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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JW] 해답을 찾아서 │ Working It Out - 3 본문

Sherlock_장편/해답을 찾아서

[SH/JW] 해답을 찾아서 │ Working It Out - 3

topsecretum 기밀선녀 2014.10.05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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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2 : 발견




3 : 증거 │ Evidence





1월 14일


나는 잠에서 바짝 깼다.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따라오는 육신의 노곤함이 오늘 아침에는 완전히 부재해 있다. (그래, 뭐 — 어제 저녁에 잠시 피곤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오늘은 할 일이 있다는 거다. 유일무이하게 흥미로운 존재에 대한 연구 : 존 왓슨, 그리고 그의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대단한 헌신.) 그냥 존에게 자신을 설명해 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로는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존 왓슨조차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존에 대해 말하자면 보통 아주 사려 깊은 동거인이라 할 수 있다. 아침에 출근하는 날에는 소리없이 일어나 나가는지라, 나중에 싱크대에 씻어놓은 컵과 그릇이며 옷걸이에서 존의 외투가 사라진 걸 보고서 놀라고는 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가 부엌에서 커다란 소음을 냈다. 나는 고사하고 이웃들까지 방해할 만큼 큰 소리였다.


아주 흥미로운걸, 나는 조사를 위해 침대에서 펄쩍 뛰어나온다. 방문을 나서자 돌연 쾅 하고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낮은 신음소리가 들린다. (뭐지? 누가 침입했나? 존이 어딜 다친 건가?) 나는 한 달음에 복도를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간다.


세탁기 앞에 존이 쭈그리고 앉아 버튼을 마구 눌러대고 있다. “이 망할놈의 기계. 제발 좀 켜지라고, 좀!”


그가 있는 자리의 주변에 박살난 삼각 플라스크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다 — 탁한 노란색 액체 사이로 깨진 유리 조각들이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어 위험스레 번쩍인다. 존의 맨발이 (보드라운 살갗, 분홍색 발톱) 위험하게 가깝다. 그의 종아리 역시 헐벗었다. (저 두툼한 면 가운 아래 잠옷은 안 입은 건가? 벗고 자기에는 좀 추울 텐데.)


“존?”


내 목소리에 존은 화들짝 놀라더니, 뒤로 넘어갈뻔 하다가 간신히 세탁기 문고리를 붙잡아 버틴다. 안타깝게도 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문이 덩달아 홱 열린다. 존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놀람) 비명이 나올 것 같이 입이 벌어진다(필연적으로 뒤따라올 굴욕적인 자세를 예견했겠지). 나는 속으로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얼른 팔을 뻗어 그를 붙들고, 일으켜 세운다.


우리 둘의 사이는 거의 거리가 없으리만치 가깝다. 존은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나 역시 얇은 잠옷바지 차림이다. 발가락과 발가락이 서로 닿는다. 존의 창피해하는 표정만 아니라면, 마치 껴안는 것 같은 자세다(기분이 괜찮다). 나는 웃는다. “왜 그러고 있어?”


“빌어먹을 세탁기가 안 돌아가.” 존이 세탁기를 노려보며 툴툴댄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손빨래 코스, 추가 헹굼, 90분 건조(주름 방지) 등 누를 수 있는 버튼은 다 눌렀는데, 불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콘센트를 발견하고 이내 웃어버렸다. “플러그가 빠져 있잖아. 뭐야, 존 — 아침이라 관찰력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야?”


좌절스런 소리를 내며 (자책?) 존은 내 품에서 빠져나가 세탁기의 전원을 켠다. 숨죽여 “이런—”으로 들리는 무언가를 속삭이지만 그 소리는 기계가 덜컥 켜지며 물이 쏟아져 나오는 소음에 묻힌다. 그는 유리조각을 주워 싱크대로 가져가며 의아하게 묻는다. “왜 이게 빠져 있지? 늘 꽂아 놓은 채로 놔뒀는데.”


(실험하느라. 전기가 필요했거든…)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손에 들고 존이 조심스레 바닥을 쳐다본다. “이거 설마 산성 물질은 아니겠지. 아님 수산화나트륨 수용액이라든가.”


나는 얼른 정정한다. “아니야. 말 소변이야. 심슨 형사의 부탁으로 저번에 스트레이커가 애스컷 경마장에서 약물을 사용했는지 확인하고 있었잖아, 기억나?”


존이 한숨을 쉰다. “미치겠네, 셜록. 말 소변? 이런 걸 주방에 둔단 말야? 그것도 식탁 위에?”


(그럼 안 되는 건가? 존의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다.) “어딘가 둘 데가 필요했어.” 나는 변명한다. “조리대에 자리가 없어서. 그건 그렇고, 왜 이런 시간에 주방에서 돌아다니고 있어?”


“누군가는 집안일을 해결하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존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화나서? 부끄러워서?) 대신 애꿎은 세탁기만 노려본다. 유리문 너머에서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와 세탁물을 삼킨다. 드럼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회색 시트가 따라 돌아가고, 하얀 색과 푸른 줄무늬 옷이 뒤를 잇는다. 존의 파자마 바지다. 나는 다시 존의 표정을 살핀다. 이번엔 입을 삐죽 내민 존의 얼굴에 희미하게 홍조가 떠올랐다. (아.) (아니, 당연히 아니지! 이 나이쯤 되는 사람이 설마.)


“이따금씩 세탁 좀 한다고 죽는 거 아니야.” 존은 여전히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다.


나는 —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 분명 깜짝 놀랐다. 지난밤의 입맞춤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된다. (정말 그렇게도 지독하게 나를 원하는 거야? 그래.)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아? 그냥 스쳐가는 것뿐이야. 네가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만…) (날 위해 포기해야 한다면, 뭘 버릴 수 있어? 전부, 만약에…) (얼마나 참아줄 수 있어? 많이. 빌어먹을 정도로 많이. 너도 알고 있잖아? 이 멍청아.) (얼마나 기다릴 수 있어? 셜록! 좀 봐줘. 나도 사람이라고.) 침을 꿀꺽 삼키고, 약속한다. “치울게. ...나중에.”


“알았어.” 존이 대답했고, 우리는 그렇게 협상을 맺은 것처럼 서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래. 음, 난 여기 청소 좀 하고 샤워해야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존은 어리둥절하게 뒤통수를 긁고 있는 나를 내버려 둔 채로 서둘러 (안도감에?) 방으로 돌아간다.


(왜 나를 원해, 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날?)





 

한 시간 반 뒤, 존은 일터로 막 떠났고 나는 멍하게 설거지를 하는 중이다. 무언가가 타서 따개비같이 달라붙은 것을 떼어내느라 (이게 대체 뭐야?) 수세미를 우악스럽게 놀리면서, 나는 존이 아무래도 전희에 유별나게 매니악한 집착을 가졌다거나 혹은 마조히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 속에서 맴돌았다. 존은 분명히 키스 이상을 원한다. 증거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 긴장한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입술이 닿을 때마다, 기대에 찬 존의 몸에 전율이 흐른다. 반대로 입술이 떨어질 때면 존은 늘 낮은 신음을, 상실감으로 떨어지기 싫다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급속도로 바지 앞이 단단해진다는 것도 빼먹을 수 없겠다.


오늘 아침 역시, 이불 안에서.


나는 마음이 움직여 죄책감을 느끼거나 어쩌면 연민마저 느껴야 옳을지도 모른다. 내게 이런 일은 어렵기만 했고, 존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손을 잡아 이끌지 않았다면 우리의 관계가 변화하기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얼떨떨할 따름이다. 존은 나를 원한다. 너무도 원한다. 하지만 어째서? 이해할 수 없다. 내 평생 조우한 여러 사건들 중 가장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넋이 나간 의사선생에 대한 연구.


나는 그 생각에 웃어버린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면 존이 무척 당황하겠지.


그러나 그 생각은 곧 플랫 문이 열리는 소리에 끊긴다. 다시 문이 닫히기를 기다린다. 나아가 존이 일터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소리를 앞으로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까지 바라본다.[각주:1] 대신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존과 어떤 남자. 소리가 희미하다.) 무언가로 뒤덮인 팬을 씻다 말고 싱크대의 물속으로 가라앉힌다. 나는 손의 물기를 행주에 닦고(깨끗한 행주다. 

존이 귀가한 후 다시 집안일이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 손님을 확인하러 나간다.


남자(막 중년에 접어든 나이). 요란하기 이를 데 없는 세로줄무늬 정장을 입은(이중 박음질된 밑단 : 고가) 한 남자가 문턱에 꼿꼿이 서 있다. 두 구둣발을 떡 벌리고 선 그의 손에는 갈색 무지 서류폴더가 들려 있다.


“당신이 홈즈요?” 인사말은 고사하고 거두절미 물어온다.


대답하지 않는다. 존이 진료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걸 감사히 여겨야겠군, 늘 감시관의 눈치를 보며 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어쨌든 유능한 조력자가 있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존을 향해 고개를 돌려 대답을 구한다.


“음, 이쪽은 블랙쇼 씨야, 셜록.” 존은 잠시 머뭇거리다 새 얼굴을 향해 손으로 가리킨다. 그리고 뒤이어, 대조되게 확신에 찬(자부심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리고 블랙쇼 씨, 이 사람이 — 셜록 홈즈입니다.”


블랙쇼는 그 말을 초대로 이해하고 문턱 너머로 더욱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다. (강압적, 오만함, 자기 멋대로 사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더니 내 손을 붙들고 (내 쪽에서 악수를 제시하지도 않았는데) 힘차게 악수를 한다. 세 손가락에 금반지가 끼워져 있고(자신의 부유함을 알리는 데 열심이다), 손바닥에 땀이 차 있다(긴장).


나는 불쾌함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손을 빼 마치 더러운 게 묻어 끈적거리는 양(실제로 그렇다) 엄지로 손가락을 비벼낸다. 어쨌든 예의상 나는 남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선생에게 일거리를 가져왔수다.” 그렇게 말하는 블랙쇼의 목소리에 부탁하는 기색이라고는 없다. 자신의 의뢰가 수락될지에 대한 의문점 따위 전연 없다. (이 남자는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하다. 자신이 어느 정도는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늘 그런 태도일 확률이 높다.) “선생이 평소에 얼마를 받는지 몰라도 고료를 두 배로 지불하겠소.”


(어쩌라고.) “그렇습니까?”


“중개인 앞에서 사설을 늘어놓고 싶지 않소만.”블랙쇼는 대놓고 존을 향해 고갯짓을 한다. 


(중개인?) (아! 존이 해버색 재킷[각주:2]을 입고 있어서.) (블랙쇼가 부유할지는 모르나, 안목은 없다. 멋으로 입는 재킷과 노동자용 작업복도 구분하지 못하니까.) (졸부.)


유감스럽게도, 무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존은 너무 심성이 좋은 사람이다. “물론입니다. 그러셔야죠. 일하러 가던 중이었으니까요. 자리 비켜 드리죠.”


팔을 붙잡는다. “아니.” 그리고 블랙쇼에게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블랙쇼 씨. 이쪽은 존 왓슨, 제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제게 하실 말씀 모두 이 친구 앞에서 하셔도 좋습니다. 사실, 제가 그 쪽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미심쩍은 눈빛이 돌아온다. “내 경험상 ‘동료’라는 작자들은 그다지 신뢰가 안 가는 위인들이었소만.”


알 만 하다. (이 남자의 온 몸에서 배어나오는 태도 자체가 배신을 불러들인다.) “뭐 어쨌든.” 나는 대충 말끝을 흐리며 넘긴다. (뜻은 명확하다.) “여기 있을 거지, 존?”


존이 손목시계를 본다. “10분만. 10분 정도는 시간이 나겠는데 그 다음엔 정말 가야 돼.”


“자, 블랙쇼 씨! 왓슨 박사가 소중한 십 분을 허락해 주었군요.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죠.”


일방적인 통보에, 블랙쇼의 두 눈이 험악하게 불거져 나오며 급속도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기 시작한다. (툭 건드리면 분노가 폭발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몇 번 과장되게 씩씩대더니 어떻게든 화를 가라앉힌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인신 협박을 당하는 중이오, 홈즈 선생. 독이 묻은 편지를 받는가 하면 협박 문구도 여러 번 받았으며, 빈집털이를 몇 번 당하기도 했소.”그가 가져온 파일을 직접 열었다. 맨 위에 열 장 — 스무 장? — 가량의 편지 무더기를 찍은 사진이 보인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일까지 생긴 거요.” 그는 축축함에 기분나쁜 손으로 내게 사진을 쥐어준다.


