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lude

[SH/JW] 해답을 찾아서 │ Working It Out - 1 본문

Sherlock_장편/해답을 찾아서

[SH/JW] 해답을 찾아서 │ Working It Out - 1

topsecretum 기밀선녀 2013.08.04 22:00
#, , , ,

  • 줄거리 : 셜록이 자신이 발견한 사실에 괴로워하는 사이, 존은 셜록의 생일을 알아내 그를 이끌어 관계를 쌓아보고자 한다. 절대 쉽게 풀리지 않던 일이지만.



  • 1 : 깨달음 │ Epiphany[각주:1]





    12월 31일


    너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해봤자 무의미하겠지만 그래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동생아. 항상 걱정되는구나. 엄마는 지금도 네가 파티에 참석하길 바라신단다. 왓슨 박사도 같이 초대됐다. MH


    (삭제.)


    (존은 여기 없다. 해리의 집에 갔다. 마이크로프트도 알겠지. 아마 장난으로 말한 걸테다.)






    1월 1일


    새해 복 많이 받아! 너 잘 있지? 5일에 돌아갈 거야. 좀 늦을지도. 차랑 우유 좀 사놔. *부탁이야* J


    (나흘 더?) (누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대체 왜 그 집에 그렇게 오래 있으려는 거지?)


    (휴일 짜증난다. 바보같아.)






    1월 2일


    갑자기 잠에서 깼다. 온 몸이 초경계상태다. 의식이 현 상황을 지각하려고 급히 돌아가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된다. 미약한 메스꺼움이 나의 현재 상태가 공포임을 다시금 확정한다. 계속해서, 마음이 온통 하나로 집중되어 있다. 존 왓슨. 존.


    (심호흡. 생각해. 관찰.)


    (어둡다. 공기가 차다. 겨울. 밤. 아니, 새벽. 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거의 일정하게 들려오고 있다. 그러니 이른 아침이다. 아주 이른 새벽.) 분명 무언가 나를 깨웠다.


    (사건? 아니, 사건은 없어.) 몇 주 동안 하나도 없었다. (뭐지, 그럼? 소음?) (존이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했나? 비명을 지르며 몸이 갈가리 찢기는 악몽 중 하나로 다시 돌아가면, 자다 일어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처럼 몇 시간이고 방 안을 서성이곤 한다.)


    (아니, 존은 여기 없다. 해리 집에 있지.) 나는 혼자고, 자동차 소리나 겨울 여름이 되면 오래된 221번지의 건물이 내는 기묘한 끼익 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그럴 듯한 결론은 꿈 뿐이다. 눈을 감고 떠올려보려 한다.


    어둡다, 나를 따라오는 어마어마하고 광활한 어둠에 빛이 거의 가려졌다. 철창들이 양옆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곤 어떤 움직임이, 오른쪽 시야 끝에서, 무언가 ― 누군가? ―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가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그게 뭐든, 이유는 모르지만 ― 그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위험하다는 걸 알았으나 두렵지 않다. 지금은 아니다. 총이 있다. 뒤돌아 총을 겨눈다. 어둠 속으로 (무의미하게) 난사하는 나를 내버려 둔 채 검은 형체가 도망친다.


    눈을 떴지만 꿈이 계속 따라와 외쳤다. 늦었다, 너무 늦었다고 ― 그리고 실패했다고. 어제 붙였던 니코틴 패치를 다 뜯어버리고 새로 세 개를 더 붙인다.


    다시 잠들기엔 춥고, 이미 정신이 깨버린 데다 불안하다. 침구를 내던지고 거실로 나온다. 불쏘시개를 들고 양동이에 든 석탄을 벽난로 바닥에 집어넣어 불을 지핀다.


    담배를 피울 때 쓰던 성냥이 때때로 유용할 때도 있다.






    1월 3일


    내일 런던에 돌아간다. 점심 후 바로 전화하마. 얘기 좀 하자. MH


    (삭제.)


    (기억해두기 : 마이크로프트에게서 오는 문자와 전화를 완전히 차단하는 방법 연구.)






    1월 4일


    이른 점심을 차려먹고 ― 오전 11시 반에 커피 한 잔과 구운 콩 통조림을 먹은 걸 점심으로 칠 수 있다면 ― 산책하러 나갔다. 아주 긴 산책. (런던은 춥고 적막하다. 흥미롭거나 가치있는 사건 없음. 지루하고 고만고만한 것들만 남았다.) (옥스포드 가[각주:2]는 생지옥이다. 상점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아니면 살인을 합법화하든지.)


    오후 4시면 베이커 가로 돌아가도 안전할 것 같다. 그러나 허드슨 부인이 현관을 열자마자 뛰쳐나온다. 미소가 어색하다.


    “오, 이제 왔구나!” 외친다. 이상하게 법석을 떨고 있다. 내 팔을 토닥이고 깃을 세운다. (움직임이 불안하다.) “셜록. 화내지 말고 들으렴―” (토닥인다. 가볍게. 미소.) “―너희 형이 여기 왔단다.”


    “누가 뭐요?” (사람들은 늘 분노를 묘사할 때 화산처럼 급격히 치솟는다고 표현한다. 아니다. 느리고, 음험하며 강렬하다.) “아직도? 죽여버려야겠군.”


    “자, 자, 얘야. 네 형은 그냥…” 주름진 앞치마가 퍼덕이는 것도 내 양심에 영향을 못 미친다.


    성큼성큼 걸어올라간다.


    마이크로프트가 ― 그다지 편안하진 않겠지만 여전히 반듯하게 ― 철제 다리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그에게 맞는다.) 완벽하게 다려진 정장 다리를 한쪽으로 꼬고, 그 밑으로 크로켓 앤 존스 브로그 구두가 사악하게 반짝인다. 그는 웬만해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자기애에 취한 듯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끝을 첨탑처럼 모을 뿐이다.


    “잘 있었니,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너와 왓슨 박사 모두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냈길 바란다.”


    불현듯 존의 부재가 염산에 타는 듯이, 바늘에 찔리듯이 파고든다. “존 여기 없어 ― 댁도 아주 잘 알 텐데.”


    연민의 가장, 과장된 몸짓으로 안주머니에서 가죽 양장 수첩을 꺼내 보라는 듯이 느릿느릿 훑는다. 그 안에 든 모든 내용을 사진을 보듯 기억 속에 완벽히 저장해 뒀으면서, 순진한 척 일부러. (사진 보듯 완벽한 기억. 사기다. 하지만 바로 그게 마이크로프트다.) “아, 그럼.” 홀로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박사의 누이 집에 갔었나, 누이 집이라.” 둘 사이의 적막에서 부러 강조한 그 단어가 요란찬란한 미끼처럼 흔들거리지만, 너무 뻔한지라 걸려들지 않는다. 한참 있자, 마이크로프트는 다른 먹이를 꺼내든다. “박사가 탐탁치 않아하는 누이 말이지.”


