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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4 : 인지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4 : 인지

topsecretum 기밀선녀 2015.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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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장, 비논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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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인지





스팍과 보내는 시간도 재미있었지만, 나와서 옛 친구들과 모여 어울리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지나갔다. 일단 라이더의 일터로 가 교대 전 비는 시간에 낡을 호버바이크를 뜯어고치고 있는 동안 인사를 했고, 무니즈와 점심을 먹다가 로버트슨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캠퍼스에는 지금 없고 근처에 불러내면 나올 거라고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화해 셋이 모여 학생 휴게실 한 곳에서 게임을 하며 두어 시간을 보냈다. 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곳을 지나는 진짜 학생들은 세 남자의 모습을 보고 퍽 우스운 모양이었다. 그중 한 명은 교관이고 또 하나는 함장씩이나 되는데, 다 큰 어른들이 서로 욕지거리를 날리며 놀고 있는 것이 신기했나 보다. 유야무야 게임이 끝날 때쯤, 소프가 1학년생 기말 시험을 마무리 짓고 나타나서 반갑게 무리에 참석했다. 그렇게 좀 더 빈둥거리며 시간을 때우다 다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일어났다.


그들은 입을 모아 짐에게 함장이 되더니 사람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거듭했다. 주제가 사생활 얘기로 달아오르니 더 그럴 만도 했다. 종일 약속한 것처럼 하나같이 술 한 모금 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분위기에 즐거웠다. 늦은 밤이 되어 아쉽게 숙소로 돌아갈 때가 왔다. 그래도 허탈함을 상쇄할 만한 좋은 이유가 있었기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에겐 룸메이트가 있었다.


그의 룸메이트는 짐이 숙소를 나섰을 때 모습 그대로, 조용히 앉아 터미널로 문서를 검색하고 있었다. 스팍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내고 마저 읽던 것으로 눈을 돌렸다.


마음이 안 좋았다. 자신은 옛 친구들과 한참 놀다 들어왔는데 스팍은 여기서 종일 앉아만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짐은 약간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오래 나가 있었네. 열중해 있느라 다들 몇 시인 줄도 모르고 있었어. 서로 얼굴 본 게 정말 오랜만이거든. 바쁘다 뭐다 해서… 바람이라도 쐬지 그랬어?”


스팍은 고개만 저었다. “여기에는 날 알아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행동반경을 최소로 줄이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당신에게 내 사정을 설명하지 않은 것처럼 웬만해서는 번거로워질 상황은 피하는 게 좋겠지.”


그럴듯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래서 짐은 마음이 더 안 좋아졌다. 저렇게 얘길 했으니 내일즈음에라도 스팍을 데리고 근처에 돌아다녀보려는 계획이 어렵게 된 거다. 짐은 죄책감을 뒤로 숨기고 일부러 건방 떨듯 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나한테만 사정 숨기는 건 아닌가 봐.”


“그래. 이미 알고 있을 사항이라고 보는군.”


“당연히 알지.” 스팍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짐은 길게 한숨을 지으며 거실 반대편의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해서, 혼자 놀고 있었어?”


“‘놀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지만 생산적인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노는 것보다 시간 활용을 잘 했다고 볼 수 있겠군.”


짐은 멍하니 뒤통수를 긁적였다. “…반박하려 했는데 사실 나도 모르겠네. 다같이 돌아다니는 것 말곤 진짜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였거든.” 적어도 그의 친구들은 할 일이 있었을 거다. 다들 짐이 바뀌었다는 데 놀랐으니까…


“활동을 줄이는 것도 중요한 일을 하는 것만큼 생산적일 때가 있어.” 스팍은 앉은 채로 의자를 돌려 짐에게로 향했다. “나의 경우로 예를 들면, 지난 몇 년간 충분히 편안한 환경에서 쉬거나 건전한 음식을 섭취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 오늘 나는 내게 주어진 기회를 받아들여 적합한 영양분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했으며, 명상을 하는 사치까지 누렸어.”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먹고, 낮잠도 자고, 앉아서 사색의 시간을 즐겼다는 거지.”


“바로 내가 요했던 일이었지.”


짐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담 다행이야. 왠지 본즈랑 비슷한 소리를 하네 ― 나만 보면 가끔씩은 쉬어가면서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그러거든.”