블랙쇼의 덩치에도 불구하고 존에게는 사진 안의 살풍경한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축 늘어져 흐리멍덩한 눈을 한 고양이 한 마리가(확실히 죽었다) 문손잡이(놋쇠, 광택)에 가느다란 줄로 목이 매달려 있었는데, 거기서 회백색의 포틀랜드석 바닥 위로 점점이 피가 떨어져 있었다. (이하의 정보로 분포도를 생각해 봤을 때 — 통계학적으로 런던 중심부의 어딘가로 추정할 수 있다.) 사진의 맨 왼쪽 끄트머리에, 우유 배달을 받는 철제 바구니가 드러나 보인다. (거주지라는 거로군.) 창문 주변을 둘러싼 벽돌은 붉은 색이고 나머지 벽은 어두운 계열의 벽돌로 이루어졌다. 현관 밖의 길가가 살짝 보인다. (트위크넘Twickenham[각주:3]인가?)


조용하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존이었다. “끔찍하네요. 경찰이 뭐라고 하덥니까?”


블랙쇼는 경멸조의 소리를 내며 남들보다 몇 배는 클 법한 콧구멍으로 콧방귀를 뀐다. “하! 경찰놈들!” 질문이 존의 쪽에서 왔음에도, 대답은 내게 돌아온다. “범죄라고 단정하기에는 증거가 충분치 않다고 하더이다.” (도둑이 몇 번이고 들었는데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뭔가 이상해.) 블랙쇼는 한숨을 짓는다. “그냥 경비를 세우고 상황이 ‘더 악화되면’ 그 때 알려달라고 하질 않소.”


“그 편지에서 지문 감식을 받으셨습니까?”


“깔끔했소. 흔적 하나 없었지. 그놈은 아주 영리한 놈이오, 건질 거리가 하나도 없었단 말이외다.”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놈’이라니, 눈여겨보는 자라도 있습니까?”


“눈여겨보다 뿐이겠소,” 블랙쇼는 험악하게 으르렁댄다.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소. 그 놈에게 일자리를 내줬건만, 이런 식으로 되갚음을 받았지.”


(아, 원한을 품은 고용인과 비정한 고용주 사이의 알만한 다툼이라는 거지.) (지루하긴.) (존을 연구하는 게 훨씬, 훨씬 더 재밌다.) 나는 블랙쇼가 가져온 사진을 도로 파일에 끼워넣는다. (경찰들도 이 일련의 얘기를 듣고 수사를 거부했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블랙쇼 씨, 노사 간 분쟁과 인사 관련 사안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ACAS등의 기관에 연락해 보시는 걸 추천드리는—”


“세 배는 어떻소.” 블랙쇼가 말을 자르고 들어오지만,


나는 차가운 눈길로 대답한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절대 돈이 중요할 수 없다.) “안녕히 가십시오, 블랙쇼 씨.”


“내 말 듣기는 한 거요? 평소 고료의 세 배를 지불하겠다는데 싫다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렇습니다. 자, 이만 양해해 주시죠. 왓슨 박사가 출근에 늦겠군요.” 나는 열린 채로 기다리고 있던 문을 향해 그를 정중히 몰아낸다.


돈이 그런 식으로 거절당한 데 놀란 모양인지 블랙쇼는 더 이상의 말 없이 나간다. 층계참에서 들리는 화난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 나는 단호히 문을 닫는다.


“음, 셜록?”


몸을 돌리자, 존이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다. “왜?”


“일단 저기, 나도 나가봐야 해서. 그리고 — 지금 아무 일도 없잖아. 일이 있는 편이 낫지 않겠어? 지루함도 덜고.”


“너에게 형편없이 무례하게 굴었잖아. 내가 뭐하러 도와줘?”


존은 놀란 표정이었다가, 곧 그런 이유로 내가 일을 거부했다는 생각에 기쁜 듯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 맞아, 별로 양반은 아니었지?”


나도 웃는다. “뭐, 확실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지.”


“넌 아무도 안 좋아하잖아.”


“내가 그런가?” 존의 양 어깨를 잡는다. (우선 그의 입술로 잠시 눈을 내리깔아, 그를 긴장하게 만든다.) (존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정말 — 그는 기대감에 차올라 다음 동작을 기다린다.) (벌써부터 몸이 가볍게 움찔거리고 있다.)


예상과 한 치 다름없이, 존은 입술을 핥더니 고개를 뒤로 기울여 나를 본다. “글쎄…”


뒤로 이어지는 말은 없다. 나는 그를 내 품으로 가까이 끌어당기며 속삭인다. “이럴 땐 증거를 살펴봐야지 않겠어?”


존의 입이 열리지만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할 말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시험 삼아 그의 얼굴로 내려가 벌어진 입술 안쪽을 살며시 훑어본다. 존은 바로 허기지게 입술을 마주 부벼온다. 나는 그것을 잠시 음미하다가(존은 정말 독창적이고 능숙하기도 하다. 전문가로부터의 가르침은 늘 좋다.) 존이 한층 흥분할 때쯤 몸을 뗀다.


“가야지.” (도움이 돼줘야지.) “출근 시간 늦겠다며.”


볼만한 표정이다. 그의 온갖 감정들이(흥분, 의무감, 좌절감) 마구 뒤섞여 얼굴의 작디작은 점, 선, 면을 타고 표출되며 우선권을 주장한다. 그런 그를 보는 건 나에게도 역시, 살갗을 따라 익숙지 않은 짜릿한 긴장감이 손끝에서 시작해 아랫배로 모여들게 만든다.


“그렇지.”존은 한숨을 쉬고 겉옷을 갈무리한다. (괜히.) (자제심을 끌어모은다.) “정말 가야겠다. 혼자 있을 수 있지? 할 일도 없는데.”


“난 괜찮아. 할 일이야 많아.”


“정말?”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눈을 반쯤 내리감고 한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살짝 내려다본다.) “물론.”


무슨 뜻이냐며 물어볼 시간은 없다는 걸, 존도 안다.


그의 물음에 내가 답하지 않은 게 아닐 뿐.

 





존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가 거실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알 수 있었다. 보통 존은 기운좋게 열일곱 계단을 뛰어올라오는데(자신이 장을 봐오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어필할 때만 빼고), 오늘은 그의 발걸음이 무겁고 느리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그가 겉옷을 벗어 문 뒤 고리에 거는 것을 지켜본다. 입을 삐죽 내민 (다문 입가가 쳐졌다) 그의 미간에 깊게 골이 져 있다. 잠시 어쩌면, 키스를 제대로 못 해준 채 중간에 서둘러 존을 출근시켰기 때문에 그 일로 종일 존이 언짢아 있었을지 모른다고 당황스레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상당히 어색해지는 상황인데.) (어쩌면, 우리 관계의 발전에 대해 내게 설득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존은 뒤돌아 나를 보더니 애써 비뚜름한 미소를 짓는다. 신발을 벗어던진 그는 금세 한층 더 작아진다. “엉망이야. 내 환자 중 한 명이 죽어서—”잠시 말을 멈추고, 존은 마음을 다독이려는 듯이 숨을 깊게 들이쉰다. (나빠도 아주 나쁜 소식인가 보다.) “출산 휴가 중이었던 쥬디 포트스큐가 일찍 돌아왔어.”


“그래서?”


“돈 말이야, 셜록. 돈 문제지. 정규 수입은 더 이상 없고 누가 아파서 쉬거나 휴가냈을 때 잠시 자리를 채우는 일밖에 없어. 다른 일을 더 찾아야 돼. 전에 바틀릿 사건, 마이크로프트가 따로 보수를 주지는 않았을 거 아냐?”


“응.”


한숨을 쉬며, 존은 반대편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TV를 켠다. “블랙쇼에게 의뢰를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런 식의 뻔한 책망이 달갑지 않다. 내 재능과 내 신념을 향한 비난은 아무리 조금이라도 괜찮을 리 없다. “난 흥미로운 사건만 받아. 너도 알잖아. 이런 건 낭비라고. 얼간이라도 다 알 법한 사건을.”


“그게 안 되니까 온 것 아니겠어.”


“그 자도 멍청이라는 거겠지.”


“넌 모든 사람들을 전부 멍청하다고 하면서―”존은 대꾸하려다 금세 입을 다문다. 돌연 레스트레이드의 모습이 TV 화면에 나타난 것이다. 엄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법의학 연구팀이 현재 저택을 철저히 조사 중이며 사고 현장에서 증거물을 검색하고 있습니다. 블랙쇼 부인은 의식이 돌아오는 대로 수사에 협조를 부탁드릴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사건에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정보를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블랙쇼 부인?”존이 경악한다. 화면에서는 불타올라 껍데기만 남은 커다란 스테이션왜건(BMW, 3 시리즈 왜건형 모델?)의 모습을 짤막하게 내비치더니, 곧 레스트레이드의 엄숙한 목소리가 앵커의 조금은 가벼운 목소리로 대체된다. “45세의 블랙쇼 부인은 오늘 아침 손과 다리 및 얼굴 일부에 2에서 3도의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블랙쇼 부인은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며, 차체가 화염에 휩싸이기 전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에 의해 밖으로 튕겨져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충격으로 입을 벌린 채, 존이 텔레비전을 끈다. 그의 숨죽인 목소리가 들린다. “이럴 수가… 셜록. 우리가…우리가 도와주지 않아서… 우리가 도와줬으면…맙소사.” 갑자기 존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의자의 양쪽 팔걸이를 움켜쥐더니,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존은 몇 시간동안 뛴 사람처럼 괴롭게 숨을 헐떡이며 거의 알아듣지 못할 말을 떠듬떠듬 늘어놓는다. “우리가 저 사람을 저 지경으로 몰아낸 거야! 나…난 저렇게 될 줄은… 어, 어서 빨리—”그의 눈이 초점을 잃고, (과거에 있었던) 눈앞의 무서운 환영을 보듯 휘둥그레하게 변한다.


(플래시백이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펄떡 일어나 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꼭 잡는다. “존. 존. 괜찮아. 집이야, 여기. 베이커 가에 있어. 안전하다니까.”소용없다. (좀 더 강한 방법이 필요하겠어.) 그를 붙들고 흔든다. “존! 그만! 날 봐!”


이번엔 내 목소리(톤?)가 전해진 모양이다. 존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펴면서 뒤통수를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세게 부딪힌다. 처음엔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차츰 눈이 다시 또렷해지며 초점을 찾았다.


“존.” 다시 말을 건다. “여기는 집이야. 안전해.”


안도감과 슬픔이 뒤섞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오른다. 그는 떨리는 숨을 크게 내뱉으며, 앞으로 풀썩 무너져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기분이 이상하다.) (그런 식의 욕구는 한 점도 없었고, 단지 존은 매달리고 싶었을 뿐이다.) 어색하게 등을 토닥인다. “괜찮아. 안전해.”그런데 이번엔, 내가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우리 둘 모두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때까지 그에게 키스하고 싶다. (미쳤어.) (위험하다.) (오. 안 돼. 섰다.[각주:4]) (부적절하게도 서버렸다.)


“존…”


“그 사람을 도와줘야 해, 셜록.” 존은 거칠어진 목소리로 절박하게 내게 말한다. “그게 우리 의무야.”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중이다. (존에게 무엇도 약속치 않았다.) (하지만 안 된다는 말 역시 안 했다.) (또다시.) (어째서 존에게 무언가 거절을 하는 건 이리도 끔찍이 어렵단 말인가?) (아니, 무언가가 아니다. 뭐든 어렵다.) (젠장.)


블랙쇼 사건에 진전이 없습니까? SH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앤더슨이 현장에 나왔어. 커다란 전진이 있다고 하더군. 이대로라면 해결은 따 놓은 당상이겠지. GL


나는 코웃음을 친다.


앤더슨이 전진을 해요? 제가 필요할 겁니다. SH


(존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어.) (불탄 자동차 이상의 것을 본 거겠지.) (불에 희생된 사람들 이상의 더 심한 것을 본 것이다, 분명.)


