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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 : 5년 본문

Star Trek_장편/중력을 거스르다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1 : 5년

topsecretum 기밀선녀 2015.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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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제 1장

5년





짐은 샌프란시스코의 공항을 지나가며 주변의 풍경에 별 생각 없이 여행가방을 끌었다. 5년 만에 보는 공항의 분위기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구석구석이 환했다. 이곳은 항상 생활의 일부였다. 아이오와에 오고 가며 들렀고 또 엄마가 도착하길 기다리느라, 혹은 방문하는 샘을 맞이하러, 더러는 본즈가 고향에 가기 전까지 배웅하며 어울리기도 했다. 짐은 본즈가 두려워하는 편이 전 부인을 보는 건지 왕복 셔틀에 오르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건 딸의 존재가 있다는 게 본즈에게 충분한 용기를 불어넣어준 모양이었다. 조안나가 아빠를 만나러 마중을 나왔을 때 본즈는 바로 저기,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는 딸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번에 짐은 혼자였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 따위도 없었다. 물론 바깥에 나가면 그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전부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 제임스 T. 커크, 멋진 함선을 이끄는 함장, 저명한 졸업생, 졸업식 축사에 초대된 명예로운 장교…. 그러면서도, 짐은 연설 같은 걸 하는 대신에 그냥 졸업식이 끝난 후 졸업생들에게 성대한 파티를 열어서 부어라 마셔라 놀라고 하는 편이 훨씬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선에서는 신디홀[각주:1]을 제공하는데 그 따위는 쓰레기나 다름없기 때문에 정 술을 마시고 싶으면 자기 몫을 챙겨오는 게 상책이었다. 물론 고위직 간부들이 알면 달가워하지 않으리란 게 자명하지만서도. 파이크 제독은 예외였다. 그는 충분히 즐거워할 것이다. 그 뒤엔 짐에게 충분히 면박을 줄 테지만.


사관학도 시절과 비교해 풍경이 꽤나 바뀌긴 했지만, 공항은 여전히 괜찮은 장소였다. 깔끔하고 밝게 닦인 탁 트인 공간은 누가 봐도 돈 냄새가 나는 곳이다. 예전에 본즈가 가끔가다 추레한 차림을 한 사람 두엇이 바깥쪽 벽에 기대 구걸을 하더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여기 도착한 첫 날 그가 그러길, 자기들은 저들과 운명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둘 다 숙취에 시달리는 중이었고, 옷가지나 조금 든 채 반 거지꼴로 지나가던 처지였기도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짐은 그런 존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본즈가 옳았다. 이후로 그는 오가며 할 수 있으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적선을 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벽에 기대 앉아있는 사람은 다른 거지들과 조금 달랐다. 그는 보통 구걸을 하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엎드려 있거나, 시체처럼 누워서 동정심을 자극하지도 않았다. 그 사내는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아 있었다. 단지 덥수룩한 검은 머리칼 너머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을 뿐이었다. 희한한걸. 게다가 눈에 띄게 크레딧 스틱을 내놓지도 않은 걸 보니 구걸을 하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어쩌면 정말 구걸을 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남루한 차림을 한 남자는 며칠 꽤 자란 수염이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었고, 앉은 자리 옆에는 낡은 배낭이 놓여 있었다. 입고 있는 검은 재킷 역시 몸에 맞지 않았는데, 위로 한참 올라간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은 안쓰러울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그래, 더 볼 것도 없지.


가까이 가서 쳐다보거나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건 무례한 짓이다. 예정보다 셔틀이 일찍 착륙한 탓에 아직 그를 데려갈 차편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있어서, 짐은 그 남자를 좀 더 바라보기로 했다. 특별히 볼 만한 것이 있는 풍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구경하려는 의도 역시 아니었다. …짐은 무어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남자에게 뭔가 기묘한 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짐은 한숨을 쉬었다. 기다리느라 몇 분 계속 여기에 있기도 했고, 여력이 있을 때 베푸는 건 좋은 일을 하는 셈이니까 ― 함장이 받는 급료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는 슬그머니 주머니를 뒤져 자신의 크레딧 스틱을 확인해봤다. …좋아, 이거면 되겠지. 짐은 남몰래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주머니 안의 뭔가가 삑 울리는 소리에 눈에 띄게 몸이 긴장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들어 짙은 빛깔의 눈으로 짐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었고, 곧바로 고개가 도로 내려갔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조용하고 냉담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짐을 보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이라 해야 할까, 짐 역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그를 내려다봤다. 대체 뭐지? 눈이 마주쳤던 순간 뭔가 봤던 것도 같은데,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시선이 사라지고 말았다 ― 로봇도 아니고 감사를 저런 식으로 하나? 하긴 감사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서도. 그런데도 왠지…


