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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5 : 오해하지 않았으면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5 : 오해하지 않았으면

topsecretum 기밀선녀 2015.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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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오해하지 않았으면





소파에서 자는 것의 확실한 장점이라면, 아침을 시작하기 훨씬 쉬워졌다는 점이다. 스팍이 방 안에서 문을 닫고 자고 있으니 깨울까봐 조마조마하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짐은 문을 잠그고 나가서 곧장 아침 운동을 나갔고, 마치고 돌아온 이후에도 소리가 날까봐 걱정할 필요 없이 편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샤워를 한 뒤 새 옷을 가지러 방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다음번엔 미리 꺼내놔야겠다고 기억해 두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스팍보다 먼저 일어날 거라면 계속 소파에서 잘 수 있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싶어졌다. 어차피 짐이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스팍은 깊게 잠이 들었는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지만 ― 그는 바르게 누워 짐이 조용히 서랍을 여닫는 소리에도 눈을 감은 채였다.


…스팍이 미동도 없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온 짐은, 가져온 옷을 소파에 얹어두고 터미널을 켰다. 샌프란시스코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멀리 있는 행성은 시간대가 완전히 다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랬듯 스팍 대사는 반갑게 짐을 맞아주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짐과의 통화에서 그는 반만 벌칸인 방식이었다. “이리 빨리 자네를 다시 볼 수 있어 내심 놀라웠다네, 친우여.”


“정말요? 좀 더 자주 연락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우리가 함께 갖고 있으니 말이죠.”


“옳은 말이로군.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짐은 스팍 대사가 두 명의 스팍을 모두 자신으로 언급하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알고 무척 희한해졌지만, 그러면서도 재미도 들었다. 그러니 동참해 어울려 줄 용의라면 담뿍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자고 있고요. 어제 당신을 침대로 보내고 대신에 제가 소파에서 자기로 했어요.”


스팍이 한쪽 눈썹을 세웠다. “인상적이로군. 돌이켜보면 나는 자주 그것을 동정으로 오해했기 때문에라도, 너그러운 배려에 특히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하네만.”


짐도 그렇게 느꼈지만, 그게 주된 요인은 아니었다. 딱히 ‘너그러움’도 아니었고. 왜 이리 가시를 돋우고 있는지 알 길이야 없지만… 그게 스팍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어떻게 한 건가?”


스팍의 물음에 짐은 히죽 웃었다. “체스에 내기로 걸었죠.”


“그렇군.” 이야기를 곱씹는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벌칸의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흡족함과 동급의 의미일 거라고 짐은 생각했다. 스팍은 얘기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내가 자네를 이길 수 있었다는 뜻이겠지?”


“아뇨. 그냥 누가누가 희생을 잘 하나 ― 대회를 했죠.”


“아, 그럼 자네가 게임에서 져준 거로군.”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짐은 덜 편한 상을 위해 승리를 노린다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스팍에게도 자신만큼이나 우스웠을까 조금은 확신이 안 섰지만, 스팍 대사에게 있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짐이 설명하자 정말로 웃기까지 했다. 저기 방 안에서 잠들어 있은 스팍을, 이 모든 일의 장본인인 바로 그 벌칸을 이렇게 소리 내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이 즐거워 보이게 만들려면 어찌 해야 하려나, 짐은 무심코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늘 그랬듯, 그는 스팍 대사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었다. 본즈며 우후라, 스카티, 엔터프라이즈의 모두가 어땠었는지 듣는 건 정말 즐거웠다.


한동안 잡담이 오간 후 짐은 질문하려던 것이 떠올랐다. “스팍, 사실은요, 여기의 당신이 일어나기 전에 얼른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당신은 몇 시에 일어나죠? 아니, 이 나이대였을 때 언제 일어났어요?”


“당시의 나는, 내 근무 시간이 돌아오기 한 시간 전, 더러는 두 시간 전에 기상해 준비를 했지.”


“그래요…? 근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서 말이죠. 그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땐 늦게까지 깨어있다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어요? 아님 그 반대? 둘 다인가요?”


스팍은 상상치 못한 질문에 난처해진 얼굴을 했다. “…나는 마음대로 일정을 정해본 적이 없어. 줄곧 함선에서 근무해 왔으니까. 늘 일이 있었기에 그것을 먼저 살피고, 일에 지장이 없다면 잠을 보충했지. 벌칸은 필요하다면, 수면을 취하지 않고도―”


“네, 그건 저도 들었어요. 그럼 원래 잠을 얼마나 자는지부터도 딱히 알 수 없다는 거죠?”


스팍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요즈음엔 수면에 시간을 들인다네. 하지만 내 또래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세기가 젊은 사람이 그러하는 것보다 훨씬 그러한 경향이 짙을 테지.”


“흐음. 그러겠네요.”


“과거를 더듬어 보니, 기억이 나는군. 당시에 나는 수면을 매우 적게 취했어. 부족함을 느낀 적은 드물었지만.”


“으음, 지금 당신은 확실히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밤동안 내내 자고 제가 일어났을 때까지도 그러고 있더라구요. 거기다 낮잠도 자고요.”


“그에게 수면이 매우 필요한 것이겠군.” 스팍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이 헤아려 보았다. “충분히 이해가 가네. 지쳐 있을 테니 회복할 시간을 들이는 것이겠지.”