    질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래.” 라고 대답한다. 곧 멍청한 내 자신에게 자해로써 벌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든다.


    “존이 필요하다는 걸 말하기 싫은 거지?” 마이크로프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는다. (까맣다. 원래보다 까맣다.) (염색한 것이다.) (저 허영심이라니, 우습다.)


    나는 일부러 미소를 짓는다. “그럴지도.” 만족스런 방어다.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의 뜻에 동의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그의 수많은 약점 중 하나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니?” 집요한 마이크로프트. 무자비하고 가차없이 압박을 주러 오려고 부러 일거리를 줄인 게 분명하다. 아니면 권력이 하야에 접어들었다든지? 그러면 좋겠다. (기찻길 다리 밑 같은 데서 골판지 상자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참 꼴이 고소할 거다.[각주:3]) (아니면 나무 상자도 좋고.)


    “이유를 안다고 해서 해답도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나는 바이올린을 집어들며 쏘아붙이고, 활을 미끄러트려 스스로도 불쾌하게 들릴 정도의 불협화음을 연주한다. (존은 여기 있어야 했다. 존이 여기 있었으면 이 짓도 더 쉬웠을 텐데.) (어째서 여기 없는 거지?)


    마이크로프트가 미소를 짓는다. (동정과 음흉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미소.) “그럼 내가 감히 추측해 봐도 될까?”


    “됐어!”


    “넌 약하게 보이는 게 두려워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어. 애석하게도 더 심각한 점은, 넌 거부를 두려워해. 그래서 늘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걸 거부하는 게지.”


    “돌팔이 심리학자 나셨군.” (마이크로프트는 기도하는 모습의 사마귀와 비슷하다. 고요하고 신중하게 침묵을 지키다 재빠른 동작으로 먹잇감을 공격한다.)


    “그리고 덧붙여 왓슨 박사에게 여자친구가 있으니 넌 거절당하는 게 무서운 거다.” ― 마이크로프트가 수첩을 몇 장 휙휙 넘긴다. ― “사라 소여. 존과 같은 의학박사에 일반의. 존의 임시 상사인 이 여성은 ― 아, 여기 있군 ― 알버트 로드 진료소, 맞아, 이거였어. 여기서 일하는군.”


    마이크로프트의 말을 무시하려고 끼익 바이올린 줄을 그어댔지만 이런 수법은 먹혀들지 않는다. 도리어 더 신경을 긴장시킬 뿐이다. 나는 손가락을 축 늘어뜨린다. “그래, 여자친구 있어. 나나 댁이나 신경쓸 일은 아니지.”


    부드럽게 혀를 끌끌 차더니, 마이크로프트가 온 얼굴에 연민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존한테 말을 해보지 그러니.”


    말해?”


    그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슬픈 듯 고개를 내젓고 한숨을 쉴 뿐. “존은 언제 돌아온다더냐? 아예 존을 영영 내쫓기로 한 건 아니겠지?”


    “5일에 돌아와.” 나는 필승패를 쥔 도박사처럼 일부러 거칠게 읊조린다.


    하지만 필승이 아니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공격 카드를 내밀었다. “5일에? 정말 속도 깊은 사람일세.”


    “무슨 뜻이야?” 묻는다. 그게 남은 마지막 한 수였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 마이크로프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아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네 생일 전에 돌아오려는 거다.” 마이크로프트는 가슴을 활짝 펴며 명료하게 설명한다. (벌떡 일어나 포동포동한 수탉처럼 점잔빼듯 거실을 활개치면서 의미심장하게 카펫을 쪼아대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너희 둘 무슨 계획이라도 있니?”


    “존은 내 생일 몰라. 그러니까 계획도 없어. 그리고 존한테 말하지 마.”


    마이크로프트가 흐응 하고 만족한 듯한 소리를 낸다. “흠, 그럼 나가서 저녁이라도 하지 그러냐. 내가 자리 하나 예약해 주랴? 둘이 같이? 아이비[각주:4]라는 데가 아주 괜찮던데.”


    “필요 없어!”


    “셜록, 정말로… 이 상황 우습지 않니?”


    “그래.” 동의한다. “맞아. 생일 축하같은 거 우습지. 열두 살 이상이라면 누구에게나.”


    마이크로프트는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보인다. “알았다, 셜록. 네가 이겼다.” (‘지금은’이란 수식어만 붙이지 않았다 뿐이지. 마이크로프트는 절대 포기를 모른다. 그것도 이리 쉽게는.) 그는 코브라가 또아리를 풀어 공격하듯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서, “더 이상 얘기 안 하마.” 그렇게 약속하고는(거짓말), 내 어깨에 올린 한 손에 무게를 더한다. “하지만 마음 바뀌면 전화해라. 개인적으로 왓슨 박사에게서 식도락가의 인상을 받았거든. 싫다는 말은 않을 거라 확신하는데… 공짜 식사에.”


    (대답하지 않으려 했건만 ― 참을 만큼 참았다.)


    “나가!” 외친다. “나가!






    1월 5일


    나는 존을 기다리는 게 아니다. 택시가 멈춰서거나 존이 걸어서 도착하는 것을 보려고 창밖을 보는 것도 아니다. (이제 다리를 절지 않는다. 원하는 만큼 걷고 뛸 수 있어.) 갑자기 어지럼증이 몰려와 커튼을 놓는다. 창문이 도로 사르르 가려진다. 정신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할 필요가 있어, 주방으로 들어가 존의 명령으로 사놓은 차와 우유를 (다시) 확인한다. (가격이 터무니없다.) (아마도.) 잘 모르겠다. (식료품 사는 일은 존의 영역에 더 맞다.)


    시계가 일곱 시를 지나자마자 허드슨 부인이 ‘불쑥’ 나타난다. 내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다.


    웃는 입술이 부자연스러운 모양을 그리고, 눈썹 사이의 주름이 평소보다 살짝 골이 졌다. (걱정하고 있다. 근심 수준으로.) 눈을 굴려 플랫 안을 구석구석 훑어보는 부인의 시선을 나도 따라가 본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렇지?) 난롯가에 우편물을 나이프로 깔끔하게 갈무리해 뒀고, 최근에 계란 노른자를 사용했던 실험물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쓰레기통에 버렸다. 냉장고 안은 저지방 우유 두 병 외에는 텅텅 비었다.


    “별 일 없지?” 허드슨 부인이 한숨을 쉬고, 입술을 오므린다.


    “지금까지는요.” 대답한다. “오늘 존이 집에 돌아와요.”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속이 약간 싱숭생숭하다.


    부인의 이맛살과 어깨에서 보이던 긴장이 약간 풀린다. “어머, 잘됐네. 돌아오면 다녀오느라 고생했다고 좀 전해주렴.”


