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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JW] 해답을 찾아서 │ Working It Out - 2 본문

Sherlock_장편/해답을 찾아서

[SH/JW] 해답을 찾아서 │ Working It Out - 2

topsecretum 기밀선녀 2014.01.18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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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1 : 깨달음


줄거리 : 한 정치인의 남동생이 실종된 사건을 수사하는 중, 셜록은 자신의 새로운 면을 깨닫게 된다 ― 자신의 새로운 심문 능력 역시.




2 : 발견 │ Discovery





1월 7일


아침이다. (확실히 아침이 되었다. 자정 후의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새벽이 아니다.) 그 증거처럼 커튼 밑자락에서 쏟아져 들어온 빛이 침실 벽으로 칼날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커튼이 창문에 맞지 않는다.) (허드슨 부인에게 말씀드려야겠다.) 거리의 가로등 불빛으로 부드럽게 빛나던 주홍색 풍경이 점점 밝은 여명으로 변하고, 베이커 가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와 행인의 목소리가 떠듬떠듬 늘어나기 시작한다.


눈을 비빈다. 뻑뻑하다. (존 생각을 하느라 밤새 잠을 못 잤다. 존에게 키스받던 느낌을 처리하거나 ― 잊어버릴 수가 없다.) 입술을 만져본다. 아직도 따끔하고 욱신거린다. 이게 좋은 느낌인지 아닌건지 모르겠다. 마무리 짓지 않은 무언가를 남긴 듯이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이 따뜻하기도 하다 ― 이상한 만족감이다. (존은 떠나지 않을 거다.) (존은 여기 있고 싶은 거다.)


(존.)


(아직 자는 건가?) (푹 잘 자는 걸까. 아님 아무렇지 않은 척 쉴 수가 없어 밤새 뜬 눈으로 지샜을 지도 모른다.) 이불을 확 걷었다가, 훌쩍 다가온 냉기에 순간 부르르 떨며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 가운을 집어 입고 단호하게 허리끈을 맨다. (너무 꽉 죄었다.) (온기가 없다.) (은폐할 수도 없다.) (지긋지긋한 생리 현상. 도대체가 말이지, 아침마다 서는 것의 목적은 뭐란 말인가?) 급히 욕실로 들어가 내가 아는 한 가장 빠르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좀 다르다. 꼭 쥐고 위아래로 손을 움직이는 동안 머릿속에서 존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아무래도 이 짓에 금방 중독될 것 같다. 갑자기 자위가 육체적 문제의 처리 방편이었던 처지에서 벗어나 심장을 꽉 죄어온다. 턱턱 막히는 목으로 흐느낌이 터져나오는데,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이미 멈출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속도를 좀 늦추고 존이 이렇게 해준다고, 이렇게 느끼도록 해준다고 상상해본다. (환상적이다. 무시무시한데, 그러면서 완벽하고… 맙소사.) 부르르 떨며 신음과 함께, 어이없으리만치 금세 사정한다. 크게 헐떡이며 힘없이 벽에 기댄다. 존이 짓는 자랑스런 미소가 눈꺼풀 뒤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맴돌았다.[각주:1]


(웃기다. 수치스럽다.) (그만해. 당장 그만 둬. 씻고 옷 입어.) 힘없이 샤워 꼭지를 틀었다.


221B의 배관은 오래 되서 금방 돌지 않는다. 졸리고 헐벗은 몸으로 샤워를 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한 물이 나오려면 5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성행위 후의 ― 실리적으로 혼자 처리한 거라 해도 ― 지저분한 상태를 지워버려야 했다. 플랫메이트가 손으로 해주는 상상은 상세해도 너무 상세했고, 그걸 씻어내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더욱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 가운과 잠옷을 벗고 얼음장같이 쏟아지는 물 아래 선다. (그래, 차가움이야말로 멍한 머리를 깨우는 데 적격이다). 욕조에서 나올 즈음엔 이가 덜덜 부딪히며 온 몸이 떨렸다.


설탕을 넣지 않은 블랙커피로 목을 축여야겠다. 욕구 불만으로 가득 찬 몸이 그걸 바라고 있다 ― 육신이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리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컵에 한 잔을 따라내고 있을 때 존이 주방으로 들어온다. 눈이 마주친다. 숨이 턱 멎는다. (이번엔 뭐지? 존이 뭘 하려는 거지?) 존은 뭔가 하기에는 너무 졸린 상태다. 다행이다, 그러면서도 저 잠에 잔뜩 취한 얼굴과 제멋대로 뻗친 머리칼을 보고 있자니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진다. 무언가 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뻗은 머리를 가라앉게.) (빗겨주고 싶어.) (만지고 싶어.)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해야 적절할지 알 수 없는 게 문제라, 바보같이 그냥 서있기만 한다 ― 주방에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이 상황에서라면 머리칼을 만지는 것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 보통의 관계에서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우린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다.) (절대 그렇게 될 일도 없을 테고.) 나는 긴장으로 속이 이상하게 뒤틀리기 시작하고,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듯 심장이 뛰어댄다. (이런 초조함은 곤혹스럽다. 날 약하게 만든다.)


“좋은 아침.” 저렇게 존은 생글거리는 무른 미소를 지으며 커피포트로 눈을 돌린다. “내 것까지 만들어 놓은 거야?”


“응. 아니, 너 주려고 만든 건 아니고―” (지금 재판하는 게 아니잖아! 존은 진실을 요구하지 않았어. 고지식하게 말 그대로 굴지 마.) (하지만 처음부터 그냥 솔직하게 행동하는 게 그나마 낫겠지? 내게서 커피나 차를 받을 거라 예상한 적 없을 테니까.) “그래도” 커피머신을 들어 꽉 찬 속을 흔들어 보인다. “많이 마실 만큼은 있어.”


“좋아.” 그렇게 대답하며 존이 나의 손을 잡는다. 손끝이 마주 닿고, 전기가 찌릿 타고 올라온다. (우스운 일이다. 손가락은 성감대가 아니다.) (…성감대인가?) (그런 것 같다.) 손을 홱 빼내지만, 존이 다시 잡아다가 손목을 살짝 쥐고 엄지로 가만히 쓰다듬는다. “괜찮아, 셜록. 정말로. 너 안 덮칠거야.”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끄덕인다. “응.”


존의 눈빛이 짓궂게 변한다. “네가 그걸 원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


속이 갑자기 널을 뛰어서, (그런가? 그러길 원하나?) (모르겠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 뒤로 물러서며 대꾸한다.


존의 눈에서 번쩍이던 기색이 누그러들었으나 (실망했다.)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웃는 상이다. (실망했지만, 당황하진 않는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그는 조그맣게 꼬르륵 소리를 내뱉는 배를 문지른다. “나 허기져서 숨질 지경이야. 이런 상태론 덮치지도 못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꽤나 확신한다. (존은 친절해. 사려깊고.) “고마워.” (다시) 말한다.


“뭘 이런 걸로.” 존이 가까이 다가와 입맞춘다. 부드럽다 ― 하지만 키스일 뿐이고, 내가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계속 키스를 많이 하게 되는 걸까?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키스 다음에 또 뭔가 오는 건가?) 심장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한다. 존을 향해 입이 슬며시 벌려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존은 정말 따뜻하고, 정말 듬직하고, 그리고 자신이 뭘 하는지 뭘 느끼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다.)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확신을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키스가 좋은 건지 나로서도 알 수 없다. 육신의 근접은 나의 경계에 도전장을 내밀고, 정체성의 테두리를 흐트려놓는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어디서 끝내고 어디서 존이 시작할 건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더 원한다. (이걸?) (그래 ― 하지만 또다른 감각 역시 ‘더’ 원한다) 존의 존재에 파고들었을 때 편안함 이상의 것을 느끼고 싶다. 존이 나를 향해 품고 있는 감정 역시 알고 싶다. (어떤 감정? 존경? 애정? 욕망? 아니면 모두 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혼란이 겹겹이 쌓여간다.


결국, 나는 불안하게 얼굴을 뗀다. “나, 어…”


미소지으며, 존이 나의 뺨을 쓰다듬는다. “괜찮아. 알아.”


“알아?” (안다고?) (어떻게? 그는 섹스를 숨 쉬는 것처럼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관계를 갖는다는 걸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전에 애인이 몇백은 있었다.) (아마도.) (잠깐, 잠깐! 애인들? 우리 이제 애인 사이인 건가?)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이리저리 휘저으며, 무언가 붙잡고 이 혼란에서 빠져나올만한 ― 사실, 데이터를 찾아 움직인다. 증거 없이는, 기댈 곳 없는 무한의 바다에 휩쓸려 버린다.


“오늘은 콩을 먹어야겠군.” 존은 쾌활하게 두 손을 비비고 (기대) 찬장을 열어 통조림을 하나 내리면서 입맛을 다신다(허기).


웃음이 나온다. 존은 정말이지 감탄스러우리만큼 몸짓이 풍부하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존이 캔 따개를 찾아 서랍을 뒤지며 어깨 너머로 바라본다.


갑자기 밀려오는 행복감에 그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너.” 아니, 아니. 하나 더 붙여야지. “하고 나. 우리.”


“이상한 커플이지.” 존은 큭큭 웃으며, 아침마다 늘 그래왔듯 콩을 데워 내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같은 아침이었다.






1월 13일


마이크로프트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은 화이트홀[각주:2] 중에서도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곳으로, 바깥에서 보면 팔라디오 풍의 저택 사이에 끼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 안에 들어섰을 때서야 비로소 권력자가 이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꿀빛 대리석으로 뒤덮인 바닥과 고급스러운 몰딩이 둘린 천장, 샹들리에까지 그 곳의 모든 것이 강한 인상을 풍겼다.