“여기의 스팍도 그런 비슷한 얘길 했어요.”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충분히 회복을 하고 나면 본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겠지. 그 본래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본인만이 알겠지만.”


“별 거 있겠어요? 인간보다는 덜 자도 되는 그런 거겠죠.” 짐은 중얼거렸다. “스팍을 방 안에 재우기로 한 게 천만 잘 한 일이었네요. 자고 있는 동안 움직이는 소릴 내서 방해하기가 미안해서요.”


“벌칸인의 청력은 매우 예민하다네. 단순히 다른 방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소리를 감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아.” 그제야 짐은 자신이 벌칸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다는 걸 실감했다. 몇 년간 스팍 대사와 알아오며 벌칸의 특이점을 배웠지만 그건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먼 곳에서 서로 전화를 통해서만 교류를 하고 있었기에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을 테다. 그러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그는 키득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 어제 어쩌다가 스팍을 깨웠는데, 진짜 바보같은 오해를 했거든요…”


벌칸의 청력이 얼마나 예민한지 벌써 잊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짐 자신의 청력이 벌칸에 비해 떨어진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얘기가 막 나오려는 중에 뒤에서 방문이 벌컥 열렸고, 돌아보니 스팍은—젊은 스팍은—이미 옷을 다 차려입은 채였다. 아주 잠시 동안 짐은 몸이 굳었다가, 이내 긴장을 조금 풀었다. 저 스팍이, 어, 이 스팍을 정말로 모를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잘 잤―” 인사를 건네기가 무섭게, 스팍이 딱딱하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보내고 현관 앞의 벽장을 열어 배낭을 꺼내 한쪽 어깨에 걸쳤다. 그렇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담 좋겠지만― “야, 잠깐 ― 나가려고?


“그래.” 스팍은 외투를 꺼내는 동안 배낭을 내려놓고 대꾸했다. “당신의 환대에는 감사하지만, 이제 그만 가보는 게 좋겠어.”


“뭐?” 짐도 얼른 일어나 뒤를 따랐다. “왜?”


그러자 스팍이 번득이는 것에 가까운 눈빛으로 터미널을 쏘아봤다. 화면 너머에서 약간의 걱정을 담은 미래의 그가 이곳을 보고 있었다.


“잠깐, 내가 스팍 대사와 얘기해서 그래?” 스팍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그게 왜… 그건 내 마음이지…” 뭐라고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지금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라곤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뿐이었고, 진짜로 목 위로 비집고 올라오려는 그 말을 삼킨 채 짐은 허둥거렸다. “…말로 해결하면 안 되겠어? 어, 논리적으로?”


“그 말이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말하는 건가?” 스팍이 쏘아붙였다. 그나마, 적어도 스팍의 주의를 끌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당신들의 비현실적인 의견에 날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라?”


“아니, 난 ― 저기,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모르겠거든?” 짐은 문의 잠금을 해제하는 단추 위로 스팍의 손이 올라가려 해서, 얼른 말을 붙였다. 첫날 그랬던 것처럼 문 앞을 가로막는 게 아니라 그는 스팍의 옆에 서 있기만 했다. “뭣 때문인지 얘기라도 좀 해줘야 내가―”


“스팍.” 그 때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짐과 스팍이 동시에 터미널로 고개를 돌리자, 화면 너머에서 스팍 대사가 엄숙한 얼굴로 젊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 스팍 대사가 단호히 그에게 확신했다. “너의 신뢰를 부정할 일은 없었어. 그와 나는 한동안 친구로 지내왔기에 담소를 나누며 친분을 쌓고 있던 것이야. 그게 전부네.” 그 얘길 듣자 스팍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뉴 벌칸에서의 일을 겪은 후에도, 너는 자신의 인간인 반쪽으로 귀 기울이는 것이 아직도 마뜩찮은 것인가?”


그 말에 놀랍고 궁금증도 들어서, 짐은 젊은 스팍 쪽을 쳐다봤다. 어두운 얼굴을 여전히 한 채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생각에 잠겨 스팍 대사의 말을 곱씹는 것 같았다.


“상황을 거북하게 만든 데에 두 사람 모두에게 유감을 표하네. 자네들끼리 이야기를 먼저 마쳐야 할 테니, 추후에 대화하도록 하세. 모두 함께 볼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나는 기다리도록 하겠네.”


“…그래요.” 짐은 잠시 생각해보다 얼른 마무리를 지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나중에 연락할게요.” 여기 있는 스팍이 괜찮다고 한다면 그렇지만. …괜찮지 않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다시 젊은 쪽의 스팍에게로 시선을 돌려 살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터미널에서 통신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린 이후에도 그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반응이 없는 스팍이라, 어쩔 수 없이 짐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지금 오해를 푸는 게 좋으려나?”


그제야 스팍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봐야겠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낮게 중얼거리고는 도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짐은 그가 나가버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원래 스팍 대사와의 대화를 마친 후에 샤워를 할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감히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마주쳤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스팍이 예의 그 ‘생각해 본다’는 걸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게다가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조차 모르겠으니 답답할 일이었다. 그 두 명의 스팍에게서 오고간 대화를 생각하면 서로의 존재 여부를 확실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생각할수록 스팍의 반응을 보면 그가 스팍 대사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스팍은, 스팍 대사가 자신을 협박하기라도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라… 스팍 대사는 젊은 스팍이 밝히길 꺼려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명백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번의 통화에서 스팍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 않았나? 하지만 더 자세한 내용을 몰랐던 그는 스팍이 그런 강렬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거다.