기다리고 있는 교통편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으니, 그는 좀 더 남자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남자는 어색한지 자세를 조금 틀었다. 짐도 덩달아 갑자기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이 사내에게 뭔가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남자가 짐이 있는 쪽을 똑바로 보려 하지 않아서, 다시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뭐가 이리 마음에 걸리는 거지? 그 눈동자… 짐은 어쩐지 익숙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일수도 있지.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고, 어쩌면 아카데미에서 안면을 튼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보니 자세가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남자가 짐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고개를 내리며, 얼굴을 살며시 반대편으로 틀었다. 부스스한 머리칼에 가려진 얼굴에 더욱 그늘이 내려앉았고, 그래서 더 의아한 생각이 든 짐은 벽에 기댔던 몸을 떼고 남자의 눈을 따라서 상체를 굽혔다. 바람이 한 차례 가볍게 불어와 남자의 머리칼을 흩트렸지만, 그래도 얼굴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흩어지는 머리칼 사이로 아주 잠깐 귀가 나타났다 사라졌고, 동시에 짐의 표정은 황당하게 변했다.


…당연하게도, 짐과 알았던 사람 중에 저런 귀를 한 인물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지만, 그렇다고 그의 짐작이 확실하리란 법은 없었다. 뾰족한 귀를 가지고 태어나는 종족은 본 것만 해도 몇 종은 될 거다. 자세히 본 게 아니고 눈앞에서 스쳐지나갔기 때문에 그냥 저 남자의 귀가 뾰족한 것처럼 보인 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머리 색이 똑같은 데다… 그리고 이 남자의 무감정한 목소리도 그렇고…


“…스팍?”


처음엔 반응이 없었지만, 이내 남자는 좀 더 고개를 반대편으로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짐은 벽에서 떨어져 나와 남자의 앞에 똑바로 가서 섰다. “스팍?”하고, 다시 물었으나 이미 의심은 확실해졌고 ― 상황이 믿을 수 없는 것뿐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짙은 눈빛이 올라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커크.” 그는 짧게 끄덕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아는 척을 하고는, 도로 고개를 내렸다.


짐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다,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뭘 하는 거야?”


“이미 알아서 추측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보는군.” 여전히 고개를 내린 채로 스팍이 대답했다. “당신이 내게 도움을 제공했지. 고맙게 생각해.”


“아니, 내 말은…” 스팍이 정말로 구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확인하자, 충격으로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고?”


“내 외모의 일부에 의해서 인간이 아님이 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에 외계 종족으로서 스타플릿 시설 근처에 사는 것이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더 수용하기 쉬워지는 현실이지. 해서,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외계 종족이 오가는 여행객들로부터 도움을 청할 기회가 적합한 비교적 무난한 장소야.”


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스팍은 그가 무엇을 묻는 건지 알고 있고, 질문을 일부러 회피하고 있었다. 하기야, 이쪽부터도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조차 알 수 없으니 아주 엇나간 대답은 아니랄까.


무슨 우연인지, 그 때 번쩍거리는 하얀 차가 다가와 길 위에 섰다. 짐이 돌아다보자 장교로 보이는 청년이 운전석에서 내려 그에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소매 장식을 보니 중위였다. “함장님. 귀환을 환영합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마워.” 짐은 잠시 어색하게 있다 대답했다. 그는 경례에 익숙하지 않았다. 함선에 오른 후 크루들에게 경례를 할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못박아두기도 했었고, 사실 스팍이 옆에 있는데 누군가에게 거수경례를 받는다는 게 정말이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스팍이 이런 모습으로 있었으니까. 별안간, 자신을 태우기 위해 온 번쩍번쩍한 비싼 차와, 입고 있는 좋은 옷이 신경이 쓰였다… 원래대로라면 돌아다닐 때 낡은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는 게 더 편했겠지만, 지금은 적절한 차림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중위가 뒷문을 열고 그를 기다렸다. 이렇게 당황스러울 데가. 점입가경으로 젊은 장교는 짐을 들어주겠다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짐은 여행가방에 손을 올리며 얼른 사양했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하지. 귀관의 이름은?”


“넬슨 중위입니다. 만나뵈서 반갑습니다.”