“현명한 사람인 듯 하군. 당신이 조지아에서 방문하려는 친구가 바로 그 사람인 건가?”


짐은 이 스팍과 보낸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깜빡 하고 있었다. 스팍 대사라면 본즈가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바로 알았을 것이다. “그래, 닥터 맥코이. 그 사람 기억나? 나라다 호와 첫 교전을 했을 때 닥터 퓨리가 사망해서 네가 그를 의료 장교로 승진시켰잖아.”


스팍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다소… 성격이 있는(colorful) 사람이었지.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책임지고 당신을 엔터프라이즈에 태운 장본인이었고.”


“그래. 바로 그 사람이야.”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스팍은 자신이 말했던 ‘현명한 사람’과 맥코이가 동일 인물임을 열심히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거다. “책임감과 세월로 그의 인성이 변한 건가?”


“전혀.” 스팍의 물음에 짐은 웃음을 터뜨렸다. 스팍 대사가 그의 세계에서 본즈와는 걸핏하면 의견이 안 맞고 대립했으면서 이상하게도 친했더라는 얘기가 떠올라서, 갑자기 조지아로의 방문이 무척 기대가 됐다. “그래도 플릿에서 최고가는 의사야 ― 남부럽지 않은 최고의 친구고. 보고 싶어지네, 벌써.”


사실은 모두들 보고 싶었다. 그동안 훌륭히 짐과 일해준 엔터프라이즈의 크루들 모두, 보고 싶지 않을 수 없었다 ― 5년간 함선에 틀어박혀 늘 같은 얼굴을 보고 지내왔으니 다같이 친해지지 않는 이상은 미쳐버리고 말 거다. 운 좋게도 대부분의 크루들과 호감을 쌓기 위해 굳이 분발할 필요는 없었다. 다들 그렇지 않아도 대단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일부는 처음에 그의 자질을 의심했었지만.


…스팍과 만났다고 하면 우후라는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이다음에 연락하게 되면 언질이라도 해줘야지 싶다. 물론 스팍의 상황에 대한 건 아니겠지만. 그냥 우연히 길 가다 마주쳤다는 이야기만 하게 될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된 게 그녀의 책임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우후라는 수년 전 스팍을 떠나보내고 실망했던 마음을 추스른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짐의 책임인 것도 아니다. 이럴 때 본즈가 옆에 있었다면 한 마디 했겠지. 그는 짐이 남들의 책임까지 전부 자기 어깨에 지고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짐은 스팍의 일이 자신이 이고 갈 수 있는 의무이길 바랐다.


“근데, 뭐 하고 있었어? 조사?”


스팍이 보던 화면에 몇 가지 계략도와 더불어 간간히 덧붙여진 설명이 띄워져 있었다. 스팍은 수긍하며 눈짓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스타플릿이 나라다 호의 드릴에서 무엇을 얻어냈는지 궁금했어.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인양되었지. 그 기술은 전적으로 이례적이고, 또 현재의 로뮬란 공학에서 수준이 한 세기가 앞서 있으니 잔해만 남았더라도 귀중한 정보를 산출할 수 있겠지.”


“맞아 ― 들어본 것 같아.” 떠올려 보면 어렸을 때 짐도 그 소식을 들었다. 격파된 켈빈 호를 촬영한 영상 자료를 스캔하는 것만으로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기술의 혁신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에 대해 길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던 일에서 스타플릿이 긍정적인 면을 찾아낸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으니까…


하지만 스팍과 함께 그 적함을 격퇴했기에, 지금은 옛날만큼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는 새삼 스팍에게 때아닌 애정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이건, 스팍 대사가 얘기해 주던 모험담과는 다른 현실이었다. 나라다 호를 무너뜨린 일은 그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안겨주었고, 무엇보다도 둘이 직접 함께 해낸 모험으로 남았다.


“이후에 전문적으로 조사를 하는 연구단이 세워졌어. 기능을 측정하기에는 장치의 상당 부분이 파손되어 복제조차 불가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효용이 있었다는군. 유감스럽게도, 드릴은 자체적으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었어. 본선의 동력에 의존하는 방식이었지. 그 동력에 대한 정보가 특히 연구의 주요 대상이었을 테고.”


