다.


짐은 어색해진 침묵을 채우려 말을 붙였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악기를 연주한다는 얘기를 한 번도 안 해줄 수가 있어? 그런 걸 계속 갖고 다녔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네.”


“관련이 있는 대화를 나눈 바가 없으니 해당하는 주제가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그렇긴 하지만. 그동안 연주 한 번쯤은 해볼 수도 있었잖아.”


“당신이 여러 가지 다른 활동을 통해 상대해 주었으니까.” 스팍이 대답했다. “그리고 당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농담이지?” 짐은 믿기지가 않아 되물었다. “방해가 될 리가 없잖아. 실력이 좋던걸.” 게다가 스팍이 연주하던 장르는 짐이 듣던 거에 비하면 제일 거슬릴 리 없는 노래나 다름없었다.


스팍은 고개를 짧게 끄덕여 칭찬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잠시 말이 없다가 다른 소리를 했다. “…조안나가 내 연주를 다시 듣고 싶어 할 것 같아.”


짐은 큭큭 웃었다. “그래, 그럴 걸.” 조가 자기한테 홀딱 반했다는 걸 스팍이 알려나 모르겠다. 알아채지 못했다면 조의 반응을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한 거겠지. 뭐, 퍽 인간적인 반응이니까 말이다.


그 날 저녁, 조안나가 숙제를 마치고 와서 짐과 스팍에게 게임을 더 하자고 물어왔다. 짐이 본즈를 도와 식사를 만드는 동안 조과 스팍이 캠페인을 많이 진행해 놓은 모양이었다. 짐은 물론 다시 게임에 끼는 데 환영이었지만 본즈는 게임이라면 지긋지긋해 할 테고, 여기 온 목적도 친구의 딸과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친구와 있으려는 것이었으니 게임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싶어졌다. 그렇잖아도 조가 자신보다는 스팍과 있는 것을 좋아할 테니까. 스팍에게 집중된 조의 관심에 짐은 왠지 재미있었다. 그리하여 엔터프라이즈 호에 있을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본즈와 함께 어두워진 현관에 앉아 밤공기를 맞으며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술이 빠졌다는 것만 달랐다.


날씨가 좋아서 열어둔 창문 안으로, 조와 스팍이 게임을 진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씩 조가 예전에 혼자 깨지 못했던 미션을 성공해내 환호를 지르기도 했고, 어려운 구간에서 미리 경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스팍이 무언가 질문을 했다. 조는 이렇게 손을 들면 마주 손뼉을 쳐줘야 한다고 설명을 했고, ‘하이파이브’라는 행동에 대해 감을 잡게 된 스팍은 거절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짐은 소리가 나지 않게 숨죽여 큭큭댔다. 하지만 본즈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걱정에 잠겨 있었다.


“조를 스팍하고 단둘이 내버려둬도 되는 걸까? 괜한 걱정이겠지?”


“걱정일랑 말아. 적어도 스팍이 이상한 일을 할 거라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조라면 혹시 몰라도…”


“조는 좋은 애야.” 본즈는 그러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지 엄마를 닮은 데가 하나도 없거든. 예쁜 것만 빼고.”


사정을 물어봐야 하는 것일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짐은 본즈가 스타플릿에 입대한 바로 직후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봤던 일들과 그 이후 몇 가지 지나가며 들은 말로 미루어 보아, 어쩌다 이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짚이는 점은 조금 있었다. 하지만 본즈는 그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지 않아서 사연을 전부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소리를 낮춘 조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팍…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저씨는 벌칸인이죠?”


침묵이 뒤따랐다. 짐은 본즈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 맞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낮의 태도와는 달리 짐작이 맞아서 뛸 듯이 기쁜 기색은 없었다. 조는 진지하게 말했다. “들어본 적 없는 특이한 이름에다 아저씨는 말투도 정말 특이하거든요. 그리고 벌칸 음악을 연주하고, 또… 또 하이파이브가 뭔지 모른다고도 그랬구요. 잘은 모르지만 아저씨가 무척 먼 곳에서 왔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벌칸 음악이라는 말을 듣고 감이 잡혔어요.”


“그러한 주된 근거에 의해 네가 결론을 맺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숨기려던 게 아니었네요?”


“너에게서는 아니지. 너의 아버지는 내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했었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 그의 가족에게 한해 내 종족 정체성을 숨길 필요는 없을 것이라 판단했어.”


