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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2 : 보금자리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2 : 보금자리

topsecretum 기밀선녀 2015.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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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장, 5년

↑ 표지





제 2장

보금자리





교정의 풍경이며 분위기만큼은 짐이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큰 변함이 없었다. 짐은 이 시간대에 어느 건물이 가장 조용할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 중에서 터미널을 쓸 수 있는 곳을 골랐다. 물론 숙소로 돌아가서 해도 되는 일이었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스팍이 듣지 않는 것을 원했다.


공학 연구소 한 곳에 들어가(정문에서 외부인을 막는 사람이 그를 기억하고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짐은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을 찾은 후에는, 다른 학생들이 들어오더라도 방해받지 않도록 한쪽 구석으로 빠졌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눌러 이미 익숙해진 번호를 입력했다. …행성 시간대를 추측해 놓은 것이 정확하기를. 한밤중에 전화하는 것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괜한 걱정이었는지 통화는 금방 연결되었고, 화면 너머에 나타난 나이든 벌칸의 모습이 시선이 닿자마자 반가운 얼굴을 그렸다.


“짐 ― 이렇게 놀라울 데가. 아카데미에서 연락하는 건가?”


여느 때와 같이 짐을 본 그는, 표정은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목소리 안에서 기쁨이 묻어나왔다. 짐은 고민이 약간이나마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봤을 때 이 두 명의 스팍이 시공간이 뒤틀린다거나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서로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피하고 있다면, 나이가 지긋한 이 스팍은 다른 스팍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조차도 모를 거라 여겨졌다.


“맞아요. 올해 졸업식 축사를 부탁하더라고요. 좀 웃기는 일이죠? 하마터면 쫓아낼 뻔한 역사가 있는 사이에 말이에요.”


“자네는 쫓겨나지 않았네.” 스팍은 진지하게 대꾸했다. “결과적으로는 자네의 논리가 그들을 설득시켜 자네 편으로 끌어들였고, 나머지 부수적인 상황은 따라오게 마련이었지.”


“그렇게 생각하세요?”


스팍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사실을 아는 것 뿐이야.”


정말 그랬다. 그쪽에서마저도, 짐 커크는 그렇게 산 모양이었다. “하하.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격려를 원해서 연락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노련한 친구가 뜻하지 않게 자신감을 북돋아주니 기분이 좋은 건 여전했다. 짐은 기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해졌다. “스팍, 혹시, 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아요?”


스팍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지만 짐은 어렴풋이 그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이 시간대의 스팍은, 뉴 벌칸으로 떠났기 때문에 제 일등 항해사가 되지 않았어요. 왜 스팍이 뉴 벌칸에 있지 않은 건지 압니까?”


스팍은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 다물어 버렸다.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니군.”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할 얘기가 아니라니. 그가 곧 당신이잖아요?”


스팍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아닐세, 짐. 그렇지 않아. 유전자 상으로는 동일할지 모르나, 우리의 상황과—우리의 선택이—큰 차이가 있어. 또한 모든 생명체는 선택의 기회에서 자유로울 권리가 있네.”


“그렇죠, 어, 거기에 이견이 있는 건 아닌데요…”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혹여 그의 소식을 아는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고 중얼거리다 문득, 스팍의 목소리에 어린 기대심을 느끼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스팍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세요?”


“그가 이주지를 떠난 이후로 현황이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네.”


“그게 언제 일이죠?”


“이주지 건설이 시작되었을 때, 도착해서 아주 잠시 머물다 갔어.”


짐은 믿기지가 않아 화면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건 우리가 막 임무를 떠나고 난 후인데! 그럼 제가 우주에 나가있는 시간동안 그렇게 쭉 행방을 몰랐다는 거잖아요?”


“그렇다네.”


“왜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랑 당신이 그 시간대에서 얼마나 잘 지냈는지 온갖 얘기를 해줬잖아요? 그런 걸 들어놔서 첫 번째 임무가 끝나고 난 후에는 꼭 스팍에게 가서 다음 출정에 같이 가자고―”


“짐, 내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것일지도 모르네.”


