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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8 : 관심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8 : 관심

topsecretum 기밀선녀 2015.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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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장,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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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관심





그 날은 다시 짐이 소파에서 자는 차례여서 거실에서 잤음에도, 이른 아침 개운하게 일어났다. 그는 잠기운 사이로 머리를 굴리다가 해 두어야 하는 일이 떠올라서 그 생각으로 옮겨갔다.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미리 해두었어야 옳았던 것이긴 했다.


아침 조깅을 뛰고 와서 해결해야겠다, 고 짐은 생각하며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그런 후엔 힘이 돋고 준비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일어나니 눈앞에 책상 위의 터미널이 바로 보였다. 조깅부터 나갔다가 그동안 스팍이 일어나게 되면 조용히 통화를 할 기회는 없게 될 거다… 지금 해결하는 것과 나중에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좋은 걸까?


짐은 고개를 젓고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지금 해결하는 게 나을려나. 이곳은 서부라서 시간대가 조금 늦었음에도 아직 이른 아침이었기에, 괜히 엄마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아침 운동으로 낙점이었다.


변명, 또 변명.


교정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주말이기도 했고 졸업식 후의 일요일이라서 더욱 그랬다. 나와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이제 학생 신분을 졸업한 이들은 대부분 지금도 자고 있을 것이다. 여행 가방을 끌고 지나가는 졸업생도 몇몇 보였는데, 벌써 일자리가 정해졌는지 아침 일찍 공항으로 하는 듯 했다. 어쩌면 공식적으로 임무가 나오기 전에 잠시 집에 가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집’이라, 요즈음에 그의 생활에 되풀이해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는 개념이었다. 지낼 곳이 없는 스팍과 마주친 후로 새삼 느낀 거였지만, 사실 그 전부터도 그랬다. 어제의 통화에서 본즈는 전부인의 집에서 지내면서 상륙하고 못 본 새 긴장을 풀고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짐 역시 캠퍼스의 낯익은 환경에 돌아와 있으니 편하고 좋았다. 다만…


짐은 일부러 속도를 높여 멀리까지 뛰었다. 그러면서 이곳이 그리워질 테니 이러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나왔을 즈음엔 시간이 좀 더 지나 있어서, 조용히 전화를 하기에는 조금 늦은 듯 했다. 스팍은 일어났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변명, 또 변명. 더 변명할 거리는 많았지만 그는 곧장 책상으로 가 터미널을 켰다.


엄마는 잠기운이 없는 모습으로 금세 전화를 받았다. 환하게 웃는 것을 보니 일찍 일어나 전화를 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듯 했다. “짐! 잘 잤니?”


“안녕, 엄마.” 짐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너무 일찍 전화한 건 아닌가 몰라요.”


“전혀. 오늘 아침에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어.” 엄마가 다정하게 웃었다. “어제 축사한 거 봤어. 엄만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고마워요…” 딱히 예상 못한 칭찬은 아니었기에 그는 고개를 주억여 대답했다.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 그냥 머릿속에 있는 걸 말로 꺼낸 것뿐이에요.”


“그래도. 네가 진심이니까 대단한 거 아니겠니. 거창한 이야기를 젖히고 가장 근본적인 핵심을 곧장 짚은 거니까. 넌 스타플릿이 존재하는 이유를 정확히 꿰뚫어본 거야.” 엄마는 뭔가 더 말할 듯 뜸을 들였다. 짐은 엄마가 ‘그’ 얘기까지는 하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엄마는 더 얘기하지 않았다. “그럼 오늘 아카데미에서 출발하는 거니?”


그는 끄덕였다. “네. 계획은 그렇죠…”


“지금 셔틀에 타지 않는 이상 점심때는 못 올 것 같고, 저녁에 도착하면 같이 먹을까? 데리러 나갈 테니까 어디 좋은 데로 가서 외식이라도 하자. 늦게 도착할 것 같으면 대신 집에서 요리를 해 놓을게.”


엄마는 무척 들떠 보였다. 이래서 차마 전화하기가 힘들었다. “엄마, 사실은…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서 잠시 들르기로 했어요. 그 친구가 당분간 애틀랜타에 지내고 있는데 제가 축사 때문에 지구에 내려온다는 걸 알고 와서 며칠 지내라고 초대했어요. 정박한 이후로 줄곧 못 만났거든요.”


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듯 했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안 온다고?”


“아뇨, 갈 거예요. 그냥, 어, 먼저 친구 집에 방문하고 그 다음에 곧장 갈 생각이었어요. 사실 리버사이드에 가고 나서는 갈 데도 없어요. 거기서 한동안 있을 거예요. 와, 진짜 있죠 ― 엔터프라이즈에서 지내면서 본즈를 연일 봐왔더니 몇 달 못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좀 낯설어서요. 그 친구도 그럴 거구요.”


“그렇지만 엄마도 정박하고 나서 제대로 못 봤잖아.”