“네, 그렇죠. 그치만 전…” 조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듯 했다. “…제가 어렸을 때 뉴스에서 봤던 게 기억나요. 벌칸이—그러니까 벌칸 행성이—한번에…”


“붕괴되었지.” 스팍이 대신 말을 이었다. “사실의 서술에 내 반응을 염려할 필요는 없어.”


“…그랬죠.” 조는 풀이 죽은 듯 했다. “안됐어요.”


다시 한 번 말소리가 끊겼다가, 스팍이 물었다. “유감의 표현인 건가? 그런 거라면… 고마워.”


스팍도 조금은 감정을 짚어낼 수 있는 거로군. 짐은 속으로 생각했다.


“네.” 조가 그렇다고 했다. “…그 당시에 아빠 걱정 많이 했어요. 우주에 멀리 가 계시니까요. 우주에선 사람들이 많이 죽잖아요. 그런데 행성 하나가 없어져 버렸다는 얘길 들으니까… 너무 끔찍했어요.”


“그랬지.” 스팍이 조용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짐이 알기로는, 벌칸의 재앙이 일어난 후 처음으로 스팍이 감정을 인정하는—혹은 그 비슷한—말이었다. “그러나 너의 아버지가 당시의 생존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어주었지. 그는 나의 아버지 역시 치료해 주었어.”


“다행이네요.” 잠시 멈추었다가 조가 말을 이었다. “아빠가 엔터프라이즈에 나가 계실 때 저하고 편지를 많이 썼어요. 아빤 늘… 음, 아빤 로뮬란과 닮았다는 이유로 벌칸을 차별하는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난다고 자주 그러셨어요. 로뮬란이 아저씨네 행성에 저지른 일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고요. 사람들이 로뮬란 때문에 벌칸이 겪은 고통은 무시하는 것 같잖아요.”


스팍이 입을 열었다. “무시한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가 피해망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더러는 벌칸의 일이 허풍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해 버리는 모양이야.”


조가 역겹다는 소리를 냈다. “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바보예요. 직접 보지도 못했으면서 이기적으로 구는 거죠. 아빠가 당시에 거기 계셨으니까 알아요.”


짐은 본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본즈도 자랑스레 웃고 있었다. “역시 내 딸이야.”


스팍이 말했다. “그러한 견해가 지구인들 사이에서 소수에 해당함을 알고 있어.”


“그렇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그런 건 저한테 상관없어요. 전 아저씨가 되게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벌칸인이란 건 중요하지 않죠. 아저씨가 저희 집에 오셔서 정말 기뻐요.”


스팍은 잠깐 당황한 듯이 말이 없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고마워. 친절한 환대에도 물론이고, 찬사를 보내주어서.”


짐은 소리 낮춰 투덜거렸다. “왜 나한텐 저렇게 못 해주는 거야? 나랑은 매번 내가 뭘 좀 잘해주려고 할 때마다 사사건건 투닥거렸으면서.”


“조야 귀엽지만 넌 아니잖아. 뭐… 평소라면 이렇게 대답했겠지만 말이야. 저 놈은 벌칸이니 그 속을 누가 알겠어?” 본즈가 조용히 속삭였다.


“천만에요.” 조가 대답했다. “…여기 오셨을 때요, 경청할 줄 아는 관객은 언제라도 환영이라고 하신 거,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사실은 저, 아저씨가 연주하시는 거 더 듣고 싶어서요. 아, 물론 아저씨가 내키시면요.  게임은 많이 했으니까, 이제 다른 것도 해보면 어떨까요? 그래서… 연주를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내 악기가 위층에 있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할 스팍의 모습이 뻔했다. “기다려. 가지고 올게.”


“저도 같이 가요!” 조는 신이 나서 말했다. “사실 위층이 더 편해요 ― 제 방 보여드릴게요―”


“빌어먹을!” 본즈가 기겁을 해서는 벌떡 일어났다.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본즈의 뒤를 따라가며 짐은 그 표정을 보고 웃어대느라 바빴다.


밤이 되어 본즈는 잘 시간이 되었다며 조를 올려보내고(방학까지 얼마 남지 않은 터라 조는 약간 싫은 소리를 했지만 본즈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조는 스팍이 보는 앞에서 말썽을 부리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짐과 스팍이 있는 거실로 들어왔다. 아침 일찍 샌프란시스코에서 왔기 때문에 시차가 있어서 두 사람에게는 아직 취침하기에 이른 시각이었다. 손을 놀려두는 게 무료하기도 해서 짐은 조안나가 거실에 두고 간 컨트롤러를 집어 스팍에게 게임을 더 해보자고 제안했다. 게임을 하면서도 본즈와의 대화는 계속 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조지아에 있는 동안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본즈가 짐에게 얘기했다. “네가 혼자 오는 줄 알고 생각해 둔 게 있었거든. 근방에 괜찮은 데 구경이라도 시켜주면서 보여주려고. 맛집이라든가, 근처에 내가 다니는 물맛 좋은 데로…”


“신기하군.” 스팍이 입을 열었다. “이 지역에 가정 내 수도 시설이 보급된 것은 몇 세기나 되었을 텐데 ― 일부 지역엔 아직 그렇지 않은 건가 보군. 아니면 단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유물로 남겨둔 건가?”