벨몬트 가든 17번지, 트위크넘. 아침 10시에 와. 앤더슨 좀 까지 말고. GL


미소를 짓는다. (존이 기뻐하겠지.) (그리고 앤더슨을 까는 건 언제나 즐겁다.)

 





1월 15일

 

택시에서 벗어나 머리 위로 작게 펼쳐진 벨몬트 가든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탁하기만 했다. 차를 타고 오는 짧은 시간동안 바람 역시 한층 거세어져 차의 보호막에서 벗어난 나의 코트며 목도리, 머리칼까지 찢어놓을 듯이 사납게 몰아친다. 바람은 거리를 가로질러 둘러진 푸른색과 하얀색의 접근금지 테이프를 뒤흔들며 위협하고, 안으로 흘러들어와 감식반이 블랙쇼 부인의 차 주변에 설치한 간이텐트의 옆자락까지 펄럭이게 만든다. (텐트가 있어서 다행이다. 존의 시선에서 자동차의 모습을 가로막을 수 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나는 몰래 그의 얼굴을 훔쳐본다. 그 역시 바람에 시달린 외투 깃이 세게 뺨을 갈기는데도, 갈무리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다.) (어제의 소름끼치는 기억에 매달려 있다.)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반복된 그 기억은 이미 여기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일인데도.) 나는 내 코트 깃을 더 바싹 세운다.


길 저편, 감식반의 텐트 바로 맞은편에 두꺼운 코트와 바람막이로 무장한 거무죽죽한 무리가 보인다. (기자들.) 그들은 나와 존이 17번지의 부지로 다가가는 걸 발견하자 돌연 움직이더니 카메라를 들이댄다. “여기요! 이쪽을 봐주세요!”외침과 동시에, 플래시가 연이어 터지며 눈을 가로막는다. (젠장, 번쩍번쩍 하군.) (이런 거야말로 존이 정말로 피하고 싶었던 일일 텐데.) 얼른 고개를 틀어 그의 표정을 확인한다. 나는 그에게 불안함이 몰려들 것을 우려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존의 표정은 텅 비었다. 원래보다 걸음걸이도 딱딱하고 입매 역시 긴장해 있다 하더라도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흔들림 없는 눈을 하고 있다. (진작 알고 있던 것을. 존 왓슨은 엄격함으로 똘똘 뭉친 사내다. 필요하다면 심장까지도 강철로 변할 수 있다.)


“가자, 존.” 나는 그를 부른다. (샘솟는 자랑스러움, 그리고 때아닌 소유욕.) “레스트레이드를 찾아보자고.”


(존을 위해서라면) 레스트레이드가 저택의 바깥에 나와 있는 게 이상적일 테다. 하지만 그는 감식반 텐트 안에 있었고, 존은 망설임 없이 내 뒤를 따라 들어온다. 바깥은 바람이 사납게 날뛰는 중이었고, 불에 소각되다시피 한 상태로 천막에 둘러싸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경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바짝 탄 훈제 생선처럼 매캐한 연기가 감돌아 코를 찌른다. 옆에 선 존의 눈이 꾹 감기며 다문 입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고, 바로 다음 순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눈 앞의 광경에 놀라 간담이 서늘해졌을 뿐, 동요하지는 않는다.


내 눈 앞에도 존이 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다.


자동차의 형태는, 차체라기보다는 타고 뼈만 남았다고 하는 편에 가까웠다. 앞문 두 쪽이 떨어져 나간 후 틀은 화염에 휩싸여 뒤틀렸고, 모퉁이에 끼워져 겨우 남은 뒤쪽 유리를 제외한 모든 창문이란 창문은 깔끔하게 박살이 났다. 바퀴가 있던 자리 역시 바짝 타서 바닥에 타이어의 흔적만 남긴 채였다.


(블랙쇼 부인이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다. 블랙쇼 부인은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피해자다.)


앤더슨은 보호 장갑과 하얀 실험복을 입은 모습으로 한때는 뒷좌석이었을 부분에서 바짝 탄 가죽과 금속 파편들을 제거해내고 있었다. 그것들은 빠짐없이 봉투에 담겨 조수(젊은 여자. 머릿결이 좋고 육감적인 외모)에게 건네진다. 레스트레이드와 도노반, 그리고 블랙쇼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 조수를 쳐다보고 있던 (그러나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딴 짓을 하는 척 하던) 도노반의 시선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저 자식이 여기 왜 있는 거예요?” 도노반은 짝다리를 짚고 턱을 내밀며(적개심) 내 쪽을 가리킨다.


레스트레이드는 이해하라는 듯이 (회유적인) 미소를 지어보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간 어디로 튈 지 모르잖아.”


앤더슨이 이쪽을 알아차린다. “이게 누구야. 우리의 사이코— 아니지, 우리들의 영웅 고기능 소시오패스 납시셨군.” (빈정대는 방법 한 번 요란하군.) (화를 불러일으킬 심산이겠지.)


“그만 좀 해.” 레스트레이드가 나서 중재한다. “해결할 손이 많아질수록 좋은 것 아니겠어. 이웃에 목격자도 없으니까 말이야.”


(블랙쇼의 주택 주변으로 십여 채가 넘는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의심스러운 정황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답이다.) (이웃들이 의심스럽다고 증언할 만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나는 차체로 다가갔다.


내부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운전대는 완전히 찌그러져 들어갔고, 대시보드가 있어야 할 곳은 아예 뻥 뚫려 있었다. 기어 노브는 간 데 없고 아래쪽은 엑셀이 달려 있던 흔적만 남긴 채 클러치와 페달까지 모두 사라진 모습이었다. 운전석에서 남아 있는 거라곤 운전석의 문이 날아간 뒤 새까맣게 탄 스프링 하나뿐이었다. (폭발이 운전석 밑에서 일어났다.) (의심할 여지 없이 블랙쇼 부인을 노린 범행이다. 블랙쇼 본인이 아니라.)


“지금까지 찾아낸 단서는요?” 나는 레스트레이드에게 질문을 던진다. (앤더슨은 쓸만한 단서들을 대부분 놓치니까.)


“별로 많지 않아. 금속 파이프 쪼가리하고 샷건 탄환 몇 개 정도가 다야. 아주 초보적인 폭발장치를 해놓은 것 같아.”


“좀 더 일찍 연락했어야죠.” 예상했지만, 역시 마음에 차지 않는다. (앤더슨은 앞으로도 중요한 단서를 못 찾아낸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러자 블랙쇼가 이를 드러낸다. “내 기억으로는, 애초에 내가 의뢰했을 때엔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나.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짭짤하게 돈을 준다니 생각이 달라졌나보지?” 그러면서, 그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턱을 치켜올린다. (승리감을 드러내는 자세.) (도발.) (블랙쇼의 바디랭귀지는 배우자가 심한 화상을 입고 무의식인 채로 누워있는 상황에 보일만한 그것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기엔 심하게 으스대고 허세도 많다.)


“그 반대입니다.” 나는 들으라는 듯 일부러 차분하고 공손한 대답을 들려준다. “저는 오직 관심있는 사건만 맡는 것을 규정으로 하고 있습니다.”


블랙쇼의 눈이 가늘어지며 콧구멍이 움찔한다. (의심.) “아하, 그래서 이젠 관심이 생겼다 이거요?”


“과시할 거리가 생겼을 때만 관심이 생기죠.”


“바로 그렇습니다.” 나는 앤더슨의 읊조림을 무시하고 블랙쇼에게 미소를 반짝 띄웠다가 곧바로 지운다. (사람을 약올리는 데 유용한 표정이다.) (사람은 약이 오르면 대게 경계를 늦춘다.) “부인께서는 어떠신지?”


그 질문에 앤더슨이 지레 움찔 놀란다. (죄책감.) (그렇다면 저기 셔츠 칼라 바로 위로 돋보이는 자줏빛 흔적은 분명, 아내가 아닌 도노반의 작품이겠지.) 하지만 정작 질문을 받은 블랙쇼에게는 그 말이 아주 통상적이기 그지없는 생활회화가 아닌 모욕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양 볼기짝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입가에 게거품을 물고 씹어뱉듯이 대답한다. “자가용이 다 타서 재가 됐을 지경이니 하마터면 요단강 건널 뻔 했지 — 산 채로 구이가 됐지 그럼 어떻게 됐겠어? 그 개새끼를 당장 잡아들여! 잡아 가두라고, 알아들었어?”


앤더슨은 나를 향해 비열한 웃음을 흘린다(블랙쇼의 분노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레스트레이드는 입매가 뒤틀린다. (그는 이렇게 압박받는 상황이 언짢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점을 양해해 주십시오.”


“하! 시간같은 소리 하네! 누구 소행인지 당신네들에게 이미 말했다고. 가서 잡아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란 말이야.”


레스트레이드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한숨을 쉰다. “죄송하지만, 그 일이란 게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 예전 고용인을 얘기하는 거로겠군요? 그 사람과 만나봤습니까?”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내 물음에 도노반이 다그친다.


“도노반이 엊저녁에 찾아갔어.” 레스트레이드는 도노반이 눈을 굴리며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쉬는 것을 무시하고 대답한다.


“물론 경사님은 아주 철저하게 조사를 마쳤겠죠.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으니…”


최대한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듯이 가식을 떨자, 코를 찡그리면서도 레스트레이드는 못이기는 척 쪽지를 건네준다. “그럼 알아서 해봐.” 이름과 주소만 적힌 작은 종이다. 찰스 히스코트-베인, 레드힐 트라팔가 아파트 16호. (레스트레이드의 글씨가 아니다. 도노반도 아니고, 그런데 눈에 익다.) (블랙쇼의 글씨인가?) “알아서 해봐. 하지만 셜록, 미리 얘기하는데 알아낸 게 있으면 숨기지 말고 모두 말해.”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엊저녁에 우리가 거의 두 시간이나 거기 가 있었잖아요.” 도노반이 앤더슨을 흘긋거리고 (동의를 얻으려고? 맞장구를 쳐달라고?) 단호하게 가슴 앞에 팔짱을 낀다. “새로 찾을 것도 없을 걸요.”


오호라. “‘우리?’”


“히스코트-베인이 흔쾌히 조사에 응해서, 내가 앤더슨과 같이 갔었지.”


“그것 참 프로다운 처사로군요. 그래서 이번에도 무릎 꿇고 앤더슨을 도와줬나 보죠?”


무표정한 내 얼굴에서 나오는 말에 도노반의 입이 떡 벌어지고, 앤더슨은 쿨럭 하고 어색한 기침을 내뱉는다. 하지만 레스트레이드는 별 일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이래서 대원들이 함께 일하기 싫어하는 거야. 됐어, 둘 다. 나도 알아. 백만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나도 일단은 형사라고.”


비밀이 폭로된 도노반과 앤더슨은 똑같이 수치감에 물든 표정을 한다. 옆에서 존의 입가가 움찔거리더니, 목을 가다듬는다. (웃지 않으려고 자제심을 발휘하고 있다.)


“존, 어떻게 생각해?” 돌연 나는 그 자제력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어 불쑥 묻는다. (이 사건 때문에 존이 많이 경직된 상태였다.) (그의 자제심을 공략해 무너뜨리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예상 적중.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그는 얼른 헛기침으로 무마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회피한다. “음, 어, 내 생각엔 도노반 경사가 아주 현명한 행동을 한 것 같은데.”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인다. “현명한 처사였지. 블랙쇼 씨의 고용인이 폭탄을 설치한 장본인이었다고 생각해봐. 경사 혼자 찾아갔다면 아마 어떻게든 해코지를 당했겠지. 어쨌든 뒤에, 음, 뒤를 맡길 사람이 있으면 나쁠 건 없으니까.”


“오—.” 나는 즐거움에 간드러지는 긴 감탄사를 내뱉는다. “물론 앤더슨이라면 뒤를 아주 잘 봐줬을 거야.”


결국에 존이 터지는 웃음에 굴복하고 말자, 레스트레이드가 끼어들어 중재한다. “1절만 해, 자네들 둘. 이제 그만 가봐.”