“그래, 그렇겠지…” 놀라울 것 없게도, 지난 몇 백년간 인류는 향상된 새로운 에너지 자원을 찾기 위해 늘 분투했다. “사실은 말야, 아직 그런 기술은 모르고 있어야 맞아. 적어도 원래 한 세기 정도 내로는 알아낼 기술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옳은 거지.”


“개인적으로 연방은 그보다 훨씬 앞서 이 정보를 활용하게 될 거라 예상하고 있어. 이미 견본을 통해 자료를 얻었으니, 순간을 넘으면 우리의 기술과 과학 지식 역시 발전에 가속이 붙겠지.”


“남의 것을 그대로 베끼다가 중요한 것을 하나라도 넘겼다간 발전도 없겠지만.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생각에 잠겨 중얼거리는 짐을 향해 스팍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동감이야 ―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다른 모든 절차가 그러하듯 단 한 발자국의 진보로 완성이 되니까. 보통 그런 결과가 더욱 만족스럽기도 하고. 놀랍게도 당신이 과학의 발전에 손쉬운 방법을 두고 고유의 유기적인 접근을 옹호하는 발언을 할 줄은 몰랐군.”


“왜, 내가 네 시험에서 사기를 쳤기 때문에?” 짐은 웃음을 지었다. “그거야말로 유기적인 접근이었지. 지름길을 쓴 게 아니라고. 난 시험을 할 때마다 매번 결과가 비슷하게 나온다는 것을 알고 두어 번 실험을 통해서 동일한 결과가 반복된다는 가설을 확인했어. 그거면 충분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아?”


스팍이 표정 없이 보고만 있어서, 짐은 말을 이어갔다. “여하튼, 나라다 호에서 기술을 얻는다는 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야. 따지고 보면 이미 과학의 발전에서 순서가 어느 정도 뒤바뀐 셈이거든. 스카티하고…” 그는 스카티와 스팍 대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고, 본즈하고도 가끔 그랬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 곧, 이제와 숨길 것도 없겠다 싶어졌다. “…또 미래에서 온 너 덕분에 말이야. 그가 미래의 워프 이동 방정식을 스카티에게 미리 알려줬어. 그러니 기계의 진화가 몇 시점 앞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대단한 변화는 없을 거라는 거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하지. 최우선 철칙Prime Directive[각주:1]의 정신에 위배되는 건데 이렇게 열성적이라는 게.”


“흥미로운 발상이군. 하지만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


“그것도 이번 사안은 연방에서 주도하고 있어. 일반적으로는 알게 된 걸 되돌릴 순 없는 거거든 ― 그저 영향을 받은 문명이 진보된 지식으로 스스로 자멸하지 않기만을 바라야 할 뿐이지. 그리고 솔직히 개인적으론 그런 건 젖혀두고서라도 말이야, 적어도 굴착기같이 무기같지도 않은 무기에 당할 수는 없는 거니까.”


스팍이 조용해져서 그를 빤히 바라봤다.


“…왜?”


“오랫동안, 상당한 지적 수준의 대화를 나눌 상대와 마주할 기회가 없었어. 과학 기술이나 윤리와 같은 주제에서 특히.”


그 말에 짐은… 진심으로 기뻤다. “…고마워.” 그는 스팍에게 살며시 웃어주고는, 가벼운 투로 농담을 던졌다. “상당히 지적이라는 건 혹시 겨우 합격점이라는 거 아냐?”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그 말에 좀 더 환하게 웃었던 것도 잠시, 스팍이 뒷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최근의 대화에 비교할 지적 근거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짐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꼭 토를 달지.” 그래도 스팍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알 것 같았다 ― 스팍 대사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서 그 나름의 표정에 익숙해졌으니까. “뭐어, 하기야… 양질의 대화를 많이 나눌 만한 기회는 찾기 힘들긴 해.”


“담화의 주체가 특이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대화의 주제 역시 태반이 그 특이한 상황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지.”


“그리고 넌 그 특이한 상황에 대해 얘기하려 하지 않으니까, 즉 대화할 거리 자체가 태반이 없어진다는 거겠네.” 그렇다면 기꺼이 ‘상당히 지적인’ 대화를 해 보는 게 좋겠다 싶다. “해서, 그 드릴에 대해 뭔가 새로운 거라도 발견했어? 큰 건이 있었으면 내가 이미 소식을 받아 알았을 거고, 아직까진 없는 모양인데. 하지만 뭐, 저 내용이라면 나보다야 상대적 중요성을 네가 더 잘 알 테니 한 번 들어보고 싶은걸.”