비통한 목소리에 짐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스팍은 좀처럼 남의 말을 끊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대체 스팍이 무슨 실수를 했기에… “설마… 스팍에게 뭔가 얘기해서 미래를 꼬아버리거나 한 건 아니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어, 하지만 짐, 자네에게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이 있네.” 스팍은 순순히 인정했지만, 짐의 입이 벌어지자 곧바로 덧붙였다. “내 존재를 발설하는 것이 우주에 재앙을 야기할 수 있다고 자네에게 경고한 적이 있었지, 그러나 내 자신은 그런 일이 실제하다고 믿지 않았네. 내가 나의 짐 커크와 공유한 우정이 자연스럽게 축적된 것이듯이, 자네 둘 역시 천천히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길 바랐을 뿐이야. 외부의 간섭 없이 서로 믿을 수 있는 귀중한 관계를 형성해야 하니까. 나는 그 과정에서 개입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네.”


“제게 거짓말을 한 거군요.”


스팍은 미안한 듯이 조금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을 기만한 것을 사과하겠네.”


“솔직히, 그거 꽤나 약은 결정이었어요.” 짐도 아무렇지 않은 몸짓을 해보였다. “저도 가끔가다 엉큼한 짓을 하는데요, 뭘. 그런 걸로 비난을 할 순 없죠.”


“바른 말로 하자면, 내가 누구로부터 정교한 속임수의 미덕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는지 상상이 가려나 모르겠군.”


“전혀 모르겠는걸요.” 짐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고, 말을 이었다. “여하간, 그러니까 당신이 스팍에게 말을 걸었을 때 우주가 붕괴한 것까진 아니지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거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네. 그는 논리적으로 충분한 숙고를 통해 스타플릿에서의 은퇴를 결정하고 우리 사회에로 돌아왔어. 이것을 알고, 나는 그에게 접근해 당분간 논리는 잊고,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할 것을 제안했네. 나는 내가 그의 또래였을 당시 느꼈던 외로움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 그것이 충족되기 전까지는 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공허함이었지. 그가 당시에 겪었던 시간이 나의 경험보다 훨씬 혹독했기 때문에라도, 비록 내 과거보다는 조금 이르지만 우정을 누릴 수 있는 곳을 그에게 권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라 생각했다네.”


“그게 바로 엔터프라이즈고 말이죠.”


스팍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우리와 함께 뉴 벌칸으로 가서 재건을 돕는 쪽을 선택했어.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웠지만, 앞서 말했듯이 지각이 있는 존재는 누구든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네. 결과가 어떻든 말일세. 그렇게 5년 정도 흐르고 나면 스타플릿에서의 삶을 그리워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 어쩌면 자네 둘이 나의 세계에서 그랬듯이 좀 더 나중에 함께 일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지. 그러면 시간의 흐름이 안정된 원래의 궤도로 들어맞게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논리적인 일이었겠네요.” 짐은 머리를 주억였다. “그런데 스팍은 뉴 벌칸에서 떠났고, 스타플릿으로 돌아가지도 않았죠. 그리고 당신은 이유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거고요.”


“때때로 나는, 내가 그의 삶에 참견을 한 것이 자네의 현실에마저 분열을 야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네. 그리고 무척 근심이 들어. 짐.” 스팍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네가 찾은 내 다른 편의 스팍이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예감이 드는군. 인정하건데 우리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그의 발행 이후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짐은 스팍에게, 아는 정보를 말해 준다면 자신도 아는 대로 얘기해 주겠다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들었지만, 그건 좀스러운 짓이었다. 그와 스팍은—적어도 마주하고 있는 이 스팍만큼은—친구였으니까. “…그 녀석하고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오늘 오후에 마주쳤죠.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고 있더군요, 공항 밖에서 구걸을 하면서.”


놀라움에 스팍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런…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로군.”