“물론이죠.” 대답을 마지막으로, 사건 현장에서 즐거워하는 나를 향해 (여전하게도) 비난을 퍼붓는 도노반을 뒤로 하고 성큼 천막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웃음을 다 흘리지 못한 채로 존이 뒤따라온다. “저러다가 머잖아 네게 되갚아줄 방법을 꾸며낼 지도 몰라.”


“말도 안 되지!” 나는 코웃음을 친다. “서로 상상 속에서 껄떡대느라 바쁜데 다른 생각 할 여유가 어디 있겠어? 상상만으로도 역겹군.”


존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는 내 옆으로 걸음걸이를 맞춰 걷는다. (존이 웃는 걸 보니 다행이다.) (예상하지 못했기도 했다.) (바로 지난밤, 그의 힘들어하던 모습을 봤기 때문에 더욱.) (안팎으로 꼬인 구석이 그다지 없는 사람임에도, 존은 너무나 예상하기 어렵다.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잠시 후 존이 묻는다. “경사가 왜 앤더슨과 만나는 걸까, 생각해 봤어?”


나는 흘긋 그를 향해 시선을 보낸다. “넌 생각해 본 모양인데. 어디 들어나 보지.”


그러자 존은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됐어. 어차피 말도 안 될 텐데. 들어봐야 도움도 안 돼.”


“난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얘기해 봐.”


“으음,” 존은 (자신의 이론을 정리하며) 천천히 운을 뗀다. “도노반 경사는 예쁜 여자잖아. 똑똑하기도 하고. 당연히 선택지에 앤더슨만 있지는 않을 거란 말이야…”


(존은 잘 생긴 남자다. 똑똑하고. 친절하고, 재미있고, 용감해. 그에게도 역시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도노반 경사가 딱히 간절할 이유가 없는데, 경사가 보기에는 앤더슨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거지.”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온다. “매력? 외모? 지성이?”


“아마도. 아마 뭔가 있겠지. 너랑 내가 모르는 뭔가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걸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는 않거든.”


“그래?” (흥미롭군.) (흥미로워?) (이게 어떻게 흥미로워?) (존은 무슨 말을 한 거지?) (그가 원하는 것이 — 필요로 하는 것이 — 남들과는 다르다는 뜻인가?)


조그만 대답에 존은 단번에 자신감이 줄어든 얼굴을 한다. “네 생각은 다른 거야?”


(모르겠어, 존. 그래서 묻는 거야.) (화제를 바꿔야 할 때다.) “앤더슨의 섹스 라이프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생각하는 게 좋겠어.” 나는 웃어보인다. “일단 지금은 네가 점심식사를 해야 하니까.”

 




 

히스코트-베인은 점잖고 세련된 차림을 한 50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그가 입은 트위드 재킷의 소맷부리는 올이 닳기 시작했고 팔꿈치 부분은 쓸려서 반짝였다. 세 단추 중 두 개가 다른 것으로 교체됐다. (저런 스타일의 옷? 적어도 5년은 됐다.) 그러나, 옅푸른 셔츠만큼은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잘 다려져 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차림을 깔끔히 하는 데 수고를 마다 않는 타입.) 180cm가 조금 안 되는 중키에, 희끗희끗한 관자놀이 머리 아래로는 잘 다듬은 콧수염만 남겨뒀다. 왼손 약지에 가느다란 금반지가 끼워졌다. (결혼했다.) 걸음걸이가 살짝 경직됐다. (관절염 초기. 왼쪽 무릎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선 모습은 반듯하고 꼿꼿하다. (군인. 아니, 전역 군인.) 금발에 푸른 눈과 더불어, 원래 밝은 색이었을 피부는 짙은 구릿빛으로 탔다. 빨갛게 열상을 입은 자국은 없다. (단순히 볕에 태운 것이 아니라 적어도 수개월에 걸쳐 자외선에 노출된 피부다.) (더운 지방에 오랫동안 파병되어 복무했다.) 그와 존은 거실의 소파에 마주보고 앉는다. 나는 내가 보는 그의 특징들을 존이 몇 개나 눈치챘을지 궁금하다.


히스코트-베인은 집 내부와 정원을 살펴보고 싶다는 요청에 한 마디의 불평이나 반문도 없이 집을 보여주며 필요하다면 경찰에게 무슨 일이든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블랙쇼 부인에 대해 공손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남편에 대해 얘기할 때는 자세가 딱딱했다(전자와는 사이가 좋았지만 후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윗층으로 올라갈 때까지도 그는 집주인으로서 지켜보거나 안내를 할 의지는 없어보였다. (혐의가 될 만한 증거들을 티끌없이 처리했다거나, 아니면 정말로 숨길 것이 없는 걸 수도.)


책 몇 권과 이상한 사진들만 제외하면 층계참과 복도는 장식물 하나 없이 말끔하다. 안방에는 히스코트-베인과 곁에 짙은 머리에 녹색 눈의 여인이 담긴 사진 액자가 침대의 머리맡에 걸려 있었다. 히스코트-베인의 (꽉 끼는) 바지 모양새와 여인의 목걸이(커다란 플라스틱 비즈)로 미루어 보아, 사진 속의 시대는 80년대 초 쯤이다. 하지만 옷장과 서랍에 여자 옷은 없었다. 그리고 책꽂이를 살피던 중 사진 앨범을 발견했다. 히스코트-베인과 아까 본 여인이 찍힌 사진들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 지 10여년은 족히 되어 보인다. 사진첩의 뒤쪽으로 갈수록 히스코트-베인과 꼭 닮은 밝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금발의 어린 남자아이도 함께 나오기 시작한다. 남자아이가 교복을 입고 등장할 때 즈음엔, 여인의 사진은 없다. (혼인 생활을 하는 상태는 아니군.) (이혼한 것도 아니다. 히스코트-베인은 여전히 손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 (부인은 사망했다.)


다른 침실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잠겨있지는 않다. 역시 다른 곳과 같이 간소한 방에, 누군가 사용한 흔적이 없으며 사진도 없었다. 그러나 옷장 안에는 성인 남자 사이즈의 풋볼 장비와 바이크 가죽재킷이 몇 벌 있었다.


목이 죄여오는 것 같다. 세세한 부분은 다르더라도 이 집의 분위기만큼은 소름이 돋으리만치 비슷했다. 마이크로프트가 집에서 떠나버렸을 때, 그는 인생에서 가장 살이 쪘을 때에서 20킬로그램이 줄었고, 그의 빈 방은 18인치 깃이 달린 셔츠가 버려진 그의 옷장만큼이나 적막이 감돌았다.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은 모두 상자에 담아 먼지쌓인 다락방에 내버렸었지…


한 순간, 이 집이, 그중에서도 윗층이 무척 냉랭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기가 몸 속으로 파고들어 침실 문을 닫고 신속히 계단을 내려왔지만 응접실에 아무도 없음을 발견하고 내심 깜짝 놀란다. (이건 실망인 건가?) (존이 어디로 갔지?) 그 때 (반쯤 문이 열려진) 옆방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존과 히스코트-베인이 같이, 저긴 주방인가?) (차를 마시려고? 아니면 커피?) 지금은 내게도 온기가 무척 그리웠으므로, 같이 따뜻한 음료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문에 다가서며 귓가를 스치는 대화에 발걸음이 멈춘다.


“군의관이었습니다.” 존의 목소리.


아, 하는 낮은 음성. “힘든 자리지.”


“네, 아니라고 할 순 없겠죠. 맞습니다.”


존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차분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많이 눈을 깜박이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감정이 격해질 때 그의 반응.) “하지만 전방에 서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죠.” 이번엔 활기찬 목소리. 존이 분위기를 밝게 만들 때의 방법 중 하나다. 그 목소리에서 가벼운 웃음기도 어려 있다. (히스코트-베인의 용감함을 추어주는 것이다.) (존은 겸손이 지나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히스코트-베인이 대꾸한다. “정신없을 때에는 난리통에도 뛰어드는 사람들 아닙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럴 시간조차 없으니. 그저 행동만 하는 셈이지. 당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 불릴 만 하다고 늘 생각했었죠. 뒤를 수습하고, 우리들을 고쳐주고. 목숨까지 구해주니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죠.” 존은 조용하게 대답한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그 뒤를 이은 침묵에 나는 몇 걸음 더 그들을 향해 다가갔고, 다시 흘러나온 히스코트-베인의 목소리를 듣고 멈췄다. “돌아온 지는 얼마나 됐소?”


“1년 하고도 여섯 달 다 됐죠.”


“새 생활에 적응은 잘 하고 있고?”


“뭐, 다들 같지 않습니까…”


히스코트-베인 역시 자조적인 웃음을 뱉는다. “나도 잘 알죠, 확실히. 그러니까, 여기 이 곳을 봐요. 다 무너져가는 것 같이 하고 살지. 군대에 있었을 때엔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조차 직접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어쨌든 조금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혼자 어떻게든 꾸려나가게 마련이죠, 안  그렇소? 세상이 많이 바뀌기도 했고.”


“자동계산기도요.” 존이 웃음을 터뜨린다. “제 삶의 골칫덩어리죠.”


“평범한 시민으로 산다는 게 참 지독하게도 외로운 일 아니오?” 히스코트-베인이 말을 이었다. “당신같은 젊은 친구는 동지애를 나눌 관계가 그리울 거요. 금방 친해지기 쉬운 보통 민간인들은 말고. 목숨을 걸고 믿을 수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당신을 봐요, 당신은 부상을 당했고 동료들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지. 민간인들이라면 얼마나 그럴 수 있겠소?”


“글쎄요, 전—”


“그리고 목적의식이 없어지는 것도 힘든 것 중 하나요. 군에 있을 때엔 늘 뭘 하는지 알고 살았죠, 어째서 에 대한 답은 없더라도 중요하다는 것만은 아니까 항상 움직일 수 있었지. 하지만 당신은 적어도 그런 면에서 운이 좋은 사람이오. 훌륭한 기술이 있으니. 보아하니 지금은 경찰 쪽에서 일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닙니다. 보건소에서 시간제 근무 중이예요.”


“아. 그럼 같이 온 사람은 상사가 아닌 거요?”


“아니지만, 그렇게 행동하니 오해하실 만 하죠.”


“음. 그래도 결정을 내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다행이지 않소? 책임도 대신 지고 가 주고. 군대 규율에 익숙해지고 난 후라 그런 명령 계통에 들어가 있는 게 편할 테지. 안 그래요?”


존에게서는 대답이 없다. (왜 대답하지 않지?) (충성심 때문에?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제는 봐요, 책임져야 할 것들만 남았죠.” 무거운 한숨이 들린다. “내겐 온통 갚아야 할 빚뿐이고, 수선하고 고칠 것 투성이에 필요한 곳에 연락도 해야 해요. 더 끔찍한 건 그것들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거요. 그래서 어쩔 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 때가 있어. 폭탄이 터지고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들고 — 선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내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얘기하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소?”


총알이니 폭탄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폭탄이.) (존이 또다시 공황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주제니까.) 나는 마지막 세 걸음 마저 건너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고, 막 존이 웃으면서 대답을 하려던 차였다. “그 얘기가 나오니까 말입니다, 셜록은 조금—”


안으로 들어서는 동시에 전기주전자가(흰 색, 아르고스 밸류 레인지 제품) 끓어올라, 커다랗게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전원이 꺼진다.


존도 폭탄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질린건가 싶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니, 차라리 지금 당장 파도에 휩쓸려서라도 사라지고 싶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조금 의아하다. (어째서?) (방금 몰래 하려던 얘기 때문에?) (그보다 더한 말도 했다.) (그것도 내 앞에서.)


(아!) (그가 들켰을까봐 걱정하는 것은 나를 향한 모욕이 아니다. 나와 누군가의 비교였다!)


“아, 홈즈 씨.” 나를 본 히스코트-베인이 차를 권한다.


“감사합니다.” 나는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가 건네주는 접시와 잔을 받아든다. (존의 맞은편.) (존을 지켜보고, 그의 반응을 관찰할 수 있는 최적의 각도.) 차 안에 설탕을 녹여 넣은 뒤, 나는 존을 향해 상냥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네 선임에 대해 얘기해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군.”

 





3시 반 경 우리는 히스코트-베인의 집에서 일어났다. 벌써 바깥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지만 다시 비가 내렸다. 나는 히스코트-베인의 집 앞 마당을 가로질러 건너가며 코트 깃을 세워 얼굴을 묻는다. 존은 비로부터 고개를 숨기지 않은 채,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등을 꼿꼿이 세우고 군인처럼 걸어간다.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니야.” (아예 광고를 하고 다니지 그래.)