    그리고는 나를 다시 홀로 남겨두고 계단으로 총총 사라진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으려 한다. (안 된다.) 책을 읽어본다. (가능할 리가 없다.) 실험을 길게 끌고 있느라 시시각각 먼지가 쌓이고 있지만 (지금은 존이 와서 보고 잔소리하지 못하게 구석에 치웠다) 그것도 오래 집중하지 못한다. 뇌가 온통 실타래처럼 얼기설기 얽혀버린 느낌이다. 실마리 끝에서 돌연 발생한 소음을 감지하고 (현관문 소리인가? 휴대폰? 자동차 문?)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건 분명 앞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계단을 올라오는 존의 익숙한 발걸음 소리(굳건하고, 확실하며 듬직하다)가 들린다. 목적없이 여기저기 방산되는 에너지로 꾸준히, 엉금엉금 올라오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있다 발견되면 안 된다. (왜?) (왜냐하면―!)


    얼른 소파로 몸을 던져 몸을 쭉 펴서 노곤하고, 무관심하게 (부디) 보이는 자세를 취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들어온 존은 등에 짐이 미어터질 듯한 배낭을 매고 한 손에 테스코 봉지를 들고 있다.


    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배낭을 내려놓는다. “지하철이 말야,” 그는 툴툴거리며, “완전 아수라장이었어. 당장 차 한잔 해야지 안되겠어. 우유 사왔다.” 보라는 듯 봉지를 들어보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눈 밑 그늘이 깊고 어두워졌다. 피부가 까칠하다. 머리 : 안 감았다. 부스스하다. 입술 : 텄다. (자꾸 핥겠지.) (물기도 할 테고. 그의 긴장반응.) (해리와 함께한 휴일이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이다. 지쳤다.) 그러나 표정만은 웃고 있으며 (집에 돌아온 기쁨) 한 손에 식료품으로 그득한 가방이 들려 있다(식료품을 사는 게 바로 여기서, 집에서 존이 맡은 역할이니까.).


    일어나 봉지를 받아든다. “사실,” 흠, 흠. “주방에 우유랑 차 있어.” 굳이 그걸 언급하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노력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내가 좀 사왔어.”


    “네가? 네가 장을 봐왔다고?” 존의 눈썹이 진짜로 놀랐을 때의 원래 위치보다 더 올라간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거지.) 장담하건데 분명 존이 이사오고 난 후에도 내가 뭔가 장을 봐온 적은 있었다. 다만 전례를 불러들일 만큼 충분히 기억이 안 날 뿐이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존의 미심쩍은 표정은 곧 커다란 진짜 미소에 자리를 내준다. (어떻게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지? 두 눈이 저렇게 동그랗게 반짝 떴는데 입까지 커지다니.) (그의 얼굴, 대부분은 흔치 않은 형상이다. 표정이 풍부하고, 기분이 잘 드러나고, 생동감마저 넘치는.)


    존은 어깨 너머로 코트를 벗고 뻐근한 고개를 돌린다(지하철에서 내내 서 있었을 것이다). “아이고, 셜록, 집에 오니 너무 좋다. 크리스마스에다 새해까지 해리랑 보내는건 좀… 아! 잊을 뻔 했네―” 그리곤 갑자기 손을 쑥 내민다. 내가 와 맞잡을 것을 기대하는 손. “―새해 복 많이 받아.”


    망설여진다. 존이 먼저 접촉을 하려 한 적은 없었다. 나도 거의 그렇다. 하지만 존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남자들이) 다들 그러하듯 악수를 한다. 존의 손가락이 꼭 감겨든다. 따스하고 강한 그 손을 마주 힘주어 잡는 나를 발견한다. 목구멍 안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 (감기? 두통 없음. 열 없음. 오한? 편도선염?) “새해 복 많이 받아, 존.”


    그러나 악수로는 충분치 않았던가 보다. 존은 나를 끌어다가 껴안고 정답게, 남자답게, 등을 착 친다. “내가 미친 게 분명해.” 그가 키득인다. “네가 보고 싶다니.” 잠시, 그의 웃음이 나의 가슴 안으로 퍼져들어와, 빨라지고 있는 심장박동과 한데 뒤섞인다. “진심이라구, 해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번에도 억지나 빡빡 쓰고 무례하게 굴어주더라고. 하지만 너에 비하면 누나는 명함도 못 내밀지.”


    (존은 놀리고 있는 거다.) (자주 저런다.) 악의를 갖고 놀리거나 아니면 점수를 따려고 일부러 그런 사람은 많았다. 나의 인생에서 존은 그런 해당 사항이 하나도 없는 유일한 인물이다. 익숙하고, 편하다. 나는 존의 품 안에서 약간이나마 긴장을 풀고 마주 등을 감싸본다. 하지만 그러자 너무도 빨리 존은 팔을 놓고 떨어져 옷걸이에 (강박적일 정도로 깔끔하게 관리한) 외투를 걸러 뒤돈다. 나는 화가 나야 할지, 안심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차 끓일 거면, 내 건 설탕 넣지 말고 줘.” 결국 이렇게 말할 뿐.






    1월 6일

     

    또 그곳이다. 그늘지고 어두운 곳, 사방이 깜깜하고 코앞조차 분간할 수 없다. 바로 머리 위에 버팀목과 쇠파이프로 얼기설기 얽힌 거미줄같은 구조물이 매달려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불안해 보인다. 당장 와르르 쏟아져 나를 뭉개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도망쳐야 한다.


    조금만 더 불빛이 있으면 좋을 텐데. 바로 저 앞은 환한 햇살로 빛나고 있건만, 여기는 한 점도 허용하지 않는다. 춥고, 습하며, 암흑에 가까운 이 곳엔.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부드러운 땅이 푹 꺼지며 발목까지 잡아당긴다.


    왜 맨발이지?


    나타났다. 알 수 있다. 발걸음을 향하고 있던 그 존재. 머잖아 보일 것이다. 그 생각에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뛴다 ― 흥분이 아니다. 이건 공포다.


    “셜록?” 누가 이름을 부른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다. 존이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존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안도감에 휩싸인다.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 존이 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됐다. 심장이 쿵, 쿵, 울릴 때마다 존의 모습이 더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인다.


    서서히 다가온다.


    앞으로 뻗은 손에, 총을 들고.


    깨달음과 함께 꿈에서 깨어난다. 무슨 의미인지, 모두 깨달은 채로. 자각과 함께 깨달음이 사방에서, 빠르게, 거부하거나 차단할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어 직소 퍼즐이 한데 완성되듯 빈틈을 꽉 메운다. 결국, 몇 달간이고 계속됐던 번뇌의 해답은 바로 이것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이다지도 답을 금방 찾아내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진다.

     





    커피 향이(진하다. 쓰다.)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유혹한다. (어쨌든 여기 계속 숨어있을 수도 없다.) (며칠 ― 영원히 ― 말 안 하는 건 아직 가능해 보인다.) 불을 켜고 옷을 입는다. (검은 색 스펜서 하츠[각주:5] 바지, 돌체 앤 가바나 퍼플 셔츠, 입생로랑 구두 ― 이 모두는 갑옷이다.)