기다림이 몇 시간은 지속된 것 같았지만, 실제로 문이 열리기까지는 30분 정도가 지났을 것이다. 짐이 번뜩 머리를 들자 스팍이 낡은 외투를 입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심장이 쿵 내리앉으려는 찰나 스팍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편이 좀 더 현명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어. 당신이 괘념치만 않는다면.”


“물론 환영이지.” 짐은 얼른 대답했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일단은 네가 걱정이 되니까, 당연히 여기 있어도 돼.”


고개를 끄덕인 스팍은 다시 문가로 가 벽장을 열어 도로 외투를 걸어놓았다. “그가 내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진실인 듯 하군.”


짐은 정말이라고 열심히 대답하며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갔다. 스팍을 졸졸 따라간 건 아니고… 단지 둘 사이에 거리가 있었기에 그런 것뿐이었다. 어디까지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자신도 스팍의 신뢰를 얻으려면 솔직해져야 했다. “사실은 널 찾아낸 이후에 바로 스팍 대사에게 연락을 했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혹시 아나 싶어서. 왜 네가 뉴 벌칸에 있지 않은 건지 물어보려고 그랬거든. 근데 그걸 내게 알리든 알리지 않든, 그건 네 선택에 달렸다고 하더라고.”


그러자 스팍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흥미롭군…”


“그게 왜 ‘흥미로운’ 건지 난 하나도 모르겠거든. 남의 사생활을 떠벌리는 건 아주 비상식적인 행동이라고 봐. 사정을 모르는 나같은 사람이야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으니 답답하지만 말이야.”


스팍은 소리 낮춰 중얼거렸다. “그가 내 일을 ‘남’의 사생활이라고 여길지는 의문이 들어. 그는 자신과 내가 하나의 동일한 존재라고 확신하고 있으니까.”


“그것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은 그렇게 확신하지 않는 듯 해. 두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해선 안 되는 일을 자기가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렇다면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 우리의 의견은 일치하는군.”


짐도 벌칸인들을 봐왔다. 그들은 상대가 누구든 경멸스럽다고 생각하면 차가운 목소리로 아주 고압적인 태도를 했다. 반면 스팍의 목소리에 담긴 격한 감정은, 초연한 벌칸의 그것이 아닌 좀 더 인간적인 혐오에 가까웠다. 그것이 그의 인간성의 일면을 나타내는 걸까, 짐은 궁금했지만 질문은 속으로 넣어두기로 했다. “여튼… 계속 있겠다고 했으니까, 아침이라도 드는 게 어때.”


“시간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스팍이 대답했고, 짐은 주방으로 향하며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합성기가 작동을 마치길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전부터 몇 가지 묻고 싶었던 것을 꺼낼 때가 된 게 아닐까. 하지만 괜히 상황을 또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제길. “내가 자꾸 꼬치꼬치 캐물으려 해서 귀찮은 거 알아. 그러니까 굳이 대답해 줄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을게. 근데 그냥 묻기라도 하면 안 될까? 네가 열 받고 그러지만 않는다면?”


“질문의 내용에 따라 내가 결정을 번복하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반응이 어떻든, ‘열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해.”


그렇다면 최대한 스팍을 자극하지 않을 만한 표현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방금 왜 그랬던 거야?”라고 솔직히 묻자, 스팍이 묻는 눈을 해와서 짐은 자세하게 설명했다. “미래의 너랑 얘기하고 있는 걸 보더니, 갑자기 나간다고 하다가 이번엔 방에 틀어박혀서 생각해본다고 그랬지. 그러곤 나와서 다시 안 간다고 했고.”


“그랬지.”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줄 수 있어? 왜 내가 미래의 너와 얘기했다는 이유만으로 가버리려고 했던 거야?” 왜인지는 짐도 알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넌 그를 싫어하는 거지?”


스팍은 머뭇거리다 되물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어…물론.” 비밀 사이에 꽁꽁 숨고 있는 쪽은 자신이 아니었기에 짐은 의아해졌다.


수긍의 의미로 짧게 고개를 끄덕인 스팍이 물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나에게 매달리는 것인지 알고 싶어. 내게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고, 당신의 개인적인 여행에 나를 동반하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지?”


짐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서 사실 나조차도 모르겠어. 그냥 그러고 싶어.” 이유야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설명이 되는 것은 없었다.


“미래의 내가 자신의 세계에서 우리가 가까이 지냈다고 얘기했기 때문인 건가?”


스팍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위험한 눈을 했다. 갑자기 짐은 무엇이 그다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그 이유를 모르는 건 여전했지만 말이다.


그는 아니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런 게…” 하지만 짐은 스스로에게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래, 어느 정도 요인은 있어. 스팍 대사가 그쪽의 나와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면 좋겠어. 하지만 그건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야. 이곳에선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 네 삶도 달라졌고, 나 역시 그래. 엄밀히 얘기해서 그 사람과 나는 이미 친구이기 때문에 또 너와 똑같은 일을 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거잖아. 이런저런 거 다 젖혀놓고라도, 널 돕고 싶은 이유를 찾자면 엄청 많거든. 예를 들어서 난 누가 고생하며 지내는 걸 보는 게 싫어. 또 넌, 내 목숨과 내 고향을 지켜줬기도 했고.”