“표현을 아끼는 재주는 두 사람 다 최고네요.” 짐은 투덜거렸다. “그러고 전 어쩌다 스팍이 그렇게 됐는지 털끝만큼도 못 들었고요. 당신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걱정했다고요.”


“그가 뉴 벌칸에서 나선 이후로는 나와 관련하지 않았으니, 도움을 줄 수 없었어.” 스팍이 재차 말했다. “한 마디도 소식이 오지 않았네. 우리의 아버지 역시 그러했고, 나와 같이 근심만 했지. 그의 생사조차도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뭐어, 최소한 그거라면 확실하니까 안심하세요. 멀쩡하게 살아 있어요. 처음 봤을 때랑 똑같이 쇠고집에다가, 어찌나 가시를 세웠는지 찔리겠데요. 벌써 별것도 아닌 걸로 주거니 받거니 하느라 욕 좀 봤죠.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도 얘기해줬음 좋겠지만, 아쉽게 그건 귓등으로도 안 듣고.”


스팍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도, 그가… 여전하다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


“어느 정도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면 궁금해도 참을 순 있겠는데요. 두 사람 다 숨기는 게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적어도 이유라도 알려주셔야죠.”


“그의 현 상태에 대해 내가 자네에게 말하지 않는 사항은 아주 적은 일부분의 내용일 뿐이야.”


“있기는 있다는 거잖아요.” 스팍이 확실하게 장담했지만 짐은 턱을 괴고 깊은 한숨을 쉬어버렸다. 시선이 화면 끝에 표시된 시간에 맞춰졌다. “그 녀석이 가지 않겠다 약속을 하긴 했지만 믿을 수 있는 걸까요? 제가 없는 동안 얌전히 거기 있는다고 어떻게 장담하죠? 이제 곧 파티에 가봐야 하는데 자꾸 걱정이 들어요. 돌아갔는데 스팍이 가버리고 없으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스팍이 호기심 어린 얼굴을 했다. “지금 자네와 같이 있는 건가?”


“명색만 ‘같이’ 있는 거죠. 제가 아카데미에 머무는 동안 숙소에 와서 며칠이라도 같이 지내라고 했어요. 데려와서 식사도 하게 했고요. 말없이 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믿어야긴 하겠는데…”


스팍이 한족 눈썹을 올렸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젊은 쪽의 스팍이 그러는 걸 봤으니 꽤나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자네가… 단순히 얘기를 통해서 아카데미로 되돌아와 같이 지내도록 만들었다는 말인가?”


어딘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설명이 미덥지 않았겠지 싶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절 데리러 온 차편에다 내 친구라고 멋대로 말해버리고 그 녀석 짐을 가져다가 실어버렸어요. 같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겠죠. 그 뒤엔 대화를 해서 여기서 머무르라고 하고, 없는 동안 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도 받았어요. 논리니 뭐니 하는 걸 죄다 때려붙여서요.” 그는 농담조로 덧붙였다.


스팍은 목을 가다듬었다. 짐은 그것이 웃음을 무마하려고 그러는 행동임을 알았다. “아주 잘 했네, 짐 ― 감탄스러워. 내가 장담하건데 그의 약속을 믿어도 좋을 거야.”


“다행이네요.” 짐은 하도 괴상한 대화에 빠져 있느라 줄곧 저녁 파티를 잊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계속 연락 할게요.”


“그렇다면 매우 고맙겠네.”


“혹시라도 마음 바꿔서, 처음에 스팍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준다면 정말 고마울 거예요. 아, 아니면 있잖아요.” 그는 문득 생각난 것을 꺼내 물었다. “그 녀석하고 직접 얘기해서 제게 털어놓으라고 하는 건 어때요? 어디서 지내는지 알려드릴 테니 연락해서…”


스팍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짐, 그의 사정은 철저하게 사적인 문제라네. 만약 내가 그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자네에게 주저 않고 얘기했을 것이야. 그러나 그와 나는 다른 존재이니, 그가 사정을 털어놓는 것은 본인에게 달린 일이지. 나로서는 그가 자네에게 말하는 편을 택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


“뭐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예상했던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짐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웃었다. “여하튼… 나중에 또 얘기하도록 할까요, 친우님?”