“알죠, 그럼요.”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매일 붙어 지낸 사이는 아니라는 점을 굳이 지적할 것까진 없겠다. “걱정 마세요 ― 아직 다시 배에 탈 일 없으니까요. 엄마 얼굴도 보고 지내다 갈 시간은 충분히 있어요.”


“알아, 짐. 그치만…” 엄마의 슬픈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짐은 불효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전화를 걸 때부터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서도. “…샘이 지구에서 이사 간 이후로는 이곳이 너무 적적해. 너도 스타플릿에 들어가고 나부터는 얼굴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잖니.”


“엄마, 나 못 믿어요? 집에 가서 엄마 음식 먹기 전에는 다시 우주로 갈 일 없어요. 거기다 엄마가 요리해 주는 거 질릴 때까지 먹을 거거든요. 나 얼마나 먹는지 아시죠? 거기다 요 몇 년간 계속 합성된 음식만 먹느라 질렸거든요. 내가 한 번 꽂히면 봐주는 거 봤어요? 오히려 나 거기 도착하고 나면 언제 가버리려나 손만 꼽게 될 걸요.” 짐은 살갑게 농담을 던졌다.


“그럴 리가 있겠니.” 엄마는 웃어주었다. 애써 지어낸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짐은 받아들였다. “우리 아들, 언제나 환영이지.”


“다녀온 다음에는 곧장 엄마한테 갈게요. 아시죠? 약속해요. 오늘 당장 못 가는 것 뿐이에요. 죄송해요, 엄마가 기다리는 거 알고 있었는데… 착륙한 후부터 일이 좀 이상하게 돼서 엊저녁까지 결정을 못 하고 있었거든요.” 정확히 말해서 스팍과의 일 때문에 무척 분주했던 터라, 두 곳의 선택지 중 어느 쪽에 먼저 갈 지 제대로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솔직해지자면 정말로 가고 싶은 곳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건데 ― 엄마, 미안해요.”


“…금방 오겠다고 했으니까 괜찮아.” 엄마는 정답게 대답했다.


엄마는 괜찮다고 했지만 목소리에 깔린 외로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걸 들으니 짐은 더 도망가고 싶어졌다. 스스로가 점점 더 나쁜 자식이 되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게요, 엄마. 함장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요.”


그 말에 엄마의 미소가 조금은 밝아졌다. “그래… 잘 놀다 와, 그럼. 조심하고.”


“물론이죠.” 조지아로 비행하는 눈 깜짝할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 리야 없지만 말이다. “계속 연락할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알았어, 고마워, 짐. 사랑한다.”


“저도 사랑해요, 엄마. 곧 봐요.”


통신을 종료하며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엄마와의 사이가 나빴기 때문이 아니었다 ―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단지… 스타플릿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엄마에게 말을 건네는 게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지휘부에 앉은 후로는 훨씬 더 그랬다. 지금처럼 멀리 나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보다, 예전에 그랬듯 술이나 퍼마시며 주먹다짐에 사고를 치고 돌아다녔으면 차라리 가족 관계만큼은 안정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릴 때까지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스팍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냈다. 통화를 하는 동안에 스팍은 깨어있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다렸던 거다. 고마웠다.


그 후로도 스팍이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있던 것 역시 어찌나 다행인 일이었는지. 둘은 아침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공항으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 식탁 위에서 다음 대전을 준비하고 있던 여행용 체스 세트도 접어서 가방에 들어갔다 ― 짐은 스팍이 자신의 배낭 안에 들어가 있는 체스 세트를 보고 아무 말 하지 않아서 기뻤다. 스팍은 한쪽 눈썹만 들어올렸고, 짐은 웃어주었다. 그걸로 얘기는 끝이었다.


셔틀이 이륙할 즈음에야 짐은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대체 불만이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지금 그는 본즈를 보러 가고 있고, 스팍도 함께 동행했다. 스팍은 지난번 공항에서의 모습보다 훨씬 차림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모든 면에서 상황이 나아졌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이고, 그렇게 된 지 6년이 흐른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벅찼다.


땅에서 떨어져 위로 올라갈수록 지평선은 저 아래로 낮아졌고, 그는 이번 이륙이 함선으로 돌아가는 게 아님을 상기하고는 조금 흥이 식었다.


비행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몇 개월 후 돌아갈 엔터프라이즈는 달라져 있을 거다. 우선 넘버원이 자신의 함선을 얻어 나가게 되었으니 그녀의 빈자리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자리가 비워질 곳은 더 있었다. 현역에서 은퇴할 준비를 하거나 다른 곳에서 특별한 업무를 수행하려는 뜻을 밝힌 크루들이 있었으므로 고려해야 했다. 짐은 그 중 어느 것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임무 중에 짐 자신 때문에 전근을 요청한 대원도 있었지만 특별히 마음 쓰지 않았다. 함선 사이에서의 모임에 부지런히 나가 다른 함장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각 함선마다 그곳의 체계에 따라 문화처럼 저마다의 분위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주요 대원들은 대부분 젊고 생기가 넘치며, 의욕이 가득해서 언제든 우주로 나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길 원했다. 사기가 높고 열정이 넘치는 엔터프라이즈는, 경험이 많은 승무원들을 비롯해 신중하고 주의 깊은 대원들에게 있어 성향이 맞지 않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플릿에서 넘버원을 함장으로 승격시킨 이유일 것이었다. 파이크와의 연줄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녀가 조심성이 과하다거나 연방의 말만 듣는 속물은 아니었지만, 필요하다면 대원들의 열의에 고삐를 당겨 통제할 능력이 되어줄 터였다.