스팍이 요약해서 얘기해 주는데도 퍽 어려운 내용이었다. 몇 가지는 수월하게 이해했다. 연구단은 특이한 분자 구조를 복제하려 했으며, 아마 그 분자 구조가 나라다 호가 처음 블랙홀에 휩쓸렸을 때 이쪽으로 통과해 나오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요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에너지를 집약하는 렌즈에 대한 얘기 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항이 있었다. 그러나 주파수와 방사성 등에 대한 세부 사항으로 들어와서는 함장으로서 이해할 만 한 거리가 못 됐다. 일부였지만, 도해가 도움이 되었다. 어찌 되었건 그는 고개만 주억거리며 스팍이 계속 얘기하도록 두었다. 확실히 관심이 많은 주젯거리였는지 스팍은 양껏 얘기했다. 저렇게 활기를 띤 걸 보니 꽤나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 그동안 이런 이야기를 할 일이 많지 않았을 테니 짐은 기꺼이 들어주고 싶었다.


집중해서 듣고만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짐은 “내가 참여해 있는 짧은 시간동안―”이라는 대목에서 퍼뜩 표현이 집혀 곧바로 일어나 앉았다. “잠깐만. 무슨 뜻이야, 네가 참여했다니?”


스팍이 평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구로 돌아온 이후에 이 프로젝트에서 잠시 일을 했어. 스타플릿에는 복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력서를 몇 군데 넣었고, 스타플릿과 무관한 별개의 연구단에 고용되었지.”


짐은 의아해져서 눈썹을 찌푸리고는,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행 중인데…” 왜, 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늘만큼은 스팍을 건드려 개인사를 캐내려 하고 싶지 않았다.


“왜 내가 아직도 거기에 있지 않느냐고?”


그래서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내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래.”


“연구 환경이 적대적으로 변했으니까. 단원 중 나는 유일한 벌칸이었어. 한편, 추락한 드릴을 바다에서 인양해 열어보니 드릴에—정확히는, 드릴 안에—남아 있는 로뮬란들이 있었고, 단번에 로뮬란과 벌칸이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생물학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지. 흡사한 외형에 대한 정보는 이미 켈빈 호의 사건 때 알려져 당시까지 전해지고 있었지만, 그 일로 우리 두 종족이 사실상 외견을 서로 구분하기 힘듦을 알게 되었어.”


짐은 황당하게 외쳤다. “말도 안 돼. 널 로뮬란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내가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라도 더욱, 지구에서의 내 존재는 의심스러웠겠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내 고향에서 동족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어. 그런 시기에 어째서 벌칸 한 명이 혼자 지구로 내려와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지 의문이었을 거야. 난 왜 뉴 벌칸에서 내 종족과 함께 있지 않는지 구태여 설명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 의심을 샀을 테고. 더욱이, 그들은 스타플릿에서의 내 경력을 몰랐고 이로써 어떻게 내가 나라다 호에 대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이미 인지하고 있는지 역시 이해할 수 없었겠지. 내게 의혹이 가중된 것은 특별히 놀라울 일이 아니야.”


스팍의 말을 들을수록 짐의 눈빛은 험해져갔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널 넘겨짚어도 된다는 건 아니잖아.”


“유감스럽게도, 당신 종족의 역사는 항상 차별과 억압을 바탕에 두고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야. 인간들은 자신과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생득적인 경향이 있어. 지구인뿐만이 아니야 ― 벌칸도 그런 때가 있었으니까.”


“벌칸도 그랬다는 이유가 붙는대도 그렇지. 네가 당한 일이 정당해지는 게 아니라구.” 짐은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널 첩자 따위로 몰아서 쫓아냈다는 거야?”


“고용되기 전에 내 신원에 대한 배경 조사는 되어 있었어. 그러나 그런 확인 절차는 공식 기록과는 무관해. 내 고용주들은 내가 결백함을 알고 있었어.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그렇지 못했지만. 그들은 문제를 삼아 나를 배제시키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이 조화를 이뤄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사직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어. 내 존재로 방해받는 일이 없으면 원활하게 업무를 수행하게 될 테니까.”