“언제든 반갑네, 친우여. 약속하건데, 내가 대답을 줄 수 있는 문제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응답하겠네.” 스팍이 희미한 미소를 보냈지만, 이내 표정이 심각하게 흐려졌다.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얘기하세, 짐.”


“뭔데요?”


“우리의 벌칸 생리에 의해 강인한 육체가 육신과 더불어 감정의…동요에 저항하도록 그를 구성했겠으나, 지금 그의 심신이 심약해져 있다 해도 놀랍지 않은 일이네.”


짐은 그의 말을 기억해두며 수긍했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걱정 말아요, 상냥하게 대할 테니까.” 그 말이 얼마나 괴상하게 들릴지 깨닫고 슬며시 웃음을 붙였다. “뭐 말하자면요.”


“상냥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만, 부디 조심하게.” 손을 들어 인사를 보내는 스팍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짐은 그의 손 모양을 그대로 따라해 보였다. 똑같이 해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하나였다. “그럴게요. 걱정 마세요.”


통신을 종료하고 화면이 사라진 것을 확인 한 후, 교정의 반대편으로 가기까지 5분이 남아 있었다. 차림도 차림이고 울타리를 넘어 지름길로 갈 수도 없는 일이라 짐은 느긋하게 목적지로 향했다. 뭐, 늦는다면 그런 숨 막히는 곳에서 딱딱하게 앉아 있을 시간이 줄어든다는 거니까 딱히 나쁜 일만은 아니겠다 싶었다.


드레스 코드는 재쳐두고라도, 걱정했던 만큼 지루한 파티는 아니었다. 솔직해지자면, 사실 그렇게까지 지루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진즉에 알고 있어야 옳았다. 파이크가 그 자리에 올 것이고, 넘버원도 같이 얼굴을 비출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 작년에 엔터프라이즈가 입항한 이후로는 그녀와 자주 볼 기회가 없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에게 승진을 축하할 기회가 생겨 다행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내빈”들이 많이 자리해 있었다. 즉 파티에 참여한 나이든 장교들로, 예전에 함장으로 근무하다 지금은 은퇴했거나 한산한 자리로 물러난 사람들이었다. 거기까진 알고 있었지만 그 중 일부는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고, 더러는 함께 복무하기도 했었다는 걸 떠올리면 기분이 이상했다. 5년간 스스로 자신의 함선을 몰고 나 보니 짐은 아버지와 끊임없이 비교를 당하는 게 그렇게 불쾌할 일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예전 같았으면 분개를 하고 진절머리를 냈겠지. 지금은 오히려 은퇴한 아버지의 친구들이 해주는 얘기들이 흥미롭기도 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이지만 살아서 조언을 해줄 아버지가 있었다면 자신 역시 더 나은 함장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짐은 조금 궁금해졌다. 그랬다면 아버지의 지략을 물려받아 그가 수없이 마주하곤 하는 ‘피할 수 없는’ 사고를 피할 확률도 높이고, 직면한 문제에 좀 더 나은 해결 방안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테다.


당연하게도, 스팍 대사는 그의 세계에서 그런 노련한 짐 커크와 함께 지냈다. 그런 그가 이 세계에 사는 짐 역시 남부럽지 않게 퍽 잘해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생겼다.


식사를 하고 술을 나누는 동안엔 이곳의 젊은 스팍이 짐의 머리 한 켠에 계속 맴돌았다. 그가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은 생각에 불안함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스팍 대사는 그의 약속을 믿어도 좋을 거라 했지만, 그조차도 젊은 자신과 어디선가 틀어졌다고 했다.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는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는 게 결국 제일 답답한 부분이었다.


어찌 되었건,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짐은 순수하게 스팍이 걱정되었다. 그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제 두 사람은 이곳에 함께 있는다는 게 명백한 현실이고, 짐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현실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스팍이 받아들여 주기만 한다면 그러고 싶었다.