짐의 시선은 옆자리에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스팍에게로 향했다. 스팍이 플릿에 있었다면 그 역시 넘버원처럼 자신의 함선을 얻어 나가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짐의 밑에서 몇 달 못 버티고 전근을 요청하게 된 크루 중 한 명이 될 지도 몰랐다. 스팍 대사는 엔터프라이즈에 잘 적응했고 나아가서 스스로에 대해 깨달은 점도 많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 스팍은 조용하기만 하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있을까. 벌칸 행성이 파괴된 일이 그가 알고 있던 예전의 스팍을 더 말수 적고 비밀도 많은 벌칸으로 만들어 버렸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연스레, 스팍이 어쩌다 지구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짐은 그러한 일련의 생각을 접어두었다. 스팍을 플릿에 복귀시키지 않는 이상에야 일등 항해사 스팍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해가 넘어갈 준비를 하고 진하게 물들어갈 즈음에 셔틀이 목적지에 착륙했다. 짐은 택시를 잡아 주소를 댔다. 내비게이션에 뜬 지도만 보더라도 이 지역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쉬운 길인 듯 했다. 15분 후, 교외의 주택가로 들어선 택시는 이내 구식 외형에 신식 설비를 더한 한 주택 앞에 도착했다. 내려서 가방을 꺼내는 동안 현관이 열리더니, 본즈가 나와 얼굴에 미소를 띠고 팔을 흔들어 맞아주었다. “어떻게 잘 찾아왔네.”


앞뜰을 건너오는 본즈에게 짐은 반갑게 웃었다. “식은 죽 먹기지. 길도 찾기 쉽고 택시 기사가 이쪽 근방에 빠삭했으니까 ― 잠깐만, 여기 아저씨한테 요금 좀 내고 나서 얘기하자.”


“그래. 스팍, 정말 오랜만이야. 어떻게 지냈어?”


본즈는 짐이 택시 기사와 용무를 보려는 동안 스팍에게 인사를 했다. 짐은 돌아서다 말고 얼른 끼어들었다.


“벌칸인은 악수를 하지 않아.” 어색하게 나와 있는 본즈의 손에 스팍의 눈이 빤히 가서 꽂혀 있었다. “잊지 말라구. 다른 식으로 인사하는 방법이 있거든. 보여주지 그래, 스팍?”


그동안 그는 팁까지 후하게 쳐서 계산을 한 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숨죽여 히죽였다. 본즈는 손가락 가운데를 제대로 벌려 펴려고 꼼지락대다가 마침내 다른 쪽 손으로 그럭저럭 성공했다. 퍽 자랑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그것도 스팍이 지적하기 전까지였다.


“엄지손가락을 굽히면 안 돼.”


“…젠장할.” 본즈는 짜증 가득 툴툴대고는 손을 내려버렸다. “여하튼, 짐이 그게 다야? 들어줄 필요 없지?”


“됐어. 가볍게 하고 왔거든.” 짐이 대답했다. 필요한 것만 챙겨놔서 정말 그랬다.


“뭐, 들어와. 조랑 게임을 하고 있던 중이야. 끝내려고 했는데, 괜찮으면 와서 같이 하든가.”


“나야 좋지. 어떻게 할래, 스팍?” 짐은 흔쾌히 동의하고 가방을 들었다.


“무슨 게임인가에 달렸지.” 스팍은 어깨에 배낭을 걸치고 함께 집으로 향하며 대답했다. “나는 지구식 게임에 익숙하지 않아.”


“같이 와서 하라는 걸 보니까, 분명 체스를 하고 있던 건 아닐 테고 말이야.” 짐은 본즈에게 슥 미소를 건넸다.


“체스? 무슨 소리야. 열다섯 짜리 애랑 그런 고리타분한 걸 하겠냐.”


“이봐, 체스도 얼마나 재밌는데. 나랑 스팍이 두는 걸 보고서도 그런 소릴 하나 보자.”


“내 입장에서는 우리의 체스 경기를 재미있다고 표현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보다는 분투에 가깝지.” 스팍이 옆에서 한 마디 했다.


“집 좋네.” 짐은 본즈가 두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있는 동안 안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집의 내부는 바깥의 외양만큼이나 고풍스런 분위기가 났다. “언제 지어진 곳이야?”