“나 역시 반갑네.” 요즘은 별 생각 없이도 적절한 농담을 던지며 대꾸를 할 수 있게 된 게 다행이었다. 마음이 온통 다른 데 가 있었다. 스팍에게 제대로 된 대답 하나 얻지 못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눈을 피하는 스팍의 모습을 생각하니…. 맨 처음 제대로 얼굴이 마주한 후로, 스팍은 눈에 띄게 얼굴을 숨기려고 했다. 아무래도 일정이 끝난 후 여기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테고, 한 술 더 떠 저 열성적인 장교가 시중을 들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서 좀처럼 생각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스팍이 가버릴 거다.


뭐,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인 것 같다. “가자.” 그는 돌아서 스팍에게로 향하며, 그렇게 말했다. “자네는 우리가 가방을 챙기는 동안 가서 출발할 준비를 해줘.”


이 사람이 스팍이라는 걸 알았기에 망정이지, 더수루한 머리 아래서 수염이 그대로 덮인 얼굴이, 한 쪽 눈썹을 추켜올렸다는 걸 모르고 지나갈 뻔 했다. “우리 가방?”


“그래. 내 여행가방이랑, 네 배낭.” 짐은 마음이 조금 안 좋았다. 틀린 게 아니라면, 저것이 스팍이 소유하고 있는 전부일 거다. 그는 몸을 굽혀 스팍의 배낭을 집고 어깨에 멘 다음 차로 향했다. 이제 스팍은 뒤따라올 수밖에 없겠지.


스팍이 군말 없이 일어나주긴 했지만, 눈빛만큼은 협조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꼴을 가만히 두고 발 뻗고 잘 수 있을 리가 없지. 스팍을 이렇게… 이렇게 나앉아서 여행자들에게 돈을 구걸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스팍은 그래선 안 된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카데미의 동창생들이 잔뜩 와서 짐에게 축배를 들어줬고 거기서 막 나온 참에 이런 일을 보게 된다는 건, 곱씹을수록 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넬슨 중위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친구 분이십니까, 함장님?”


“그래. 참 ― 이 녀석이 지금 이런 차림으로 있다고 해서 우습게 생각하진 마.” 짐은 트렁크를 닫고 좌석으로 돌아나오며 어린 장교에게 경고했다. “나보다 똑똑한 친구야. 여행할 때 편하게 다니는 방법을 아는 거거든.”


“…그렇군요.” 넬슨은 미덥지 않은 표정을 보였지만 짐은 이걸로도 충분할 것임을 알았다. 장교까지 올라온 머리라면 누구든지 교묘하게 대화를 맺고 끊는 이치를 알 것이다. 어찌됐건 그는 넬슨보다 훨씬 높은 직급에 있으니, 넬슨이 다시 그 주제를 꺼내지 못하리란 건 자명했다. “동행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분부는 듣지 못해서 말입니다.”


“사실 나 역시 방금까지만 해도 여기서 마주칠 줄 몰랐어.” 말하자면 사실이다. “이쪽은 스―”


“스티븐스입니다.” 스팍이 말을 자르고 들어오며, 손을 내밀었다.


짐은 중위와 스팍이 악수를 하는 게 이상하게만 보였다. 새로운 의문들이 머릿속에 마구 떠올랐지만 ― 짜증스럽게도, 저 친구가 수행하는 대로 차에 타서 길을 나서야 하니 스팍에게 물어볼 기회가 없어졌다.


뭐, 숙소에 일찍 도착할수록 물어볼 수 있는 시간도 빨리 돌아오리라. “좋아, 가보자고. 캠퍼스에 돌아가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구만.” 그는 차에 올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는군. 자네는 어때, 스티븐스?”


“자네가 구경시켜 주는 건 어때.” 스팍이 따라 옆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짐이 은근하게 스팍을 떠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의심 중 하나가 확인이 됐다. 아직 자세한 사항은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짐은 넬슨이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는 스팍의 짙은 눈동자를 모른 척 한 채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이지. 과학 연구소가 어떻게 해놓고 지내는지 보면 자네도 마음에 들 거야.”


“기대되는군.” 스팍은 짧게 대꾸한 후, 움직이는 차창 너머로 고개를 돌린 채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극에 끌어들였으니 스팍이 기분이 더러울 만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도 서로 그런 감정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의 숙소는 스타플릿의 교직원 건물 한 켠에 마련되어 있었다. 조그만 아파트로 구색은 갖춰져 있으니 며칠 머무는 동안 집 노릇을 할 곳이었다. 함선의 함장으로서 명색은 확실히 해줬다. 안을 둘러보니까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이 쓰는 기숙사나, 스타플릿에서 상륙하기 전에 제공하는 대부분의 숙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짐이 함선에서 쓰던 자신의 개인실 보다도 훨씬 나았다 ― 침대에는 진짜 거위털이 채워진 이불이 고즈넉이 마련되어 있었고, 벽지며, 주방시설이며, 잘 갖춰진 욕실까지… 개성은 좀 없더라 할지라도, 쾌적하게 시설이 잘 되어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며 감상을 갖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쏟지 않았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기다리고 있는 넬슨 중위에게 돌아가야 하니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오는 길에 만난 소령은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1층의 관리담당실에 연락만 하면 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짐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고, 관리담당실에서 그것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나 들어오는 동안 아무도 스팍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짐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방해를 피하고자 문의 잠금을 활성화한 뒤, 스팍에게로 돌아섰다.