“상당히 확신하는 말투로군.” 나는 (씁쓸하게) 대꾸한다. 지금 이 순간, 그를 향한 나의 관대함이 퍽 줄어든 기분이다. 존이 ‘아무 때나’ 연락하라는 히스코트-베인의 초대를 넙죽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군대에 있던 시절의 일을 묻는 내 질문에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히스코트-베인에게로 말을 돌리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나는 수사 과정에서 남에게 주도권을 뺏기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초조하다. 존에게 휘둘리는 상황은 한결 더 견디기 힘들고, 그래서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할 인물로서의 내 자신에 확신이 떨어지게 만든다. (여태껏 존은 한 치의 비밀도 없이 투명하리만큼 솔직했었다.) (하긴, 진정으로 거짓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연히 확신하는 말투가 나오지. 확신하고 있으니까.” 존은 택시 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가며 가볍게 말한다.


나는 그 옆에 타 안전벨트를 매고, “베이커 가요.” 행선지를 말한 뒤 바로 존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자가 무고하다는 걸 어떻게 알지?”


“왜 그래, 당연하잖아!” 생각해 보라는 듯 존은 두 손바닥을 위로 펴보인다. “그 사람을 봤으니 알 거 아냐.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런 좋은 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


“퇴직 군인이기도 하고.” 나는 차갑게 대답한다. “즉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한 것 뿐만 아니라 실제로 경험도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귀국하고 나서 일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대. 몇 달간 나라에서 보조금만 받아 생활하다 블랙쇼한테서 일자리를 얻은 거야. 그 사람은 블랙쇼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지금까지도.”


“레바논에는 이런 속담이 있어. ‘쉽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조심하라.’ 사람들은 좀처럼 빚진 입장이 되려고 하지 않아, 존.”


내 거만한 웃음에 존의 주먹이 세게 쥐어진다. (안달이 나겠지. 좀처럼 논쟁이 안 풀리니까.) “그 사람은 블랙쇼 부인을 좋아한다니까. 이번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도 굉장히 마음 상해 있고.” 그는 다른 패를 꺼내들며 항의한다.


“하!” 나는 고개를 젖히며 비웃는다. “닳고 닳은 시나리오로군. 부인은 좋아하지만, 그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라. 협박편지를 없애버릴 계획이었는데 잘못되어 부인이 다친 거고.”


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신다. 미간을 찌푸린 그의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믿기지 않는다는 건가.) “설마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건 히스코트-베인을 향한 노골적인 존의 찬양에 찬물을 끼얹을 좋은 기회였고, 저항하기에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나는 모은 두 손의 끝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게 중얼거린다. “증거가 그렇게 가리키고 있어. 그리고 블랙쇼의 증언을 추가로 고려해 본다면—”


“아니.” 존은 고개를 젓는다. “안 믿어, 난. 히스코트-베인은 국가 공훈 메달을 받은 사람이야. 그것도 두 번이나. 그럴 리가 없어.”


풀이 죽어 쳐진 그의 모습을 잠시 감상하다, 나는 이내 밝게 입을 연다. “물론 그렇겠지. 동기가 있다면 뭘까?”


“어... 블랙쇼 부인?”


“히스코트-베인은 죽은 아내만 바라보는 남자야. 손가락에 반지 못 봤어?”


존은 혼란스러움에 조용해진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그 놈이랑 잤어?”


“뭐?” 고개를 휙 튼 그의 눈에 충격이 가득하다. “히스코트-베인 말이야? 나 그 사람이랑 방금 만났어!”


(또 말 돌리기인가.) (아주 익숙하게 하는군.) 나는 차가운 미소로 대답한다. “네 선임.”


혹독한 추위에 그렇지 않아도 발간 기운이 어려 있던 존의 얼굴이 더욱 색이 짙어지고, 존은 (긴장한 목으로) 침을 넘기더니 (방어적으로) 고개를 치켜든다. “우리 부대엔 준사관이 없었어.”


(이번엔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는 건가?) 발견하는 순간의 익숙한 짜릿함을 여기서 느끼게 될 줄이야. (이건 단서다. 그것도 아주 양질의.) “그럼, 선임하사관은?” 난 승리감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 채 공격한다.


한 순간 존은 경악한 얼굴을 한다. 그러더니 두어 번 깊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단호하게 대답한다. “아냐. 아니야, 그런 일 없어.”


“좀 더 분명한 표현이 필요해?” (존 왓슨은 추궁을 당하면 족제비처럼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군.) “그 남자랑 섹스했어?”


시트에 가라앉듯 힘을 푼 존이 내 손을 잡더니 꼭 쥔다. 그는 채 억누르지 못한 웃음을 흘리며 키득인다. “너, 질투하는 거였구나.”


“웃기지 마.” (난 질투같은 거 안 했어.) (질투? 내가?)


“어쨌든, 너도 히스코트-베인이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존이 묻는다. (화가 나리만치 태연한 표정이다. 자신이 꽤나 완벽하게 화재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좋다. 그렇게 날 속여넘겼다고 좋을 대로 생각하게 두자.) (속여넘기는 것의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하지만 난 속지 않았다. 조금도.) 나는 억지로 블랙쇼가 의뢰한 사건으로 주의를 돌리며 한숨을 쉰다. “인정하긴 싫지만 앤더슨의 말이 맞은 것 같아.”


“이제 어떻게 하지?”


“집에 가야지. 집에 가서 내일은 조금이라도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도록 빌어야지.”




 


1월 16일

 

지난밤까지만 해도 나는 블랙쇼가 의뢰한 사건에 더 이상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뒤가 구린 구석이 있는 상종하기 싫은 남자. 지루하긴!) 하지만 오늘 아침 내 본능은 무언가 어떤 일이 더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딱 집어낼 수 없다는 점이 날 괴롭히고 성가시게 만들면서 동시에 무시하지 못하고 머릿속에 맴돌게 만들었다. (존 왓슨이라는 이름의 미스터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존은 책상에서 랩탑으로 뭔가 작성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는 키스가 없었다.) (어째서?) (벌써 존의 인내심이 닳은 건가?) 그런 가능성이라면 별로 반갑지 않다.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뒤로 가 선다. (몸이 가까워지면 보이는 그의 반응에 마음이 안정되니까.) ‘그때만큼 내 인생에서 비참했던 적이 없던 것 같다. 셜록이 뒤돌아 나를 발견한 찰나의 순간, 그는 내 정체가 적임을 깨달은 표정이었고―’ 거기까지 읽었을 때, 랩탑 뚜껑이 홱 닫힌다. “꼭 그렇게 감시를 해야겠어?”


이상한 느낌의 격류는 내 마음만 휘저어놓은 걸로 끝나지 않고, 나의 몸도 ― 가슴도, 심장도 ― 흔들어놓았다. 존이 옳았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존이 사실은 모리아티인 거라고 정말로 믿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그 의심은 증거나 타당한 생각이라곤 단 한 조각도 없이 그저 두려움으로만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존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공포. 그를 향한 믿음을 유린당했다는 공포.) (그리고…)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그만 둔다. 대신 코트와 목도리를 챙기는 쪽을 선택한다. “내게 불후의 명성을 가져다주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고맙지만, 더 가치있는 일에 네 도움이 필요해. 갈래?”


“어딘데?” 존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리치먼드와 트위크넘 일보. 지역 신문이야, 존. 가십거리과 온갖 신변잡기의 보고지.”

 




 

또다시 마법같은 힘을 발휘해준 레스트레이드의 경찰 배지 덕분에, 약 한 시간 후 우리는 간행물 보관소에 (손쉽게) 출입 허가를 받아 최근 몇 년 사이 있었던 눈여겨 볼만한 사건을 찾아 기사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존이 그 일을 했다. 그는 씩씩하게도 택시를 타고 오는 길에 써준 키워드 목록을 받아 찾는 일을 맡았다. 내가 신문이 보관된 파일을 무작위로 꺼내보는 동안 15분간은 말없이 각자의 업무에 집중했고, 존은 이따금씩 목록에 볼펜으로 선을 그으며 낙담한 듯한 이상한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가정해 보건대 눈길을 끌만한 기사를 찾지 못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나는 집중력이 한껏 흐트러진 채 (이런 조직적인 일에는 존이 훨씬 유능하다) 무의식적으로 신문을 들추다, 곧 내 시선이 창 밖을 향하거나 존의 뒷덜미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곳에 난 머리카락이 조금 길어졌다. 반 인치 정도, 제멋대로 구불구불하게 휘어지기 시작한다.) (구레나룻 쪽에도 그렇다.) (전혀 군인스럽지 않다.) (그는 오늘 면도 역시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다면, 그의 뺨 위에 입을 맞출 때 어떤 느낌이 들지 상상해본다. (왜 지난밤에 키스해주지 않았지?) (지금 키스하는 건 부적절한 건가?) 나는 망설이기만 한다.


“음, 셜록.”존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건다. “뭔가 찾은 것 같아.”


블랙쇼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년 전의 사진이다. 지금보다 턱 밑에 겹쳐진 살집이 덜하고 머리 역시 검다. 나는 사진 옆의 기사를 읽으려고 몸을 기울이며 자연스레 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게 되었고,


돌아온 것은 마치 소몰이 막대같은 걸로 찔리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다. 존은 자신의 격렬한 반응을 기침으로 무마하고 억지로 웃음을 내뱉는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지 몰랐네.”


(지금 키스하는 건 괜찮으려나?) “놀래킬 의도는 없었어. 불편하다면―” 나는 (시험 삼아) 손을 치워본다.


“아니, 아니. 괜찮아.”


“그래, 그럼.” 허락도 받았으니 나는 당당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기로 한다. (천천히. 가볍게, 그 다음엔 힘줘서.) “그래서, 무슨 내용이지?”


“5년 전에 사고가 있었대. 읽어줄게.” 그는 기사를 읽기 시작한다. “지난 8월 13일 새벽 A3로에서 대형 트럭이 충돌해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리처드 히스코트-베인(26)이 머리를 크게 다쳐 사망하고 트럭 운전사인 스페인 노동자 미구엘 헤르네즈(32)가 중상을 입었다. 충돌의 원인을 수색한 결과 차체의 브레이크 고장―” 어깨에 얹은 손을 좀 더 안쪽으로 늘어트리자 거진 목소리가 엉켜들 것 같이 숨을 들이킨다. 쇄골에 내 손가락 끝이 닿았지만 그는 남자답게 버텨낸다. “―으로 인한 사고인 것으로 밝혀졌다. 히스코트-베인 씨의 고용주인 트위크넘 출신의 사업가 브래들리 블랙쇼(43)는 회사 내 운반 차량의 관리가 미흡하지 않았냐는 의문에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다른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셔츠 위를 살며시 덧그리자 (또다른 실험.) 이번에는 아예 읽는 것을 멈출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다. (재밌는데? 힘을 행사한다는 건.) “계속 읽어봐.” 나는 재촉한다.


“블랙쇼 씨는 회사 내 15대의 차량에 대한 최근 운송 기록을 공개했으나, 히스코트-베인이 탔던 포드 트렌지트와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 대해 블랙쇼 씨는 지난주 사업장에 도둑이 들어 몇 가지 물건들을 도둑맞았다고 밝혔다. 히스코트-베인 씨는 미혼으로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으며, 사건 현장에서 아버지인 찰스 히스코트-베인(53)에 의해 구조됐다.” 존이 고개를 들었다. “제길, 셜록, 히스코트-베인이 정말 범인이라면 이거야말로 빼도박도 못하는 범행동기인걸.”


“그래.” (확실히 강력한 동기다.) (하지만 존의 뒷덜미를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만큼 강렬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 선을 따라서 귓불 뒤의 조그맣게 옴폭 들어간 부분까지.)


숨이 턱 막힌 존은 고개를 뒤로 움츠린다. “셜록…”


“아, 미안.” 나는 그렇게 (거짓)말하면서 손을 가만히 얹는다. “비눗물 말라붙은 자국이 있어서…”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다.) (그냥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그럴 듯한 핑계라서.) “불편했어?”