평소같았으면 마이크로프트로부터의 소환 요청 문자에 이다지도 선뜻 반응하지 않았겠지만(아니면 아예 반응하지 않든가), 오늘은 221B번지에서 잠시 떠나 있을 핑계가 필요했다. 그다지 먼 여정도 아니라 걷기로 했다. 시린 겨울 공기가 머리를 맑게 해준다. 존이 처음으로 키스해준 그날로부터 한 주가 지났다. 벌써 7일이다. 그런데도 아직 익숙하지가 않다. 여전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도 키스받을 때마다 놀란다. 그리고 하루에 적어도 두 번은 ― 혹은 더 많이 ― 그런 일이 일어난다. 키스를 할 때마다 점차로 존은 점점 더 허기지고 더 인내심이 없어졌다. 거칠게 입술을 집어삼키고 몸 위로 부벼지는 부분이 굳어져만 간다. 코트로 감싸인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너무 불편해서 다 벗어던지고 싶다. 코트고, 재킷이고, 셔츠고, 살갗까지 ― 모두 다. 소매가 물을 먹은 듯 팔을 잡아누르고 독방에 갇힌 마냥 코트가 갑갑하게 느껴진다. 두껍고 무거운 문에 미친 듯이 손톱자국을 내는 내 모습이 잠깐 상상된다. 하지만 이내 떨쳐버리고, 세 발자국을 올라가 마뜩찮은 마음으로 윌리엄 피트 하우스의 입구에 들어선다.


인터콤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제복 차림의 경비원이 입구 쪽 복도에서 문을 열어주고(방탄유리, 디지털 잠금), 구두굽을 울리며 정렬해 예의바르게 목례를 건넨다. 예상했던 방문이라는 거로군. 신경이 곤두서지만(마이크로프트의 예상 범위는 소름끼칠 정도다) 어쨌든 여기 일단 왔으니까. (다시 뒤돌아 가버리는 건 유치한 거다.) (그리고 마이크로프트에게 선수를 내줄 수는 없다.)


잘 꾸며진 복도를 겹겹이 지나 우아하고 조용한 승강기를 타면 마이크로프트의 사무실에 도착한다. 당연하게, 그곳은 최상층이고(마이크로프트가 신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길 즐긴다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너무 뻔한 결과다), 그다지 큰 방은 아니다(거짓 겸손). 노크 없이 안으로 들어선다. (마이크로프트는 이미 모든 패를 쥐고 있다. 나머지 수까지 통째로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아, 사랑하는 우리 동생 왔구나.” 마이크로프트가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 너머로 고개를 든다. 그가 앉아 있는 책상은 새로 들여온 커다란 놈이다(대비 효과로 더 날씬해 보이길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지) ― 카펫 위에 고동색의 짐승같은 몸을 웅크린 형상으로, 주인을 위해 당장이라도 적에게 뛰어들 것처럼 험악하게 생겼다. “잘 지냈니?”


“어.” (마이크로프트는 언제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애매하게 말한다.) (누구에게나.)


애정이 담긴 (믿음이 안 가는)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마이크로프트의 시선이 날카롭다. “그래 보인다. 꽤나 좋아 뵈는구나.”


(아는 거다. 빌어먹을, 저 자식, 알고 있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맺힌다. (부정하려 해봤자 이제 소용없다.) (숨 쉬어, 진정하자고. 열내봤자 득될 거 하나 없잖아.) “그래?”


“그래, 정말로.” 의자 가죽이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마이크로프트는 비밀스런 미소를 지으며 일어난다. “네 생일날 일이 된 모양이지?”


“오페라 보러 안 갔어.” 몇(십)년동안 그에게는 비밀을 얘기하기 거부했기에, 이런 애매한 대화 역시 쉬워진다. 만족스러울 정도다.


“그러냐? 그럼 그 날 무슨 일을 하며 놀았을까?” 마이크로프트는 분이 날 만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아주 득의양양해 있군.) (주먹을 부르는 얼굴이다.) “형이, 상관, 할 바, 아냐.”


마이크로프트는 책상 뒤편에서 걸어나와, 내 주위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혼자서 흠, 하는 추임새를 넣는다. 나는 미동도 없이 꼿꼿이 섰다.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약점을 내보이는 꼴이 된다.) 한참 후 마이크로프트는 만족한 듯, 상냥하게 내 어깨로 손을 올린다. “잘 됐구나. 시간문제일 뿐이었지. 시간문제일 뿐이었어.”


나는 숨기지 않고 의기양양한 비웃음을 내보인다. (어쨌든 마이크로프트의 생각은 자신이 아는 내용 안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의자로 돌아가며 마이크로프트가 나긋하니 말을 잇는다. “키스는 키스일 뿐 아니겠니. 아직 갈 길이 멀단다.” (마이크로프트의 선제공격.)


“왜 불렀어?” 조언을 듣기 전에 먼저 화제를 바꿔야 한다.


“아, 그렇지.” 이제야 기억했다는 듯 마이크로프트가 끄덕인다. “네가 봐줬으면 하는 일이 좀 있다. 사실 조금 급해. 발품을 꽤나 팔아야 하는 일이거든, 앉아만 있어서는 해결이 안 되는 거라 ― 그렇잖아도, 너와 왓슨 박사는 함께 뛰어다니는 걸 아주 좋아하지 않냐, 응?”


“그 일이란 게 뭐지?” 말을 자른다. (요점에만 집중해. 다른 건 무시하고.)


“조금 미묘한 이해관계가 있는 문제야.” 마이크로프트는 넥타이를 반듯하게 여미며 의자로 깊숙이 몸을 묻는다. “개인적으로 경찰이 개입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 네 재량에 의지를 해보고자 한다. 정부 사람의 남동생인데, 그 실없는 젊은이가 문제에 처한 모양이야. 네가 그의 행방을 알아내면 된다.”


“젊은이?”


“표현상 그렇다는 게 아니겠니, 셜록. 표현상. 미란다 바틀릿은 내무성의 작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유망하다고 지목되는 인물이야. 데이비드 바틀릿은 서른여섯이고 저명한 누이 미란다보다 네 살 아래지. 지난 일요일 오후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아 바틀릿 씨가 동생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어. 나 역시 그렇고. 중요한 지위까지 올라갈 사람이니까.”


(뭔가 더 있다. 마이크로프트는 남을 염려하지 않는다. 그런 대상은 지금껏 오직 자신 하나밖에 없었다.) (당연히 뭔가 더 있지. 마이크로프트인데.) “그 여자의 경력을 걱정하는 건가?”


“저런, 설마!” 마이크로프트는 짐짓 깜짝 놀란 눈치다. “나와는 전연 관련 없는 얘기지. 중요한 건 따로 있어 ― 그 사람이 심란함 때문에, 발현된 법안의 흐름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일에 지장이 올 거야. 몇 가지 중요한 영향력을 제때 발휘하는 데 일시적으로나마 문제가 될 테지.”


(자기 책략의 연장선이라는 거군.) (따분하다.)


그는 엿듣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양 옆을 확인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자, 동생 바틀릿에게는 문제점이 있어. 그걸 극복하게 하려고 누이가 노력하는 중이지. 그게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누이 바틀릿이 알게 될 까봐 걱정이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난 거다.” 그렇게 말을 맺으며 마이크로프트는 지친 미소를 짓는다. 동정과 협조를 끌어내기 위한 수작이다.


분명하게도, 데이비드 바틀릿의 상황이기도, 나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양쪽 모두 사절이다. 난 말려들지 않는다. 그렇게 두지도 않는다. (자기가 무슨 세상만사 해결하는 박애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나는 (말없이) 지루하다는 몸짓을 보이고, 대꾸한다. “그 자는 서른여섯이야. 내키는 대로 돌아다닐 자격이 있다고. 고압적인 연장자에게 신물이 나서 새 삶을 찾아 떠난 걸지도 모르지. 고맙긴 하지만, 마이크로프트, 난 관심 없어.”


마이크로프트의 미소에는 미동도 없다. 그대로 굳은 채 눈만 날카롭게 변한다. (마이크로프트의 가장 위험한 표정이다.) “넌 여러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다, 셜록.” 그는 차분한 목소리다. “동시에 여러 가지, 수많은 결함도 갖고 있단다. ―왓슨 선생이 당분간은 못 본 척 넘어가기로 한 바로 그런 결함 말이야. 하지만 왓슨 선생은 ―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 그래, ‘행동하는 남자’기 때문에, 육체적 활동에 대한 요구가 그의 방식대로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 채워져야 하지 않겠니. 네가 하는 거라곤 종일 누워서 벽에다 총알구멍을 내는 게 다인데, 그 사람이 언제까지 네 곁에 머물러 있을 것 같으냐?” (마이크로프트의 득점.)


“존은 위험한 활동을 좋아해.” 말을 정정한다. (듀스.) “총 쏘는 건 위험한 일이지.” (그리고 다시 마이크로프트 득점 ― 이건 혀 내밀고 우스운 표정을 짓는 거와 다름없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눈을 휙 굴린다. “표적이 그냥 벽돌일 뿐일 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지. 그래도, 네 무기를 존에게 향하도록 길들인다면, 존이 조금이나마 만족을 얻을 수 있을 테지.” 표정은 없다. 윙크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질 유머임을 알고 나는 내심 놀라 얼어붙는다. 내가 피하고 있는 어떤 노골적인 주제를 (고의적으로?) 노린 거였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마이크로프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찔러보고, 들춰보고, 비웃을 거다.) (심지어 존에게 얘기할 지도.) (안돼!) (그런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이 다툼에는 져주고 물러나서 더 큰 그림을 봐야 할지도.)