술집을 얘기하는 거다, 스팍.” 본즈가 볼멘소리를 했다. “비유해서 하는 말이지. 아무래도 술집은 네 관심사가 아닐 것 같구만. 박물관이나 유적지는 좀 있는데… 어때, 그런 쪽에 흥미가 있으려나?”


“나를 위해 계획을 변경할 필요는 없어. 나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에 익숙하니까.”


“글쎄, 유적지라면 내가 관심이 가는 걸.” 짐이 대신 말했다. 스팍을 혼자 집에 앉혀두는 것보다야 같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편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는 정말로 유적지에 관심이 있기도 했다. “가이드는 너한테 맡길게. 괜찮은 맛집이 어딘지 기대를 해봐야지. 아, 술집도.”


“좋아 ― 그럼 대충 정해졌군.” 본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좀 있다 자야겠다. 주변에 둘러보고 싶은 데 있으면 아침에 알려줘. 남들 관광 많이 시켜줬는데 나도 몇 군데 안 가본 지 오래된 곳이 있거든. 오랜만에 구경하는 것도 좋겠지.”


“그래, 그럼.”


짐은 대답하면서 게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적들 중 일부가 위쪽에서 집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짐이 총을 발사해 흩뜨렸고, 스팍이 뒤를 이어받아 그 중 반을 격추시켰다. 그동안 조작법을 완벽하게 터득했는지 스팍은 쉽게 해냈다. 짐은 씩 웃었다. 몇 년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좋은 팀인 듯 했다.


“우리도 곧 자야지. 안 그럼 내일 아침에 늦잠자느라 시간을 다 날릴 걸. 일단 이번 판은 다 깨려고.”


본즈는 알았다며 일어났다. “게임 더 할 생각이냐?”


“아니, 이거 곧 끝날 것 같아.”


“잘 됐군, 소파에서 자야 하는데 너희들이 소릴 내면 난 못 자니까. 게임 가지고 올라가서 해도 되는데, 조가 자니까 소란만 내지 마.”


스팍이 얘기했다. “커크가 얘기한 대로 우리 역시 곧 자는 게 좋겠어. 이 미션을 종료한 후에 그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지.”


“그래, 잘 준비 하고 있어. 담요 가져다줄게.”


머지않아 두 사람은 게임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나서 위층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짐은 스팍과 함께 자게 된다는 걸 깜빡 하고 있었다가, 방에 들어와 침대 양 쪽에 나란히 앉아 가방에서 잠옷을 꺼내면서 새삼 깨달았다. 그렇지만 스팍은 그다지 어색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담 이쪽도 어색해 할 게 뭐란 말인가? 논리적으로 봐도 아무것도 아닌 일인걸. 스팍이 샤워를 하러 간 동안 짐은 잠잘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한 쪽에 누워 패드를 켰다. 그리고 애틀랜타 지역의 볼거리와 갈 곳을 검색했다. 벌칸에 있을 스팍 대사에게 전화해서 취향을 물어본다면 쉬워질 일이다. 그렇지만 그곳의 시각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확인해 보니까 조지아보다 훨씬 깊은 시간이었다. 뭐, 내일로 미뤄도 괜찮겠지.


스팍이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을 즈음에는 몇 군데 행로를 정하고 후보도 뽑아놓은 상태였다. 짐은 스팍이 욕실에서 곧장 옷을 갈아입었다는 사실에 왠지 실망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카데미의 숙소에서는 허리에 수건만 두르고 나왔는데 말이다. 스팍의 수건 차림을 보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는 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스팍이 옷을 입으려고 수건을 풀게 되면 시선 둘 데가 없어 곤란했을 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그랬으면 스팍의 몸에 혹이라도 달려 있어서 팍 식지 않는 이상에야 알몸을 본 남자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되는 건데, 얼마나 더 힘들어졌을까.