    주방으로 나온다. 텅 비었다. 주방을 빠르게 확인한다. 꽉 찬 커피메이커, 토스터 위로 튀어나온 두 개의 통밀 크로와상, 플로라 프로-엑티브[각주:6] 버터(건강관리와 대식에 대한 죄책감의 결합) 탁자 위에 놓인 (유기농) 라즈베리 잼. 존이 금방 다시 돌아올 것이다.


    커피를 따른다. 앉는다.


    1분 후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그런 척 해.)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유일하게 안전한 행동.) 이것도, 내가 아는 걸 존도 알게 될 일은 절대로 없다는 걸 아니까 할 수 있는 거다. 적어도 지금은, 선취점이다. (기다려. 눈 똑바로 뜨고 관찰해.)


    “너한테 편지 왔어.” 존이 하얗고 큰 편지봉투를 들고 걸어온다. 눈이 반짝인다. (아주 잘 쉬었다. 편하게.) “카드 같은데.”


    마이크로프트의 글씨다. (음흉한 개새끼.) 휙 채어가 허벅지 밑에 깔고 앉는다.


    존이 눈썹을 찡긋 한다. “확인 안 하려고?”


    “아니!” (너무 흠칫했다. 다시 말한다. 거짓말.) “초대장이야. 마이크로프트가 성대한 자기 연회에 참석하라고 하도 잔소리를 해대서.” (훨씬 낫군.) “이미 안 간다고 말해뒀어.” (완벽해.)


    존은 슬쩍 어깨를 으쓱 하고 눈을 굴린다. (탐탁지 않으면서도 웃기다는 표시.) (마이크로프트의 동생으로 지내는 게 뭔지 존도 경험해 봐야 해. 아마 일주일 도 안 가 총으로 쏴버릴 걸.[각주:7]) “오늘 무슨 계획 있어?” 토스터기에서 빵을 빼내며 묻는다.


    단조로운 목소리,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머리. 미소짓고 있다. (대답을 기다리지만 딱히 별다른 걸 기대하지 않는다.) (존은 모르는 거다. 짐작도 못 할 테고.) (내 생일도. 그리고 아마 다른 것도.)


    폰이 울린다. 화면을 본다.


    생일 축하한다. 카드 잘 받았니? 우리 클럽에서 같이 점심 먹자꾸나. 낮에 보자. MH


    (이 자식이 지옥에 떨어지길. 간악한 속임수다. 만나자는 핑계를 대고 뒤에서 존과 대화할 빌미를 만드는 거지. 존에게 말하려는 거다.) (그렇게 되면 생일축하에, 악수에, 거기다 ― 맙소사 ― 포옹까지 있을지도. 멍청하고 우습기 짝이 없게 야단법석을 떨겠지. 마이크로프트는 난데없이 내가 존과 식사를 하는 게 고무적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빠르게 답장을 찍어낸다.


    거기서 봐. 12시 30분. SH


    (봐라! 접근 거부다.)


    “마이크로프트야?” 존이 고갯짓으로 휴대폰을 가리키며 묻는다.


    “어떻게 알았어?” (둘이 짰나?)


    존이 웃는다. “난 ― 게 아냐, 본 거지. 네 표정에서 말야.”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취해야 할 유일한 방법이란.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느릿하게, 짐짓 겸손을 떠는 거다. “실력이 꽤 괜찮은데, 존. 정말. 아주 잘했어.” (다시는, 절대로, 무방비한 표정을 흘리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함께.)






    아침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플뢰르 드 리스[각주:8] 벽지 문양이 일백 하고도 열아홉 번째 거듭된다. 응급차가 사이렌 소리를 토하며 지나가길 여섯 번, 허드슨 부인이 외출했다 돌아오길 두 번 반복했고, 두 번째 마실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존은 차 두 잔을 마시면서 어슬렁거리며 내게 은근한 곁눈질을 던진다. 한편 나는 레스트레이드가 연락해 주길 끊임없이 바라고 있는 중이다.


    11시가 반쯤 지났을 때 텔레비전을 켜기로 한다. 미녀들의 수다.[각주:9] (말 그대로 별 생각 없이 지껄이는 수다. 존이 싫어한다.) 아니나 다를까, 목청 크고 불만 많은 패널 하나가 국민 의료 보험의 세태에 대해 들먹이기 시작하자 존이 낮게 불만을 토로하더니 방으로 올라가 전염병에 관한 글을 읽으러 가겠다고 얘기한다. (성공이다!)


    음소거를 누르고 출연자들의 얼굴을 살펴본다. 빨강머리의 손톱 끝이 물어뜯겨있다. (긴장.) 얼빠진 얼굴을 한 한 명의 초점이 완전히 나가 있다. (드디어 데이트를 했군?) 검은머리 여자는 콘택트렌즈가 아닌 안경을 끼고 있다. (잠을 못 잤나? 아니, 울었던 거다.) 오늘은 결혼반지 역시 사라졌다. (결혼 생활의 상태를 알 수 있다.) 빨간 머리가 카메라를 향해 웃는다. (광고 시간이다. 11시 45분.) 텔레비전을 끄고 코트와 목도리를 착용한다. (마이크로프트가 기다린다.)

     




     

    마이크로프트의 클럽은 예상한 바로 그대로다. 조용하고, 세련되고, 절제된 곳이다. 심하게 조용하다. 광을 낸 오크나무 바닥에 마이크로프트의 가죽 구두 밑창이 마찰음을 낸다. 숨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그리고 머리 굴러가는 소리도 들린다.


    흰 장갑을 낀 제복차림의 고용인이 벽감 안 테이블로 둘을 안내한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뚫린 유리 너머로 골프 필드가 내다보인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린넨 식탁보 위로 무거운 은식기가 촘촘히 나열되어 있다. 마이크로프트가 앉은 퀸 앤 스타일 의자가 무게에 짓눌려 삐걱 소리를 낸다(비명을 지른다).


    “왓슨 박사도 동참했으면 좋았을 텐데. 초대하지 그랬니.” 마이크로프트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척 하며 약을 올린다. (이 곳에 수년간 속해 있었으니 메뉴 따위 모두 외우고 있는 게 당연하다.)


    대답하지 않는다. 도망가고 싶다. (안 된다. 마이크로프트는 내가 무슨 생각 하는 지 아직 모를 거다.) (흠. 아니다. 안다. 명백하게. 마이크로프트는 언제나 안다. 뭐든. 그리고 본인이 안 되면 ‘아는’ 사람을 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거다. 마이크로프트에게 아무것도 말 안할 테다. 알아챌 만한 여지를 주지도 않을 테다.