“뭘 원하는지 말해.”


“우선 이걸 먼저 보는 게 좋겠다.” 마이크로프트가 안주머니로 손을 뻗어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너머로 건네준다. 공책선이 인쇄되어 있고 (싸구려) 한쪽 가장자리가 우둘투둘 찢겨 있다. (링 제본된 공책에서 뜯었다.)


종이를 펴니 뻑뻑한 푸른 잉크로 쓴 (저가형 볼펜) 글자가 나온다. 곳곳에 볼펜이 눌린 자국과 함께 틀린 글자 위로 줄이 쳐져 있다. (왼손잡이가 쓴 글씨.) 내용은 이러했다.


네 동생을 살리고 싶다면(이 부분을 휘갈겼다. 급하게), 1월 13일 저녁 9시 이전에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수하물 보관소에, 유통되는 지폐로 5만 파운드를 가져다 놔라. 무지 봉투에 담아, 음료수 자판기 뒤에 숨길 것.


“바틀릿 씨에게 네가 오늘 오후 연락할 거라고 전해 뒀다.” (통보가 아닌 부탁이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맙다, 셜록. 우리는 언제나 같은 편에 서 있다는 걸 명심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있어.”


“말해봐.”


“내 일에서 신경 꺼.”


마이크로프트의 얼굴로 음산한 기운이 스쳐가지만, 순간이었고 다시 알랑거리는 미소로 돌아간다. “물론이지, 셜록. 언제나 네가 원하는 대로 아니겠니.”






실물로 본 미란다 바틀릿은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을 위로 말아올려 깔끔하게 외모를 관리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바틀릿에게서는 오렌지 블라섬, 백단유, 머스크의 잔향이 나면서도 그 위로 진한 월하향이 풍겼다. 디올의 포이즌 향수. (보통 내근직을 하는 사람이 쓰기에는 너무 자극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바틀릿은 자신의 여성성을 누르지 않고 보여주고 싶어하는 성격이라는 거겠다.)


존은 이 여자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 차에 이어서 커피며 비스킷을 권한 뒤 ― 바틀릿이 셋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자 ― 이번엔 포도주를 대접하려 한다. (실험용 시신 옆에 보관되어 있다.) 바틀릿은 멍청한 얼굴로 마주 웃어준다. 존의 추파에 용기를 실어준다.


이를 악문다. 바틀릿은 나를 필요로 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바틀릿, 혹은 존이 이쪽에게로 보여야 할 관심이 모두 사라지고 마치 나란 존재가 여기 없는 것 같다. (존이 의뢰인에게 미혹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다지도 속이 쓰리고 무력해진다는 게 우스울 따름이다.) “고맙지만 됐어, 존.” 차갑게 가로막는다. “바틀릿 씨는 바쁜 사람이야. 이만 요점을 얘기하고 싶으시겠지.”


미란다 바틀릿을 자리로 안내하는 도중에, 존이 입을 합 닫는다. 몇 걸음 바틀릿에게서 떨어져 나오며 중얼거린다. “그렇지, 미안. 미안합니다.”


만족스럽다. 존이 조수의 자리로 돌아오는 광경, 그를 통제한다는 감각. 몇 주 동안 이 느낌을 누릴 기회가 없었다. 존이 크리스마스에 이어 신년까지 해리와 보내기로 한 이후부터 그랬다. 집에 혼자 내팽개쳐진 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존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사라에게 존을 뺏겨버린다는 공포도 느꼈다. 그 다음엔 키스를 했고. (맙소사. 키스라니.) (어떻게 사람들은 자제력을 잃지 않고  아니, 조금은 잃을지 몰라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만 지금은, 일이 있다. 사건이다. 나는 나대로 일이 있고, 존의 역할도 따로 있다.


바틀릿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한다. 존이 반대편 자리에 앉아 대화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최상의 상황이다. 상대방이 나를 주목한 채 조용하게 기다리는 것.) 주머니에서 예의 그 쪽지를 꺼내 바틀릿의 코앞에 들이민다. “이 쪽지를 어떤 경로로 받았습니까?”


존이 작게 움칠한다. (왜?) (이 여자에게 질문해 마땅한 내용이다. 당연히 그런 물음을 예상하고 왔다.) (오늘로 30시간이 지났다. 존이 이 여자를 ― 존이라면 어떻게 표현하려나? ― ‘꼬드기느라’ 허튼 짓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멍청한 단어다.) (실제로 존이 그러는 걸 보는 것만큼이나.)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 매트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봉투는 없고?”


“버렸어요.” (멍청한 여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서요.” 한심하다는 눈길을 던지자 서둘러 설명한다. “그게 중요한 것일지는 몰랐어요.”


“진심입니까? 내무성에서 일하는데 증거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요?” (사실을 향한 완벽한 무시. 마이크로프트가 국회에 보내길 강렬히 열망해 마지않는 ‘특별 교육’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시민 ― 및 개인의 ― 자유를 무시하는 행위는 마이크로프트가 남들과 죽이 맞는 유일한 사항이다.)


존에게서 헛기침이 들린다. “으흠. 셜록.” 그의 목소리에서 경고를 들을 수 있다. ‘좋지 않음’ 신호를 강하게 보내고 있다. 상관없다. 여기서 존이 언성을 높이려 할수록, 나는 바틀릿의 존재에 더욱 짜증이 높아질 뿐이다.


창 밖에서 구급차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극적인 움직임으로 창가에 다가가, 나를 따라오는 두 눈길을 즐긴다. (특히 존의 시선을.) (미란다 바틀릿이 221B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존의 시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정확히 돌아왔다.) 커튼을 걷은 후 길가를 내다본다. 바틀릿과는 굳이 얼굴을 마주칠 필요도 없다. “바틀릿 씨, 본인이 풍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베이커 가의 모습은 바쁘게 돌아간다. (쇼핑하는 사람. 여행객. 택배 차량. 바람피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주변을 과하게 의식하는 남녀. 전부 잘못됐어. 서로 닿아있지 않지만 충분히 가까이 다가서 있다. 방어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고개는 바닥을 향했다. 수치스러운 듯이.)


잠시간 바틀릿을 마주하고 있지 않자 천천히 대답이 돌아온다. (말에 무게가 담겨 있다. 질문 뒤에 숨겨진 뜻을 간파하려 한다.) 목소리가 경직됐다(수사할 수 있는 한계선을 명확히 하길 원한다. 사생활 침해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드러내려 한다.).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습니다.” (거슬리는 질문에 모욕을 느꼈다. 하지만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왜 묻는 건지는 몰라도.) “제 재정 상태는 전부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으며, 모든 수입이 국회의원 재정관리 목록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몸을 돌리고 바틀릿을 바라보니, 미동도 없는 자세로 ― 더욱 꼿꼿이 몸을 세웠으며 ― 얼굴에 내걸었던 거짓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 외에는?” 재촉한다. “예를 들어 유산 문제는 어떻습니까?”


어금니 위의 피부가 한 차례 움찔거린다. (스트레스를 나타내는 만고불변의 증거.) (기억 : 존에게 그 부위의 정확한 명칭을 물어볼 것.) 그러나 그녀는 곧 한숨을 깊게 들이쉬고, 조용하게 대답한다. “집이요. 집을 물려받았어요. 동생은 상속금을 받았구요.”


“흥미롭군.” 일부러 뭔가 알았다는 몸짓을 취한 거지만(의뢰인들은 수수께끼같은 기이한 반응을 좋아한다), 사실이기도 하다. (아주 흥미롭다.) (상속금을 받은 사람이 데이비드 바틀릿이라면 누구라도 미란다를 납치해 그 동생에게 몸값을 요구할 테다. 데이비드를 납치하는 게 아니라.) (하긴, 범죄자들은 법조계 인간들만큼이나 멍청하니까. 흥미로운 사건을 제시해 주는 자와 조우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동생분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동생 바틀릿 씨에게 이렇다할만한 적 세력이 있었습니까?”


바틀릿은 한숨을 쉬더니 존을 흘긋 쳐다본다. (동정을 얻으려고?) 존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격려가 필요하기라도 했나보지!) “제가 아는 한은 없어요. 대부분 모두 데이비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걸요.” (‘보였다’? 의문? 불신?)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거든요.” (현재형 시제. 동생이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동생의 실종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가는 바가 있다.) “파티에 죽고 파티에 사는 사교광이었으니까.” 바틀릿은 미소를 짓고(눈은 웃지 않는다) 한숨과도 같은 숨을 내쉰다. (자포자기? 절망?) 빳빳하게 경직된 목이 당겨지며 기도의 모양이 드러난다. (이 일련의 질문이 마이크로프트가 언급했던 그 ‘문제점’의 일부를 건드렸다.)


“상당히 외향적인 사람이었나 보죠?”


“네.” 바틀릿이 조그만 목소리로 답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다.


“즉 술을 많이 마신다는 거겠고.” 곧장 말을 이어가면서 존이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듣는다. 무시한다. “그것도 매우 많이. 확신하건데 빚도 있을 테고요.”


바틀릿의 머리가 반짝 들린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하는 기색이 눈에 떠오른다. 간단하다. (상속금을 받았는데 여전히 누이 집에서 산다?) 어쨌든 기분은 좋다. (바틀릿은 지금 구석에 몰렸다. 달래듯 조금 유하게 접근할 때다.) 책상 의자를 빼 바틀릿과 존 사이에 앉는다. “평상시에 동생분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묻는다. (부드럽게. 자신감을 북돋우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양 손을 모은 채. 앞으로 기대서.)