너무 깊이 들어간 것 같았다. 이러다 상상만으로도 어색해지기는 마찬가지인 듯 했다. 해서 짐은 의식의 흐름을 다시 틀어,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하고 편하게 입고 있는 벌칸이 끼어들기 전에 원래 하고 있던 생각으로 돌아갔다.


“내일 목적지 말이지, 몇 군데 정해봤는데… 한 번 볼래?” 그는 패드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스팍은 패드를 받아들고 짐의 옆자리로 올라와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았다. 목록을 확인하는 동안 이따금씩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표정은 여전히 평소와 같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서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 스팍의 발이 보였다. 스팍은 맨발이었는데 손가락처럼 발가락도 늘씬하게 잘 빠져 있었다. 짐은 갑자기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손을 가져가서 저걸 만져보고 또… 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 자신. 발 페티시라도 있는 사람처럼. 단지 남들은 못 봤을 스팍의 일부를 알아가면서 관심이 들었을 뿐이라고 해 두자.


옆자리에 누운 스팍이 반쯤 눈을 내리감은 채 패드를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짐은 더욱 확실하게 깨달았다. 제길 ― 스팍에게 정말로 끌렸다. 그냥 ‘죽여주는데!’ 정도가 아니었다. 엔터프라이즈에 있는 대부분의 핵심 멤버들을 포함해서(어차피 스스로 선을 그어두긴 했지만)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곤 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에 짐이 빠져든 정도는—죽여주든 안 죽여주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샤워하면서 자꾸 생각나고 또 보고 싶어지는—퍽 중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예전에 우후라에게 줄곧 갖고 있던 호기심과 비슷한 생각이랄까. 우후라가 스팍과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랬었다. 그 후로는 스팍은 없더라도 함장으로서 그녀를 선원으로 대해야 했으니 선이 그어진 셈이었다. 갖고 있던 호기심은 그녀와 좋은 친구 사이가 되어가면서 잊혀갔다. 우후라는 정말 좋은 친구였고 짐 역시 만족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스팍과의 경우는 짐에게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벌칸인일 뿐만 아니라 처지가 좋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니 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생각 없이 아랫도리를 잘못 놀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지금까지 쌓아놨던 신뢰를 단번에 잃고 스팍이 다시 공항으로 나가서 구걸을 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손 뻗으면 있을 거리에 나란히 누운 사람을 향해 새삼 매력을 느끼다니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다. 특히나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짐은 표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고, 스팍을 위해서라도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관심 가는 데 있어?”


“당신이 정한 행선지 모두가 괜찮아 보여.”


“정말? 방해되기 싫어서 그러는 거라면 안 그래도 괜찮아.”


“정말이야.” 확언해 주는 스팍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당신의 선택지는 지적 호기심이 충족되는 장소들이기에 내게도 어느 정도 유익한 결과가 되리라고 봐. 나는 이 행성의 아주 기본적인 정보 외에 모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대한 역사 역시 그러하고. 유익할 거야. 놀랍게도 우리의 취향에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왜, 나라는 인간은 후미진 당구장 같은 데서 싸구려 맥주나 마실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짐은 놀리는 투로 대꾸했다.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사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고. 내가 설마 억지로 관심 있는 척 그랬을까봐?”


스팍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항상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당신이 지구를 구한 공적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의도한 대로 유머를 섞어 하자니 내 부족한 유머 감각에 조심스러워져. 농담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무례한 얘기를 한 셈이 될 테니까.”


짐은 스팍이 한 말을 이해하느라 잠시 곤혹스러웠지만, 이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 난 누가 농담하면 대충 눈치 채거든.”


“그렇지 않더라도 부적절한 농담일 수밖에 없어. 당신이라는 인물에게 부당한 처사가 될 테니까. 첫인상과 실제의 당신은 달랐다는 걸 인정할게. 알고 보면 당신이 세상에 내비치는 모습 이상임을 알게 되었어.”


짐의 미소가 조금 흩어졌다. 가볍게 농담이나 주고받으려 했는데 대화가 어느새 의도한 것 이상으로 진지하게 변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세상에 내비치는 모습이라, 짐은 잠깐 생각해 보다가 그 주제에서 가볍게 넘어가는 편을 선택했다.


“뭐어, 다들 그렇지 않겠어?”


“맞아.” 스팍은 대답하면서 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갑자기 눈을 거둬 얼른 다시 패드로 시선을 돌려서 짐은 속으로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선호하는 선택지라도 있어?”