“당신 역시 못지않은 공이 있어. 바른 말로 하면 당신의 계획으로 지구의 안전을 지켜냈으므로 당신 쪽에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


“그럴 지도 모르지. 그치만 그 함선을 무찌른 건 너야. 그리고 그 드릴을 쏴서 끊어버린 사람도 너고. 네게 빚을 진 거야.”


“당신은 내게 빚진 것이 없어. 그건 내 의무였어.”


“문자 그대로의 뜻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야.” 짐은 설명했다. “난 네가 고마워. 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행성을 구한 사람이 길거리에 나앉아서 지낸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리고 말이지, 그것뿐만이 아니라구. 여기로 널 데려오길 잘 했다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난 네가 약속을 지켜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게다가 넌 수준급으로 체스를 하잖아. 지적이고, 재밌는 얘기도 하고 말이야. 여기 나 혼자 내내 있었으면 그렇게까지 재미 보지 못했을 걸 ― 앞으로 좀 더 같이 있는다고만 하면 난 언제라도 소파에서 잘 준비가 되어 있어.” 스팍이 젖어 보송해져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점은 쏙 빼두었다. “게다가 넌, 나한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던져줬잖아? 내가 왜 저 우주로 나가서 탐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 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걸 좋아하거든.” 그래도 스팍은 수긍이 안 간 얼굴이라, 좀 더 직접적으로 설득했다. “그 사람의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내 앞에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짐은 진지한 눈으로 스팍을 똑바로 마주했다. “내가 왜 널 데리고 있으려고 고집을 부리는지 이유를 계속 읊어볼까? 네가 그러길 원하는 것 같아서 하는 얘기야. 한참은 더 있으니 말만 해.”


고개를 숙인 채 스팍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 “그거면 충분한 것 같아.” 마침내 그렇게 대답하고는 합성기를 열고 만들어진 식사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침식사를 만들고 있었지. 합성기가 작동을 마쳤는데도 깜빡 잊고 있었다. 스팍이 식탁으로 자리를 비켜준 뒤 짐도 자신의 몫을 가져와서 몇 입을 들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스팍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미래의 나는 자신의 세계에서 발생했던 일을 바탕으로 미래가 예견되어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더군. 그는 ‘운명’이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어.”


“그래?” 그건 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델타 베가에서 엔터프라이즈로 올라가지 않았던가?


한쪽 눈썹을 세운 스팍은 당연한 이치라는 듯이 말했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 지금까지 그래왔어. 그는 내가 자신의 행보를 그대로 되밟아 가야한다고 주장했지. 그러나, 나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참견이었고, 불쾌했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짐은 한 입 가득 베이컨을 우물거리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자신만 해도, 그의 앞에 펼쳐질 미래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생각했을 법 했다.


스팍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해서, 당신과 대사가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으니,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어. 예정된 운명에 대한 그의 입장을 당신 역시 수긍하는 건가?”


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그 사람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식의 ‘숙명’을 믿지는 않을 거야. 글쎄, 네가 뉴 벌칸에서 떠나오기 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전에 내가 그에게 널 발견했다는 얘길 하려고 통화를 했을 때, 지각이 있는 모든 존재는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나한테 그랬어.”


“그런데도 당신은 그가 명시한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군. 그가 역설한 대로, 당신은 엔터프라이즈로 돌아왔고, 비정통적인 일련의 행동을 통해 당신에게 예견된 것처럼 함선의 지휘석을 얻게 되었어.”


짐은 약간 화가 돋은 얼굴을 했다. “스팍, 내가 이룬 것 중에 그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따른 것 아무것도 없어. 몰래 엔터프라이즈로 돌아와서 지휘석을 맡고, 또 그렇게 진짜 함장이 됐지만… 그래, 그가 길을 가리켜주기는 했어. 하지만 결국 그건, 내가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야. 그리고 우리가 친구인 것도 그의 말대로 따라서 된 것이 아니라구 ―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을 진 몰라도, 친구가 될 운명이라고 해서 우정을 만들어낼 순 없는 거잖아? 그건 서로 진심이어야 하는걸.”


“그렇다면 당신은 정확하게 그가 얘기한 대로 일이 전개되는 것이 거슬리지 않는 건가?”


짐은 고개를 젓고 그에게 씩 웃어보였다. “노력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이 눈앞에 닥치면 그게 더 걱정일 걸. 생각해 봐. 나의 운명이라는 게, 가만히 앉아만 있는 동안 그냥 이루어진 건 아니거든 ― 내가 따낸 거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받아들인 스팍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무척 좋지 않은 상상이 떠올라 짐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벌칸 이주지에서 떠난 게 혹시, 그가 너한테 뭔가 운명이니 뭐니 말한 것 때문은 아니지?”


“그는 처음부터 내게 커다란 운명에 대해 설파했지.” 스팍은 대답하더니 멍하니 자신의 접시로 고개를 떨궜다.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스팍 대사의 견해에 의해 그와 관련하지 않기로 했음을 확실히 했고, 당신 역시 그와 사상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어. 이걸로도 방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오해는 풀렸다고 봐.”


“맞아. 그래도 말이지, 네가 그 사람을 좀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짐은 거기까지만 해두기로 했다. 괜히 건드렸다가 스팍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까봐 마음 졸이는 건 사양이었다. “여하튼, 확실히 해두고 싶어. 가버지리 않겠다고 한 거, 정말이지? 마음을 바꾼 거 아니지?”