“처음에? 20세기 후반일 걸.” 본즈는 현관에 들어서서 대답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오래된 건물도 아니야. 이미 옛날에 유지 보수를 하려고 골조를 바꿔서 설비는 신식이고 겉만 고풍으로 놔둔 거지. 맥코이 가문 대대로 내려온 집이다 아니냐.” 짐은 그가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조금은 풀이 죽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즈는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어쨌든 나중에 조가 물려받을 테지.”


이런 것이 이혼합의에서 진 사람의 비애이려나. 짐은 더 얘기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멋진데, 여기. 요즘 지어지는 것들보다 볼거리도 많고 말야.”


주변을 둘러보던 스팍이 한 마디 했다. “나로서는 이곳이 비교적 특별히 시각적 흥미가 높다고 표현할 수는 없겠어. 구식 건물은 현대식 건축물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요소가 적을 테고, 따라서 이러한 양식이 퇴보함에 따라 외형에 희소성이 부여되지.”


본즈가 그에게로 눈을 홉떴다. “그거 칭찬인가? 아님 모욕이야?”


“둘 다 아니야. 다만 최신의 건축식과 비교하였을 때 이러한 양식과 설계가 더욱 독특하게 여겨지는 데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되는 것이지.”


“…칭찬이라고 생각하려 했더니만.” 애초에 기대도 않았으면서 본즈는 그렇게 말했다. “여튼, 잠잘 곳은 이따 보여줄게 ― 들어와, 와서 앉아. 스팍, 아직 내 딸을 만나본 적이 없지? 그리고 짐 너도, 4년은 못 봤고.”


그렇지만 조안나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조는 소파에 앉아있다 그가 들어서는 걸 보고 일어나더니,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짐!” 그러다 잠시 생각해보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우리 아빠의 상사인데, 계속 짐이라고 불러도 돼요?”


짐은 웃으며 가볍게 조안나를 포옹해 주었다. 키가 훌쩍 자랐고, 몸에 굴곡도 생겼으며 어렸을 땐 지금보다 머리털 색이 밝았던 걸로 기억했다. 그래도 여전한 조안나였다.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야. 짐이라고 불리는 게 편해. 다들 그렇고 말이지. 너희 아빠도 계속 나더러 짐이라고 부르는걸. 게다가 ‘미스터 커크’ 이런 걸 쓰는 건 너무 구리지 않니?”


“알았어요. 미스터는 잊어버릴게요.” 조안나는 어깨를 으쓱 하며 웃었다.


“그리고 이쪽은 스팍이야.” 본즈는 이어서 스팍을 안으로 들이며 소개했다. “그냥 스팍이라고 해도 돼. 다들 스팍이라고 부르니까.”


“지구에서 이 녀석 성을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짐은 우스갯소리로 덧붙였는데,


“우후라 대위라면 가능한 일이야.”


“진짜?” 스팍의 대꾸에 살풋이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게 가능은 한 일이었군. “알았어. 이 대륙 안에서라고 하자.”


조안나는 옆에서 뭐라고 하건 반응도 없이 스팍을 빤히 쳐다보고 있더니, 갑자기 차분하게 예의를 차렸다. “안녕하세요. 만나뵈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스팍.”


짐은 저런 표정에 익숙했기에 설마 싶었다. 시선을 교환하며 눈썹이 올라가 있는 본즈를 보니 그 역시 그랬고.


“나 역시 반가워, 맥코이 양.”


스팍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조가 얼른 대답했다.


“오, 그냥 조안나라고 하셔도 돼요. 아니면 조라고 하거나요. 다들 그렇게 부르거든요.”


“원한다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다만 예의에 맞게 원하는 호칭으로 대하려는 의도였어. 어느 쪽으로 불리는 것이 좋겠어?”


조의 뺨에 발그레하게 물이 드는 걸 보고 짐의 설마는 두말할 것 없이 확신으로 변했다. “어… 조안나 쪽이 좋아요.”


“그렇다면 좋아, 조안나. 나 역시 ‘미스터’를 붙일 필요는 없어. 스팍이라고만 하면 돼.”


“알았어요… 스팍.”


본즈는 완전히 황당해져서 둘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짐은 그 모습에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애를 탓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는가.


본즈가 끼어들어 말을 텄다. “뭐, 들어왔으니 앉아, 앉아. 뭐 필요한 거 있냐? 마실 거라도 갖다 줄까?”


“빨리도 물어본다. 물어보니까 갑자기 목이 엄청 말라.”


“물 한 잔이면 적절할 듯 해.” 스팍도 거들었다.


“그래. 물이면 돼.” 그것보다 조금 강한 음료를 마시면 좋을 것 같지만 본즈가 딸 있는 앞에서 그런 요청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상황만 허락한다면 본즈도 같이 마셨을 법 한데 아쉬웠다.


본즈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나자 조안나가 다시 말을 붙였다. “아저씨는 짐의 함선에서 근무하는 사람인가요?”