정말 오랜만이었다—벌써 6년인가—하지만 방 한 가운데 스팍이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전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났다. 두 손을 뒷짐 진 채 등을 꼿꼿이 펴고 성긴 머리와 수염 난 얼굴을 긍지 높게 든 채, 초라하게 빛이 바래가는 옷차림을 한 모습으로도, 그가 바로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인 것처럼 보였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위화감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얼마나 빈틈이 없고 꼼꼼한 인물이었는지 생각하면 더 그랬다. 좋게 생각하자면, 사실 전혀 나쁘지 않은 외모다. 당시에 짐이 늘상 어딘지 나사가 조금 빠진 듯한 ‘방금 자다 일어난’ 스타일이었다면, 스팍은 어느 정도 그와 정 반대의 스타일이었다. 이 순간, 짐은 속으로 이 녀석 꽤나 섹시한걸, 하고 은근히 감상을 내렸다. 길게 자라서 얼굴을 조금 가리는 머리칼과 일주일은 못 깎은 것 같은 턱과 목에 올라온 수염에,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다만 자세만큼은 여전했음을, 제외할 수 있을 것이다. 눈빛 또한 그랬고.


그에게 고정되어 있는 눈은 이미 매서웠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나의 현 상태에 대해 설명을 요구할 것으로 짐작되는군.”


“그건 꽤 점잖게 표현한 말인걸. 어쨌든 여전히 서로 마음이 통한다니 다행이네.”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시간 낭비를 했어.”


짐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에게 설명을 할 일이 없다는 뜻이지.” 그러더니 스팍은 몸을 굽혀 소파 옆 바닥에 내려두었던 배낭을 들었다. “기꺼이 조력을 제공하려는 당신의 기여에는 감사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워우, 잠깐만 기다려봐.” 짐은 채 생각을 하기도 전에 얼른 문으로 향하려는 스팍을 가로막았다. 아마 그가 무의식적으로 문을 잠근 건 다른 사람의 방해를 피하려고 했다기보단 스팍을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어딜 가려고 그래?”


“이만 가겠어.” 스팍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태연했다.


“어디로 가는데?” 짐은 다가오는 스팍의 발걸음에 맞춰, 문 쪽으로 뒷걸음질치며 재차 물었다.


“방금 말했듯이, 여기서―”


어느 곳으로 가는지 말해보란 말이야.” 짐은 고집스럽게 말하며, 스팍이 더 다가와도 꿈쩍도 않고 버텼다, 두 사람의 거리는 1미터 남짓도 되지 않았다. “장소가 있을 거 아니야, 네가 가려는. 어디에서 머물려는 건지 얘기해봐.”


스팍은 거기서 우뚝 멈췄다. 짐이 가로막고 서 있어서 더 이상 다가갈 수도 없었다. 기다려도,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짐이 예상한 대로일 거다. “갈 데가 없는 거지?”


“선택 가능한 장소는 많아.”


“하지만 그 중 어느 곳도 네 건 아니잖아.” 짐이 받아쳤다. “집이 따로 없잖아? 길거리에서 지내는데.”


정말 이게 잘 하는 일인 걸까? 무언가가 스팍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가는 찰나, 떠올랐다—하도 오래되어 지금껏 잊고 있었다—함교에서 저 눈빛을 본 후 곧장 스팍이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상황을 말려줄 스팍의 아빠도 이 자리에 없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자 스팍은 도로 무미건조한 눈으로 돌아갔다. “당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야. 당신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이후로 직급의 번영에 성공한 듯 하군. 나는 그렇지 못한 나머지 다수의 하나일 뿐이야.”


“넌 ‘나머지 중 하나’가 아니야.” 짐은 힘주어 말했다. “넌 내 친구잖아.”


스팍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짐에게 도전적인 시선을 보냈다. “우리가 아주 잠시 동안 함께 임무를 수행한 적은 있지만 ― 내게 있어서는, 당신을 친구로 여긴 적이 없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마구 콕콕 찔려왔다. 짐은 살짝 충격을 받고 움츠렸다… 하지만 빠르게 회복했다. 스팍이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것뿐이야… “어떻든 간에, 우리는 친구가 되어야 할 운명인 거라고.”