들을수록 화가 나는 얘기였다. “저기,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건 당연히 맞아. 근데 너도 항의할 권리가 있잖아? 그런 불합리한 일을 어째서 맞서 반박하지 않고? 네가 누구인지 증명해줄 사람을 데리고 온다거나…?”


“시도해 봤어. 효과는 미미했지만.” 스팍은 대수롭잖게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나는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사실을 증명하는 근거의 유무에 관련 없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 애초에 상사의 지지 역시 완전한 증거는 못 되었고.”


그런 식으로 스팍은 괴롭힘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가혹한 표현이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결국 스팍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다 미안해지네. 그 사람들은 진짜 멍청한 놈들이야.”


“그러한 행동을 하는 종족이 지구인에만 국한된 게 아니야. …그리고 지구에서 개인이 그들과 별개의 문제에 나서 사과하는 관습은 이해할 수가 없어.”


“정말로 사과를 하려는 게 아니라 유감스러우니까 하는 말이지. 거기다 내가 그런 놈들하고 같은 종이라는 게 조금 역겹기도 하고.”


“나는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 인간에 대해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의 다양성에 상당한 폭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이따금씩 허를 찔리곤 하는군.”


그나마, 네로가 지구를 부숴버리게 놔둘 걸 그랬다거나 하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었다. 스팍이 인간들을—그 중 일부가 지닌 커다란 단점에도 불구하고—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곁에 더불어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스팍 대사는 당시에 자신이 겪었던 문제를 그렇게 표현했다. 하긴, 스팍 대사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면, 벌칸도 인간만큼이나 비겁하고 옹졸할 수 있다는 걸 스팍이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스팍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나 그것이 뉴 벌칸을 떠난 이유라면 더욱. 게다가 지구에서마저도, 그는 사람들의 비열한 소문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렇게 공항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거지?”


“본질적으로는. 다른 일자리도 찾아보았지만 역시 길게 가지 못했어. 내 정체에 대해 수상히 여기는 건 프로젝트의 과학자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벌칸인으로서의 내 특성을 은닉하더라도 결국은 대게 알게 되더군. 내 정체성을 숨기려 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의심을 가중시켰지. 다른 일자리는, 내게 전혀 맞지 않았어.” 스팍은 잠시 말을 멈추고 떠올려 보는 듯 했다. “이따금씩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하기도 했어. 거기서 요하는 대로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고, 내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하지만 계절직이기에 자리가 드물었지.”


스팍을, 벌칸의 두뇌와 지식을 지닌 인재를 막노동에 낭비한다니! 그걸로도 벌칸에 한참 모자라는 짐의 머릿속은 한계 초과였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 화제가 당신을 언짢게 만들었군.” 할 말을 잃은 짐을 보고 스팍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불쾌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할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나는 거기에 익숙해 졌어. 실로 현재 나는 괴로움만이 아니라 그 무엇도 느끼고 있지 않아 ― 당신이 책임을 질 일 역시 아니고.”


“스팍,” 짐은 낮게 목소리를 냈다. “기분을 나아지게 하려고 그러지 않아도 돼. 반대가 되어야지 맞는 거라구.”


“앞서 말했듯, 당신은 이미 내 처지를 개선해 주었어.”


“그리고 동시에 내 처지에도, 나쁜 구석은 없어 ― 뭔가 네가 애써 해줄 필요는 없단 말이야.” 물론 짐은 지금 좌절감이 들고 기분이 언짢았다. 하지만 스팍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야, 네가 그 얘기를 해줄 정도로 신뢰를 얻은 것 같아서 기뻐.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았다는 거 알아…”


“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지구로 돌아온 후의 일자리는 내 사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솔직해져야겠다. 아주 조금, 일부분은 스팍에게 좌절감이 드는 걸 수도 있겠다. 그가 곁에 있었다면 스팍이 다시 자립해서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들도록 격려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남들이 그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걸 앗아가지 못하도록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어떤 사항을 다른 사람들—모두—에게 말하지 않는 논리적 이유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별개로, 피해망상 차별주의자들 때문에 좋은 직장을 잃게 된 사연은 사적인 게 아니고, 또 그가 지구에 돌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는 매우 사적인 것이라면 대체 그 기준을 가르는 척도가 무엇인지 짐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가늠해볼 수 있는 건 한정적이었고, 뉴 벌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분명 끔찍했던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스팍에게서 거기까지 사정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그래도. 고마워.”