스팍은 짐과 조안나가 앉은 소파에 함께 오지 않고 1인용 안락의자 옆에 배낭을 내려두고 자리를 잡았다. 그는 고개를 저어서 대답했다. “아니.”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장교는 아니신 것 같았거든요. 막 엄격해 보이지 않아서요.”


짐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왜? 나도 장교잖아. 네 아빠도 장교고. 나랑 너희 아빠가 엄격해 보이니?”


“나 역시 동의해야겠어. 커크는 내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가장 덜 격식을 차리는 인물이지.” 스팍도 맞장구를 쳤다.


“알았어요, 맞아요, 맞아.” 조안나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인정했다. “그래도 역시 장교로는 안 보여요. 그보다는… 예술하는 사람처럼 보여서요. 음악가라거나. 뭐 그런 쪽으로요.”


짐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용을 쓰고 있다가, 다음 순간 스팍의 대답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 했다. “말하자면, 어느 면에서 음악가라고 할 수 있지.”


“그럴 줄 알았어!” 조안나는 짐작이 맞아 기쁜 듯 신이 나서 물었다. “어떤 음악을 연주하시는데요?”


“클래식한 계열을 주로 연주해. 내 개인적으로는 대중적인 음악 쪽에 익숙하지.”


짐은 스팍이 어디까지 응수를 해주려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스팍은 이렇게 권하기까지 했다.


“한두 곡 정도 들어보겠어?”


“듣고 싶어요!”


조안나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스팍은 이미 몸을 굽혀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옷 외에 다른 게 (짐이 직접 집어넣은 여행용 체스 세트를 제외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가방의 뒤쪽 칸막이를 열자 윤이 나는 커다란 나무 케이스가 쑥 나왔다. 스팍은 그것을 무릎 위에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내부에 덧댄 고운 천 속에 우아하게 생긴 현악기가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스팍 대사에게서 악기를 연주했다는 얘기를 한 번 들은 적은 있었지만,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그간 떠돌면서 악기를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와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런 걸 갖고 다녔던 줄은 꿈에도 몰랐네.”


“호젓한 시간동안 이것이 동료가 되어주었어.” 스팍은 케이스를 옆에 내려두고 악기를 감싸 안듯 목 부분을 어깨에 기댔다. 줄 끝의 노브를 하나 조인 후 가볍게 줄을 퉁기자 신기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간직할 가치가 있는 사치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조안나 역시 감탄사를 내뱉으며 스팍이 줄을 뜯어보는 모습을 놀랍게 지켜봤다. 몇 번 반복해서 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 보니 아마 튜닝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악기에 손을 올리고 어딘지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음색으로 복잡한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조는 더한 듯 했다. 조안나는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열중해서 스팍을 지켜보았다. 주방에서 돌아온 본즈는 딸을 보고 시선을 옮겨 스팍을 쳐다보더니, 짐을 향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시선을 보내왔다. 짐은 그저 어깨만 으쓱 하면서 웃고는 다시 스팍을 구경했다. 악기에 대해 문외한이니 잘은 모르지만, 현 위에서 날래게 움직이는 손가락만 보더라도 스팍은 정말 연주를 잘 했다.


연주를 마친 후 스팍은 본즈가 건네주는 물잔을 받아들었다. 조안나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노래가 정말 좋네요! 제목이 뭐예요?”


“세톡의 열다섯 번째 움직임. 다가오는 모래 폭풍을 일깨우는 내용이지. 벌칸에서 옛부터 내려오는 유명한 곡이야.”


“그렇구나… 벌칸 음악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요.”


스팍은 조용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그랬을 테지. 벌칸과 지구는 첫 접촉 이후 동맹을 맺고 지내온 역사가 짧지 않지만 최근의 몇 해간 관계가 긴장된 것이 사실이니까. 그리고 벌칸 행성이 붕괴된 이후로 벌칸 문화가 번영하기에는 남아 있는 재원이 많이 부족해졌어.”


“벌칸 전통 음악을 더 들어보고 싶어요.”


“나도 그래.” 짐도 본즈에게서 물을 받아들며 씩 웃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본즈에게 물었다. “너는?”


“뭐, 좋아.”


본즈는 점점 불만이 그득 차오르는 분위기였는데, 반면 짐은 이 상황이 퍽 즐거워졌다. 보통 듣게 되는 노래와는 전혀 다른 유형이었음에도 스팍의 연주는 무척 인상이 깊었다. 다른 이유보다 그 주체가 스팍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음악은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고 하지 않던가. 짐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뭐… 스팍의 경우라면 그것도 아주 조금이겠지만. 다른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스팍의 표정이 변했고 천천히,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미묘하게 무게를 더해갔다. 스팍이 집중하고 있음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연주를 듣는 만큼이나, 스팍을 지켜보는 것 역시 흥미로웠다. 


…샤워 후 섹시한 스팍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반라에 물방울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짙은 눈동자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의 무게가 고스란히 존재를 드러냈고… 짐은 저 살짝 벌어진 입술이 급하게 되면 어떻게 움직일 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두어 번 눈을 깜박이다 스팍의 손으로 눈길을 돌렸다.