“논리적인 존재들은 ‘운명’에 의해 삶을 좌우하지 않아.” 스팍이 대꾸했다. “오직 비논리적인 존재만이 현실을 부정하고 환상을 좇으며 살지.”


짐은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그가 스팍 대사로부터, 그들이 함께 모험을 하고 우정을 쌓았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지 얘기하고 싶었다. 그건 환상이 아니라 실제였다. 단지… 알면 알수록 그 얘기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만큼은, 환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짐은 수년 전 스팍 대사가 경고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런 생각의 일련을 접어두고 그를 상대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볼까? 우리가 서로 ‘친구’라고 부르든 말든 사실 큰 상관은 없어. 우리는 좋은 팀이었잖아? 넌 내가 지구를 구하는 것을 도왔고, 이 연방을 구한 거야. 내 사전에 따르면, 즉 넌 좋은 놈이고 네가 길바닥에서 잠을 잔다는 게 마음에 안 들거든. 그러니까 가방 내려놔. 이제부터 여기서 나와 같이 지낼 거야.”


“외람된 말이지만, 커크 함장.” 그의 직위를 강조하는 목소리에 험하게 날이 올랐다. “나는 이미 스타플릿에서 사임했어. 당신이 내게 명령을 내리거나 여기 남으라고 강제할 권한은 없어.”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라도, 짐은 믿기지 않은 표정이 나왔다. “난 계급을 들먹이려는 게 아니야, 스팍. 나는…” 호의를 ‘베푼다’고 하면 스팍은 거절할 게 뻔했다. “이봐, 스팍. 내가 보기엔,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데도 거리로 나가겠다는 건 무척이나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거든. 나는 네게 없는 선택지를 주려는 거야 ― 내가 제안하는 사람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고. 다른 행동보다 나은 걸로 보이는데, 받아들이는 게 논리적인 선택 아니야?”


주춤한 스팍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 했다. 조금 주저하다 그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당신의 초대를 수용하는 편이 물론 논리적인 선택이지.”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것을 놓고 내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적인 정보와 거래를 하려는 거라면―”


“아니야.” 짐은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스팍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얘기를 하니 심장이 얻어맞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가 자신의 얘기를 해준다면야 이쪽에서도 환영이겠지만, 그것 때문에 그에게 호의를 제공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난 네가 길거리에서 지내는 게 마음이 쓰이는 것뿐이야. 그게 다야. 네가 제대로 식사를 하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그렇게 잘 지냈으면 해. 진심이야. 네가 지내는 것 가지고 얄팍하게 굴 생각은 전혀 없어.”


“타인과 개인적인 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상당한 불편을 야기할 수도 있는 일이야.” 그렇게 토를 달면서도 스팍이 도로 배낭을 내려놓자 짐은 안심했다.


짐은 고개를 젓고 그냥 스팍을 향해 웃었다. 스팍이 도움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더 고마워지는 게 어찌나 우스운 상황인지. “그다지. 날 아는 동창생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 나한텐 사적인 영역 같은 거 모르고 지내는 버릇이 있걸랑.”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던 스팍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렸다. “알았어 ― 납득 가능한 제안이야. 머무르도록 하지.”


“잘 생각했어.” 이제 다음 문제는, 얼마나 스팍을 잡아두고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일단은 다음에 더 생각해 보자. 셔틀을 타고 오랜 시간 비행을 하느라 몸이 쑤신 데다, 도착하면서부터 계속 긴장의 연속이었다. 짐은 기지개를 편 다음 입고 있던 얇은 재킷을 벗어 오른편의 작은 옷장에 걸어넣었다. “저녁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거든 ― 그 동안 난 샤워를 할 건데, 먼저 욕실을 쓰고 싶다면 양보할게.” 그렇대도 목욕이 급해 보이는 외형이라기엔, 추레한 차림과 별개로 스팍의 위생 상태는 길에서 떠돈 사람의 그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저녁 약속이 있지만 나는 아니야. 약속이 있는대로 가봐도 좋아.”


짐은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내가 없는 동안 몰래 가버릴 생각은 아니지?”


“머물겠다고 앞서 약속했어.”


하지만 시선은 돌린 채였다.


“약속해.” 그러자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기 때문에, 짐은 그에게 재차 강요했다. “아니, 진지하게 말로 해. 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내 약속에 상당한 신용을 두는 것 같군.” 스팍은 그제야 이쪽을 돌아다봤다.