바틀릿이 침을 삼킨다. “대학을 나온 뒤에 잠깐 금융계 기자 일을 했는데, 잘 안 됐어요. 그 다음엔 장사를 해보겠다고 했죠. 몇 년 하다 그만 두고, 또 몇 달 뭐 하다 그만 두고…”


아, 하고 낮은 목소리로 유감이라는 표현을 건넨다. 옆에서 존의 만족스러운 눈길이 느껴진다. “언제 마지막으로 동생분을 보셨는지?” 격려하듯 바틀릿의 손 위로 살짝 손을 얹었다 뗀다.


핸드백을 연다. (루이뷔통 브레아.[각주:3] 사치품.) (허리끈을 졸라매자는 정부의 말과는 사뭇 다르다. 선물이라는 거로군.) (작년 모델이다. 밑바닥이 살짝 흠이 났고 솔도 닳았다. 자주 썼다. 감정적인 사유가 있는 물건인가?) 휴대용 휴지를 꺼내 코를 닦아낸다. (눈물을 참았다. 좋아! 이제 사실대로 말해.) “집에서요. 의회 개정 시간 전이었는데, 일찍 자러 가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럼, 바틀릿 씨가 아는 대로라면, 동생분이 집에서 사라졌다는 말씀이겠죠?”


“네.”


“집에 누가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까?”


바틀릿은 잠깐 머뭇거리다, 살짝 충혈이 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아요.”


(망설임에서 걸렸다. 다시 전략을 바꿀 시간이다.) 의자가 넘어갈 듯 불쑥 일어난다.“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 그럼 댁에 누가 숨어들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늘 어수선한 모양이죠?”


“셜록.” 경고조의 낮은 목소리가 날아든다. 걱정이 담긴 그의 표정에서는 부성애마저 느껴진다. 복잡한 사교적 문제에 인내심 있게 아이를 이끌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를 노려보는데 (이건 사건이지, 사교 모임이 아니야!) 그 때 바틀릿이 먼저 입을 연다.


“가정부가, 청소를 해주는 가정부가 있는데… 얼마 안 된 사람이라…”


“예, 알았습니다.” 말을 끊으며 재킷 버튼을 풀어낸다. (이만 떠날 시간임을 알리는 데 적격인 신호다.) “제가 직접 살펴보고 싶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죄송하지만 안 돼요. 급한 미팅이 있어서.”


(완벽해! 이 여자는 오지 않을 거다. 존이 저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느라 내가 도통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뭐, 그건 유감이지만, 왓슨 박사와 제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겠네요.” 가볍게 말하며 손을 내민다. “열쇠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 그리고 갖고 계시면 동생 분의 사진도 한 장 주시죠.” (물론 갖고 있다. 동생을 그렇게 위하는데 당연하지.)


지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바틀릿은, 혼이 빠진 듯이 멍하니 다시 가방에 손을 넣어 열쇠 꾸러미를 꺼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내 손 위에 올려놓은 뒤 이번엔 지갑을 뒤져 여권 사진을 빼든다. “아주 최근에 찍은 건 아니에요.” 바틀릿의 손가락이 사진의 유광 코팅 위를 한 번 훑는다. “여기서 살이 좀 쪘어요. 머리도 빠지구요.”


(즉각적인 순종. 유용한 정보. 보상받아 마땅하다.) 환하게 웃어준다. “감사합니다, 바틀릿 씨.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얼핏 드러났지만(여자들은 쉽게 들뜬다. 이용하기도 쉽다.) 바틀릿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도로 전문가다운 가면을 쓴다. “고맙습니다.”


존이 일어나 바틀릿에게 코트를 입혀주면서, 얻는 게 있는 대로 모두 알려드리겠다며, 동생분이 곧 돌아오게 될 거라고 확신의 말을 건넨다. (둘이 너무 가깝다. 저건 아예 등을 감싸안은 거잖아.) (방금 저 여자 목덜미에서 냄새를 맡은 건 아니겠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존을 멀리 떨어트린 다음 바틀릿의 등에 손을 딱 얹고 문으로 밀어낸다. 여자의 등 뒤로 문을 닫고 나서야 안도감이 물밀듯이 찾아온다.


존에게로 고개를 돌릴 때까지만 해도.


존 왓슨은 합리적인 남자다. 냉철하고, 지적이며 차분하다. 의리있고 존경스러우며, 본능적으로 99퍼센트 늘 셜록 홈즈의 옆에 붙어 있다. 지금은 그 99퍼센트의 상황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어딘지 기분이 가라앉고 지친 모습이다.


“왜?”


“저 불쌍한 여자 말야.” 존은 느리게, 한마디 한 마디를 강조한다. “걱정돼서 죽으려고 하고 있다구. 친절하게 좀 대해준다고 누가 잡아가는 거 아니잖아.”


짜증이 울컥 올라온다. 이 얘기로 전에도 자주 언쟁을 했었다. (아주 많이.) (지금쯤이면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냐?) “하, 친절이라고!”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코웃음을 친다. “바보들이나 알아서 친절을 챙겨주지. 저 여자에겐 ‘친절’같은 거 필요 없어. 동생을 찾아줄 사람이 필요하지. 그러려면 나는 냉정하게 중립을 유지해야 해.”


“친절하면서도 중립을 유지할 수 있잖아.” 대꾸하는 존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진다. “의사들은 ― 좋은 의사들은, 언제나 그렇게 해.”


(설득하는 거다.) (싫은 건 아냐.) 하지만 아직 양보할 수 없다. (존은 그 여자가 맘에 든 것이다.)[각주:4] “뭔가 헷갈리나 본데, 난 좋은 의사가 아니야, 존. 베갯머리송사 따위 필요없어.” 바틀릿의 향수 냄새가 한 차례 훅 끼쳐와서(존에게서 나는 거겠지, 그 여자와 닿았을 때 옮아와서) 다시 울컥 짜증이 난다. “게다가, 너도 친절하게 대한 건 아니었지. 작업을 건 거라면 모를까.”


존의 입가에 걸린 조그만 미소가 얼굴로 환하게 퍼져간다. 웃음으로 눈가에 주름이 생기고, 두 눈이 반짝인다. (그런 거 맞잖아? 아니야? 방금 그 말은 질투를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난 질투하는 게 아냐!) (질투하는 건가?) “작업 건 거 아니야.” 존은 내 손을 잡아다 가까이 끌어당기며, 대꾸한다.


당황스러워서 굳어버린다. (모든 증거가 있다구, 웃어주고, 접촉하고… 아.) “아니었어?” 갑자기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존이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젓는다. “아냐.” 허리에 한 팔을 슥 두르고, 나머지 손은 내 얼굴을 감싸 엄지로 아랫입술을 살며시 매만진다. “이게 작업이지.”


그리고 내가 그를 저지하기 전에, 일을 하는 중이니까 머리가 맑아야 한다며 막기 전에, 택시를 부르라고 시키기도 전에, 존이 다시 내게 키스한다. (이럴 순 없어. 뻔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정말로, 중요한…) 뇌가 빠른 속도로 이성을 잃어가고, 등에 놓인 존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등허리에 얹힌 손, 나는 저지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그저 눈을 감고 사지에 힘이 빠지는 대로 둔다. (이건 ― 이 행위는 마약이나, 술과 비슷하다. 세상이 모두 멀리 멀리 사라지고, 몸이 닿은 곳에서 느껴지는 존의 온기와 혀의 맛만 남는다. 허리를 움직이고 싶고, 몰아붙이고 싶다. 부숴버리고 싶다.) 그러나, 존의 손이 내 엉덩이를 잡아 홱 잡아당겼을 때 허벅지 안쪽에 여실히 닿는 감각과 ― 그가 거의 목구멍까지 침범할 듯 게걸스레 혀를 놀리며 욕망으로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나는 충격으로 몸이 굳는다. 현실의 존은(욕실에 있을 때 나타나는 상상 속의 존과 반대로), 키스하고 떨어지는 동작의 사이에 부가 단계가 너무 많다. 너무 현실적이다. (협상 : 네 침대? 내 침대? 손으로? 입으로? 삽입?) 너무 많은 예상과 결과. 질문도 많다. (무슨 뜻이었어? 의미가 있기는 한 거야?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얼마나 자주? 어디서? 무슨 뜻이었냐구?) 너무 복잡하고, 불가해하다. 답할 수 없는 무수한 질문들 사이에 휩쓸려 버리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존을 밀어낸다. “존, 저기―”


“알아, 알았어.” 존은 숨을 고르며 웅얼거린다. 앞섶을 불편하게 당긴다. 눈에 띄게 발기했다. 조이는 바지가 아닌데도 명확히 보일 정도로. “알았다구. 알았어, 안 해. 오늘은 안 해.”


보통은 이런 식으로 쓴웃음을 짓는데, 지금은 즐거운 기색이 없다. 빠르게 입술을 핥고 침을 삼킨다. 내뱉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안으로 넘긴 것 같다. (약이 오른다.) (스스로의 권리가 이 정도라고 정해버렸다.)


그럼 이쪽이 말하지. “내가 널 실망시켰군.”


존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고 긴 한숨을 내쉰다. “있잖아, 셜록―”


“아니, 아니. 나한테 화났잖아. 만족 못 했다고.” 나는 존에게서 떨어져나와 책상으로 물러난다. “이해할 수 있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난 경고 했었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존, 내게는 ― 일이 먼저야. 언제나 그래.”


눈 깜짝할 순간 상처받은 기색이 존의 눈에 스쳐지나간다. “알아.”