“아니.” 존은 얼른 부정했다가, 천천히 설명할 말을 고르려 했지만, “‘불편하다’기 보다… 그런 쪽은 아니고…” 아무래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 모양이다.


슬그머니 웃는다. “금방 지워질 거야.” 내가 상상 속의 비누 자국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동안, 존은 의자에 앉은 채로 뻣뻣하게 굳어 숨만 겨우 쉬었다. 목으로 긴장이 여실히 드러났고, 그렇게 가만히 드러나 있을 뿐인 긴장된 근육을 기어이 쓰다듬고 싶은 충동에, 참지 못하고 손을 가져다댄다―


―그리고 그 순간 손목을 붙잡히고 만다. 의자에서 홱 돌아 일어선 존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그 감각이 싫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나고 만다. “놔.”


우리가 이 짓을(이 짓이라 함은 존이 무척이나 하고싶어 안달을 내는 것을 말한다) 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존은 화가 나 보인다. 실망스러움이나 지친 기색은 한 점 없고 그는 그저 화가 나 보인다. 더불어, 날 놓아줄 생각도 없어 보인다. “넌 날 만지고 애태우면서 ― 나는 네게 손끝도 못 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면서 가슴 안을 꽉 죄이듯 둔탁하게 두드린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본다. “날 만지고 싶다고?”라며, 되풀이하는 내 목소리는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차갑고 잔인하다.


“서로 동등하게 하고 싶다는 뜻이야, 이 멍청아.” 유리창이 달린 문가를 흘긋 확인한 존은 목소리를 낮추고 비난한다. “넌 왜 ― 셜록! 난 널 만지고 싶어서 완전히 미칠 것 같단 말이야.”


(그의 말은 사실이다. 그건 그의 조그만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모양에서, 긴장된 목에서, 손목에 돋아난 힘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렇게 어려워야만 하는 일이었던가?)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안 돼.”


잠깐 동안,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쓸어넘긴다. “일이나 하자.” 포기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오 ― 저 얼굴이라니.) (그의 표정, 그의 자제심, 그의 친절함.) (저 눈동자. 저 입술. 저 믿기 힘들만큼 민감한 육신.)


나는 가까이 나가가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양 손으로 존의 얼굴을 감싸다가 다정하게 입맞춘다. “고마워.” (짧게 돋아난 수염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응당 그래야 하는 것보다 훨씬 기분좋게 느껴진다.)


존은 피식 웃음을 흘려버린다. “넌 진짜― 믿을 수가 없다니까. 대체 어떤 기분인지 알기는 해? 네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쭉 기다리기만 하는 기분이?”


(아, 지난밤에 키스를 해주지 않았던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존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넌 모르겠지만, 키스할 때에도 내내 나 자신을 억누르고 있어야 한다니까. 그게 무슨 기분인지 넌 모를 걸.”


생각해보자. 존에게서 작게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신음과, 떨리는 몸. “괴로워?”


“그래.”


“그럼―”


"아니,” 존이 얼른 말을 가로막는다. “아니, 그게 아니야. 그냥, 쉽지 않다는 걸 네가 알았으면 하는 것 뿐이야. 매번 이해시킬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는 너무도 솔직하다. 그래서 어쩐지 감동적이다.) “언젠가는 널 눈감아 줄 날이 오겠지, 결국에는.” 나는 웃는다.


분위기가 다정해질 것이란 예상(틀림없이 존이 원하는 것이기도 할 테고)과는 달리 그의 눈은 애정으로 가득 찬 웃음을 짓지 않고, 내게로 활짝 열려 살피듯 쳐다본다. 그 시선에는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고(놀라움? 불신? 기대? 두려움?), 그건 정체를 가늠해보기도 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존이 얘기하고 싶은 주제는 아닐 것이다. 그가 얼른 자리로 되돌아가 신문기사를 뒤적이는 모습에서 의혹은 더욱 확실해진다.


나는 한동안 그의 모습에 눈을 맞춘 채, 집중해 있는 허리의 곡선과 목록 위를 빠르게 훑는 손가락의 움직임에서 단서를 찾아 헤메지만(어떻게 하면 그가 회피하는 주제에서 그의 군 시절 과거를 연관해 볼 수 있을까?), 존은 아무 말 않으려고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나는 더욱 더 이유를 알아내리라고 결심하게 된다.

 




 

1월 18일

 

소파에서 종일 빈둥거리면서 존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건 썩 괜찮은 취미거리다. 오늘 그는 주방에서 아침식사를 만들기 위해 포가 떠져 나온 생선을 들고 부산히 움직였다. (이 때가 가장 즐겁다. 그의 음악적 취향은 유감스럽지만서도.) (가는 허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러 각도에서 비치거나 움직일 때마다 바지 위로 둔부의 곡선이 드러나는 모습이) 즐겁지만(즐거워? 존의 육신을 보는 게 즐거움이라고?), 오늘만은 포기할 요량이다. 나는 랩탑을 홱 닫고 일어난다. 지금 출발하면 레스트레이드와 거의 동시에 트위크넘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코트를 입고 목도리까지 단단히 여민 다음, 나는 잠깐 주방 문가에 멈춰서 안을 둘러봤다. “계란이 두 개군. 베이컨은 네 장이나?” (욕구 불만이 과식으로[각주:5] 이어진다는 일반적인 통념이 사실로 입증되는 모양이군 ― 적어도 존의 경우에 있어서는.)


“네 몫도 만들고 있어.” 그러나 곧 내 코트와 목도리 차림을 보고 존의 얼굴에서 미소가 흩어진다. “무슨 일이야? 레스트레이드가 전화했어?”


내 관점에 따르자면 레스트레이드가 휴대폰의 해킹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한 것은 내게 연락을 취해 호출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존이 그렇게 생각해줄지는 미지수라, “새 메시지야.”라고 (정직하게) 말하기로 한다. (도노반이 레스트레이드에게 보낸 문자였지만, 어쨌든 메시지는 메시지다.) “블랙쇼의 집으로 구급차가 갔다는군.”


존의 손에서 생선 조각이 떨어진다. (충격.) “블랙쇼 씨가...다쳤대?”


“그럴 가능성이 높지. 지금 거기로 가려고.”


존이 서둘러 가스 밸브를 잠근다. “외투 가져올게.”


그 말에 갈등하게 되는 내 자신이 스스로도 놀랍다. 지금껏 나는 존의 존재 자체와 더불어 그가 보내는 꾸밈없는 찬사에 늘 기꺼웠다.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존은 매우 유능한 아군이기도 했고.) 하지만…(하지만, 뭘?) “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알아, 나도―” 그는 나를 지나쳐서, 지난밤 의자에 걸쳐뒀던 재킷을 거둬와 팔에 꿴다. “―그래도 같이 갈 거야.”


존의 말에 온 몸이 따뜻하게 물들어 간다. (자랑스러움, 고마움, 그리고 존을 껴안고 싶은 저항하기 힘든 충동.) “넌 정말이지 말리지도 못하겠어.”


“당연하지.”


(존을 껴안고 싶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이다.) 나는 더 이상 욕구를 외면하지 않기로 하고, 문을 여는 존의 팔을 잡아끌어다가 입을 맞춘다. 고마움의 의미로 짧게 입술만 맞출 생각이었지만, 닿는 순간 존이 무게를 실어 온 몸을 밀착해온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존의 머리칼을 붙잡고 팔로 허리를 감아 더욱 가까이 끌어당긴다. 키스 한 번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존과의 키스는 목마름에 괴로워하며 보낸 수일 끝에 얻는 생명수와도 같다. 질척한 감각은 황홀하다. 매번의 키스는 입맞춤 사이의 공백이 그동안 내게 얼마나 큰 갈증이었는지 깨닫게 만든다. 입을 맞추면서도 갈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멈추고 싶지 않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존에게 키스하고, 또 키스하고, 그의 안으로 더욱 깊숙이 혀를 넣어 그를 탐하며 쾌감 끝에서 조금씩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서로의 입술을 집어삼킨다.


마침내 존은 입술을 떼고, 씩 웃었다. “시도는 좋았어. 그래도 난 너와 함께 갈 거야.”

 





어두운 밤 번쩍이는 비상 차량의 불빛은 아이러닉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빛을 받는 근처의 유리창마다 기하학적 무늬가 선회하며 점멸하고, 머리카락을 태우는 듯한 후광을 만들어 흥분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밝은 낮이 되면 구름이 잔뜩 낀 겨울날 아침에조차(구름이 잔뜩 낀 겨울날 아침에 특히나 더) 그 효과가 오히려 반감되어 칙칙하고 음산하게 변한다.


오늘 아침은, 옆이 움푹 패인 구급차나(도로쪽 앞바퀴도 휘었다) 레스트레이드와 도노반이 몰고 다니는 차량이 세차가 시급해 보이는 몰골(수 차례 튀어 말라붙은 염화칼슘)로 한층 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셜록.” 그제야 레스트레이드가 이쪽을 알아차린다. 자신이 날 불렀던 건지 기억이 안 나는 눈치다. (그건 그렇잖아도 내게 연락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도노반은 고까운 표정이지만 아무 말이 없다. 온 신경이 이 저택 안에 쏠려 있는 거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한 모양이군. 정말 심각한 일이.)


앞서가는 레스트레이드와 도노반을 따라 존과 나는 저택으로 들어간다. 현관의 양쪽 문은 활짝 열려, 값비싼 가구(페르시아산 러그, 파커 노울 엘스워스 소파, 티파니 플로어 램프)로 점철된 응접실을 환히 보여준다. 그 안쪽으로 녹색 유니폼 차림을 한 사람 두 명이 보인다. (구급대원.) 바닥에 쭈그려 앉은 그들의 옆에 미동도 없이 누운 형상은, 시신이다. 한편 여자의 목소리가 누군가를 진득하게 타이른다.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선생님. 치료를 다 받고 나면 그 때 경찰과 얘기해도 늦지 않아요.”


“그만 재촉하시오! 진술하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블랙쇼의 목소리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인지 고집을 부리고 있다. (당장 병원의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람에게서 나올 만한 음성은 아니다.) 응접실로 들어서 상황을 살피니 증거는 더욱 명확해진다. 그의 한쪽 볼에 베인 상처가 보이고(곧고, 얕다), 하얀 셔츠가 피에 흠뻑 젖어 넝마가 된 채 가슴을 덮고 있다.


단번에 그는 나를 알아챈다. 얼굴이 셔츠 앞가슴만큼이나 벌겋게 변한다. 그는 나를 가리키며 고함을 지른다. “저 놈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내가 계속, 그렇게 말했건만, 저 셜록 홈즈란 놈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어. 네놈 때문에! 이미 늦어버렸다고. 나가!


“괜찮아.” 레스트레이드가 목소리를 낮춰 중재한다. “일단… 지금은 물러나 있어.”


나는 알았다는 표시를 보내고 주변을 둘러본다. 샷건이 일단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로 짜맞춰 도장한 이곳의 목재 마루만큼이나 깨끗하게 광을 냈다. 공기중에 아직 흩어지지 않은 화약 내음이 풍긴다. 가슴 한 가운데 총알이 박힌 히스코트-베인의 시신은 미동도 없이 싸늘하게 바닥에 누워 있었다. 주방칼(20센티미터. 헹켈 셰프 나이프)이 손에 들려 있다. 쓰러진 의자와, 그 아래 핏자국. 동그랗게 피가 떨어진 자국이 점점이 흩어져 바닥을 수놓았다.


“자, 그럼, 선생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레스트레이드는 예의 그 감탄스러우리만치 차분하고 안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블랙쇼는 내게서 노한 눈길을 거두고 두 주먹을 말아쥔 후, 고갯짓으로 히스코트-베인을 가리킨다. “저 놈이 날 공격했소. 칼로. 그게 다요.”


“저 사람이 왜 여기 왔죠?” 도노반이 묻는다. (좋은 질문이다.)


창문 근처의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향해 블랙쇼가 눈짓한다. (집 내부의 전반적인 인테리어를 따라 그곳도 크림 색이다. 단지 빨간 핏자국만 빼면.) “운전사 중 하나가 일을 그만 둬서 급하게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소.”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히스코트-베인 씨에게 일자리를 제의하기 위해 집으로 불렀다는 말씀이시죠? 차는 어디에 주차해 두셨습니까?” (이것 역시 좋은 질문.)