“그래, 맞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짐은 농담 한 점 없이 진지했다. “내 눈 보고 말해, 스팍.”


잠깐의 정적 후, 스팍은 다시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했다. “당신에게 알리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일단은 이걸로 안심이었다. 짐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고마워. 자, 앉아서 쉬시고.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외투도 벗어놓고. 뭐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스팍이 지금 입은 것 외의 다른 옷이 있는지조차 사실 모를 일이었다. 졸업 파티에 나타나서 식사를 할 만한 차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팍이 앞서 말했던 가짜 이름과, 그가 건넸던 악수가 떠올랐다. 짐이 알고 있는 바로는 대게 벌칸인들에게 있어 악수는 유쾌하지 못한 행위다. 짐은 샤워기 아래 서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골몰했다. 그나저나 ― 흐르는 물줄기를 맞으니 얼마나 좋은지. 능률적인 살균을 위해 대부분의 우주선에서 소닉 샤워를 한다지만, 몸에서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간다는 느낌은 정말 멋진 감각이었다. 그는 샤워를 마친 뒤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방으로 나올 때쯤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물론, 한 가지 결정을 내리고 나니 나머지 의문들이 줄줄이 뒤따라왔지만 말이다. 일단은 이것 하나부터 해결해 볼까… “그러고 보니, 공항에서 네가 ‘스티븐스’라고 소개하던데.” 짐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운을 뗐다. “누가 물어보면 내 친구 스티븐스에 대해 뭐라고 더 해야 하지? 음, 그러니까 그게 네 실제 성일 리는 없고.”


“당신은 물론이고 그 장교도, 내 실제 성을 발음할 수는 없을 거야.” 스팍은 소파에 앉아 손가락을 모으고 생각에 빠져 있던 것 같았다. “가명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두지 않았어. 아마도 윌리엄스, 정도면 무난한 이름일 것 같군. 질문이 들어오면 프리랜서 공학자라고 얘기해둬. 당신이 우주에서 지내며 스타플릿 관계자와 성간(星間) 유동 인구 사이의 친분을 고려해 봤을 때 지구에 정착해 일하는 윌리엄 스티븐스와는 스타플릿에 들어오기 전에, 어쩌면 당신 고향인 아이오와에서 만나서 알고 지냈다고 하는 게 가장 합당한 설명이 될 수 있겠지.”


이야기를 머릿속에 새기며, 짐은 수건을 도로 욕실 안에 걸어놓은 뒤 가방 안에서 새 셔츠를 꺼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두 가지 의문점이 떠오르거든,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는걸.”


“내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도 있어. 그러니 어느 쪽이건 중요치 않겠군.”


“솔직해서 어찌나 고마운지.” 짐의 불평에,


“어려운 일도 아니지.” 대꾸하는 스팍은 여전한 얼굴이었다.


짐은 한껏 어이없어 하는 대신 그냥 군말 없이 셔츠를 입기로 했다. “좋아, 그럼 ― 일단 이것부터 물어볼게. 왜 인간으로 위장하고 있는 거지?”


“네로가 나타나 켈빈 호를 함몰시킨 이후로 인간과 벌칸 사이가 거북해진 경향이 있어. 벌칸과 로뮬란의 외향적인 유사성 때문이지. 지구인들 사이에서 최근에 벌칸 종족이 겪은 참사에 매우 유감을 느끼는 태도가 일반적이지만, 절대 다수의 여론은 다시 벌칸을 의심하는 입장을 되돌리고 있어.”


“스타플릿에서 일하는 벌칸이라면 또 다르지.” 짐은 그의 말을 받아쳤다. “왜 스타플릿으로부터 숨는 거야? 너는 뛰어난 졸업생이었으니, 여기서도 널 반겨줄 텐데. 네가 함선에 오르고 싶지 않대도 분명 교관 직을 제안할 테고…” 스팍은 머리가 비상하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왜 스팍이 그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너도 수입이 있고, 살 곳도 마련할 수 있는데…”


“난 스타플릿에서 떠났어.” 스팍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돌아가지 않아.”


“그건 네가 대답하지 않겠다던 질문의 일부겠지?”


“추론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군.”


대답 한 번 화려하네. “그렇다면 네가 어째서 뉴 벌칸을 떠나왔는지도 역시 들을 수 없는 거겠고?”


“앞서 말했듯 그 추론 역시 틀림이 없어.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는 지금도 통용되는군.”


“성질머리가 어딜 가겠어. 무뚝뚝하고 고집 센 건 여전도 하군.” 짐은 한숨을 지었다.