존의 손이 닿을 때마다 자제심이 무너져내리던 아찔한 감각은 이제 먼 옛날의 얘기인 것처럼 멀어진다. 과거의 일로 흘러가 버린다. 지난날의 이야기 속으로. 이것이 바로 나의 정체야. 자문 탐정 셜록 홈즈. 냉담하고, 깔끔하고, 만질 수 없는 남자. 나는 한 마디를 덧붙이며 서랍 안에 유괴장을 집어넣는다. “그러니 내가 한창 일에 착수한 동안에는 되도록 건드리지 말아줘. 존. 자, 택시 불러. 레드힐로 갈 거야.”






택시를 타고 미란다 바틀릿의 에드워드 7세 풍 빌라 앞에 내렸을 때는 겨우 여섯 시 반 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미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지러지며 하늘에 휘영청 떠 있는 달은 주변에 환한 빛을 발하고 있다. (달무리.) (상층부 대기의 얼음 입자로 인한 빛의 굴절.) (폭풍우가 몰려온다. 오늘은 아니지만, 곧.) 오늘따라 더 춥다. 발끝과 손으로 찌르는 듯한 격통이 느껴진다. 자갈길 위를 저벅저벅 걸어가는 동안,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도 가죽재킷 아래로 셔츠에다 두꺼운 양털 스웨터까지 단단히 입어주는 존의 센스에 어느정도 감탄이 든다. (겹겹이 껴입었으니 따뜻할 거다.) (적어도 보온은 잘 되겠지.) (그의 태도가 눈에 띄게 냉담하다. 베이커 가를 나온 이후로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하얀 입김에는 내 예의없는 태도를 향한 비난과, 마지못해 뒤를 따라온다는 꺼림칙함이 함께 실려온다. (사과를 하면 될까?) (아니야.) (지켜야 하는 게 너무 많아진다. 알아야 할 설명과 정의도 많다.) (그리고, 그러기엔 존은 이미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걷는다. 존을 뒤에서 우스운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따라오게 만든다. 저택이 서 있는 길가는 빛 한 점 없이 거의 어두운 곳이었고,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 밑으로 저광도의 불빛만이 은은하게 밖으로 흘러나왔다. 현관 앞에 서 있는 경비는 물기가 돈 눈으로 코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 (추웠다. 매우 추웠다.) 존이 건넨 신분증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두어 번 떨어트리고 나서야(몇 시간째 근무를 서고 있었다) 제대로 카드를 집어든다. (손톱 밑이 푸르다.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다.) 무전으로 말을 전하고 듣는 과정일 뿐이지만 원래보다 한참 시간이 걸렸다. (마이크로프트는 이런 과정에 신물이 났을 테지.) 그래도 존은 인내심 있게 웃으며 이해해 준다.


한참 후에야 마침내 현관에 도달한 나는 도어벨을 울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따뜻한 공기가 훅 끼치고 여자가 나온다(흑인, 키가 작다). 푸른색 작업복 차림에 양 손과 얼굴에 밀가루가 묻어 있다. (바틀릿의 요리사?) (아니, 무릎에 먼지가 묻었고 신발코가 닳아 있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엎드려서 손으로 걸레질을 했다. 오늘. 그렇다면, 전반적인 집안일을 하는 사람.) 그녀는 우리를 안으로 들인 다음, 1층의 방 앞으로 안내한다. “데이비드 씨의 방이에요.” 그녀가 옆으로 물러서며 문을 열어준다.


방 안은, 크기가 작지 않음에도 어수선한 모습 때문에 비좁아 보였다. 가구가 너무 많다(안 어울림). 의자만 해도 겉에 쿠션을 댄 의자, 식탁 의자, 플라스틱, 회전의자까지 다양하다. 소나무 책장 안은, 속이 헐거워진 파일들과 A4크기의 갖가지 간행물, 학술서로 정신없이 들어찼고 책상, 컴퓨터며 전원이 그대로 켜진 팩스기 사이사이로 먼지 뭉텅이가 돌아다닌다(사용한 지 오래 됐다). 그 중간에는 더블베드(각각 푸른색과 흰 색 베갯잇, 분홍 꽃무늬 이불)와 마호가니 옷장(원래 사무실인데, 여분의 방이  없어 임시용 거처가 되었다.)이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선 끝에서 바틀릿의 가정부가 계속 서성인다. 다리를 한 짝씩 바꿔 짚어가며 앞치마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다른 할 일이 더 있다.) 뒤돌아서 가정부에게 웃어준다. “감사합니다. 여기 일은 저희 둘이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여자는 고마운 듯 마주 웃더니 무릎을 살짝 구부려 인사한 다음, 도로 긴 복도로 나가 빵 굽는 냄새가 나는 쪽으로 사라진다.


“뭘 찾아야 하지?” 존이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다.


“종이. 펜. 플러그.” (딱 보면 뻔하지 않나?)


“알았어. 플러그라고. 오케이.” 존이 심호흡을 하고 팔뚝으로 소맷부리를 걷어붙인다. “좋았어.” 안쪽으로 들어선 존은 잡동사니를 헤치고 세탁물이 그득 찬 바구니 쪽으로 가서, 책장 뒤편의 굽도리 쪽을 살핀다. “그렇지. 여기 하나 찾았네. 왼쪽 두 개에 콘센트가 꽂혀 있어.” 그가 침대 너머로 고개를 든다. “두 베개 모두 침대 왼쪽에 있어. 램프도. 데이비드 바틀릿은 왼손잡이야.”


나는 자랑스러움에 마음이 뿌듯해진다. 배우는 존과 가르치는 나 모두에게. “아주 잘 했어, 존. 다른 건?”


존은 방을 둘러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글쎄. 어수선한 성격이네. 그게 도움이 되려나? 설마, 그 자가 뭔가 남겼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니까, 자기 누나의 집에.”


(존이 방을 제대로 보길 바라는 건 너무 많은 바람이다.) (그리고 미란다 바틀릿에게서 신경 끄고 사건에 집중하길 바라는 건 더 심한 바람이다.) “종이를 찾아봐, 존 ― 종이!” 짜증스레 재촉한다. “보이는 거 있어?”


선반을 가리키며 존이 대답한다. “많아. 햄스터가 집이라도 지어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손글씨가 있는 종이 말이야.” 한숨을 쉬며 범위를 정해 준다. “어딘가에 분명 있을 거야.”

알기 쉽고 직선적인 사람답게 존은 책상부터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침대 밑을 살펴본다. 찾았다. (그럼 그렇지.) (눈에 안 띄지만 손에 잘 닿는 곳.) 나는 링 연습장을 집어 의기양양하게 들어올렸다.


“그 유괴장도 그런 비슷한 종이에 쓰여 있었어.” 존이 천천히 입을 연다.


“아니, ‘그런 비슷한’ 게 아니야. 바로 이거지.” 나는 옷과 오래된 신문 무더기를 건너와 전등 아래 공책을 펴보았다. (여기 있군. 첫 장부터. 네 동생의 목숨을 (틀린 부분은 선으로 긋고.) 살리길 원하면… (이하 동문.)


잠시 존은 미간을 찌푸렸다가(증거를 외면하고 있다. 거짓이길 원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다. (깨달았다.) 어두워진 얼굴을 구기고(화가 났다) 씩씩대기 시작한다(분노). “속인 거야? 씨발, 동생놈이 속인 거였어? 이런 개새끼! 어째서?” 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숨이 가빠진다. (답을 해줄 필요는 없다. 이미 존도 알고 있다.) “누나의 돈을 원했던 거야! 술 퍼마시고 마약까지 손대느라 제 것 다 쓰고는, 세상에. 이제 하다못해 제 누나 돈까지!”


“그런 거지.”


존이 가까운 벽을 세게 치자 ― 옷장 문이었다 ― 옷장이 파르르 떨린다. “버러지같은 새끼.” (분이 나서 쓸데없이 말을 반복하고 있다.) 갑작스레 짜증이 올라온다. (어째서?) “불쌍한 사람. 그 불쌍한 여자.” 존이 고개를 내젓는다. “누나는 자기 때문에 밤낮으로 일해야 하는 시간을 쪼개서 걱정하고 있는데 ― 동생이란 놈이 이런 식으로 갚다니!”


(아, 그렇군. 왜 짜증나는지 알겠다. 미란다 바틀릿을 향한 과도한 동정심.) “어찌됐건 남매라는 거지.”


“바틀릿 씨는 내무부 정치인이잖아! 이딴 동생놈을 위해 돌아다니고 있을 여유조차 없다구. 그런데 동생이란 자식은 자기 인생을 망가뜨린 걸로 모자라서 똑같은 짓을 누나에게―”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기는 느낌이다. (왜 존은 만난 지 세 시간밖에 안 된 낯선 정치인을 위해 이다지도 열렬히 걱정해준단 말인가?) (그것도 꽉 끼는 셔츠지독한 향수를 뿌린 여자를.) (집에서 그렇게 키스를 했음에도, 존은 그 여자에게 끌렸다.) (이젠 화가 난다.) 길을 막고 있는 옷가지와 신문이며 각양각색의 의자를 헤치고 나는 2초 만에 불쑥 존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존을 책장에 몰아 가둔다. “닥쳐.” (화가 난 게 아니다. 이건 분노다.)


“무― 뭐?


“입, 닥치라고.”


입을 다물지만, 존은 내 바람만큼 순종스럽지 않다. 그는 반항적인 얼굴로, 외투를 꽉 붙든 내 두 손을 뿌리쳐 떨어지려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게 만들 요량으로 나를 한 쪽으로 잡아당기지만, 이 전략은 지난번 존을 벽으로 밀쳤을 때 사용했던 방법이라 이쪽도 예상하고 있던 바다. 양 발을 벌려 중심을 잡고 앞으로 무게를 실어 밀자 (방어가 아닌 공격이다) 다시 한 번 둔탁한 소리와 함께 존의 등이 책장에 세게 부딪힌다.