교직원 숙소로 돌아온 그는 방 안에 불이 켜져 있고,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이 흐르는 소리에 크게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짐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여행 가방을 둔 데로 갔다. 저녁 자리가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지만서도 넥타이를 매는 것만큼은 역시 사절이었다. 어서 이런 건 벗어던지고 편한 차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래 입어 몸에 맞게 늘어진 티셔츠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기도 했고.


거기까진 좋았는데 여행 가방이 사라졌다는 게 문제였다. 흠, 스팍은 까탈쟁이니까—적어도 지금까지의 짐이 받은 인상을 보아하면—입구에 가방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방으로 옮겨놨을 수도 있지 싶다. 정작 자기 배낭은 소파 끝에 그대로 놓아뒀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침실 안에서 벽에 기대어져 있는 여행 가방을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예상치 못한 것은 안이 비어있다는 거였다. 옷들이 모두 어디로 간 거지, 짐은 잠시 당황했지만 옷장을 열어보니 ― 걸어서 보관해야 옷들이 전부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서 올라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들은…


그렇지, 가방에 있던 옷가지들이 속옷까지 전부 남김없이 침실의 서랍 안에 개켜져 있었다. 스팍의 솜씨인 모양이었다. 짐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넥타이를 푼 뒤 서랍에서 새 티셔츠를 한 장 꺼냈다. 그걸로 갈아입는데 낯선 냄새가 훅 풍겼다… 이것 봐라.


잠옷용으로 운동복 바지를 입기로 했는데 그 때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는 얼른 바지를 올리고 스팍에게 생각해두었던 것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욕실에서 나온 낯선 남자의 모습에, 그만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지만 물론 스팍인 것은 확실했다. 반듯하게 솟은 눈썹에다, 물에 젖어 착 가라앉은 머리칼 사이로 뾰족한 귀가 튀어나와 있었다. 저런 모습을 한 사람이 스팍 말고는 어디 있겠는가? 단지, 여전히 면도를 하지 않아서 거친 분위기가 남아 있었던 데다… 길게 자란 머리가 어깨에 늘어져—꽤나 잘 다져진 몸이다. 갈비뼈가 조금 드러나보일 정도로 말랐긴 했지만—가슴팍으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곳의 털은 턱에 솟은 수염과 같은 색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팍이… 몸에 털이 났을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그렇게 집중해 보고 있던 가슴에서는, 옅게 돋아난 검은 털이 배로 이어져서 타고 내려온 물방울이 허리에 걸친 수건 안으로 또르르 흘러들어갔다.


…제길.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와서 보니까, 어… 내 옷을 정리해 놨더라.”


“소지품을 허락 없이 만진 것을 사과할게.” 하고 대답하는 걸 보니 맞는 듯 했다. 로봇같은 말투도 여전하고, 딱딱한 태도도 그랬다. “숙식을 제공받았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는다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했어.”


“세탁이라도 한 거야?”


“그래. 세탁되지 않은 옷을 정리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니까.”


맞는 말이다. 제복이나 용도가 확실히 보이는 의장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임무가 끝난 후에 한동안 가지고 다니면서, 잠잘 때만 잠깐 입었던 거라 여기 와서도 빨아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 터였다. 짐은 조금 웃었다. “고마워.”


“수고롭지 않은 일이었어. 목욕을 하기 전에 나중을 위해 내 옷을 세탁하기로 했는데, 양이 많지 않아서 세탁기를 채우지 못했어. 당신의 옷도 함께 세탁하는 것이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논리적인 선택이었지.”


짐은 애초에 세탁 시설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호텔이 아니라 살림살이가 있는 거주지였다. 기회가 왔으니 스팍이 기분을 내는 건 나쁠 게 없었다. 갖고 있는 옷가지가 얼마 없었다는 말에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주 기분이 우울해지기엔 상황이 조금 적절하지 못했다. 스팍이 샤워를 하고 저런 모습으로 나와서, 자신을 위해 빨래를 해줬다고? 짐은 벌써부터 익숙해지는 느낌에,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의아한 듯, 스팍이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적절치 못한 행동을 한 건가?”