    주문한 뒤 음식이 나왔다. 못 먹겠다. 속이 울렁거리고 걱정되고 혼란스럽다. 마이크로프트가 접시 위의 음식을 우아하게 썰어 입으로 가져간다. (왜 더 살이 찌지 않는 거지? 저보다 훨씬 더 뚱뚱해야 마땅하다. 언제나 뚱뚱하다.) 먹지 않을 때면, 말을 한다. 그의 말을 하나하나 경계하며 덫과 지뢰를 찾는다. (지친다.)


    “오늘따라 조용하구나.” 마침내 커피가 나올 즈음에 마이크로프트가 은근히 운을 뗀다. “고민하고 있는 거라도 있냐? 떨쳐버리고 싶은 게 있는 거야?”


    “아니.”


    마이크로프트가 고개를 든다. “그에게 말해, 셜록.”


    티스푼 안에서 커피 빛깔에 녹아들고 있는 설탕 덩어리(비대칭, 고급, 갈색)를 바라본다. 빠른 속도로 알갱이 사이사이가 젖으며 잠시 지나자 완전히 용해되어 흩어진다.


    “싫어.”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마이크로프트의 운전사가 집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차(블랙 재규어, XF 2.2D)에서 내렸을 때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화장실에 (매우) 가고 싶었다.


    그러나 플랫 안에 들어가니 욕실 문이 잠겨 있다. 물줄기가 흐른다. (존이 안에 있다.) (한낮에? 왜?) 문 밖 좁은 복도를 초조하게 서성인다. (마이크로프트의 클럽에서 화장실에 들러야 했다. 커피와 물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 말 걸 그랬다.) (뭐라도 해야 했다. 할 일 없는 이틀은 너무 길기만 했다. 최근에 얻은 불안정한 깨달음에 한층 더 고통스러워졌다.)


    배출 욕구가 한층 격해진다. 욕실 문을 두드린다. 샤워기에서 솨아아 물 떨어지는 소리가 멈추지 않자 다시 더 크게 쾅쾅. “존! 얼마나 걸려?”


    “다 끝났어!” 대답이 흘러나온다. 그제야 (다행이도) 물줄기 소리가 멈춘다.


    존이 욕조에서 걸어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욕실 매트에 발걸음이 묻힌다. (북슬북슬하니 흉물스러운 거. 젖은 욕실 바닥에서 미끄러질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고 존이 부득불 깔아놨다.)


    조금 더 서성이다 멈춰 이를 악물고 양 발을 번갈아 바닥에 구른다. (방광의 압박이 위험한 수준에 달했다.) “존!” 급하게 소리친다. “빨리!”[각주:10]


    욕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온다. 존 왓슨이. 목욕물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젖어서 헝클어진 머리. 방금 얼굴을 깨끗이 면도했다. 샴푸와 비누 내음이 난다. 그리고 나신에 부드럽고 도톰한 수건만 허리에 달랑 걸쳤다. (아.) (생각하지 마. 다른 생각 해.) (다른 게 뭐가 있지? 이 넓은 우주에 다른 게 있나? 모든 게 다 하나로 귀결된다. 발그레하게 젖어서는 반쯤 헐벗은 존 왓슨.)


    사타구니의 압박이 잠시 뒤로 밀려난다. 침을 꿀꺽 넘긴다. (이건 아냐. 마음의 문제다. 마음가짐만 달라지면 돼. 아무것도 쳐다보지 말고…)


    “미안! 너 온 줄 몰랐어.” 존이 밝게 말한다. (그의 눈이 비이성적으로 파랗다.[각주:11] 그의 입술은 화가 날 만큼 끌린다.) “마이크로프트랑 점심 잘 먹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대꾸하며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주 잠깐 동안, 뒤늦게 자리를 피해주려고 지나치는 존의 살갗에 손등이 스치고 만다. (젠장! 전기 충격기라도 한 방 먹은 것 같아.) (아니지. 이건 그 때 느꼈던 감전이다 ― 날 죽일 뻔 했던.) (어렸을 때, 다락에서 버려져 있는 오래된 전기난로를 발견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거라 곧장 콘센트를 꽂아 봤다.) 이건 ― 존의 피부에 닿는 건 ― 더 끌어당기고 싶은 마음과 멀리 떨어지고 싶은 두려움이 공존하는 행위다. 너무 강렬한 격류에 온 몸의 근육이 움츠러든다. (붙잡고 싶은 충동이 든다.) 마이크로프트가 전기회로를 차단했다. 지금은 존이 잡념을 차단한다. 몸을 모로 틀어 문틀에 등을 대고 길을 내준다.


    존이 나오자마자 욕실로 재빨리 들어가 홱 문을 닫는다. 지퍼를 내리는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나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존이 방으로 올라간 후였다. (세상의 모든 존재하지 않는 신들에게 감사를.[각주:12]) 수사할 건수가 있었으면, 하다못해 아무 일이라도. 그럼 머릿속에서 온갖 잡념들이 저들끼리 충돌하며 두통을 일으키는 데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 당장 같아서는 마이크로프트가 꺼려하는 ‘발품파는 일’을 던져준다 해도 기꺼이 뛰어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나 자신과, 그리고 존이 신경쓰이는 두려운 현실 단 둘만 남았다. 그를 원한다 ― 감히 상상할 용기조차 나지 않지만 어떻게든 나는 그를 원한다. 속이 타들어가고, 무력해질 정도로 그를 원한다.


    의자 위의 바이올린이 얼마 전 마이크로프트가 베이커 가에 들렀을 때 두었던 모양 그대로 잠들어 있다. 악기를 집어올려 몇 가지 음을 연주해 본다. 연주를 하면 마이크로프트가 방문할 때 으레 그러듯 어느 정도 안정감을 부여해 준다. (지금은 전혀.) 적어도 손을 놀리는 거니, 위층으로 튀어올라가 존의 방문을 두드리고, 날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해결해 달라고 빌지 않도록 잡아두는 최소한의 이유가 생긴다. 하지만 안되겠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데이터 부족. 경험 부족. 단지 끔찍하리만치 공허한 갈망만 있다.) (어처구니없는 기분이다.)


    얼마나 연주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손가락으로 음계를 찾아 누르고 활은 리듬을 타며 다음, 또 다음 노래로 거듭한다. 분노, 좌절, 씁쓸한 자조를 음악에 담아내지만, 곧 결국 그런 감정을 직시하기 싫어진다. 바이올린 소리가 구슬프고 처연한 음색을 띠기 시작한다.


    한동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 ‘시 플랫’이 길게 공중으로 흩어지고, 불현듯 뒤에서 흘러나오는 감탄조의 한숨에 끔찍하고 섬뜩한 현실로 퍼뜩 돌아온다. (존이 여기 있다.) (연주를 듣고 있었어.)


    “정말,” 존이 감탄한다. “멋진데.”


    갈색 옷이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색.) 보드라운 코르덴 재킷이 상체를 감싸고 밑으로는 깔끔하게 다려진 밤색 면바지를 입었다. 빳빳한 흰색 셔츠의 단추가 목까지 풀어 헤쳐져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고, 존의 살갗을 빛나게 한다.