내일 갈 곳 말이지. “글쎄… 내일 날씨만 좋으면 야외로 나가는 것도 좋겠지. 몇 년 동안, 어… 실내에 틀어박혀 지내느라 말야.” 그는 말하던 도중, 스팍은 그 반대였음을 기억하고는 멋쩍어졌다.


짐이 괜히 미안해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스팍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그대로였다. “반면에 나는 긴 시간동안 실내에만 있는 데에 익숙지 않았지. 그간 쉴 곳과 최신 기술을 포함해 여타 사치를 누리는 데 감사하게 여기고 있지만 오랜만에 야외 활동을 하는 편도 익숙함이 보장되는 좋은 선택이라고 봐.”


짐은 그가 이런 말을 통해서 고마움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 스팍이 보통이면 하지 않았을 말에 신기해하며 관심을 기울일수록 스팍은 어색해 할 테고, 그렇게 되면 다음번에 또 그답지 않게 속내를 드러낼 때까지 시간이 더 걸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선의 반응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거겠다.


“좋아. 내일 아침에 본즈한테 물어보자.”


스팍이 패드를 다시 돌려주었다. “그럼 이제 그만 자는 게 좋겠군.”


“할 일이 없을 땐 자는 게 최고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열심이었지만, 스팍이 담요를 들어서 안에 누우려는 모습을 보자 더 힘들어졌다. 짐은 패드를 꺼서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고 따라서 잘 준비를 했다. 잠을 자는 건 확실히 좋은 선택이다. 무의식 상태가 되고 나면 생각하면 안 되는 잡념들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있을 터였다.


예상치 못하게 스팍이 거기에 도움을 줬다. 짐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마치 경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이, 좀 더 이쪽으로 와도 돼.” 짐은 옆으로 몸을 돌려 스팍이 있는 쪽을 향해 히죽 웃었다. “안 물어. 네가 ‘물어주세요,’ 하고 부탁한다면 또 모를까.”


“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스팍이 의아한 얼굴로 넘어다봤다. “단지 당신이 필요로 할지도 모르는 공간을 더 만들어 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뭐, 그건 나도 그래.” 짐은 담요를 끌어올려 몸에 덮었다. “그리고 그다지 공간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나 때문에 구석에 숨을 필요 없어. 우리가 팔을 대자로 벌리고 자는 게 아닌 이상 실수로 닿거나 하지 않을 거라고.”


스팍이 가늠해 보는 눈으로 그를 살폈다. “의도적으로도?”


“의도적으로도.” 짐은 한숨을 지었다. “걱정 붙들어 매라구. 본즈한테는 맨날 장난을 치지만 넌 본즈가 아니잖아. 본즈하고는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어.”


“그렇다면 이전의 말은 농담이었군.”


“그래. 대부분은. 그러니까, 본즈가 관심이 있었다면야… 나도 뭐 불평하거나 할 건 아니거든. 그런데 본즈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고, 나도 존중해. 너한테도 같은 거야.”


“알겠어.”


스팍이 조금 더 가까이 오자 짐은 베개를 베고 누워 천장을 향했다. “불 꺼도 되지?”


“그렇게 해.”


“컴퓨터, 소등해.”


조명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창문을 통해 멀리서 가로등 불빛만이 은은하게 방을 밝혔다.


옆에서 스팍이 움직여 편하게 자리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불쑥… “나한테도 똑같이 존중하겠다고 한 말은, 내가 관심이 있을 경우도 포함되어 있는 거야…?”


“어…” 짐은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했다.


대꾸를 하지 못하자 스팍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아직 지구식 유머의 방식에 충분히 익숙지 않은 듯 해.”


“…아.” 짐은 안도를 해야 할지 아니면 실망을 느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농담을 던진 거였구나.”


“당신과 닥터 맥코이의 대화로 유추해 보아 그것이 대중적인 대화 양식이라고 보였어.”


짐은 조용히 웃었다. “아하. 그럴 만도 하네. …사실 말이지, 네 농담이 이상했다는 게 아니라. 너한테서 농담을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뿐이야.”


“납득이 가는군. 타인이 농담을 하면 대게 알 수 있다고 앞서 당신이 했던 말과는 사뭇 다르지만.”


“당황해서 그래.”


“그렇군.”


짐은 뭔가 더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싶었다. 예를 들어 스팍에게 방금 한 농담이 정말 농담에 지나지 않는 거냐고 묻는다든가. …아니다. 여기서 말을 더 해봤자 상황만 악화될 게 뻔했다. 그래서…


“잘 자, 스팍.”


“잘 자.”


부디 어서 잠이 오기만을 바라야 할 때였다.






제 10장, 의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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