아니. 네가 아니라 내가 그러는 것 같아. “아냐, 그럴 리가. 왜 그런 생각을 해?”


“내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부터 이상하게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


이런. 짐은 머리를 저었다. 무마할 거리가 금방 떠오른 게 다행이었다. “네가 진짜로 샤워를 하는 걸 보고 좀 놀랐던 거뿐이야. 그러니까, 물로…” 거기까지 말하던 짐은, 파괴된 그의 고향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자란 곳은 그다지 물이 많은 곳이 아니었잖아.”


“사실이야.” 스팍은 작게 끄덕였다. “하지만 당신의 행성은 물이 풍족하고, 여기서 오랜 세월 지내기도 했기에 익숙해졌어. 다른 사치를 누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라도, 물로 목욕을 하는 것은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치지.”


“나도 소닉 샤워보다는 물이 훨씬 좋아.” 두 사람 모두 물 샤워를 좋아한다고 하니 그럼 같이 목욕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짐은 상상으로 즐기는 걸로 끝내고 충동을 꾹 눌러뒀다. “마음껏 쓰도록 해. 여기서 수도세가 날아올 일은 없으니까.” 짐은 시선을 돌리곤—그렇지 않으면 뻔히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기에—소파로 가 풀썩 몸을 묻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내가 편의를 봐줄게.”


스팍은 소파로 따라오며 되물었다. “실은 내 쪽에서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는지 질문을 구하려 했어.”


그 말에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전부 부적절하기가 짝이 없는 거였다. ‘내가 너한테 달려들기 전에 뭐라도 좀 입어라.’ 흠… 이것도 별로 나아진 것 없는 거다.


대답이 없자 스팍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게 음식과 지낼 곳을 마련해 줬어. 되돌려보면 처음에 당신의 호의를 적개심으로 되갚았지. 정당하지 못한 일이었어.”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눈빛에 약간 미안한 기색이 어렸다. “당신의 조력에 합당한 감사를 표하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없군.”


“네가 동냥으로 먹고 사는 재주는 없다는 거 아니겠어.” 구걸하는 남자가 스팍이라는 걸 알기도 전부터 그건 확실하게 보였던 거였다. 짐은 그가 샤워실에서 나왔을 때부터 딴 생각을 하느라 양심이 콕콕 찔리긴 했지만 애써 잡념을 몰아내며 고개를 들어 스팍과 눈을 맞췄다. “어디 보자… 그렇다고 어째서 뉴 벌칸에 있지 않은 건지는 얘기해 주지 않을 테고?”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닌 문제를 토론하는 것 외에는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는 건가?”


“알았다구.” 짐은 물러나서, 영상이라도 볼 요량으로 비드스크린을 작동시켰다. “이것 봐, 나도 나름 참고 있다고.”


“그런 것 같군.”


“여튼 너무 신경 쓰지 마.” 얘기가 끝난 것 같자 뒤돌아 가려는 스팍에게, 짐이 말했다. “딱히 뭔가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나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편하게 지내라구.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지, 뭔가 바라고 그러는 게 아니야.”


조금 곱씹어본 후 스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렇지만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당신에게 공급받고 있으니, 혹여 보답할 길이 있다면 내게 제안하는 것이 맞다고 봐.”


정말 이상한 말투였다. 짐은 조용히 웃어버리고 말았다. “보답이라. 어쨌든 뭐, 그래. 그렇게 할게.”