“동감이야. 당신 역시 본인과 관련 없는 일에 개입하기 좋아하는 성격은 여전한 모양이로군.” 스팍이 대꾸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스팍이 앉은 자리에서 그를 올려다봤기 때문에, 짐 역시 마주 내려다봤고… 이런 걸 불가항력이라고 하는 걸까,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이 스팍이란 녀석과 마주했던 경험이 너무도 오래 전의 일이라 하마터면 잊고 있을 뻔 했다 ― 그들은 정말 잘 맞는 환상의 팀이었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스팍은 눈썹을 찌푸리거나 눈을 피하지 않았고, 그냥 그 미소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에 짐은 그렇게 느끼는 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거라는 기대도 들었다.


“뭐, 어찌됐건 좋아.” 짐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여행가방으로 눈을 돌렸다. “네가 굳이 사정을 얘기하지 않는대도 말이야, 지난 5년간 저 넓은 곳에 나가서 우주의 비밀을 밝히며 지내왔거든? 우주의 비밀도 밝혀내는데, 고집 센 벌칸 한 명의 비밀이라고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놀랍게도, 스팍은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눈썹을 치켜세웠을 뿐. “이번에는 5년이란 시간을 갖고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었군. 밖에서 만난 소령이 당신은 여기 5일 머무른다고 하지 않았나?”


“두고 볼 일이지.” 짐은 씩 웃으며 넥타이를 둘렀다. 그나마 드레스코드가 세미포멀이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스타플릿에서 여기 있는 걸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나와 같이 저녁 식사에 갈 생각도 없는 거겠지?”


“그러는 편이 좋지.”


“그럼 나 나가기 전에 뭘 좀 해놓고 가야겠다.” 짐은 주방에 들어가 합성기를 켜고 목록을 살폈다. “요 놈이 벌칸 음식을 만들 줄 아는지 모르겠네…”


“그럴 필요 없어.” 스팍이 주방 입구로 따라와 말을 붙였다. “벌칸의 신체구조는 매우 효율적으로 되어 있어. 식사를 건너뛴다 해도 큰 영향은 미치지 않아.”


“하지만 합성기가 여기 이렇게 있는데? 그리고 식사를 건너 뛴 건 대체 얼마나 많지?” 짐은 어깨 너머로 그를 돌아다보며, 눈썹을 올렸다. 스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거 봐, 그럴 줄 알았어. 뭐 먹을래?” 그는 다시 물으며 합성기로 고개를 돌려, 목록을 밑으로 내려 확인했다. “이것 봐라, 학생이었을 때 이후로 뭐가 많이 추가됐네…”


“이걸로 내 사정을 캐내려고 이러는 거라면―”


“아니야.” 짐은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말을 잘라냈다. “네가 아무 말 안 하더라도 난 네가 잘 먹고 잘 쉬는 걸 봐야겠어.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아무 대답도 없어서, 짐은 스팍이 거실로 가버린건가 싶어 어깨 너머를 돌아다봤다. 당연하게도 스팍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가만히 서서, 예의 그 표정 없는 얼굴로. 그래도 아까의 날이 잔뜩 선 모습은 누그러지고 눈빛에 부드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마 자기 자신도 모르는 거겠지만. 알아차렸더라도 반가워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짐은 그냥 더 얘기 않고 물었다. “이태리 음식 어때?”


“솔직하게 말해서 사양이야.”


“진짜?” 짐은 입가에 웃음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 스팍이 그냥 권하는 대로 받아넘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떻게 이태리 음식을 사양할 수가 있어?”


“내 경험에 따르면 이태리 음식은 마늘에 과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아.” 짐은 목록을 더 훑어내렸다. “중국음식은?”


“몇 가지는 입에 맞는 편이야.”


질문이 몇 번 오가면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스팍은 향신료를 싫어라한다. 채식을 하면서 향신료도 싫어하다니 까다롭기가 하늘을 찔렀다. 놀랄 것도 없이 이미 알고 있던 거지만, 어떻게 지금껏 깔끔하게 잊고 있었을까. 몇 번을 고른 끝에 마침내 스팍은 맹맹해 보이는 샐러드를 선택했고, 짐은 합성기를 작동시켰다 ― 몇 분 내로 음식이 나올 것이다. 한편으론, 합성기를 쓰는 법을 알면서 왜 직접 하지 않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스팍은 그저 거기 그대로 서서 쳐다보기만 했을 뿐…


그러고 나서, 스팍이 입을 열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호의에 감사해, 커크.”


“천만에.” 짐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수고도 아닌 걸. 내가 뭔가 할 수 있어서 좋네. 도움을 받아들여줘서 내 쪽이 고마워.”