“약속은 지킬게. 당신에게 알리기 전에 가지 않겠어.”


“다행이네. 고마워.” 당장이라도 할 말은 차고 넘쳤다…라기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짐은 겨우 가라앉은 분위기를 지켜 조용히 식사를 하는 편을 선택했다. 이미 오늘치의 참사는 피했으니 더 이상은 버거웠다. …따지고 들면 이게 왜 참사인지부터도 할 말이 많을 거다.


다음 순간 스팍이 가벼운 주제로 넘어가서 짐은 좀 더 안심했다. “오늘 특별히 일정이라도 있어?”


“그다지 특별한 건. 하지만 생각해두고 있는 게 있지. 너도 종일 숙소에서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의아한 스팍의 반응에 짐은 히죽 웃었다. 적어도, 이걸로 더 이상은 소동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짐에게 있어 옷 쇼핑은 그다지 매력적인 활동이 못 되었다. 그렇다 보니 그는 자신의 몫으로 티셔츠 몇 장과—사이즈를 아니 집어다 넣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대충 품이 맞을만한 바지에 어깨가 낙낙히 들어가는 외투 정도면 충분했다. 졸업한 이후로는 그렇게 지냈다. 그 후에는 함장이 되어서 플릿에서 제공된 옷으로 살았던지라 따로 옷을 살 일이 없었다. 휴가 중 스타플릿 부지에 있을 때를 대비해 직위에 맞게 조금은 괜찮은 옷가지를 사놓아야 하는지라 성가시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귀찮은 일을 한껏 덜어낸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남의 옷을 골라주는 일이 이렇게 재미날 줄은 몰랐다. 특히나 그 대상이 매력적이었기에 더 흥이 났다.


“이건 실용적이지 못한 옷이야.” 탈의실에서 나온 스팍은 셔츠를 밑으로 당기면서 그렇게 한 마디 했다. “부자연스럽게 조여.”


“원래 그렇게 나온 거야.” 짐은 대답해주곤, 스팍이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은근하게 눈 호강을 했다. “몸에 딱 맞게. 왜 그런 옷들 있잖아.”


“아카데미의 제복이 몸에 꼭 맞는 것들이었지.” 스팍은 계속 셔츠 밑단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신축성이 심하고 노출이 과해.”


“전자는 모르겠다만 후자는 말야, 방금도 말했지만 원래 그렇게 입는 거라구.”


“그렇다면 어째서 이게 함장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적합한 차림이라는지 이해할 수 없군.”


제길 ― 하여간 눈치는 빨랐다. “그 위에다 재킷을 걸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 차림으로도 이미 불편해.”


“목까지 꽉 죄는 제복도 입었으면서 겨우 이런 것 갖고 불편하다고?”


“목적이 있는 옷은 그 쓰임에 맞게 적합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면 불편한 게 아니야. 반면에 이건, 인체공학적으로 제단 되지 못했고 의도치 않게 옷에 의해 자세를 수그리게 되는 것 같군.”


“알았다고. 싫다는데 어쩌겠어.” 한숨이 나왔다. 꿈은 꿔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럼 남방은 어때?”


“한결 적합하겠군, 움직임에 제약이 덜할 테니.”


“그럼 이걸로 입어보자.” 짐은 스팍이 그가 들려준 옷을 들고 다시 탈의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그 일이 있고 난 후라 아직도 마음이 가라앉지 못했다. 스팍과 자신이 정해진 것처럼—‘운명’이라니 정말 얼토당토않은 얘기였다—순조롭게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에 안일했던 게 잘못이었다. 결국 정말 그렇게 되리란 보장이 하나도 없음을 깜빡 잊고 있었던 거다. 스팍이 그를 막역하게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예 아무 감정이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아님을 짐은 알았다. 생각해 보니, 스팍이 짐과 스팍 대사가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스팍이 숨기고 있는 것들을 몰래 캐낸 거라는 오해를 받기 딱 좋았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짐은 (아직까진) 그런 짓은 하지 않았고, 적어도 떳떳하다 여기고 싶었다.


아카데미에서 3년을 보내고 함장까지 될 수 있었으니, 스팍과 좋은 사이가 되는 것도 그렇게 못 할 일이겠냐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가 함장이 된다는 건, 스팍 대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자면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우정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숙명이라면 그것도 환영이다. 하지만 스스로 해나가야 하는 여정이라 해도, 짐은 기꺼이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다시 탈의실에서 걸어나온 스팍이 짐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나쁘지 않네. 근데 너무 좀… 말끔하게 입었어. 그렇게 집어넣어서 입을 건 없는데. 단추도 꽉 채우고.”


“단추는 잠그는 것을 목적으로 자리해 있으니 잠그지 않는다면 있을 이유가 없겠지.” 바른 말만 골라서 했다. “그리고 셔츠 자락이 밖으로 흘러나와 있는 건 꼴불견이야.


그렇게 입으면 섹시할 것 같다고 짐은 속으로 생각하던 차였다. “그래, 그렇지. 근데 지금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얘만 혼자 튀어.” 그는 다가서서 바지허리에서 셔츠를 조금 빼내 품이 여유 있어 보이게 했다. “면도도 하면 좀 더 자연스럽게 태가 날 텐데―”


“나 역시 고려해 봤어.” 스팍은 살짝 경계하는 눈빛으로 셔츠를 만지던 짐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하지만 현재 여전히 캠퍼스 부근에 있는 상태이니 날 알아볼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 그리고 내게 접촉하는 것을 삼가 줬으면 해.” 짐이 위쪽 단추를 풀어주려 다가오자 강조하듯 덧붙이며 그의 두 손목을 잡고 깃에서 물렸다.