스팍은 다시 한 번 짧게 끄덕이고 방으로 향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짐은 목록이 띄워진 화면에서 눈을 돌려서 슬그머니 뒷모습을 바라봤다. 헤. 등도 역시 잘 빠졌네. 스팍이 바가지 머리와 옅게 돋은 수염 너머로 저런 멋들어진 몸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던가? 말하자면 ‘멋들어졌다’는 건 짐의 수많은 기준 중 하나였지만… 짐은 보통 옆에 사람을 끼고 잠에서 깨는 게 좋았고, 그가 매력을 느끼는 몸은 그때마다 달랐기도 했다. 하기는, 스타플릿에 지원하기 전을 되돌려보면, 술집을 전전하며 꽐라가 되도록 마시다가 그의 집 화장실에서 깨어나곤 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은 스팍이었다. 스팍과 그런 것을 상상할 수는 없는 거였다.


옷을 갈아입은 스팍은 짐과 거의 비슷하게, 티셔츠와 헐렁한 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짐은 충동적으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있지, 너 되게 잘 어울려.”


스팍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날 조롱하는 거라면―”


“아니야, 진심이라구.” 짐은 손사레를 쳤다. “진짜야. 덜 뻣뻣해서 편해 보이니까, 좀 더 다가가기 쉬워지잖아.”


“‘다가가기 쉽게’ 하는 건 내가 의도하는 것이 아니야.” 스팍은 그렇게 말하며 소파 끝에 자리를 잡았고, 짐은 화면으로 시선을 돌려 목록을 확인했다. “사실상 현재 내가 벌칸인으로서의 외형을 숨기고 평범하게 위장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내 모습에 목적하고 있는 바가 없어.”


“그럼 그냥 운이 좋았던 거네, 안 그래? 외모를 바꾼 김에 분위기도 편하게 되고.” 스팍이 뭐라고 할지는 몰라도, 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화재를 바꿨다.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얘기해봐.”


“결정은 당신 몫으로 남겨둘게. 우리의 기호가 상이할 수 있으니까.”


“알고서 놀라지나 마.” 짐은 목록의 위쪽으로 스크롤을 올렸다. “나더러 결정하라고 했으니, 어디보자…”


영화가 재생되고,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화면에 제목이 떠오르자 스팍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관람 취향을 통해 내게 인상을 줄 필요는 없다고 봐.”


“누가 그래, 인상을 주려 한다고?” 짐은 샐쭉 웃음을 던졌다. “내가 이런 정극을 본다는 게 의외였나 봐?”


“솔직히 말해서 그래.”


스팍의 곧은 대답에 짐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 보자, 한 번 맞춰볼까. 폭발이나 하는 영화를 예상했겠지. 뭐, 그런 게 재밌기는 해. 근데 5년 동안 임무를 하면서 폭발은 지겹게 봤거든. 어땠는줄 대강 알겠지? 하나도 재미없었어. 그래서 지금은 연기 좋고, 서사 좋고, 아무것도 안 터지는 드라마야말로 적절하다 이거지.”


“<리어 왕[각주:1]>은 감정적 고양을 의도로 연출된 영상물은 아니야.”


“그렇지, 근데 영상으로 본 적은 없어서 말이야. 원작을 읽기만 했거든. 연기로도 보고 싶어.”


옆을 흘긋 보니 스팍은 가늠해보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잘 몰랐던 모양이야. 당신은 예상했던 것 이상인 것 같아.”


“으음, 그건 나도 그래. 이상할 것도 없지. 우리 같이 있었던 날이 별로 길지 않았잖아, 안 그래?” 다른 쪽의 스팍과 알고 지냈음에도 정말 그랬다… 마침 스팍 대사를 생각하니 떠오른 것이 있어, 짐은 아침이 되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정해놓았다. “아, 맞다 ― 잠깐만. 뭐 먹으면서 볼래? 팝콘이면 되겠다. 영화에는 팝콘을 먹어주는 게 전통이잖아?”


“난 그런 전통에 대해서는 생소해.”


“진짜?” 짐은 영화를 정지키시고 그를 돌아봤다. “팝콘 먹어본 적 없어?”


“없었던 걸로 기억해.”


“흠, 그럼 이제 기회가 왔네.” 짐은 일어나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합성기 안에는, 팝콘만 해도 여러 가지 맛과 버터로 조리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았다. 스팍이 향신료를 꺼린다는—아니, 싫어한다는—것을 기억하고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 소금으로 살짝 간만 하기로 했다.