스팍이 연주를 마쳤다. 이번에는 조안나가 박수를 치는 대신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슬픈 노래네요.”


“슬프다기 보다는, 침착하게 들리는 것이지. 이것은 벌칸 전통 음악으로 ‘기억의 찬가’라는 곡이야.”


…그러니까 결국엔 조의 말이 맞는 거 아닌가? 벌칸인들이 그걸 인정할 리는 없지만.


“또 다른 음악도 아세요?”


본즈가 끼어들어 무마했다. “자, 자. 이 친구들 오늘 먼 길 오느라 지쳤을 거야 ― 스팍을 위해서 잠시 숨 돌리게 해줘야지.”


“조안나의 요청은 나 역시 환영이야. 경청해주는 관객이 있다면 언제라도 영광이지.”


“그래, 그동안 이렇게 지냈던 거냐?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하고?” 궁금해진 본즈가 물었다.


“일부분은.”


거짓말은 아닐지 몰라도 꽤나 행간을 생략하고 건너뛴 얘기였다. 스팍은 그동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연주를 했을까. 그건 짐도 상상에 맡겨야 했다 ― 길가에 앉아 그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음악을 들려주었거나, 어쩌면 밤을 지새울 보금자리를 찾아 홀로 연주를 하며 적적한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을 테고… 그런 상상을 하자니 슬퍼졌다.


“것 참. 네게 그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본즈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번에 맞닥트린 이후로 그런 특이한 면을 엄청나게 많이 발견했다구. 스팍이 얼마나 재밌는 녀석인지 몰라.” 짐이 말했다.


“그럼 이번에 너희 둘이 ‘맞닥트려서’ 여기까지 온 거냐?”


“참 신기한 우연이지?”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마주쳤어.” 스팍이 설명을 덧붙였다. “당시에 나는 특별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


이것도 한참 압축한 얘기였다.


“뭐, 천만 다행이었네. 이 놈은 남의 계획을 멋대로 자기가 바꿔버리는 몹쓸 버릇이 있거든.”


무슨 조화인지 본즈가 히죽이며 짐에게 웃음을 던지자 스팍도 맞장구를 쳤다. “인지하고 있던 바야.”


짐은 상처받은 척 비난조를 했다. “이봐, 본즈! 이제 와서 딴 소리 하기야? 쌔끈한 함선에 태워서 먹고 살게 해줬더니!”


“이런 식으로 말이지.”


정말 그게 사실이었다. 짐은 스팍에게도 똑같이 그러고 싶었다 ― 또, 스팍에게 그것이 필요함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고 말이다.


본즈가 화제를 바꿨다. “여튼. 게임을 마저 하든가 해야겠어. 얘기하는 동안 저렇게 놔둘 거면 끄는 게 낫지. 조, 어떻게 생각해? 같이 해볼래, 짐?” 그는 짐에게 작은 컨트롤러를 건네줬다.


“해보지, 뭐. 근데 이거 무슨 게임이야?”


“보레알리스 5라는 홀로그램 게임이에요.” 조안나는 짐이 컨트롤러의 버튼과 센서를 확인하는 동안 자신의 몫의 컨트롤러를 꺼냈다. “먼 외행성이 배경인 전쟁 시뮬레이션이죠 ― 우리들은 외계인의 침략에 맞서 인질을 구출하는 특수 부대예요.”


“아하 ― 이거 1탄을 해봤던 것 같아. 대충 감 잡았어.” 짐은 소파에 앉는 본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계속 하려고?”


본즈는 고개를 젓고는 조가 알아서 깰 거라고 했다.


“아빤 이거 진짜 못 해요.” 조안나가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버튼을 누르자 허공에 메인 메뉴가 떠올랐다. “바로 앞에 있는 것도 못 맞추거든요.”


“내가 의사지, 저격수인 줄 알아?”


“현실에서는 페이저를 꽤 잘 다루잖아.” 짐은 격려해 주며 메뉴에서 캐릭터 선택 창으로 들어갔다.


“그건 현실이니까 그런 거고. 조준을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제대로 못 하면 죽은 목숨이니 훨씬 자극이 되는 법이지.”


“위생병을 하고 있었네. 원래 얘네는 총 잘 못 다뤄.”


“사실은 제가 위생병이었어요.” 조안나가 커서를 움직여 보여주며 설명했다. “아빠랑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위생병을 골라야 했거든요.”


짐은 웃었다. “그럼 원래는 뭘로 하는데?”


“돌격대요. 근데 누구랑 같이 플레이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같이 해보실래요, 스팍?” 조안나가 고개를 틀어 물었다. “컨트롤러 더 있어요. 다 같이 하면 더 재밌죠.”


스팍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악기를 옆에 내려두고 조가 건네는 컨트롤러를 받아들었다. “시도해 보는 것은 괜찮겠지.”