“차?” 되뇌인 블랙쇼는 일어서서 서성이기 시작했고, “지금 내가 찔려서 이러고 있는데 차가 어디있는 지가 중요하단 말이오?” 진정하려고 크게 호흡을 가라앉힌다. “창고에. 물류창고에 밴을 뒀어. 이리로 부른 건 열쇠를 받아가라고 그런 거요.”


“보통은 회사 차키를 집에 두시는 겁니까?” 도노반이 메모를 작성하며 묻는다.


블랙쇼는 뻐끔거리며 주춤하더니 어깨를 으쓱 해보인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알다시피, 휴가철이잖소.” (휴가철? 휴가철은 3주 전에 끝났다.)


레스트레이드가 말을 이었다. “계속 말씀해 주시죠, 블랙쇼 씨. 히스코트-베인 씨가 밴 키를 받으러 왔고,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죠?”


“내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소. 밖은 추웠으니까.” 블랙쇼의 눈이 바닥의 시신을 향했다가 도로 거두어진다. “그랬더니 갑자기 나한테 달려들었소.”


“달려들기 전에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아들놈을 죽였다며 고소하겠다고 하지 않소!”


옆에서 존이 숨을 들이킨다. (블랙쇼의 말에 넘어갔다.)


“알겠습니다.” 레스트레이드가 고개를 끄덕인다. “공격을 당하기 전까지 그 사람이 칼을 갖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말씀이시죠?”


“그건…그러니까… 이보쇼, 피를 흘려서 머리가 다 어지럽단 말이오.”


“이해합니다.” (최대한 동정어린 목소리로) 레스트레이드는 맞장구를 쳐준다. “그래서, 칼을 가지고 달려든 다음에는 어떻게…?”


“나한테 칼을 휘둘렀소. 몇 번이고. 그래서 피하다가―”


“싸움을 벌이셨고요?” 뒷말을 이은 도노반이 받아적을 준비를 하고서 묻는다.


코웃음을 치지 않기 위해 나는 무척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싸움은 무슨! 여기 증거가 빤히 보이는데!)


“그럼 내가 가만히 누워서 맞고만 있었겠소? 그것도 내 집 안에서! 인터넷에서는 영국인들이 집에 요새를 지어놓고 산다는 둥 말이 많은데 정말 그랬으면 이 지경도 안 났지. 그래서 내 총을 들고 와 쏴버렸소.”


옆에서 존이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감정적으로 이입이 됐다.) (좋은 신호는 아니다.)


“총은 원래 어디에 있었습니까?” 레스트레이드가 묻는다.


“현관에요. 모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이후로…” 양 손에 얼굴을 묻으며 (자신의 비참함을 보여주려고. 진짜가 아니다.) 블랙쇼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곧장 구급대원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맥을 짚는다. “블랙쇼 씨는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가셔야 해요.”


레스트레이드가 이쪽을 향해 묻는다. “가기 전에 묻고 싶은 거라도 있나?”


나는 ‘없다’고 말할 참이었다. (핏자국의 형태가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상처는 블랙쇼 스스로 낸 것이다.) (습격을 당하는데 똑바로 서 있을 사람은 없다.) (그리고 히스코트-베인이 들고 있는 헹켈 나이프같은 제품은 이케아 매장에서 팔 법한 싸구려 주방용품과는 달리 한정수량만 판매하는 70파운드 이상의 고가품이다) 그 때 문득 또 하나의 의문점이 떠올라 입을 연다. “블랙쇼 씨, 소매 안쪽을 걷어올려 보여주시겠습니까?”


블랙쇼의 고개가 번쩍 들린다.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다. (나중에 병원에서 보내줄 증거물을 확인하면 알게 될 일을 구태여 묻다니, 바보같은 짓이었다 ― 멍청하긴!)


괴성과 함께 블랙쇼가 의자에서 벌떡 뛰어오르자 그를 간호하던 구급대원이 뒤로 넘어지고, 블랙쇼는 시신이 된 히스코트-베인의 손에서 칼을 잡아채 노호를 지르며 달려들어 내게 칼을 휘두른다. 칼의 사거리 밖으로 얼른 몸을 빼지만 블랙쇼가 재빨리 뒤좇는다. 다시 피하자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움직였다. 빌어먹을) (블랙쇼는 오른손잡이라고!) 이번엔 칼끝이 내 코트 깃 안으로 번쩍 스치고 지나간다.


옆에서는 레스트레이드와 도노반, 구급대원들이 즉각 전투 태세에 돌입해 블랙쇼를 붙잡으려고 하지만, 블랙쇼는 피가 눌러붙은 칼을 휘두르며 가까이 다가오는 쪽을 향해 서슬퍼렇게 위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존이(용감하고, 바보같은 존이) 내게 달려드는 블랙쇼의 앞으로 뛰어들어 칼을 붙든다. 시간이 멈추는 듯 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며 나의 논리적, 조직적인 관찰력 따위는 잿더미로 변해 날아가 버린다. 눈 앞의 광경을 보고는 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칼날이 번쩍인다. 피가 흩어진다. 다시 한 번 번쩍임과 함께 핏방울이 떨어져 나온다. 존의 비명이 흘러나온다. 두 명의 인영이 뒤얽여 난투를 벌이고, 고함 소리가 섞인 다음에는 세 명으로 늘어 바닥으로 넘어진다.


다음 순간동안 주변은 정적 속에 거친 숨소리와 사지들 붙잡으려 투닥이는 소리 뿐이었다.


아드레날린이 온 몸을 태울 듯 솟구친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댔다. “존! 존!”


존은 우뚝 선 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고만 있다. 피가 흐른다. 양 손에서. 손가락에서도.


“존!” 나는 그에게로 뛰쳐가 내 손 안에 상처입은 그의 두 손을 감싼다. (떨려서 상처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괜찮아?”


한 번 훌쩍이듯 존은 코를 찡그린다. “그런 것 같아.”


(그런 것 같아? 같다는 건 무슨 말이야?)


궁금한 건 나중 일이다. 일단 그를 의자로 끌고 가 앉힌다. 구급대원 중 하나가 급히 옆으로 따라와서, 나는 기꺼이 (아니, ‘기꺼이’라니 무슨 소리. ‘마지못해’가 맞겠지) 그가 임무를 다하도록 비켜난다. 닦고, 소독하고, 꿰매고, 약을 바른 뒤 솜을 덧대서 거즈를 둘러매기까지 한없이 계속되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현실은 바뀐 것 없이 그대로 나를 따라온다.


문득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올린다. 레스트레이드다. “구급차에 타게. 블랙쇼는 우리 차로 데려갈 테니. 죽을 정도로 피를 흘린 것도 아니고…” 그는 사람좋은 미소를 짓는다. “나중에 연락하지.”


존이 얼른 말한다. “병원엔 안 가도 돼요. 괜찮아요. 정말로. 여기 이분들이 응급처치를 잘 해주셔서. 병원에 갈 필요 없어, 셜록.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어쩌지 싶어 내가 구급대원들을 쳐다보자, 붕대를 감았던 사람이 대답한다. “음, 겉에만 살짝 베였어요. 아프긴 하겠지만, 상처가 깊지 않아요. 48시간마다 붕대만 잘 갈아주면 돼요. 그래도 역시―”


“집에 가고 싶어. 부탁이야, 셜록.”


(충분히 납득 가능한 요청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덧나면 어쩌려고?”


“그럴 일 없을 거야. 게다가 집에서 요양하면 환자가 더 잘 회복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거든.” (그래?) “그리고 ― 네가 있으니까,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네가 도와줄 수 있잖아. 그렇지?”


“좋아.” 간곡해 보이는 표정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나기로 한다. “하지만 하루 종일 네 뒤치다꺼리를 하진 않을 거야, 알았어?”


그제야 존이 웃었다. “기대도 안 했네요.”





 

4시에 레스트레이트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야. 앤더슨이 블랙쇼 부인의 차 안에서 니트로글로세린의 흔적과 산탄총 탄약을 발견했어. 블랙쇼의 총에 들어가는 놈이더군. 블랙쇼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는 중이지만 말이야.”


“니트로글로세린은 어떻습니까?”


“도노반이 블랙쇼의 사업장을 조사해봤어. 일부에서 화학 약품 유통 일도 하더군. 아직 확실한 단서라고 할 순 없지만, 부인 살해 미수 건으로 영장이 나오기엔 충분한 것 같아.”


“블랙쇼에게 내연녀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빚이 막대한데, 부인이 보험에 들어 있었거나?”


“둘 다야.” 그렇게 대답하는 그가, 지저분한 살해 동기에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을 모습이 눈에 선연하다.


“히스코트-베인 쪽은 어떻습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레스트레이드가 잇새로 숨을 들이마시며 글쎄, 하고 운을 뗀다. “아직까지는 자기방어였다고 보여. 히스코트-베인이 아들의 사망 원인을 블랙쇼에게 두고 있었으니 동기는 확실히 강하지.”


내 귀를 믿을 수가 없다. “정말 히스코트-베인이 블랙쇼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너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블랙쇼가 어떤 상태에 몰렸는지 봤을 거 아냐.”


“그걸로 전 히스코트-베인이 블랙쇼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게 됐죠.”


잠시 말이 없다가,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 뜸들이지 말고 아는 게 있으면 말해봐. 뭘 찾아낸 거야.”


“오, 그다지 많지는 않아요.” 나는 휴대폰에 얼굴을 댄 채 히죽 웃는다. (이 순간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당연하지만, 거기 있던 의자가 큰 단서였죠.”


“의자?”


“옆으로 넘어가 있던 의자 말입니다. 블랙쇼는 그게 싸움 중에 넘어진 거라고 보여주고 싶었겠죠. 하지만 그 의자 밑에는 핏자국이 있었어요.”


“그랬지, 하지만 그걸론 충분하지 않아. 의자 등받이에도 핏자국이 있었고. 의자가 넘어지기 전에 블랙쇼가 칼에 베인 걸 수도 있지.”


답답하긴. “총은 어쩌고요?”


“총이 어쨌는데?”


“핏자국이 전혀 없었잖아요.”


잠깐의 정적 후 레스트레이드도 이해했다. “즉 블랙쇼가 총을 쏜 건 피를 흘리기도 전이라는 거로군.”


“그렇죠. 그리고 피가 떨어진 자국의 모양을 생각해 봐요. 작은 원형 모양이었죠. 원형이요!”


수화기 너머에서 이제야 알았다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몸싸움을 벌이다 흩날린 피라면 길쭉한 모양으로 떨어졌을 거란 말이지.”


“바로 그겁니다! 블랙쇼의 말로는 방어였다고 했지만, 핏자국을 보면 사실 가만히 서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상처를 직접 낸 겁니다.”


휘유, 하고 레스트레이드는 혀를 내두른다. “사악한 개자식이로군.”


“정말로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했었다면 팔 바깥쪽과 손에 상처가 났겠죠. 아까 존이―” (존.)


“존은 좀 어때?” 그러자 걱정에 찬 목소리로 레스트레이드가 묻는다.


그렇지만 그 대답은 지금 알 수가 없다. 존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지?) (여기 있었는데… 30분 전까지만 해도?) (나갔을 리가 없어.) (나간 건 아니겠지?)


“셜록? …셜록?”


“끊어야겠어요.” 나는 걱정스러움에, 설명도 없이 전화를 끊는다. “존? 존!”


한 번에 두 계단씩 올라 존의 방으로 들어가지만 거기에도 존은 없다. 다시 서둘러 내려온다. 그러다 문득 존이 (특유의 직선적인 표현대로) ‘물 빼러 간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낸다. (하지만 그건 집에 도착한 직후였잖아.) (거의 한 시간도 전에.) 서둘러 욕실로 향한다.


문은 닫힌 채였지만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문을 채 밀기도 전에 도로 쾅 닫힌다. 다시 문고리를 돌리며 열어봐도 꿈쩍도 않는다. (무언가 문을 무겁게 가로막고 있다.) (존.)


“존? 너 괜찮아?”


“어…음. 응.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 질문은 한 적 없다.) (알아서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로군.) “문 열어봐.”


“뭐?! 아냐! 됐다니까.”


“존. 문 열어. 당장.”