“그렇지, 미안.” 짐은 뒤로 물러서며 자동적으로 대꾸했다. 미안하다는 것도 말뿐이었다. 스팍의 살에는 닿지 않도록 조심했으니까. 벌칸은 몸이 닿으면 상대방을 읽을 수 있다는 얘기를 스팍 대사로부터 들은 적이 있기도 했고, 그러니 지금 하고 있던 생각을 스팍이 몰랐으면 했다. 스팍은 그럴듯하게 입고 있으니 진짜 근사했다. “어때, 옷이 마음에 들어?”


“적절해.”


“좋았어. 이런 걸로 한두 장 더 사자. 색만 바꿔서 돌려입으면 좋을 거야. 그리고―”


“당신이 잠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는 듯 해.” 스팍이 부드럽게 말을 잘랐다. “지금 입고 있는 것 외에 더 이상은 무의미해. 당신이 너무 많은 옷을 사주면 여행에 가져갈 배낭에 전부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그럼 버릴 수밖에 없겠지. 더욱이, 옷을 운반하는 데에는 주름을 예방하기 위해 공간적 여유가 필요해. 나는 공간 자원이 부족하기에 여지가 없는 사실이야.”


두 사람의 현실을 다시금 깨닫는 기분이 들어 울적해졌다. 짐은 그럼 자신의 가방에 넣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기로 했다. 스팍이 배낭에 다 들고 갈 수도 없는 걸 강요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스팍에게는 옷이 좀 더 필요했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그래도 셔츠 한 장은 좋은 걸로 갖고 있어야지. 거기에 입을 재킷이랑 팬츠도 있어야겠고. 나중에 일자리를 알아보려면 잘 맞는 정장 한 벌 정도는 있어 두는 게 좋을 거야.”


“논리적인 제안인 듯 하군.”


“좋아, 그럼 어디 보자…”


패션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던 지라 짐은 나란히 걸린 재킷들이 뭐가 다른 건지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색은 그렇다 치고 생김새가 전부 비슷해 보였다. 그래도 스팍이 걸치면 멋지겠다 싶은 것을 골라냈고, 입혀보니 정말 생각대로였다. 스팍과 다시 만난 이후 그의 외모에 대해 상상하던 것들은 전부 언제였냐는 듯 쏙 들어가고 말았다. 무채색의 제복을 입고 그를 마주하던 교관이나 튜닉에 과학부서 배지를 달고 함교에 서 있던 장교와 눈 앞의 남자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는 할 순 없겠지만, 그 목석같은 남자가 덥수룩한 머리에 수염을 달고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딱 집어 말할 수가 없어도 멋진 건 여전했고, 확실히 장교나 교관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엄격하고 뻣뻣한 걸로 명성이 자자한 벌칸은 이곳에 없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날아들면서 환상도 막을 내렸다. “괜찮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짐은 고개를 끄덕이곤 남성복 구역 안쪽을 더 둘러봤다. “그걸로 하자. 자, 이제 다른 것도 보러 가자구. 네 표현대로 ‘우선순위가 낮은’ 거 말야.”


“평상복은 필요한 만큼 갖고 있어.”


짐은 고개를 저으며 신사복 매장에서 나서 스포츠 의류 쪽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네가 입고 지내던 거 말이지, 많이 낡아 보이더라. 새걸로 갈 때가 됐잖아. 걱정하지 마. 티셔츠랑 바지 그거 얼마나 한다고.”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내게 질 좋은 의복을 입힘으로써 일행을 선택하는 당신의 취향에 비난이 가해질 일을 예방하기 위함이 아니었어?” 스팍이 빠르게 뒤따라왔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중요하지 않아.”


발걸음을 멈추자 따라오던 스팍은 부딪히지 않기 위해 얼른 멈춰 섰고, 그런 그에게 짐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날렸다. “뭐, 그래. 그렇긴 해. 알아, 네가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동냥을 받는 것 같을 테니까. 그치만 말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때. 오늘 내가 너한테 새 옷을 사 주는 거나, 내 몫으로 새 옷을 사는 거나 어차피 다른 게 아니거든. 새 옷이 생기면 전에 입던 것들은 너한테 주게 되겠지. 보관할 데가 부족하기도 하고.” 스팍이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을 테고, 아니면… “어느 쪽을 선택할래? 너도 네 취향이 있을 거 아니야?”


스팍은 아무 대꾸가 없었는데, 가까이 있어서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좁힌 게 빤히 보였다. 골치가 아파진 건지 생각에 잠긴 건지 모를 일이었다. 여하튼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달까, 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물었다. “어때, 특별히 원하는 거라도 있어?”


“…긴팔 옷이 몇 장 있다면 좋을 듯 해.”