스팍이 컨트롤러에 대해 하나도 몰랐기에 짐과 조는 조작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캐릭터를 선택하는 부분에서는 설명을 보고 혼자 결정할 수 있었는데, 스팍이 공수부대를 선택하는 걸 보고 짐은 좀 미덥지 않아졌다.


“진짜 그거 하려고? 그거 조작하기 힘들 텐데.”


“효율적으로 조작법을 터득할 자신이 있어.” 뭐 본인 마음이지. 짐은 포수를 하기로 했다. 이거면 곤란한 상황이 찾아오면 언제든 공격을 마구 퍼부을 수 있을 테였다.


다행히 이야기는 천천히 적진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허공에 들쑥날쑥한 지형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스팍은 처음에 움직이는 데부터 애를 먹었다. 육군에 비해 조작할 것도 많고 까다로운 캐릭터니 당연했다. 그러다 매복한 적과 마주치기 전에 어떻게 이동하는 법을 터득을 했는데, 이번엔 움직이면서 총도 쏴야 하자 또 잠시 문제를 겪었다. 짐은 예전에 해보았던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익숙했던지라, 스팍이 컨트롤러를 잘 조종하는 법을 익히는 동안 조와 함께 적을 처리했다. 스팍의 실력은 아주 꽝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조도 꽤 능숙했다. 그렇지만 조가 대부분의 시간을 스팍에게 탄약을 보급해주느라 정신없다는 걸 안 이후로는 어딘지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반대로 스팍은 짐의 캐릭터를 엄호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결국엔 스팍이 아직 한참 미숙했기 때문에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회복약이 다 떨어졌다. 어쨌든 큰 위기는 아니었다. 짐은 조가 임무를 깰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만 집중했고, 곧 머지않아 조는 다시 집중해서 적의 통신 장비를 쏴버릴 수 있었다. 중화기가 없어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마침내 적지가 폭발함과 동시에 승리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오르자 조가 환호를 외쳤다. “다음 캠페인도 계속 하실래요?” 조는 스팍에게 물었다가, 이내 짐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고개를 틀어 재차 물었다.


짐은 그저 싱긋 웃었다. “계속 해보자. 스팍 넌?”


“반대하지 않을게.”


“흠, 다들 한다니까 나도 끼는 게 좋겠어.” 본즈가 컨트롤러를 하나 더 집어오며 궁시렁거렸다. 짐은 조가 다시 위생병을 고르자 숨죽여 웃었다. 나중에 금방 알게 됐지만 조는 그 캐릭터에 아주 능숙했다.


네 사람은 본즈가 결국 그만 둘 때까지 계속했다. 본즈는 자꾸 죽는데다 짐이 놀려대니까 학을 뗐는지, 저녁 준비할 때가 다 됐다며 손을 놔버렸다. 짐도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컨트롤러를 치웠다.


“맘대로 해. 나한테 중화기를 들면 안 된다고 또 잔소리를 하면 쫓아낸다.”


“넌 그거 안 맞아. 여튼 더 이상 얘기 안 할게. 한동안 못 봤으니까 얘기나 하자고. 그게 다야.” 재미는 양껏 채운 듯 했다. 조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스팍에게 관심을 쏟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도 재미있었지만, 특히나 본즈의 반응이 더해지니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방에 들어오자마자 본즈가 투덜투덜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딸내미가 너한테 헬렐레거릴까봐 걱정했더니만, 네가 아니라 스팍이잖아?”


“애한테 뭐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짐은 본즈가 찬장을 열어보는 동안 카운터에 기대앉았다. “꽤 매력적인 녀석인 건 사실이잖아, 예전처럼 그렇게 뻣뻣하지도 않고. 왜, 머리도 기르고, 수염도 있고… 전형적인 섹시남 이미지 아니겠어?”


“내 눈엔 남자를 매력적으로 보는 기능이 없어서 말이야.” 본즈는 궁시렁대며 팬을 꺼내 스토브 위에 올렸다. “특히 그 점이 이상하다고. 왜 그 녀석이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는 거지.”


갑자기 방어적인 기분이 들어 짐은 잠깐 주저했다. 물론 본즈는 알 리가 없었다. “뭘, 너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비슷한 처지 아니었어?”


“그리고 난 그게 매력적으로 보일 거라는 환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 본즈가 대꾸했다.


“사실은 너도 꽤…”


본즈는 눈을 굴리며 냉장고로 향했다. “됐으니까 고만 해. 어쨌든, 스팍이야말로 그런 차림을 하지 않을 인물이라 생각했거든. 내가 엊저녁에 저 녀석을 못 알아보고 헤맸던 이유가 뭐겠어? 벌칸이 지저분하게 수염을 달고 다니는 건 단 한 번도 못 봤다. 그건 그렇고 짐, 도와주려고 왔다면서. 거기서 기쁨조나 하려고 따라온 거냐?”


“알았어, 알았어.” 짐은 본즈가 건네주는 채소를 받아들었다. “있지, 네 말이 맞아. 어쩌면 벌칸인들은 아예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걸지도 몰라. 근데 스팍은 반이 인간이잖아?”