    그가 밉다. “어디 가나봐.” 눈으로 보고도, 그리고 느끼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차가운 목소리가 나오길 바란다.


    존이 웃는다. (아프다. 속 어딘가 깊숙한 곳이 아프다.) (존이라면 정해놓은 장소로 딱 가서 빈틈없이 극진한 대접을 할 테지.) “대단한 추리인데. 응. 데이트 있어. 음, 뭐 일종의 그런 거.” (더 아프다.) (아파서는 안 되는 건데.) (가버려. 나가버려.) (를 떠나. 당장. 가 얼마나 좋아하는 지 봐.)


    (아니, 마주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입가엔 조소가 깃들어 있다.) “데이트?”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럼에도 다시 미소를 짓고 끄덕인다. “그렇겠지?” (질문처럼 말한다.) (이게 어째서 질문이야?)


    (빌어먹을! 이럴 순 없는 거잖아.) 내 선택지는 하나다. 콧방귀를 픽 뀌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 마치 이 세상에서 데이트란 게 가장 참을 수 없이 아둔하고 재미없는 주제라는 듯이. 마치 멍청이들이나 그런 걸 참아낸다는 듯이. (내가 멍청이가 된 걸까? 존이 ― 존에 대한 내 감정이 ― 나를 멍청한 수준으로 타락시킨 걸까?)


    더 이상의 말 없이 방으로 도망쳐 나온다. 수치스럽고, 산산이 부서진 채로.






    방이 아수라장이다. 원래 신경 안 쓴다. 지금도 신경 안 쓴다. 하지만 할 일이 없었으므로 (조금이나마) 치워야겠다. (종이 무더기는 여기, 책 무더기는 저기. 빨래 더미는…? 구석에.) (자! 훨씬 낫군!) (존도 찬성할 거다.)


    이번엔 옷장 서랍의 난장판으로 주의를 돌린다. (레스트레이드에게서 훔친 경찰 배지 네 개. 반쯤 빈 니코틴 패치 상자. 세 개의 열쇠 꾸러미 그리고 수갑.) (수갑.) 집어서 열어본다. 그리곤 찰칵 다시 닫는데,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퐁 떠오른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한지라, 당장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존이 거실에 있다. 지갑을 겉옷 안주머니에 넣고 있다. (직접 계산할 생각이다.) (사라는 존보다 월급이 높다 ― 그러니 이걸로 점수를 따려는 거다.) “나왔네!” 미소를 짓는다. “드디어! 이제 준비―?”


    가까운 벽으로 그를 쾅 밀쳐, 깜짝 놀란 존이 굳어있는 사이 손목을 붙잡는다. (남은 건 다른 한 쪽을 어디다 고정하냐는 것이다. 어디 무거운 것에 묶어두면 나가지 못할 거다. 그만큼 무거운 게 있을까? 테이블? 냉장고!)


    하지만 존은 힘이 세고, 방어본능 역시 날카롭다. 존이 잡혀 있는 손목을 옆으로 홱 빼는 바람에 내가 휘청거리는 사이, 손에서 수갑이 사라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존이 채어간 거다.


    존이 콧김을 뿜어낸다. (화났다.) 그대로 나를 잡아다 벽으로 떠밀고(그것도 세게!), 몸통을 팔로 눌러 숨구멍을 위협할 듯이 붙박아 둔다. (아주 화났다.) 얼굴 옆으로 수갑이 달각거린다. 우리의 코끝이 닿을락말락한 거리로 좁혀졌다.


    (이건 아냐. 이건 다 잘못 됐다.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 거지, 주도권을 달랑 잡히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다.) 헐떡이며 존의 성난 품에서(우스우리만치 비유적인 표현이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만 불가능하다. 존의 힘은 압도적이다. 화가 잔뜩 나 있다. (힘으로 맞먹으려 들다니 어리석은 짓이었다. 존은 군인이었다고! 멍청하긴.)


    “가만히 있어.” 위협적으로 존이 으르렁댄다. “안 그럼 다칠 수도 있어.”


    “이미 날 다치게 했어.” (뭐라고! 어디서 저런 말이 나온 거야? 뭐지?)


    다행히도 존은 이해 못 했다.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지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몸이 덜덜 떨린다. 좌절감으로, 분노로, 절박함으로. 존에게 영락없이 우스운 꼴을 보였다. (무엇 하나 예전과 같아질 순 없을 테지.) (존이 나가려 한다.) (이러다 떠나버릴 거야.) “가지…” 목 안에 꽉 막혀서는, 투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가지 마.”


    존이 눈을 끔벅인다. “뭐?”


    “가지 마. 여기 있어.”


    존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지만 눈빛이 가라앉았고, 입매도 풀어졌다. (지금은 화가 마구 난다기보다 ― 혼란스러워진 거다.) 뒤로 물러나 나를 붙잡고 있던 팔을 놓는다. “너 나가기 싫은 거야?”


    “그게 아니라! 네가 나가는 게 싫은 거라고.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


    “잠깐만! 수갑 찬 건 네가 아니라 나거든. 뭐, 지금은 내가 갖고 있지만, 어쨌든 수갑을 채우려고 한 사람은 너잖아.” 잠시 정적. “셜록, 왜 그런 거야?”


    (진실만 얘기하자. 진실은 공고하고, 일관되며, 불변한다. 냉정하게 보면,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다. 감정과는 다르게.) “너 나간다며.” 조심스레 말한다. “데이트 하러.”


    존의 끄덕임. “그―렇지.” 머릿속에서 톱니바퀴들이 끝없이 헛도는 느낌이 든다. (대체 존 왓슨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바로 코 앞에 있는 걸 반도 못 보고 지나치는데!) (차라리 감사해야 할 지도. 반이라도 ― 과거의 자신, 이전의 존 왓슨을 반씩 ― 갖는다는 걸.) (나머지 반은 그 생각이 싫어진다.) “사실 내심,” 존은 뚫어져라 눈을 응시하며 신중하게 말을 잇는다. “데이트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지. 제대로 된 데이트로.”


    “아직도 널 소파에서 자게 하나봐?”


    비웃음에도 존은 어리둥절한 눈빛이다. “누가?” (이렇게 바보같이 굴 수는 없는 거다!)


    이름이 입 밖으로 씹어뱉듯 나온다. “사라.”


    “사라?” 존의 양 미간이 좁혀진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고개를 젖히고 웃어재낀다. “아냐, 이 멍청아. 사라랑 데이트하는 게 아니라고. 랑 나가는 거지. 너도 아는 줄 알았는데.”


    “뭘 알아?”


    “내가 널 데리고 외출하려던 거 말야. 너 생일 축하하러.”


    “어떻게 그걸―?” (멍청해. 멍청한 질문이다!)


    “너희 형이 내가 해리네 집에 있을 때 전화했어. 카르멘 공연에 아주 좋은 자리가 있다고 말이야. 그거 네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라던데. 너한테 말 안한 거야?”