스팍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주제를 바꿀 때가 된 것 같아. 내가 오늘 한 일을 알려 주었으니 당신의 이야기도 나누는 것이 옳겠지.”


짐은 잠시 멍해져 눈만 깜박였다. 그건 벌칸 식의 ‘오늘 하루 어땠어?’인 걸까? “…글쎄. 그냥, 좋았지 뭐. 그치만 들어봤자 그다지 재미는 없을 걸.”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물어보는 것이 정중한 반응인 것 같군.”


불쾌했을 법도 한데 짐은 그냥 우습기만 했다. “솔직하단 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네. 어디보자… 옛 친구들하고 만났어. 일단 여기 캠퍼스 내 작업장에서 일하는 녀석하고 얼굴 보러 갔고, 또 다른 친구하고 점심 먹고 나서 한 명 더 불러 휴게실 한 곳 찍어 노닥거리다가―” 불쑥 뭔가 떠올랐다. “저기, 너 에어 하키 해봤으려나?”


“하키의 종류를 경험해본 기억은 없다고 할 수 있겠군.”


“그럴 줄 알았지. 확인 차였어, 혹시나 싶어서. 너도 내가 체스 하는 거 보고 놀랐으니까 말이야.” 짐은 잠시 생각해봤다. “언제 한 번 널 데리고 나가서 같이 해봐야겠는걸.”


역시나 스팍은 흥미가 돋은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개는 최근 과학계의 진보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는 편이 좀 더 시간을 효율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해. 당신과 같은 인간들은 신체적 에너지를 오락성 활동에 발휘하는 반면, 벌칸인은 지능을 요하는 활동에 만족하지.”


“그럼 그거 말고 당구를 보여줘야겠다. 어떻게 하는지 내가 가르쳐 줄게. 그건 기하학으로 하는 게임이거든.” 그러자 조금이지만 솔깃해진 스팍의 모습에 짐은 또다시 우스워져 얼굴에 미소를 띠게 되었다. “…너 진짜 꽉 막혔구나. 완전 샌님이네.”[각주:2]


“그 표현은, 지적인 활동에 탁월한 사람을 지칭할 때에 흔히 적용되기도 해. 가령, 예를 들면 ― 체스라거나.”


“이크.” 짐은 한 방 먹은 척 물러났다. “뭐 여튼,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냥 좀…” …귀엽다는 뜻이지. “…특이하다는, 뭐 그런 뜻이지. 체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자기 전에 한 번 재시합을 해볼래? 오늘 하루 나 혼자만 재미 본 것 같으니 남들하고도 좀 나눠야겠어.” 적어도 벌칸 한 명하고는.


스팍은 터미널의 접속을 종료했다. “우리 둘 모두 체력이 소모되어서 상호간의 흥미로운 사교활동을 지속할 만한 가능성은 낮겠지만, 늦은 시간이니, 체스라면 하루를 마무리하는 데 적절한 활동이겠군.”


“와, 피곤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일어서서 조금 놀란 시선을 던지는 짐을 따라 스팍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락하게 잠을 자본 지가 오래되었으니까. 그에서 누적된 피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할 수 있을 때 사치를 누려 두려는 욕심일지도 모르지.”


“흠. 그럼 오늘은 네가 침대에서 자야 되겠다.” 체스판은 식탁 위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짐이 체스판을 돌릴 차례였다. 스팍이 백을 잡았다.


“그럴 필요 없어. 소파로도 충분히 안락해. 그리고 이 숙소는 당신의 소유고, 나는 단지 식객일 뿐이야.”


“소파로도 충분히 안락하다면 내가 거기서 자도 되겠네. 솔직히 여기 침대는 엔터프라이즈에 있는 것보다 너무 커.”


“이유가 더해질수록 당신이 침대를 내게 제공하지 않고 직접 사용하는 편이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오는군.” 스팍이 먼저 폰을 움직였다.


“거대한 소파도 잊지 말라구.” 받아치며 짐도 폰을 들었다. “그동안 편하게 못 잔 사람은 너야. 그것만으로도 네가 더 편한 잠자리를 가질 까닭이 충분해.”