스팍이 정말로 대답을 할 거라곤 확신하지 못했기에 짐은 조금 놀랐다. “그럼 그거 먼저 찾아보자.” 그는 주변의 매대를 살폈다. 긴팔 옷이 나올 시기는 아니지만 사계절 내내 입는 기본적인 아이템 정도는 충분히 있을 터였다…


긴팔 셔츠라, 짐은 썩 내키지 않기도 했고 스팍이 깃 높은 옷에 대단한 애호가인 듯 해서 어쩐지 실망스러워졌다. 왜 좋은 걸 죄 가린단 말인가?[각주:1] 그럼에도, 매장 한켠에서 발견한 모크 터틀넥[각주:2]을 입고 나온 스팍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원래의 스팍으로 돌아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카데미의 제복은 깃이 높았고 스타플릿에서도 비슷했기에, 얼추 예전에 그가 알고 있던 스팍의 모습이 되어서 그렇게 느껴진 듯 했다. 뭐, 약간 분위기가 편해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더군다나 얼마 전까지 입고 다니던 남루한 옷을 벗고, 스스로 고른 얌전한 색의 캐주얼한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으니 짐은 그가 친하게 지내왔던 스팍 대사와 이 젊은 스팍이 어느 정도 닮은 부분이 보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확실히 스팍은 채도 낮은 색에만 관심이 있는지 검은색 한 장을 집어놓고 갈색과 회색 중에 하나를 더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짐은 진열대의 다른 편을 가리키며 불쑥 말을 걸었다. “왜, 파란 색을 고르지 않고? 왠지 이 색이 잘 받을 것 같은데.”


무슨 이유로 하는 말인지 안 스팍이 예의 그 날선 눈빛을 왈칵 쏘아붙였다. …뭘, 없는 말 한 것도 아닌걸. 짐은 변명하듯 속으로 비죽였다. 스팍은 정말로 파란색 옷이 잘 받았었더랬다. 결국 스팍이 회색으로 골라서 그는 내심 실망했다.


그렇게 고른 모크 터틀넥 위에 받쳐 입을 셔츠 두어 장과 양말(스팍이 한사코 거절한다면 짐이 쓰면 되는 일이니까) 등 몇 가지 옷가지를 더 카트에 넣고 계산대로 향하던 중, 한쪽의 매대를 발견하고 짐이 물었다. “맞다, 속옷은 어떻게 할래? 넌 트렁크 파야, 브리프 파야? 어느 쪽?”


스팍이 멍해져서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지금 갖고 있는 걸로도 충분해.”


브리프다. 볼 것도 없이 브리프지.[각주:3]


계산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 했던 작은 문제가 생겼다. 짐은 가격표를 볼 생각도 없이 물건을 담았기에, 스팍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는 걸 보니 가격의 총합이 그렇게 높게 나오리라곤 확실히 예상치 못한 듯 했다. 짐은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얼른 무마했다. “괜찮아. 이 정돈 문제없어.”


“덜 중요한 것들은 매대에 돌려놓도록 할게.”


스팍이 계산대 너머로 나간 옷가지를 다시 주섬거리려 하자 짐이 직원에게 말했다. “아뇨, 무시하세요. 계산할 거예요.”


“이건 너무 과한 지출이야.” 스팍이 옆에 있는 짐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대꾸했다. “중요치 않은 것까지 사느라 당신이 이 정도로 지출을 하게 할 수는 없어.”


“뭐 그렇다면야… 네가 사면 되겠네.” 짐의 손에는 이미 크레딧 스틱이 들려 있었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삑 하는 소리가 나자 스팍은 놀라 눈만 깜박였다. “넌 지불할 능력이 되잖아.” 짐은 웃으며 스팍의 등을 가볍게 쳐 주었다. 점원이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것처럼 둘을 쳐다봤고, 스팍은 질렸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이내 자신의 주머니에서 크레딧 스틱을 꺼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스팍은 왠지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짐이 가볍게 대화를 이어보려 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별로 대답도 없이 쨍해가지고 있었다. 자존감에 흠이 난 거겠지, 짐은 너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적어도 오늘은 그가 자존심이 낮아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얼마 뒤, 완행 셔틀에서 내려 아카데미 부지를 걸어가는 동안 마침내 스팍이 입을 열었다. “내 비협조적인 태도를 사과할게.”


낮게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짐은 우스운 표정을 던졌다. “비협조적?”


“내가 걸핏하면 따지려 들고 완고했지. 당신의 관용에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괘씸한 행동이었어.”


“…딱히, 그렇진 않은데.” 짐은 잠시 생각해 보고 대꾸했다. 스팍이 가만히 받고 있을 인물도 아니고 어느 정도 저항하리란 것은 예상했던 바였다. “정말이야. 이해해. 나도 남을 믿는 법을 배우는 데 시간이 좀 걸렸거든 ― 그리고 이제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지금도 남에게 너무 기대려고 하지는 않아.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으니까… 나 아쉬운 것만 알아서 남을 이용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면서 그는 스팍에게 웃었다. “하지만 넌 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거든. 내가 먼저 그렇게 하라고 도와준 거니까.”


스팍은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가 이내 그에게 말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커크. 그렇지만 난 당신이 무조건적으로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아직은, 그럴지도 모른다. 스팍 대사라면 의심할 여지없는 버팀목이었지만 이 스팍은 바다 위에 뜬 부표처럼 아직 위태하게 보였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나는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야. 네가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대도 말이지.”


“받는 사람이 받아들일 용의가 없으면 논리적인 답은 받지 않는 것일 텐데.”