    “안했어.” (당연히 안 하지. 마이크로프트는 그런 걸 좋아한다.) “형이 대신 지불한다고 그래?”


    “그래. 하지만 거절했어. 내가 청하는 거니까, 내가 낼 거야.”


    “존, 코벤트 가든 공연 비싸.”


    “그럼 뭐라고 그래? 봉급이 있어도 쓸 데가 없는걸. 게다가, 집에 돌아가서 같이 저녁에 외출할거라는 생각 덕분에 연휴동안 안 미치고 버틸 수 있었다니까. 정말이지 셜록 ― 해리가 어쨌는줄 알아? 사람이 딱… 셜록?”


    (왜 화가 안 나는 거지? 내가 분명 하지 말라고 한 짓을 마이크로프트가 그대로 했는데. 게다가…) “데이트야?” 그렇게 묻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둔해진 뇌가 상징적 의미를 배제한 수학적 증명을 내놓으려고 느릿하니 작동하고 있다.)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놀러 나가는 그런 거?”


    존이 미소를 짓는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 방이 환해진다.) “아니. 다른 종류.”


    “다른 종류?”


    존이 가까이 다가와, “우리, 둘 누구도 서로의 소파에 재우는 걸로만 끝나지 않는,” 말한다.

     “그런 종류.”


    (우리 둘 누구도? 우리?) (무슨 뜻일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동공이 확장됐다. 검다. 고개가 한 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혀가 잠깐 입술을 핥고 들어간다. 눈을 두 번 빠르게 깜빡이고…) (아!) (아냐, 그럴 리가. 존은 여자를 좋아해.) (아닌가?) 머리가 마구 핑핑 돈다. 존을 알아온 열한달 간의 기억을 20배속 동영상처럼 되감는다 ― 모든 대화, 모습 전부를. (오. 이런.) 존은 나를 원한다. 나와 섹스하고 싶어한다. 언제나 원해왔다. 깨달음에 심장이 요동을 친다. 날 지탱하는 다리가 위험하게 흔들린다. 어떻게 이걸 못 알아챘지? (모순되는 증거. 안시아 ― 마이크로프트가 그렇게 부르는 여자 ― 그리고 사라… 매력적인 여자들도 존의 시선을 잡아두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를 대할 때와 같은 시선으로 남자를 대한 적은 없잖아.) (틀렸어!) 존은 언제나, 나를 그렇게 바라봐 왔다. 누구보다 더. 다행이다. 벽에 등을 붙인 채 몸이 주륵 흘러내리면서도, 기쁘다.


    동시에 존은, 기대감에 찬 눈으로 흔들림 없이 서 있다. 그 다음 내가 아는 거라곤, 존이 까치발을 들고는 내 머리 뒤에 한 손을 올리고 가까이 끌어당겨 입술을 눌렀다는 거다.


    (키스.) (이럴 수가. 키스라니.) (키스는 어떻게 하는 거지? 뭘 한다고?) (숨 쉬는 건? 해산물을 채취하는 잠수부들은 평균 10분간 호흡을 참을 수 있고 숨참기 세계 최고 기록은 약 20분이지만 일반인들은 겨우 최대 2분을 상회할 뿐이다.)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다.


    존이 떨어져 나간다. “너 괜찮아?”


    나는 무력하게 어깨를 떤다. “모르겠어, 존!”


    “그냥 긴장해서 그래. 조금 진정해봐.” 존이 어르지만, 긴장을 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난 안돼, 존. 어떻게 하는 지도 몰라. 널 실망시킬 거야. 키스야 잘 하게 된다 쳐도 ― 아니, 그것도 어떻게 하는 건데? 나머지는 또 어떻고? 섹스, 관계 ― 이런 거 내가 관할하는 게 아냐. 네가 기대하고 있더라도 난 그런 거 줄 수가 없어.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도 모를 걸. 너 화나고 상처입게 될 거라고. 난 짜증을 낼 거잖아. 네가 원할수록 성가셔 할 텐데. 일하고 있을 땐 네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지도 못 할 거야. 아예 신경도 안 쓸 테고. 내가 어떤지 너도 알잖아. 이건 안돼, 불가능해. 서로 미쳐버리게 만들 거라구. 넌 대화를 하고 싶어도 난 입만 닫고 있을 거고. 네가 소파에 같이 앉고 싶어할 때 난 혼자 있길 원할 거라고. 실수하는 거야, 존. 다 망쳐버릴 거라니까. 차라리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셜록?”


    “왜?”


    “너 지금 그거 다 크게 말하고 있는 거 알아?”


    “아, 젠장.” 머리를 쥐어뜯는다. (이다지도 끔찍하게 전개돼야 하는 일이야?) (어째서 존은 그냥 이대로 행복해 하면 안 되느냐구? 왜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 관계를 ― 성적 관계를 ― 필요로 하느냔 말이다. 지금처럼만 지내면 안 되는 거야? 그냥 의사로서, 사건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그리고 사라와는 만나는 걸로 남으면 안 돼?) “미안.”


    “아니, 괜찮아. 그래도 이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됐으니까.”


    “틀린 말이 아니잖아, 존. 안 그래? 완전히 합리적이라구.”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헛소리야.”


    “하지만―”


    “입 다물어, 셜록.”


    입을 합 닫는다. 하지만 아주 잠깐일 뿐이다. 얼마 있지 않아 존이 다시 키스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단순히 입술만 닿는 데서 멈추지 않고, 혀가 나와 내가 입을 열 때까지 간질인다. 뜨겁게 젖은 감촉이 아찔하리만치 어색하다. 존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나도, 빨아들이고 빨리면서 서로 애무한다. 머리가 뱅뱅 돌고 피부가 간질간질하다. 배 아래쪽에서 긴장감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아니, 긴장이 아니다. 흥분이다.) 순전히 의지력만 남아 흥분을 억누르려고, 무시하려고 하지만 몸이 명령을 거부한다. 육신이 원하고 있다. 부정하려 할수록 더욱 거세어진다.


    “너 떨고 있어.” 존이 입가에 거친 숨을 내뿜는다.


    (드디어! 쓸만한 관찰을 하는군!) “응.”


    “내가 고쳐줄 수 있어.” 존이 말한다. (정말?) (신이시여. 존이 의사라서 정말 다행이다.)


    “고쳐줘!” 간절히 부탁한다. 뭔가 약을 줄 지도 모른다. 주사를 놓아준다든가.


    대신에 존은 방을 가로질러 나를 소파에 앉히고, 자신도 가죽 쿠션을 대고 앉는다. 마주보는 표정이 진지하다. “멈추고 싶으면 그렇다고 그냥 말 하면 돼, 알았지?”


    (마사지를 하려는 건가?) “알았어.”