“나 한 명이 아닌 우리 두 사람 모두 잠자리가 개선된 것으로 논리적인 결과가 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스팍을 침대에서 재우고 싶으니 논리가 대수냐 이거였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이기는 사람이 침대에서 자는 거야.”


“그렇다면 납득 가능하군.” 스팍은 넙죽 받아들이더니 말을 움직였다.


…너무 빨리 수긍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왜였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게 됐다. “잠깐, 야, 물려. 너 일부러 지려고 하는 거지. 그럼 재미가 어딨어.”


덜미를 잡힌 스팍은 멈칫 했다. “당신이라고 다르다는 보장은 없어.”


“지려고 하는 게임이라니, 스포츠 정신을 그런 식으로 훼손하면 안 되지.” 그는 잠시 생각해 보고, 폰 하나를 더 옮기며 제안했다. “그럼… 승자가 잘 곳을 정하는 걸로 하자.”


스팍은 호기심어린 얼굴로 역시 말을 하나 옮겼다. “그건 이미 정해진 내용이로군. 우리는 스스로의 몫보다 서로의 안락함을 선택하겠지.”


“그럼 정해진 거야. ‘승자가 소파를 차지한다.’”


체스판 너머로 스팍이 이상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했다. “승자가 불편한 쪽을 택하는 건 상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러면서도 둘 다 승리를 목적으로 할 거고 말이야, 안 그래?” 짐은 얼굴에 웃음을 띄웠고,


“이건 완전히 비논리적인 일이야.”


스팍의 말에 소리내 웃어버렸다. “그래, 그러게. 졸업한 이후로 이렇게 바보같은 짓은 또 처음이다.”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음에도 ― 아마 스팍도 덩달아 우스워진 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불쾌해 보이지는 않잖아? “…헌신의 흥미로운 예로군.”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짐은 폰을 걷어내고 길목이 생기자 룩을 전진시켰다.


“이것 역시 당신의 ‘고바야시 마루를 역으로 뒤집어본’ 시나리오인 거겠지?” 스팍이 물었다. “그렇다면 내 입장은 회의적이야. 패자가 이익을 얻는다 해도, 승자는 어느 정도 잃는 점이 있어.”


짐은 잠깐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양쪽 다 섞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어.” 마침 저녁을 먹은지 좀 돼서 속이 출출해졌다. “참, 뭐 먹으면서 할래? 팝콘이라도 가져올까…”


참 신기한 건 이런 시간이 그들에게 벌써 편안하게 녹아들었다는 것이었다. 그와 스팍은 터무니없는 내기를 위해 체스를 하고 있었고, 이따금씩 팝콘을 와삭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히 대전이 진행되었다. 다른 스팍과는 분위기가 더없이 안락했으므로 어찌 보면 스팍과 편하게 느끼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그와 스팍 대사가 실제로 만나서 어울린 시간은 적지만, 스팍 대사는 늘 그에게 친근했고 반가워 마지않았기에 짐도 금세 마음을 트게 되었다. 그러니 유리하게 시작했다고 여기기로 하고, 그는 앞에 있는 스팍도 자신처럼 편안하기를 바랐다.


어쨌든, 오늘 스팍은 적어도 잠자리에서만큼은 편안할 거다. 대전은 전날 아침과 다름없게 끝이 났다. “어디보자, 벌칸은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한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스팍은, 쳐다보고 있으면 말이 저절로 움직이기라도 할 것처럼 애먼 체스판만 빤히 내려다봤다. “정말 비논리적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이내 고개를 들고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약속대로 하겠어. 하지만 이불과 베개는 당신이 가져가도록 해.”


“이봐, 내가 일부러 불편하게 있으려고 이러는 건 아니라구.” 짐은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스팍에게 굳이 이불이 필요하려나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스팍은 담요만으로도 꽤나 몸이 따끈할 테니까 말이다.


“알겠어.” 일어선 스팍은, 경계에 가까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괜찮다면 자기 전에 샤워를 하도록 할게.”


“마음대로 해. 나도 곧 자야겠고.”