짐은 고개를 젓고, 손에 들린 쇼핑백을 들어보였다. “내가 기어코 떠맡길 때까지 넌 한사코 이걸 거부했지만 말이야, 나중에 가면 사두길 잘 했다고 생각할 걸. 그 때가 되면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어.” 그러면서 그는 날큰하게 웃었다.


어느 정도 냉소적인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무 얘기가 없어서 흘긋 돌아다보자, 스팍은 생각에 잠긴 건지 앞만 보고 있었다. 짐은 기쁘게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 때가 아주 멀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스팍은 숙소로 돌아와 새 옷에서 가격표를 제거할 때까지 조용히 있다가, 다시금 말을 걸었다. “전에 물어봤을 때 당신이 보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건 알아. 지금도 그 대답이 바뀌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다시 묻는 게 예의인 듯 해. 내가 보답을 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계속 신경이 쓰이나봐?” 짐은 스팍을 향해 즐겁게 웃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네. 말도 안 되는 걸로다가 시킬만한 일을 생각해봐야겠는걸.”


“그러는 편이 좋겠어. 당신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채로 있는 건 아무래도 불편해.”


짐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스팍, 날 믿어 ― 당장 갚지 않아도 돼. 나중에 언제라도 돌려줄 수 있잖아. 도움이 필요하면 그 때 가서 네 힘을 이용하면 되는 거라구.”


“하지만 아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먼저 제안하는 것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근데 내가 무슨 일을 부탁할지 모르잖아?” 스팍에게 시키면 재미있을 듯한 것들이야 차고 넘쳤지만, 그런 건 아카데미 생도 시절에나 할 법한 짓궂은 장난에 불과했으니 그다지 쓸모라곤 없는 거였다. 그렇다고 정말 쓸모 있는 일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쓸모라, 생각해보니… “오늘 저녁에 같이 나가지 않을래? 그냥 근처에 돌아다니면 좋을 것 같아서, 술도 마시고… 뭐어, 술은 내가 마시겠지만. 넌 그런 거 안 마실 테니까. 그리고 말야, 네가 당구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보여주려고.”


“아, 그래 ― 기하학으로 하는 게임이라고 했지. 그렇지만 내 관심사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나를 동반해 당구란 것을 가르치는 일이 유익하다고 정했다면 물론 기꺼이 참여할 의의가 있어.” 거기까지 말하고 스팍은 목소리를 낮춰 토를 달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이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은 보라는 듯 과장되게 눈을 굴리면서 대꾸했다. “일행이 있으면 좋은 거 아니겠어? 말벗도 되고. 그리고 네가 당구를 익히고 나면 꽤 하는 맞수가 될 지도 모르잖아?”


“말벗이라는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좋은 맞수가 있다면 물론 괜찮은 게임을 즐길 수 있겠지.”


“그래. 체스 말고도 재밌는 걸 해보자구.” 짐은 벽에 박힌 시계를 확인했다. 쇼핑에 쓴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아직 해가 지려면 먼 시각이었다. “그럼 저녁에 약속도 잡아놨고, 나가기 전에 연설 준비를 미리 해놔야겠는걸.”


“맞아, 연설이 있다고 했지. 언제 예정되어 있지?” 스팍이 물었다.


“어, 내일 아침.” 


짐은 조금 멋쩍어졌는데, 스팍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더 그랬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 미리 써가는 게 정말 필요한 건지 난 아직도 모르겠으니까. 너도 봤으니까 이제 알 거 아냐. 나는 즉흥적으로 움직일 때 제일 실력이 나온다고. 체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식탁에 놓여있을 체스판 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렇다곤 해도, 일절 준비 없이 대중 앞에 선다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일 거야.”


“그래서 몇 가지 주제는 머릿속에 떠올려 놨어. 글로는 안 써봤을 뿐이지. 그 아이디어들을 조합해서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순서를 정하고, 뭐 그런…”


스팍이 관심을 보였다. “그거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지도. 어떻겠어? 자랑은 아니지만, 교육을 받던 시기를 통틀어 내 어학력은 모범이 되어왔어.”


“아쉽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도움이 못 되는 거야. 넌 어휘가 풍부하잖아? 문법도 완벽하고 ― 너한테 맡기면 대단한 축사를 써주겠지. 하지만 생각해 봐, 네가 쓴 글이 입으로 그대로 나온다는 게. 상상이나 가?”


“…그렇군.”


“내게 축사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으니까, 연설가가 나인 이상… 말을 들려주고 싶어. 무슨 뜻인지 알려나.”


스팍은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렇지만, 혹여 내 조력이 필요한 부분이 생긴다면 기꺼이 도울게.”


“알아. 고마워. 나중에 도움이 필요해지면 그러도록 할게. …일단은, 점심을 먹어야겠다.” 짐은 한 번 더 웃어주고는 일어나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말하고 나니까 갑자기 허기가 지네.”


스팍도 뒤를 따라왔다. “이미 점심시간은 지났어. 아침식사도 그랬고, 일정을 지연시키는 버릇은 좋지 않지.”


“한 번 교관은 영원한 교관이라더니.” 짐은 혼잣말을 하고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합성기 안의 목록을 훑었다.








  1. 난....네가 솔직해서 좋다....!!! [본문으로]
  2. 칼라가 높지 않은 터틀넥 셔츠. 이런 거(<a href="http://ecx.images-amazon.com/images/I/71cVR1eoJLL._UL1500_.jpg">사진→</a>) [본문으로]
  3. 당연 브리프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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