스팍은 고개를 설래 설래 내저었다. “어째서 당신이 내 안녕에 염려하는지 논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지만, 지난 만남을 되돌려보면 당신은 논리적 행동과 매우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


짐은 씩 웃으며 그를 마주했다. “그게 바로 정이 있는 세상이란 게 아니겠어.”


솔직히 말하자면 할 말이 없으니 그냥 던진 말이었다. 스팍과 정이 들 만큼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것도 아니었고.


…이거야 원.


“음, 이제 난 가봐야겠다.” 그는 합성기를 종료하며 가볍게 분위기를 바꿨다. “나가기 전에 몇 가지 확인 좀 하고 갈게. 그럼 식사 맛있게 하고, 네 집처럼 편하게 지내. 터미널을 쓰든, 샤워를 하든 마음대로 해. 합성기를 쓰고 싶으면 사양하지 않고 써도 좋아. 파티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조금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달까, 지금까지 일이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다녀올 때까지 여기 남아 있을 거지?”


“당신이 짐작했듯이, 난 갈 곳이 없어.” 스팍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말했다.


짐은 그 말에 다행이라거나, 잘 됐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물론 네게도 시간 보낼 곳은 있겠지. 잊지 마 ― 이곳의 이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비논리적인 일이라는 걸.”


스팍은 순순히 그의 말을 곱씹어보는 듯 했다. “…알겠어.”


짐은 씨익 웃고 문으로 향했다. “이따 봐.” 스팍의 진짜 사정이 걱정되지만 않았더라면, 흥미로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꽤나 재미있는 건 사실이었다.





제 2장 →



역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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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쎨록 덕질을 하다못해 스따뜨렉에도 빠진 저는 선녀가 아니라 덕녀입니다. 증말이지 웃기네요. 셜록이랑 로키 좀 보다 식으면 거기서 덕질인생 끝일 거라고 안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했던 예전의 저자신이;; 이렇게 좋은 땔감이 있는데 왜때문에 그만두니?? ^q^?

그렇게 깜찍하고 순진한 헛된 꿈을 꾸다 n번째 스타트렉 인투 다크니스를 복습하던 중 베모씨의 멋짐 베모씨의 웃김 베모씨의 못남 베모씨의 몸매보다 자꾸 눈에 밟히는 짐 커크의 날랜 턱선에 한 번...스팍의 파르란 눈썹뼈에 또 한 번...의도적인 브로맨스에 세 번.... 그렇게 저의 손가락은 스팍커크 팬픽을 검색하고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사와요.

오마이갓 지쟈쓰. 셜로키언도 대단하지만 스타트렉의 트레키 역시 실로 방대한 창작물을 자랑하고 있더군요. 저는 손가락 하나 담갔다가 그만 개미지옥처럼 빠져서 헬렐레 픽을 보고받고보고받고. 출퇴근에 날로 이북리더기만 고생시키고 있는 상황이라고.


그러면서 어쩌다 셜팬픽 번역을 시작했을 때처럼 뭣도 모르고 뛰어든 상태까지 왔지만요, 셜록 픽을 소홀히 하지는 않겠다고 약속드리겠사와요. 셜록 얘긴 여기까지만 할 테니 부디 읽어주시는 분들도 이 블로그에서 셜록과 스타트렉 팬픽은 서로 별개의 공간으로 보고 언급하지 않아주신담 감사하겠습니다.



여하간~ 설라무네~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는 그러하고요.


글 얘기를 해보자믄 이 픽의 시작은 2009년 ONTD_StarTrek에 올라온 사진(scruffy!spock)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수염난 스팍' 이라고 하면....

더보기

길게 기른 산타할아버지 수염이 아니라 저런 까끌한 수염에 머리도 더벅더벅하다고 상상하면 되겠네요.

이 글은 커크 함장님이 저런 스팍을 주워오는 그런 이야기가 되시겠습니다. 본격 거지줍


스타 트렉 리부트(2009)의 뒤에서 시작하는 AU(평행세계)라 내용이 본편과 사뭇 다릅니다. 장르는 드라마구요, 진짜 알배기 드라마로 시작해서 드라마로 끝납니다. 우주에서의 모험과 전투는 없지만, 소소하게 흘러가는 풍경 속에서 천천히 변해가는 미묘한 감정, 본격 노숙줍에서 진짜 관계로 발전하는 일련의 이야기가 일품인 작품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새 이야기를 같이 지켜봐 주세요~




  1. 스타 트렉 세계관에서 알코올의 일종. 알코올과 똑같은 맛과 냄새가 나지만 영향이나 중독 증세가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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