팝콘을 가지고 돌아와 앉자, 스팍은 짐이 그러는 것처럼 한 움큼 쥐어 먹는 게 도저히 내키지 않는 듯 보였다. “이게 영화를 보며 먹는 전통적인 음식이란 말이야?”


“응. 몇 세기 됐지 아마.” 짐은 대답하며 와그작거렸다.


“먹는 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거슬려. 이것의 논리성을 찾지 못하겠어.”


짐은 우적거리다 딱 멈췄고, “…맞아, 네 말이.” 입 안에 있는 것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논리성이 없는 전통과 관습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인간에게 국한된 것도 아니고 ― 온 우주가 그렇지.” 그는 스팍에게 웃어보였다. “하긴, 벌칸은 빼야겠네. 벌칸인들의 관습은 전부 논리적일 테니까. 안 그래?”


놀랍게도 스팍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벌칸에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관습들이 있어. 내 의견일 뿐이지만.”


그런 얘길 하다니 약간 놀라웠다. “진짜? 예를 들면 어떤 거?”


스팍은 또 얼굴만 젓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짐은 기죽지 않고 그에게 팝콘 그릇을 밀었다. “…어쨌든, 먹어볼래? 나더러 다 먹으라고 할 건 아니지?”


머뭇거리다 스팍이 손을 들어 그릇 안의 팝콘 한 알을 집어올려서 자세히 들여다본 후, 입에 가져갔다. 그는 우물거리면서 맛을 음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소리가 불필요하게 크긴 하지만, 맛은 무척 좋군.”


“진짜로 조리된 걸 못 먹어봐서 그래. 합성된 것보다 훨씬 나아. 하긴 그게 더 바삭거리니까, 너라면 싫어할 지도 모르겠네.”


스팍은 또 한 알을 집어 입에 가져갔다 ― 설마 계속 하나씩 저렇게 차례대로 먹을 생각인가? 싶었지만 이내 먹는 동안 한 알을 더 집어들고 있으니, 마음에 들었다는 거겠지. 사실 짐은 저녁식사도 제대로 했고 이왕이면 버터와 소금간으로 푹 절여진 팝콘 쪽이 더 좋았기에, 아무 말 않기고 두기로 했다. 스팍이 알아서 그릇을 비울 수 있을 테니까.


도와줄 것도 없이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팝콘은 모두 동이 났다. 짐은 우스움을 감추고 속으로 즐겼다. 그러다 스팍이 너무 조용히 있기에 돌아다보니, 벌칸이 머리를 소파 등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짐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스팍이 저렇게 있는 걸 보니 왠지 귀여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런 모습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고. 으음… 내심 기대는 해봤던 거 아니려나. 누군가가 무방비하게 나가떨어진 걸 보고 있으면 재미있기 마련이었다.


한동안 편안하게 밤을 보낼 기회가 없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짐의 얼굴에서 미소가 흐려졌다.


짐은 화면을 끄고 빈 그릇을 주방으로 가져다 놓은 다음 불을 껐다. 스팍이 어디서 잘 요량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 사실은 그에게 침대를 쓰라고 하고 싶었다. 이곳은 소파마저도 엔터프라이즈에서 쓰던 침대보다 어쩐지 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괜히 그랬다가 말만 더 나올 것 같아 그만 뒀다. 이 얘기는 내일 하는 걸로 하자고.


저렇게 자면 바로 자는 것보다 지칠 텐데. 생각한 짐은 자러 가기 전에 침대에서 두꺼운 이불과 베개를 하나씩 가져와 소파 한 쪽 끝에 자리를 지어줬다. 스팍이 깨어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조금씩 잠에 빠져들며, 어느 순간엔가 짐은 눈을 떼면 스팍이 사라지고 없을까봐 걱정이 들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흩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일어났을 때도 스팍은 그대로 있을 거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냥 알 것 같았다.





제 3장, 비논리적 →



  1.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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