협박조의 목소리에 안에서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한 걸음씩 망설이며 발을 떼어 문에서 비켜난다. 나는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선다.


나는 이 안에서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예상했다. (피범벅.) (존이 욕실 바닥에 기절했다거나.) (아니면 옛날의 트라우마 때문에 욕실 구석에서 떨고 있다거나 하는.) 하지만 안에서 발견한 광경은 오히려 반대였고, 우습기까지 했다. 존은 왼손에 감긴 거즈 붕대를 반쯤 풀어내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는 왼손잡이니까.) (거기까지는 납득이 간다.) 손목에 걸린 하얀 붕대가 여자 체조선수들이 쓰는 리본처럼 길게 매달려서 출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존의 얼굴에 떠오른 우스운 부분은 한층 더해지기만 한다 ― 저 짜증나고 당혹스러운 표정이라니. (존은 자동계산기와 씨름할 때도 저런 표정을 짓는다.)


“48시간 동안은 붕대를 풀면 안 되지, 의사 양반.


“알아! 그런데…이것 때문에…” 얼굴을 찌푸린 존이 눈짓으로 앞섶을 가리킨다. (아.) (아니지, 무슨 생각이야!) 그러면서 그는 웅얼웅얼 뒷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해서… 그냥 잠깐 붕대를 풀려고 했던 것 뿐이야― 괜찮아, 봉합도 받았고… 잠시만 붕대 풀어놓고, 일을, 일을 좀…”


“붕대가 오염될 수도 있어.”


“안다니까! 잠깐 그냥―” 내 지적에 존은 다시 울컥하더니 잇새로 붕대를 물어 당기기 시작한다. “볼 일만 보고―”


“그만 해. 자. 내가 풀어줄게.” 나는 그의 팔을 붙들고 입에서 손을 떼어낸다. 단추를 풀어 작은 후크를 잡아 지퍼를 내리고,


여기까지 하자 문득 깨달았다. 존은 붕대를 풀지 못하니 속옷 안에서 스스로 꺼낼 도리가 없을 테고, 그렇다면…


존이 어색하게 움찔거린다. “셜록. 정말 이러지 않아도―”


“시끄러워!” (가타부타 얘기해 봤자 상황만 더 심각해질 뿐이겠지.) “이러지 않으면 네가 혼자 어쩌겠다는 거야.” 해야 한다면 사무적으로 간단히 처리하자. 나는 존의 어깨를 붙들어 변기를 향하도록 몸을 돌린다. 그리고 그의 얼굴(혹은 사타구니)로 향하는 시선을 단호히 잡아둔 채, 부드러운 면 속옷 안으로 손을 가져가 성기를 꺼낸다.


순간의 접촉. 잠깐이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고, 존 역시 앞으로 미적이며 도망가 발끝에 힘을 주고 몸을 기울여 변기를 향해 조준한다. 지금껏 나는 내 것이 아닌 남의 성기를 만져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감정을 처참히 무시하고 내 뇌는 순간의 감각을 닥치는 대로 분석하려 든다. 온기, 무게감, 보드라운 촉감, 미세하게 전해지는 심장의 박동… 그리고 나는 스스로를 말릴 새도 없이 내 것을 존이 만지는 느낌까지 상상하게 된다. (내가 직접 만지는 것과 비교해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더 좋을까?) (나쁠까?) (그 행위에 쾌감이 존재해 있었던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사그라든 후 존이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저기, 음, 셜록. 이거 좀…”


(똑같이 반복하기만 하면 돼.) (순서만 바뀌었을 뿐.) (다시 팬티 안에 집어넣고 지퍼를 채워주면 그만이야.) (겁먹을 것 없어.)


나는 가까이 그의 뒤로 다가선다. (결심했다.) (단호하게.) (공교롭게도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 동시에 존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고(수고를 덜려고?), 그 바람에 내게 왼발이 밟힌 그가 움찔 놀라며 낮은 신음을 내뱉는다. 나는 사과를 할 참이었지만 오히려 존이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발을 피하느라 바쁘다. 서로 피하다 이번엔 어깨를 부딪힌다.


똑바로 서.” 나는 그의 허리를 붙잡고 명령했다. “나까지 넘어지겠어.”


존이 바짝 굳는다. 호흡도 멈춘 채, 기다린다.


다시, 아까의 반복이다. 이번에는 손이 닿자 존의 눈이 감기며 몸에 언뜻 전율이 흐른다. 손에 들어온 그의 페니스는 한 번 심장이 뛸 때마다, 옅은 숨을 쉴 때마다 더욱 흥분이 짙어지고, 나는 이렇게 되니 어떻게 실수 없이 이걸 도로 바지 속으로 돌려놓을지 막막해진다.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의 속삭임에 나는 그대로 멈춰선다.


그는 비참해 보인다. (흥분했지만, 동시에 비참하다.) 스스로가 비참할 테다. (양 손에 붕대를 감고 혼자서 일도 못 보다니.) (그건 존이 영웅 행세를 했기 때문이다.) 번쩍이던 블랙쇼의 칼날을 떠올리자, 존이 다쳤다는 것을 안 순간 몸을 훑고 지나가던 공포가 되살아난다. 다쳤다. 나를 보호하다가. (바보.) (죽을 수도 있었어.)


(정말 그랬다면?) 가슴 속 깊은 곳 어딘가가 뒤꼬인다. 존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다시 또 심하게 아려온다.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춘다. (하지만 존은 그 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저 키스하는 것 이상으로.) “만약 내가 그랬다면?” 나는 입술을 맞댄 채 속삭인다. “그것도 일부러?”


움찔 떠는 존의 몸. (그의 대답.)


입을 맞추며 그를 뒤로 밀어 세면대에 기대게 한 후, 아랫도리의 단추를 풀어낸다. 존은 내 손을 밀어내려 부질없는 시도를 하지만 페니스를 잡히자 낮게 신음을 흘린다. 나는 좀 더 손에 힘을 주고 위아래로 자극을 가하기 시작한다. 조그맣게 욕을 내뱉으면서도 존은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느긋하게) 리듬을 타기로 했다. (2초 올리고, 2초 내리고.) (효율 면에서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존은 즐기고 싶을 테니까, 아마.) 존이 점점 가빠지는 숨을 허덕이며 조르듯 허리를 움직이는데도 자비심 없이 무시한 채 느긋함을 고수한다. 흥분으로 피부가 따끔하니 욱신거리고, 배가 아릿하게 당겨온다. 그런데도 내 스스로가 놀라울 만큼 차분하다. 간단하다. 본능적이다. (아니, 차분한 것 이상이다. 강력하다. 그에게 통제력을 행사하는 기쁨.) 이렇게 자제심이 허물어진 존을 보고 있으면 그가 군인이나 전쟁 베테랑으로, 영웅으로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너무도 쉽게 통제력을 넘겨준다. (지금 당장, 저항 없이, 내가 하는 무엇이든 허락해줄 수도 있을까?) 그 생각에 더욱 흥분이 차올라 존에게 거칠게 키스하며 손을 더 빠르게 놀린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존이 세면대로 상체를 떼어낸다. “잠깐!”


멈춘다. “왜?”


“나만 받을 순 없어.” 존은 헉헉거리며, 손바닥의 고통으로 살짝 신음하면서도 한 손을 앞으로 집어넣더니 내 (무척이나 단단하게 발기한) 앞섶에 가져다댄다. 육욕이 온 몸을 잠식하자 충격적일 정도로 강렬한 감각에 나는 전율한다.


“하지 마.”


“공평하지 않잖아.” 끈질기게도 존은 불편함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기어이 손을 (위아래로) 움직인다.


또 한 번 (더 지독한) 자극에 숨이 콱 막히는 것 같다. 폐가 아프다. 세포가 비명을 지른다. “하지 말라고.”


“하지만 셜록.”


존은 웃으며 나를 구슬리지만, 안 될 말이다. 거칠게 그를 뒤로 떠밀어 세면대로 몰아붙이고, 아예 세면대 위에 올라앉은 모양새가 된 존은 힘없이 내게 매달린다. 나는 존이 덜덜 떨면서 밭은 숨을 뱉으며 신음을 흘릴 때까지 사정없이 자극을 가한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존은 자신만 받을 수 없다는 데에 집착하는지, 내 허벅지에 다리를 감고 몸을 지탱해서 나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다친 손으로 바지 위를 문지르려고 한다.


(이건 무리다.) 나는 그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고, “가만히 있어.” 낮게 으름장을 놓으며 손을 더욱 빠르게 놀린다. “안 그러면 이 붕대 뜯어서 개수대에 묶어놓을 거야.


흩어질 만큼 흐트러져 있던 존의 자제심에 내 위협은 마지막 한 가닥의 이성까지 끊어버렸다. 크게 헉 숨을 들이키며 존은 사정한다. 허리가 한껏 뒤로 휘어지면서 머리가 부딪히고, 거울에 붙은 칫솔 홀더가 떨어져 욕조로 들어간다.


내 품 안에서 존의 얼굴에서 고통 섞인 쾌감이 서서히 가시고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오르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떻게 존은 끈적하게 젖어서, 산산조각이 난 채로 이렇게 힘을 뺄 수 있는 걸까. 도망가서 숨고 싶은 충동이 들지 않는 걸까?)


(끈적하게 젖어서…라…) 나는 배려고 뭐고 없이 세면대에서 존을 끌어내고 물을 틀어서 양 손을 비누와 물로 (손바닥, 손등, 손가락 사이사이) 씻어 흘려낸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말린 뒤 나가려고 생각하는 순간, 존이 혼자 바지를 잠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존에게는 도망가 숨을 필요가 없다 해도, 이쪽이 필요하다. 조용한 곳에 있고 싶다. (고립된 곳으로.) (해방되고 싶다.) 결국 내 배려는 아주 잠깐일 뿐이다. 그 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존은 몸을 대충 닦아낸 다음 급히 매무새를 정리한다. (단추나 지퍼가 없는 것으로) (붕대를 벗을 때까지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차림으로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얼른 방에 숨어 이 지독하게 흥분한 상태를 해소해야 했다.


하지만 존이 앞을 가로막는다. 흐물흐물하게 녹은 그는 나사가 빠진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정말―” 그렇게 입을 열더니, 그는 곧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키득인다. “―대단해. 최고였어.”


도망가고 싶다.


“내 손은 다쳐서 별 쓸모가 없지만 말야, 네가 원한다면―” 그는 내게 키스하고, 말을 마치는 대신 입술을 핥는다.


(손을 못 쓰는데, 뭐? 아. 아. 아! 으로 해주겠다는 말이다.) 방이 핑 도는 느낌이다.


“아니! 아냐. 그러지 않아도 돼. 내―내가…” (내가 뭘? 어떻게 대답하겠다는 거야.) (그 짓을.)


“알았어.” 존은 아쉬운 얼굴로 대답한다. (정말로 중요한 거래를 거부당한 사람처럼.)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건, 미친 거다.) “다음을 기약해야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다음’엔 ‘허락’이 있을 거라고 존은 착각하고 있다.) 마침내 이번에는 존이 잡지 않고 나를 방으로 보내줬기에 나는 한없이 안도한다. 돌아서기 전, 존의 마지막 얼굴이 우울한 웃음이었더라도. “내 생각 해.”


(네 생각?)


이 몇 주간 내가 그것 외에 할 수 있었던 건 별로 없었다. (머잖아 끝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다음 몇 분간 역시, 당연하게도 멈출 수 없었고.)






...계속




보셔도 좋고 아니 보셔도 좋은 역자의 덧붙임

히스코트-베인의 성?

하사와 준위?





  1. 존이 일터에서 잘렸다는 소식을 바란다는 이야기. 이거시 셜록홈즈식 무한 이기주의-_-;; [본문으로]
  2. 시즌1에서 존이 입었던 검은 재킷. 보통 Shooting Jacket이라고 어깨와 팔꿈치 부분을 다른 재질로 덧붙인 디자인이 있는데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입는 방수 작업복 Donkey Jacket과 혼동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런던 중심부, 서남쪽에 위치한 지역. [본문으로]
  4. 아…셜록… [본문으로]
  5. 그냥 네가 적게 먹는 거라구. 저 정도로 과식이라니…(퍼먹던 아이스크림 통을 숨기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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