“셜록.” 존이 눈을 번쩍이며 경고한다. “놔.”


“싫어.”


“한 방 먹고 싶어?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어? 말리지는 않을게. 오늘 이정도면 널 충분히 겪은 것 같거든.”


(충분해? 뭐가 ‘충분해’?) (아니잖아. 정 반대로 말하고 있어. 조금도 ‘충분하지’ 않다. 그러니 다른 데를 보고 있지.) 돌연,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이 격통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심장과 폐까지 모두 뜯겨나가는 것 같다. 숨을 쉴 수가 없다. (한심하긴! 완전히 한심해!) 도움이 안 되게도, 거의 한 뼘이나 더 큰데도 존의 앞에 서면 어쩐지 그에게 내려다보이는 것 같다. (멈춰야 한다.) (당장.) (존에게 보여줘.)


차분함으로 차갑게 머리를 식힌다. (집중. 결정.) 존을 밀어 책장에 납작 가두고 ― 선반 안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지면서, 목이 길게 드러난다 ― 입을 맞춘다. 머뭇거림도, 상냥함도 없다. 처음으로 존에게 키스를 한다면 이러하리라 예상했던 내 모든 상상들이 전부 거짓이 되어 사라진다. 가차없이 강렬하게 몰아붙인다. 기분 좋기보다는, 아프다. 서로의 이가 부딪치고, 까슬하게 돋아난 수염이 존의 얼굴을 할퀸다. 그를 물어버리고 싶다 ― 상처입히고 싶다 ― 는 충동이 억누를 수 없이 몸을 사로잡는다.


존이 무력하게 헐떡이려 한다(입술을 완전히 집어삼켰기 때문에 그는 저항하는 데 필요한 산소를 제대로 얻을 수 없다. 간접 호흡으로 이산화탄소만 겨우 얻고 있다). 온 몸이 바싹 굳어졌다가, 다시 몸을 뒤틀며 저항한다. 군인 시절에 배웠던 야비한 방법까지 모두 동원한다. 통하지 않는다. 존의 정신은 완전히 흐트러져 있다(분노, 굴욕, 무엇이 공평하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그의 기준). 반면 나의 정신은 한 곳에, 오직 하나로 통일된다. 존을 바로 내 앞에 붙드는 것. (존을 붙잡아두는 것.) 존이 패배를 인정하기까지 한참동안 압박을 가해야 했다. 존은 점차 몸부림치는 걸 그만 두고 이내 몸에 힘을 빼기 시작한다.


다시 실랑이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긴장을 유지한 채로 조심스럽게, 조금 여유를 두고 뒤로 물러나기로 한다.


존이 얼굴을 붉히고(이보다 아름다울 순 없다) 숨을 몰아쉰다. 그의 눈은 동공이 확장되어 온통 까맣게 타오르고 있다. (뭐지? 후두부 외상? 책장에 너무 세게 부딪힌 건가?)


“셜록―” (예상했듯) 헐떡이면서도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차분하다. 그는 부드럽게 애원하고 있다.


“닥치라고.” 다시금 다그쳐서 말을 끊고 나니, 무언가 확인하고 싶어지는 게 생긴다. 도로 입술을 맞댄다. 거칠지만 방금보다는 공격성이 줄어들었다. 지난번 존이 해주던 모든 동작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하나하나 강도를 높여간다. 입술을 세게 빨고 강하게 혀를 얽는다. 존의 입술이 크게 벌어지고, 두 손이 강하게 내 팔을 그러쥔다. 그가 떨고 있다. (실험이 성공적이다.) (간단하고, 위험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존이 지금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기로 한다. 존의 앞섶 위로 손을 올려, 단단하게 부풀은 부분을 잡고 문지르기 시작한다.


반응은 즉각적이다. 짧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존은 무력하게 책장으로 허리를 뺐다가 내 손 안으로 돌아오길 반복한다. 자제력을 끌어모으려 하지만 헛수고다. 손에 힘을 주며, 나는 입술을 떼고 존이 천천히, 산산이 조각나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든다. (멋져.) (역겨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존은 어떻게 이리 쉽게 굴복할 수 있지?) 점차로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고 입술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존도 그것을 깨달았다. 퍼뜩 눈이 뜨인다. “셜록,” 그가 헉헉대며 고개를 젓는다. “우리, 일하는…중이잖아.” (감탄할 만한 자제심이다.)


“맞아.” 존의 앞섶에 가져다 댔던 손을 떼고 물러선다. 살짝 신음을 내며 존은 쓰게 웃는다. (스스로 금욕을 자청했다. 굴복이 아닌 자제심을 선택했다.) “상기시켜줘서 고마워. 이곳에서의 일은 모두 마친 것 같군. 필요한 건 다 얻었어.”


“잘 됐네.” 존이 소리죽여 대답한다.


나는 못 들은 척 뒤돌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택시를 향해 아무 말 않고 나간다. 존이 매우 불편한 모습으로 뒤를 따라오고 있다.






역 건물의 시계(가장 신뢰할 수 있다. 여긴 비둘기 떼가 많은 게 흠이지만)가 여덟 시 십 분을 가리키는 시간이지만 세인트 판크라스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빈다. 번쩍이는 구두에 비싼 정장을 입은 중산층 사람들이 서류 가방이며 랩탑을 끼고 바쁘게 지나가는(자기 자랑. 수완 있는 사업가 유형) 반면 멍한 눈에 창백한 얼굴, 웃긴 옷을 입은 부류들은 패배한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간다(지친 직장인 유형). 아이들이 소리를 빽빽 지르며 사방으로 뛰어다닌다. 거리의 악사들은 사방을 둘러보며 조율이 안 된 기타로 연주를 하고 있다(경찰이 나타나서 벌금을 물까봐 경계중이다). 과하게 부풀린 머리에 비해 옷은 너무 조그맣고 얇은 것만 입은 여자들이(파티광) 떼를 지어 지나가고 나면 십대 무리들이 ‘날라리’(즉 우스우리만치 안 맞는) 복장으로 자신들이 멋져 보이는 줄 알고 뽐을 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지나간다(출장 온 직장인, 런던 여행자, 출국 예정자). 결국 한 마디로, 사람들이 너무 많다 ― 많아도 너무 많다. 순간 죄 많은 욕심쟁이 동생 바틀릿의 위치를 지목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떻게 찾으려고?” 나의 걱정을 존이 소리내어 말한다. 하지만 정말 걱정하는 투는 아니다. 혀가 빠르게 입술을 핥고 들어간다. 기대하듯. (막중한 임무에 기가 죽은 게 아니라 ― 그저 정말 궁금할 뿐인 거다. 천재적인 추리를 기대하고 있다.)


한 번에 자신감이 되돌아온다. “어디 있을지는 명백하지. 너도 알잖아.”


“그런가?”


대답 없이 그냥 (다 안다는 듯이) 미소만 짓는다. (존은 여느 의뢰인들과 마찬가지로 마법같은 추리를 좋아한다. 그 마법이 그저 관찰 및 합리적인 생각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라 해도 존은 현혹되고, 감탄한다.) “이 쪽이야.” 기차역 광장을 빠르게 가로지른다(존은 추격의 짜릿함과 혈관을 타고 솟구치는 뜨거운 피의 감각을 좋아한다). 핑크스와 베넷, 팻 페이스, 포일스를[각주:5] 지나 서클 선 환승역 쪽으로 나아간다. 그 중에서도 요 스시 전문점이 목적지다. (앉을 공간이 있으면서도 초과 수하물 보관소가 잘 보이는 유일한 장소다.) (바틀릿이 종일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지금쯤 앉아서 휴식하고 싶을 것이다.)


척 보니 바틀릿으로 보이는 자가 두 명 ― 셋 이상은 아니다 ― 있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된다. 게임에 지장을 줄 순 없지. 행색만 확인하자. 몸짓은 볼 수 있다.)


“존,”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인다. “그 가방 좀 흔들어봐.”


“흔들라고? 안에 몇 십 킬로그램은 들었겠는데!”


“그럼 떨어트리든, 밀든 아무거나 해봐! 주의를 끌어.”


잠자코(마지못해서든 아니든) 존은 끙 하는 신음과 함께 타일 깔린 바닥으로 가방을 떨어트린다.


(빙고!) 방금까지만 해도 카운터의 스툴에 축 져져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찾았군!”


“이제 어떻게 하지?” 존이 묻는다. (먹잇감을 쳐다보고 싶은 충동을 단호하게 참고 있다.) “잡을까? 레스트레이드한테 전화할까?”


“내 형님은 좀 더 신중한 방법을 좋아할 테지.”


“예를 들어?”


“바틀릿에게 허술한 계략이 탄로났다고 밝히고 인질극 및 금품 갈취 죄목으로 감옥살이를 할 수도 있다고 협박한 다음에, 집으로 보내 누이와 알아서 담판을 보게 할 거야 ― 그런 후에는 그 여자가 이윽고 마이크로프트가 원하는 법안을 확인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테고.”


“지금 네 말은,” 존이 이를 악문다. 그는 정말 화났을 때 바로 이런 모습을 한다. “훈계만 하고 그냥 놓아주자는 얘기야?”


“그래.”


존이 자제심을 끌어모으려고 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때와 상황을 막론하고, 한없이 즐겁다. 그러면서도 또 늘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된다. (유익해서?) 그것은 인간이 까다로운 문제의 해답을 찾을 때의 모습과 같다. 시시각각 나아가는 단계마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경우에는 불신, 배신감, 분노다.) 그리고 언제나 한 발자국 앞서 존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감각은 아주 근사하다. 존의 감정 하나하나가 모두 내게로 향하고, 나의 손아귀에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넌 그래도 괜찮다는 거지?” 그렇게 물으면서, 가방을 그러쥔 존의 손마디가 하얗게 변한다.