“그렇지. 그래서 반쪽의 인간적 면모를 조금이나마 포용하기로 했다, 이거야?”


짐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포용이라기보다는 위장을 위해 그 편을 선택했을 뿐이지만, 어찌됐건 스팍의 개인적인 일인 것이다 ― 스팍이 왜 뉴 벌칸을 떠나왔는지, 왜 지구로 돌아왔는지 알 수 없는 건 여전했다. 다만 벌칸 행성이 파괴된 이후 지구만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고향이라고 예전에 말했던 것만 기억났다.


서랍에서 식기를 꺼내던 본즈가 그를 흘긋 올려다봤다. “왜 그래?”


짐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스팍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거라곤 스팍의 일이 많이 안 좋게 됐다는 거 뿐이야.”


“그 음악가 일 말이야? 연주 꽤 하던데.”


“아니 ― 스팍이 그러고 지낸 건 아니야.” 짐은 한숨을 지었다. 그는 주방이 조와 스팍이 게임을 하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소리를 어느 정도는 숨길 수 있다는 게 감사해졌다. “저기, 스팍이 안 보는 데서 그 녀석의 개인사를 들먹이고 싶지는 않아. 그냥 일이 잘 안 풀렸단 얘기만 할게. 피해망상인 병신들 때문에 상황이 고약하게 됐지.”


“음.” 본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로 카운터로 눈길을 돌렸다. “일이 잘 안 풀렸다는 건 로뮬란과 벌칸이 닮았다는 내용이겠지?”


“응.”


본즈가 낮게 불평했다. “정말 멍청한 놈들이야. 뾰족귀에 초록색 피가 좀 나온다고 아주 누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방어적으로 변해서는. 사실 나도 벌칸들이 논리 어쩌고 하기 시작하면 꼭지가 돌 것 같은데 적어도 사실이니까, 솔직하게는 구는 거 아니냐고. 게다가 로뮬란부터도 대부분이 네로와는 다르잖아.”


“우린 그걸 알지만, 스타플릿 외부의 사람들은 대게 로뮬란을 만나볼 일이 없었을 테니까. 벌칸은 물론이고. 그래서 문제지.”


“그렇다고 멋대로 억측을 할 자격은 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하지만 세상이 우리 생각대로만 돌아가는 거 봤어?”


본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인 거냐, 짐?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그냥, 저 녀석을 너무 귀찮게 하지는 마, 알았지? 여행에 데리고 온 것도 일부러 생각해서 그런 거였어. 편하게 있도록 하고 싶어서. 그것도 어떻게 잔꾀를 써서 성공한 거야. 여행이 끝나면 스팍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렇잖아도,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스팍이 당장에라도 휙 가버릴 것 같아.”


“그 정도야?” 본즈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볼게. 뭔 짓을 하든 조한테 피해만 안 간다면 말이야. 혹시라도 저 놈이 여기 있으면서 위험한 면이 있으면―”


“아니. 위험하지 않아. 스팍 자체부터가 전혀 위험한 인물이 아닌걸. 오히려 스팍은 위험한 거와 정 반대거든. 있지, 지난주에 캠퍼스에서 같이 머무는 동안 말이야. 내가 자길 대접해주느라 너무 손해를 본다고 얼마나 잔소리를 해댔는지 몰라.”


“알았어.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 할게. 그럼 되겠군.”


짐은 웃었다. “그냥 귀찮게만 하지 마. 편하게 있으라고 데려온 거니까.”


“알았다. 널 봐서 잔소리는 넣어 두마. 원래 내가 하는 일이 널 위해서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는 거 아니겠냐.” 본즈가 그를 향해 쏘는 눈을 했다. “그런데 저 채소 안 씻어두고 뭐해.”


“그래야 하는 거야? 몰랐는데.”


“알았으면 해.”


“어이쿠. 알았습니다요.” 짐은 싱크대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게 있는 데 말이야…”


“뭔데?”


“뭐 만들려고 하는지 알겠는데, 햄은 빼야겠어. 스팍은 채식주의자야.”


본즈는 극적으로 크게 한숨을 지었다. “저 녀석을 귀찮게 하지 말랬더니 내가 귀찮게 생겼네. 비건이야? 아님, 뭐, 락토 오보?”[각주:1]


“락토 오보일 걸. 우유가 들어간 건 먹는 것 같았어.”


“혹시 모르니까 채소 좀 더 썰어서 올려야겠군.” 본즈는 그렇게 말하면서 햄을 도로 냉장고에 돌려놨다. “내 오믈렛을 안 먹는 것 같으면 다른 걸 만들어 봐야지, 뭐.”





제 9장, 표현 →



  1. 채식주의자의 분류 중 비건은 동물성 식품을 일절 허용하지 않아서 순수 채식주의자라고도 한다. 락토 오보는 유제품과 알 류를 허용하는 가벼운 단계의 채식주의자라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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