    미소와 함께 다시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존은 나의 어깨에 스륵 팔을 편히 감아온다. 따스하고 견실해서 안심이 든다. 느릿하고 다정한 키스다. 놀랍게도, 키스하면서도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있는 거였다. (오히려 숨통이 더 트인다.) 부들거리던 몸이 조금 가라앉았다가(이게 존의 치료라는 거겠지), 다음 순간 존의 손이 허벅지로 올라와 천천히 쓰다듬는 느낌에 도로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해수욕장. 가족들과 바다에 갔다. 해가 쨍쨍한 더운 날이었지만, 부두 쪽은 시원하고 그늘졌다. 밀물이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엄마는 술을 약간 마시고 일광욕을 하다 잠이 들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책에 몰두했다. 처음엔 듣지 못했지만…) 입술을 떼고 고개를 돌린다.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만!”


    그 즉시 존이 멈춘다.


    (해변에 있던 그 남자, 그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거라고 했다.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을 거라고. 그 남자의 손이 사방으로 다가왔다. 있어서는 안 되는 곳으로.)


    숨을 몰아쉬며, 존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존이 곧바로 놓아준다. “셜록…무슨…왜 그래?” 저렇게 걱정된 표정은 처음이다. (미간 사이에 깊은 골, 긴장한 입술,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에는. 무엇도 아니다. 마이크로프트가 책에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봤다. 해변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살찐 아이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남자가 도망쳤다.) (남은 것은 수치심뿐이었다. 공포와 죄책감 역시.)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마이크로프트에게 빚을 졌다는 끔찍한 느낌.) (그리고 절대로 다시는 신세지는 입장에 처하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아무것도 아니야.” 비참함이 몰려오지만, 오히려 더 단호하게 되풀이한다. “아무것도.”


    입을 일자로 다문 존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셜록.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가 아니었어. 얘기해 줄 수 있어?”


    “예전 일이야. 당연히 난―”


    “떨쳐버렸다고?”


    “그래.” 눈을 감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언제 적 얘긴데 지금까지―”


    “말이 안 되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거지. 게다가 그 얘기 나한테 한 번도 안 해줬잖아, 안 그래?”


    (마이크로프트가 경찰에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엄마는 이미 너무 겁이 나 있었다.) (그 후로 언쟁이 ― 듣고 싶지 않은 언쟁이 이어졌다. 오래, 아주 오랫동안.) “응.”


    “지금 얘기할래?”


    “아니.” 잠시 정적이 흐른다. 존은 상처받았거나, 아니면 인내심이 닳아버린 표정을 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본 건 존의 저 미소였다. 아름답고, 방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만 같은 미소. 침을 꿀꺽 삼킨다. 이 태양계 안에 내게 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깊게 다가와 어루만지고 또 그걸 내가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 그건 존 뿐이다. “지금은 싫어. 나중에. 아마 나중에.”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


    존이 웃는다. “그거면 됐어.”


    “정말? 확신해?”


    “확실해. 다시 키스해도 될까?”


    “여전히 하고 싶어?”


    “아, 물론, 당연하지.”


    “사라는 어쩌고?”


    “사라가 어쨌는데?”


    “그러니까, 너 그거…욕구가 있을 거 아냐.”


    “사라는 날 소파에서 재운다고, 기억 나? 그다지 고무적인 신호는 아니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만다.


    그리고 존도 따라 웃는다. 내 손을 잡아 토닥인다. “괜찮아, 셜록. 정말로. 모두 다.”


    그 말에, 믿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나는 몸을 숙여 머뭇머뭇 입술을 존에게 포개어본다. 정말, 괜찮았다. (적어도 그렇게 될 거다.) (아마.) (언젠가는 필히.)


    괜찮다.


    모두 다.





    Part 2 : 발견 →



    역자의 말


    요즘 계속되는 장마에 기분이 우울하고... 뭔가 단조로운 일상에 전환점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장편을 번역하던 중이지만 앵스트도 올리고 싶은 마음을 결국 못 참고 꾸역꾸역 우리말로 옮겨뒀던 걸 오늘 드디어 소개하네요.

    제가 눈물 펑펑 쏟아지는 강력한 앵스트를 못 읽는다는 건 아실 분은 아실 테고...(*-_-*) <해답을 찾아서>는 왕왕 슬프다기보다, 세상을 대하는 셜록의 시선에서 먹먹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남모를 상처를 갖고 있고, 감정과 머리가 따로 노는 감정 미숙아 셜록 홈즈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사건 수사 이야기도 가미되어 있구요.

    이 이야기는 원래 이번 챕터 하나로 끝나는 픽이었어요. 이 한 챕터가 한글로 약 17000여자 정도 되네요.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은... 원고지 122장 분량이라고 생각하심 됩니다) 넵. 변명이자 복선입니다. 앞으로 언제 또 다음 화가 올라올지 저도 장담을 못 드리겠다는-.-;;; 1화라 이게 분량이 가장 적거든요. 하지만 스크롤의 압박에서 허우적거리시라고 다음번에도 끊지 않고 통으로 올릴게요.

    앞으로의 셜록의 여정을 지켜봐 주세요:)


    마지막으로 보셔도 좋도 아니 보셔도 좋은 역자의 사족을 답니다.


    ♣제목에 대해

    ♣다락방의 미친 여자, 셜록이 꿈에서 깨달은 사실





    1. 에피퍼니는 동방박사가 크리스트교 신의 출현을 축하한 1월 6일, 공현 축일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로, 커다란 깨달음을 뜻하기도. [본문으로]
    2. 런던 최대의 쇼핑 번화가. [본문으로]
    3. 아...... 셜록... 마형님... [본문으로]
    4. 아마 코벤트 가든 근처에 위치한 레스토랑 The Ivy를 말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5. Spencer Hart. 베네딕트가 휴 헤프너 스타일로 미친 비율을 자랑해주신 첫 런웨이도 스펜서 하츠 쇼다. [본문으로]
    6. 건강식품회사인 플로라 사의 저 콜레스테롤 유제품 라인. [본문으로]
    7. 웃어야 할지 공감해야 할지 모르겠다;;ㅎㄷㄷ [본문으로]
    8. fleur de lys. 불어로 백합 문양을 뜻하는데, 221b의 벽지 무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으로]
    9. ChickChat이라고 동명의 토크쇼가 여러 나라에 많이 존재하는 것 같다. 컨텐츠는 다르지만 마침 한국 프로그램 중에서 적절한 이름이 있어 차용했다. [본문으로]
    10. ...미안해 셜록, 네 색다른 모습에 좀 웃었어 [본문으로]
    11. 원문에서 brown이라고 묘사하지만, 마틴의 눈은 푸른색이므로 그에 맞춘다. [본문으로]
    12. Thank every non-existent deity for that. 무신론자이지만 어쨌든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 아무 신한테나 예의상 감사를 표한다고. 베베 꼬인 표현을 쓰려는 셜록 홈즈의 의지-_-;;; [본문으로]
    신고