어깨를 으쓱 한다. 누이 바틀릿과 동생 바틀릿을 둘 모두를 향한 무관심 덕분에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너도 그렇고. 가자.”


바틀릿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는 하려나. 계략은 탄로되었고, 붙잡히기 일보직전의 상황이다. 나는 180도 홱 돌아, 바틀릿 가의 탕아가 앉아있는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바틀릿이 멍청하게 웃는다.


“가져왔군. 전부 챙겼나?” (발음이 살짝 뭉개지고, 입에서 술 냄새가 풍긴다.)


(여기가 이제 재미있는 부분이다.)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아니, 모두 챙겨오지는 못했는데.”


“얼마나 가져왔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잠시 뜸.) “한 푼도 없어.”


바틀릿이 서 있었다면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충격받은 얼굴이다. 반증이라도 하듯, 스툴 위에서 비틀거린다. “뭐라고?”


바틀릿 옆의 스툴에 걸터앉아 나는 메뉴판에 관심있는 척 시선을 돌린다. (범죄자들을 기다리게 만드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자리에 붙잡아두는 데 효과적이다.) (같은 방식으로 범죄자가 아닌 사람에게 역시 적용된다.) “우린 당신 누이의 돈을 가지고 온 게 아니야, 바틀릿 씨.” 바틀릿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최후통보.


술에 절은 머리를 굴린 끝에 바틀릿은 대답의 의미를 눈치챈다. “무슨… 뭐? 난 그런 게…”


눈을 휙 굴린다. “아니긴, 그런 게 맞아. 스스로 납치극을 벌였고 ― 그다지 봐줄만한 전략은 아니었지. 팁을 하나 알려주지. ‘네 남동생’이라고 쓰려다가 실수로 ‘나’라고 써버렸으면 그 위에 대충 줄긋고 넘어가면 안 돼. 종이는 낱장으로 꺼내서 쓰고. 습자지같은 연습장을 쓰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아, 말 나온 김에, 당신이 뒹굴거리던 침대 밑에 연습장을 던져두면 위험해. 실력 좋은 탐정이 왔다가 ― 어느 멍청한 감식반 인간도 그렇겠지만 ― 그런 데를 들춰볼 확률이 높거든.” 바틀릿의 입이 벌어졌다 그대로 닫히면서 공허한 알코올 냄새만 풍긴다. 재밌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정체가 폭로된 건 잉크 때문이었지만 말이야. 당신같은 왼손잡이라면 무슨 타입의 펜을 써야 하는지 알 거 아냐. 글씨가 오른쪽으로 죄다 번졌으니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빼도 박도 못하게 됐지 뭐야.”


“내 글씨 때문에 내가 범인이라는 거야?”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오, 아니지, 데이비드 바틀릿. 그건 내 추측을 확인해줬을 뿐이지. 당신이란 걸 알게 된 건 바로 구두점 덕분이었어. 요즈음엔 특정 학교에서 특별히 배우지 않은 이상은 옥스퍼드 콤마[각주:6] 잘 쓰지 않지. 당신의 경우엔 윈체스터 대학이려나?”


“알고 있었어?!” 존이 목소리를 높인다. “넌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존은 무의식적인 감탄의 표출을 억누르는 데 소질이 부족하지만, 그건 존이 지니고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면모 중 하나다.) 답례로 미소와 함께 작게 목례를 건네다 ― 존의 반응이 감탄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깨닫는다. 도리어 노려보고 있다 ― 두 눈이 이글거린다. “알면서도 바틀릿 씨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공연히 계속 걱정하도록 내버려 뒀다고. 그러니까 재밌어? 행복하냐고!”


이건 예상치 못했던 전개다. (이 상황에서 존은 격려와 찬사를 보내야 마땅하다.) (특히 그렇게 키스를 했으니까, 더욱.) 나도 마주 쏘아본다. “명확하지 않은 추측을 말해봤자 비극만 초래할 수 있어. 내가 틀렸으면 어떻게 수습할 거지?”


웃기지도 않다는 듯 존은 코웃음을 친다. “네가? 틀려? 그게 가능하기는 하나?”


존에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며 다그치는 사이, 혼란을 틈타 바틀릿이 도주를 결심한다. 그는 스툴에서 펄쩍 튀어나가 테이블 사이를 헤집고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우리 역시 그 뒤를 바짝 쫓는다. 뒤쪽에서 계산을 안 했다며 외치는 종업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군중들 사이로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바틀릿은 따라잡히기까지 거의 100미터 정도를 달아났다. 술에 취한 사람 치고 꽤나 잽쌌지만 (바틀릿 본인에게)안타깝게도, 나처럼 긴 다리나 마른 근육질의 몸을 얻는 축복을 누리지 못했다.[각주:7] 달려들어 바틀릿의 외투 자락을 잡아챈다.


바틀릿이 뒤돌아 배에 주먹을 세게 꽂는다(멍청해, 멍청하긴! 이런 것쯤은 예상하고 있어야 했는데!) ― 폐 안의 공기가 훅 빠져나가며 헉 하는 신음과 함께 몸이 반으로 접힌다. 두 번째 공격이 머리에 날아들고, 나는 옆으로 떨어져나간다. 붉고, 금속성의 ― 격통이 번쩍 하고 관자놀이에서 끓어오른다. (붉어? 금속성?)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선다. 시야에 구겨진 콜라 캔이 보인다(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잠시 후, 나는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달아나는 바틀릿의 뒤를 존이 좇았고 ― 금세 뒤를 따라잡는다. 번쩍 할 사이에 존이 몸을 날려, 바틀릿의 어깨와 허리춤을 잡아채 땅으로 내던지자 바틀릿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으로 구른다. 존이 그 위로 올라와 확실하게 잡아둔다. 뒤늦게 현장으로 당도하니, 존이 헉헉대면서도 만족스럽게 얼굴을 반짝이고 있다. “잡았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나가던 청년(남자)들이 바틀릿을 향해 비웃으며 야유를 한다. 그에 반해 여자애들은(몇몇 나이든 여자들도 포함해) 찬사를 보내는가 하면 존을 빤히 바라보며 관심을 보인다. (불안해진다.) 가까이 다가서, 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다. (내 사람.) “잘 했어, 존. ‘신중’이란 단어의 의미를 약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도망치잖아! 뭔가 해야 했다구.”


“그런 모양이군.”


서너 명의 경찰 무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몰려든 인파의 일부가 시시각각 자리를 피한다. 존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시들해진다.


“이번엔 또 뭐야?” 그가 한숨을 내쉰다.


“그 놈 일으켜 세워. 그리고 나와 얘기하게 둬. 넌 이미 반사회적 행위 금지 명령이 내려졌으니 조심해. 공무원들과는 말 섞지 않도록 하고.”


그 경찰 무리들은 근면하긴 했으나, 경찰청의 젊은 신입들이라 나와 마주친 적이 없고 레스트레이드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훔쳐온 경찰 신분증을 휙 보이고 몇 마디 상황 설명을 하며 비밀 임무 중임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곤란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데 쉽게 안심한다. 나아가서, 내 이마에 피가 흥건함에도 의심 하나 없이 이 상황은 레스트레이드 경감의[각주:8] 지휘 하에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믿는다.


경찰들에게 작별인사를 해준 뒤, 나는 존에게 지시해 바틀릿을 잡고 반대편으로 멀어지도록 한다. 하지만 존의 정신은 반쯤 다른 데 가 있어서, 계속 내 머리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다. “상태가 별로 안 좋아. 꿰매야 할 것 같아.”


손을 내젓는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냐, 당신 친구 말이 맞아. 의사한테 가봐야 될 것 같다고.” 바틀릿이 손가락을 흔들며 맞장구를 친다.


(존에게 충고를 받는 건, 바틀릿처럼 무능한 바보에게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 참견 고맙군.” 나는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당신의 빈약한 지략과 시간은 어떻게 하면 당신 누이가 아량을 베풀어줄지 고민하는 데에 쓰는 게 더 낫겠군. 집으로 돌아가. 가서 사죄해. 도움을 구하라고. 한 마디로, 병신 짓 그만 두면 돼.”






바틀릿 가 실종 사건은 이로서 종결되었다. (사건을 해결하고 승리감에 고취되는 건 한 순간일 뿐이고, 그 뒤 며칠간의, 몇 주간의 ― 심지어는 몇 달간의 ― 무력감과 우울함이 온몸을 덮쳐온다. 세상을 향한, 자신을 향한 권태로움에 압도되어 정신을 좀먹는다.) 욕실 거울 저편의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일이 없다면, 난 대체 무슨 존재인가?


그때 뒤편에서 문이 열리고, 거울에 비친 나의 상 옆에 존의 얼굴이 나타난다.


“들어가도 돼?”


“이미 들어왔잖아.”


“상처 좀 보려고.”


“괜찮아.”


존은 변기 뚜껑을 내린다. “앉아봐.” 어깨와 입가에 힘이 들어가 있다. (결정했다. 대화를 나누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이상 다툴 기운도, 기력도 없어서 나는 잠자코 시키는 대로 앉는다. (빨리 해치우게 그냥 내버려 두자.)


미소를 지어주며 존은, 내 머리를 약간 뒤로 젖히고 관자놀이에서 살며시 머리카락을 치운다. (접촉. 눈치보지 않는 손길.) (전문가로서의 관심? 아니면 개인적인 특권?) 확신하지 못한 채로 몸이 움찔한다.


즉시 날아드는 존의 사과. “미안! 아파?”