스팍이 샤워하러 들어간 동안 짐은 팝콘 그릇을 치우고 다음 경기를 위해 체스말을 새로 정리해 놓은 뒤(이번이 마지막 게임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잠자리를 정리하고 침실에서 패드를 가지고 나와 메시지와 뉴스를 확인했다. 그런 후… 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할 게 딱히 없었다. 그러다 물소리가 멈췄을 즈음엔 이불 안에 들어가 패드를 들고 누워서 무언가 읽는 척 했다. 스팍이 수건만 걸치고 있는 모습을 한 번 더 흘금거릴 수 있을까 싶어서, 아직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그는 너무 빤히 바라보지 않도록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역시나, 죽여주게 섹시했다 ― 이 구경거리만으로도 요 며칠 스팍을 데리고 있던 보람이 차고 넘칠 것 같다. 하지만 스팍은 수건 차림으로 오래 있지 않았다. 짐은 고개를 빼고 따라가지 않기 위해 수그리고는, 스팍이 세탁물 쪽으로 가서 샤워하기 전 벗어둔 옷을 주섬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벌칸같은 완벽주의자라면 하룻밤 입은 옷은 빨아버릴 것 같았는데 귀여운 짓을 보게 됐다. …스팍을 어떻게 꼬셔야 잘 때 입을 편한 새 옷을 사 입힐 수 있으려나. 아니면 자신의 몫으로 파자마를 사고 원래 입던 티셔츠와 반바지를 스팍에게 주는 건 어떨까. 편하게 입고 있는 스팍의 모습은 무척 잘 어울렸다. 물론, 그렇게 상상하는 게 즐거웠단 건 말할 필요도 없겠다.


스팍이 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옷을 입고 다시 나오더니 그에게로 왔다. 짐은 소파 끝에 선 스팍을 향해 묻는 얼굴을 했다. “오늘 체스로 당신이 건 내기는 특별히 오늘 하루 우리의 잠자리를 바꾸는 것을 뜻한 거겠지?”


“…뭐, 그렇달까.” 소파에 누워보니 전혀 나쁘지 않았기도 했고, 짐은 쭉 이렇게 바꾸고 있을 요량이었다고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 갑자기 말을 덧붙이는 건 내기의 신뢰도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시작해서 번갈아서 자리를 바꾸는 것을 제안하겠어. 그래야 공평할 것으로 보여. 나는 여전히 과한 도움을 받고 있는데, 그럴수록 당신은 손해를 보고 있어.”


짐은 패드를 끄며 대꾸했다. “딱히 내가 손해보는 건 없는 것 같지만, 뭐 그래. 공평하다니까 그렇게 하자. 그런데 딱 한 가지.”


“한 가지?”


“우리의 체스 경기에 보람이 있도록 뭔가 내기를 더 생각해 보려고.”


“내기를…?” 스팍이 의아한 듯 고개를 조금 반짝 들었다. “당신과 체스를 두는 자체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짐의 미소가 다정하게 허물어졌다. “고마워라. 나도 그래. 그치만 날 때려눕힐 수 있도록 네게 열심히 동기 부여를 해줘야지.”


“내가 의욕을 잃을 일은 없어. 상당히 무분별한 방식을 구사하는 상대에게 연패를 당했으니 당혹스럽게 되었지. 승리할 수 있는 조직적 전략이 정형화될 때까지 내 동기가 느슨해질 일은 없을 거야.”


어찌나 바른 말만 골라서 하시는지, 짐은 소리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두고 보자고… 난 꽤나 조직적이지 못하게 움직이거든.”


잠시 스팍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만,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된 것 같군.”


그의 한쪽 귀에 걸쳐진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또르르 내려와, 얼굴선을 타고 느릿하게 흘러서… 까슬하게 돋아난 수염 속으로 맺혔다. 저걸 핥아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다니 완전히 미친 거라고, 짐은 스스로를 마구 타박했다. “잘 자, 스팍.”


“잘 자도록 해.”


스팍이 방으로 들어간 이후로도 짐은 멍하니 누워 있다가 잠깐 후에야 문득 불을 끄는 걸 기억했다. …그 물방울, 아무래도 꿈에 나올 것 같았다.





제 5장, 오해하지 않았으면 →



  1. 스타 트렉에서 프라임 디렉티브는 스타플릿에서 최우선으로 명시하고 있는 지침으로, 다른 행성이나 문명에 접촉했을 때 해당 문명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한다. [본문으로]
  2. “...You are such a ner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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