“더 심한 상처도 겪어봤어.” (훨씬 심한 걸. 더 심한 상처. 더 나쁜 손길.) (접촉은 늘 까다로운 일이었다. 간단해야 마땅하건만.) 무던한 노력 끝에, 존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나의 머리칼을 훑는 감각을 버텨낸다. 상처를 자세히 보려고 몸을 굽힌 그에게서 따스한 숨결이 뿜어져 나와 얼굴에 닿는다. (너무 가까워. 날 몰아붙이지 마.) 존이 수건 끝자락에 물을 묻혀 말라붙은 핏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하자, 그 손길을 쳐내고 멀리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울컥 올라온다. (날 내버려 둬.) (떨어져.) (그만해!) “내가 알아서 할게.” 정신을 다잡으려고 애쓰며 나는 퉁명스레 내뱉는다. “가서 자.”


손을 떼지만, 존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왜 그러는데?”


고개를 젓는다. “아무것도.”


“아무것도는 무슨. 너 종일 이상했어.”


“나 이상한 사람 맞아, 존. 이제와서 그걸 알았을 리 없잖아.”


“아니, 평소보다 더 이상했다고. 평소보다 훨씬 무례하고 무신경하게 굴었잖아, 미란다 바틀릿에게―”


(또 그 여자!) 벌떡 일어난다. “그만 좀 해!”


하지만 존은 내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다시 앉힌다. “넌 오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무례하고 둔감하게 행동했어. 네가 그러는 거 처음 봤어.”


“내게는 여러 가지 면이 있지. 다들 알 거야.”


“농담하지 말고. 너 오늘 심했어.”


“그랬나? 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네가 그 여자를 바라보고, 그 여자를 옹호하던 걸 고려했을 때.) “내가 그 여자 동생을 찾아줬잖아. 그거면 된 거 아니야? 사람들은 내게 동정심을 바라고 오지 않는다고, 존.”


“그래야겠지.”


“네가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그 여자를 언제 봤다고.” (섹스 때문인 거지, 그렇지? 정확히 말하자면, 섹스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너에겐 그게 필요한데, 얻어지지 못하고 있으니 다른 데서 찾고 있는 거야. 만약을 위해.)


돌연 힐난하는 표정이 일시에 사라지고, 존은 무척 피곤해 보인다. “그 여자가 불쌍해서 그래, 그래서 그런 것 뿐이라구. 그 여자를 보면 감정이입을 하게 되거든, 나랑, 아니, 내 경험 때문에. 나와 해리 말이야.”


“그래?” 한쪽 눈썹을 휙 치켜올린다. “왜?” (흥미로울 것 같은 조짐이다. 유용할 거다.)


한숨을 쉬며 존이 욕조 턱에 기대앉는다. “해리와 함께 자라면서… 난 대부분의 시간을 투명인간처럼 지내야 했어. 누나는 늘 어떻게서든 온 관심을 가져가야 직성이 풀렸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은 언젠가 누나가 철이 들 거라고 하셨어. 나중에 내가 누나보다 더 크게 될 때를 위해 지금 기다리는 거라고… 하지만 누나는 그대로였어, 셜록. 오히려 점점 심해졌지. 난 미친 듯이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매 시험마다 아주 높은 점수를 따냈는데… 그런데 아무도 그걸 몰라. 내가 죽어라고 노력할수록, 점점 관심이 멀어졌어. 해리가 친 사고를 막거나 아니면 해리를 구하러 다니느라 모두 바빴으니까. 마치 그런 거야, 내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된 것처럼… 가족 중에 나만 빠져 있는 것 같았어….” 그가 말을 멈춘다. 눈을 깜박인다. 숨을 깊게 들이쉰다. (그의 자제심이 무너진다. 이거, 아프다.) “내가 대학에 갈 때엔 누나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 의학부를 졸업할 즈음엔 완전히 알코올 중독이 되어 있었어. 졸업식에 왔는데 ― 내가 이런 얘기 한 적 있나? 만취해서는 졸업식에 왔더라고. 와서 난리를 피워댔어. 소란도 그런 소란이 없었지. 난― 학생 대표로 상을 받게 되어 있었어. 단 하루, 나의 날이었는데, 셜록. 그런데 누나가 망쳐버렸어.” 존이 눈을 문지른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도 미란다 바틀릿이 짠해 보였던 것 같아. 모든 걸 감내하고 제 동생에게 쏟아붓는데, 네가 그 여자한테 무례하게 대하니 참을 수가 없었어. 바틀릿이 동생을 걱정하는 걸 보면서 비아냥거리니까…” 말끝이 잦아들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공허한 쓴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너까지 하찮게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 거야?”


존은 놀란 듯 두 눈을 깜박거린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새로운 정보.) (완전히 새로운 정보는 아니지만, 미묘한 세부사항을 얻었다.) 나는 양 손을 모아 입가에 가져간다. “그렇군. 알았어.” (알아? 대체 뭘 알았다고?)


“그리고 그 다음엔 네가―” 존이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입술을 핥는다. “―바틀릿의 집에서, 너―” 존의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오른다. (존이, 부끄러워한다? 왜?) (숫총각인 것도 아니잖아.[각주:9]) “네가―”


“내가 너한테 키스한 거?” (왜 그 말을 못해?) (뭔가 있다. 얘기하지 않은 뭔가가 더 있다.)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주제.)


“그래. 바로 그거 말야.” 존은 욕조 끝에 걸터앉는다. “그런데 지금은 닿기만 해도 펄쩍 뛰잖아. 셜록, 대체 뭐였던 거야?”


(이래서 ― 이래서 ― 키스조차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거다. 키스만으로는 절대 성에 차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차분하기 그지없다. 이 사람은 존이다. 더듬거리는 변태가 아니다. 존 왓슨,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상처입어야 한다면 자신을 희생할 사람. 존 왓슨, 내 옆에 있어 행복하고 내 처분에 기뻐하는 사람. 그에게는 권리가 있다. 내가 자제력을 잃지 않고서 베풀 수 있는 그걸 얻을 권리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지금 떠올랐다. “일어나.”


“어?”


“일어나.”


존이 일어난다. 그는 정말 작다. 그가 예의바르고 자제심 있는, 강한 사람일지라도, 그렇다. 그는 ‘싫다’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 (두려워 할 건 아무것도 없어.) 양 어깨를 잡고, 네 걸음 뒤로 밀어 벽에 가둔다. 반응은 빠르다. 두 손 아래서 기대감으로 존의 몸이 바짝 긴장하고, 흥분으로 떨리기 시작한다. 그의 두 눈이 애정으로 온전히 차오른다.


“그냥 키스만.” 나는 목소리를 낮춰 예의 그 지하로 파고드는 음성을 (톤? 음조? 음성?) 들려준다 ― 어느 정도의 효과도 있는 것 같군. 존이 부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키스 받는 것과 반대로 ― 키스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더 내 취향에 맞는다. 분명하다. 한편으로 놀랍게도, 반사적인 방어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라면 정신을 따로 떼어놓은 다음 내 자신과 존의 모습을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기억해둘 수도 있다. 심문과도 같다. 입술과 혀와 두 손을 통해 미묘한 질문을 건네면, 존은 진실되게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그렇게도 지독하게 나를 원하는 거야? 그래.)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아? 그냥 스쳐가는 것뿐이야. 네가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만…) (날 위해 포기해야 한다면, 뭘 버릴 수 있어? 전부, 만약에…) (얼마나 참아줄 수 있어? 많이. 빌어먹을 정도로 많이. 너도 알고 있잖아? 이 멍청아.) (얼마나 기다릴 수 있어? 셜록! 좀 봐줘. 나도 사람이라고.) 거짓도 없고, 꾸밈도 없다. 밀고 당기거나 속일수도 없다. 놀라우리만치 명백한 투명성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당분간 만족할 만한 정보를 두둑하게 얻은 것 같다. 입술을 뗀다. 이제 혼자 있고 싶다. 분석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존은 온 몸이 (딱 한 곳, 손쓸 도리 없이 흥분한 부분만 제외하고) 흐물거려 벽에 등을 기댄다. 그의 눈꺼풀이 무겁게 감긴다. (볼록하게 부푼) 입술이 멍하게, 호를 그린다. 그는 집중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다. “이게, 그냥 키스란 말이지?”


(존이 계속 노력하도록 둔다.) (계속 노력해봤자 허사임을 알지만 그래도 존은 괜찮다고 믿는다.) “그래.


마지못해 존도 인정하고 만다. 그는 벽에서 등을 떼고 미소를 짓는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양 팔을 잡은 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확실히 ‘그냥 키스’는 아니었는걸.”


웃는다. 물론, 아니다. 훨씬 그 이상이고, 존이 예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


그건 증거였다.





Part 3 : 증거 →




  1. ....칭찬성애자? [본문으로]
  2. 런던 내에 있는 관공서 거리. [본문으로]
  3. 달러 환율로 크기에 따라 약 1백~2백만 원 가량 된다. [본문으로]
  4. 질투 폭발!! 빵!! [본문으로]
  5. 모두 세인트 판크라스 역 건물 내부에 위치한 상점 이름. [본문으로]
  6. 단어를 나열할 때 and나 or 등의 접속사 앞에 쉼표를 생략하지 않고 붙여주는 표기법을 이른다. [본문으로]
  7. 아, 네-_-;;; [본문으로]
  8. 영국의 경감급 형사를 Chief Inspector라 하며, 원래 드라마 <셜록>에서 레스트레이드의 지위는 Detective Inspector로 다른 글에서는 경위라 번역하고 있다. [본문으로]
  9. 그럼 누가 버진일까? 응?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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